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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담론’ 논쟁이 본격화하려나

나는 1주년, 2주년 같은 것 따지는 걸 촌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촛불 1년’을 맞고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며칠전부터 몇편의 글을 읽고 있다. 글을 읽으며 내 생각을 정리하고, 지난해 쓰겠다고 해놓고 못쓴 글을 다시 구상해보려한다.

 

먼저 거의 1년전에 발표됐는데 모르고 있던 글들을 읽었다. 2008년 6월27일 열린 ‘제4회 맑스코뮤날레 3차 워크샵’에서 발표된 박영균의 ‘촛불집회를 보는 두가지 시각’과 조정환의 ‘2008년 촛불봉기: 다중이 그려내는 새로운 유형의 혁명’이다. (원문은 여기서 받을 수 있다.) 두 글을 읽고 나는 꽤 놀랐다. 1) 학자들이 지난해 6월말이라는 상당히 이른 시점에 워크샵을 했다는 사실과 그걸 내가 지금까지 몰랐다는 사실 2) 박영균의 글이 내 주장과 여러모로 유사하다는 사실[남들도 충분히 생각하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걸, 나는 굉장히 힘겹게 씨름해놓고 무슨 성취감 따위를 느꼈다는 사실] 3) 조정환의 글은 내가 감당할 수준을 초월한다는 사실.

 

촛불정국이 1년 지난 현재 상황과 꽤나 대비되는 듯 한 조정환의 촛불 묘사는 잠깐 인용하는 것도 괜찮은 듯 하다. 너무나 아름답지만, 지금 읽으면 더없이 서글프고 환상적이기에 특히 그렇다.

 

시위가 종합예술이 되고 밤에 이루어지는 거대한 소비활동이 새로운 삶을 빚어내는 용광로가 되며 앞섰던 자가 뒤서고 뒤에 섰던 자가 앞서며 가르치던 사람이 배우는 사람이 되고 지금까지 내내 배우기만 했던 사람이 가르치며 이른바 ‘지도자’들이 훼방꾼으로 기능하고 이른바 ‘열패자’들이 투사가 되며 지식인이 무지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대중이 지성의 불을 내뿜으며 늘 지도부를 자임했던 정당이 다중의 행동을 생중계하는 매개자로 되는 이 총체적 역전과 융합(퓨전)의 드라마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 (1쪽 ‘머리글’의 일부)

 

이어서 나는 ‘사회와 철학 연구회’가 엮은 <촛불, 어떻게 볼 것인가>(울력, 2009)라는 책의 몇가지 글(박구용의 ‘촛불과 지성’, 박병섭의 ‘촛불축제시위와 세계사적 의미’)을 읽어보려고 한다. 전체를 죽 훑어본 바로는 철학 전공자들이 ‘촛불’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들을 따져보는 책이다. 그러니 별로 재미가 없고, 읽고 싶은 생각도 크지 않다. 다만 박구용은, “따져보고 되짚어보고 생각을 다듬는 작업”에 있어서 ‘내공’이 있음을 내가 인정하는 몇 안되는 학자이기에 읽어보려 한다. 박병섭의 글은 주석이 흥미있다.(주석에 ‘여성주의’와 관련된 비판들이 특히 눈길을 끄는데, 내가 전혀 모르는 맥락의 것들이다.)

 

최근에 나온 촛불과 관련된 책이 몇권 더 있다.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산책자, 2009). 강내희 등, <촛불 집회와 한국사회>(문화과학사, 2009). 조정환, <미네르바의 촛불>(갈무리, 2009). 첫번째 책에 글을 실은 이들은 상당수가 당대비평 계열 사람들이다. 두번째 책은 강내희를 중심으로 한 문화과학 계열 사람들이 썼다. 마지막으로 조정환은 한국의 대표적인 자율주의자(또는 네그리주의자)다. (계열을 거론한 것은, 담론의 갈래를 파악하는 것이 책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점 때문이다. 딱지붙이기의 의도는 없다.) 관심은 있으되 관련 정보를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나열해봤다.

 

또 한가지 정보 제공 차원에서 언급할 것이 있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에 글을 실은 이택광과 <미네르바의 촛불>을 쓴 조정환이 논쟁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관련 글은 이택광의 블로그조정환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이 촛불에 대해 말들을 쏟아내고 책을 내고 있지만 본격 논쟁까지 벌이지는 않은 것으로 아는데, 이번에 두 사람의 논쟁은 잘하면 ‘촛불 담론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두 사람의 논쟁은 “네그리에 의지하는 담론”과 “랑시에르와 라캉에 의지하는 담론”의 논쟁이 되어야 정상이겠지만, 실제로는 ‘촛불비판자’(조정환이 어떤 글에서 쓴 표현)와 ‘촛불옹호자’의 싸움이 될 공산이 크다.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그래서 별 영양가가 없는 게 되고말 여지가 커 보인다.

 

말이 나온 김에, 지난해 5-7월 내가 주장했던 것들에 대해서도 언급해야겠다. 당시 내 주장은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촛불의 배경은, 기득권층과 좌·우를 막론한 “상대적 특권층”(학자, 정치인, 언론인 등 ‘먹물’ 전체)에 대한 총체적 불신과 거부다. 2) 촛불의 요구는 “한국” 또는 “남한”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재구성”이다. 3) “국가의 부재”을 전제로 한 “국가의 재구성”이라는 측면에서 촛불은 급진적이고 진보적이다. 4) 촛불은 “국가”에 한정되어 있기에 보수적 또는 반동적이다.

 

나의 주장과 유사한 주장을 펴는 이로는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이택광과 박영균이 있다. 이택광은 촛불을 “정상 국가에 대한 욕망”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정상 국가’라는 표현은 그전의 국가를 ‘비정상 국가’로 전제하는 걸로 생각되는데, 내가 썼던 “국가의 재구성”이라는 표현은 ‘국가의 부재’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 나는 “국가의 구성” 요구라고 써야 더 정확했을 것이다.(그 때는 의식하지 못한 부분이다.) 또 하나, 이택광은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모르겠으나 ‘국가’와 ‘민족’을 병치해서 쓰기도 하는데 반해 나는 ‘민족’을 개념과 용어 차원에서 철저히 배제했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은, 촛불이 ‘민족'을 넘어섰거나 버리고 ‘국가’만 선택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에겐 이 점이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박영균의 주장이 내 주장과 비슷한 점은 그가 대중의 이중성과 대중의 국가주의적 욕망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넓게 보면 이택광도 비슷한 것 같은데, 그가 쓰는 용어는 박영균의 용어보다 나에겐 덕 익숙한 것이다.) 그의 글에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흡사한 대목이 나온다. “촛불집회의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념도 공화의 ‘가치’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냉혹한 경쟁의 장이 되어 버린 ‘신자유주의 지구화’ 속에서 자신의 이기성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강력한 국가권력’을 요구한다.”(‘촛불집회를 보는 두 가지 시각’ 글의 ‘4 민주공화국, 대중의 두 얼굴’ 부분의 한 대목.) 박영균과 내가 차이가 있다면, 박영균은 조정환 등이 제기하는 자율주의적 해석과 씨름할 필요성을 느끼는 반면 나는 이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자율주의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다중의 출현’을 기대하거나 예견할 잠재성은 느낄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지금 이곳에서” 현실성을 띠고 있다는 어떤 ‘근거’도 내게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이택광과 박영균의 실명을 거론한 것은, 그들의 “어떤 권위”를 등에 업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의 생각을 내 생각과 비교하는 것이 내 생각을 좀더 선명하게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밖에 없다. 나는 촛불의 주역들 못지않게 “권위”를 거부한다. 또 내 주장은, 내 글의 논리성과 적합성으로써만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주장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촛불을 기껏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대한 요구 정도로 폄하한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비판은 이택광 등을 향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니 나만 억울해 할 이유는 없겠다. 하지만 몇마디 부연하자면, ‘폄하한다’는 비판의 배경은 대략 세가지로 생각된다. 1) 내 글에 대한 오독 2) 내가 촛불을 평가하는 ‘오만한 자세’를 보인다는 판단 3) 촛불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촛불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판단. 이 가운데 1) 내 글에 대한 오독은 대체로 급진주의적 조급성 또는 현장을 직접 느낀 이들의 열정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되고 2) 내가 평가자의 위치에 있다는 생각은 내 사회적 지위와 내 글의 문체 등에 대한 ‘종합적 판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되며 3) 촛불을 긍정적으로 보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은, 내 글이 이런 판단과 전혀 다른 의도를 담고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간파한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나에 대한 비판은 내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나는 촛불을 ‘해석’하거나 ‘평가’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다. 다만 촛불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전략을 짜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인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없으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모한 또는 무기력한 정열”뿐이라고 본다. 다만 내가 ‘전략’을 제시하겠다거나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전략’에 필요한 현실 판단과 인식에는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니 1) ‘지적인 호기심’이나 ‘지적인 논쟁’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2) 해석이나 담론 또는 평가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3) 지금은 현실을 판단하고 인식할 여유가 없으니 바로 행동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이들은, 촛불과 관련해서 나와 ‘소통’하는 걸 크게 기대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다. 소통이 잘 될 수도 없을 뿐더러, 현실 인식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방식의 소통엔 별 관심이 없다. (처음에 올린 글을 다시 읽어보고 말들을 조금 가다듬었으나, 고친 부분을 따로 표시하지는 않았다.)

2009/05/08 21:51 2009/05/08 21:51
6 댓글
  1. lk 2009/05/08 21:52

    왠 본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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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민노씨 2009/05/09 01:34

    대단히 중요한 인식과 지적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촛불이 지적인 논쟁이 되는 것 자체가 부당하거나, 혹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지만, 그 논쟁은 무엇보다 실천적인 것이 되어야 하지 (본문의 표현 중 하나인) "먹물"들의 죄의식을 위장하는 것이 되어선 안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촛불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전략을 짜기 위"한 "현실 판단과 인식"에 대해 다시금 전폭적인 공감과 동의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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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punky 2009/05/09 21:01

    전 선생님의 글 <대중은 진보적인가>에서 촛불담론과 <대중을 보는 두가지 시각>에서의 대중담론에 꽤 동의하는 편입니다. 이택광과 조정현의 랑시에르와 네그리를 전혀 모르기때문에 무슨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대강은 짐작은 갑니다.
    촛불집회는 몇번 안갔지만 후반에 가서는 우리도 프랑스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집회를 하고 집회를 즐기는 문화가 되었구나 하는 놀라움과 그 이면에 김빠진 맥주처럼 절실함과 저항의 목소리들이 흩어져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촛불집회 참석했다고 하면 주위 동료들이 냉소하는듯이 "시간 많은가봐?"하고 말할때 화가 나기도 했지만 진짜 서울까지 가서 집회할 수 없는 정치적 각성없이 하루하루 버텨내는 노동자 입장에서는 방관자 역할밖에 할 수 없다는 생각도 했지요.
    사실 촛불의 사멸에 대한 담론에 지적호기심보다는 왜 용산참사와 박종태 지회장의 죽음에는 이토록 무기력한가란 아쉬움과 분노가 더해지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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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arishin 2009/05/12 18:18

    민노씨, punky님, 답이 늦었습니다. 별로 드릴 말씀은 없고, 그냥 덧글 고맙다는 게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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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나' 와 '너' 먼 댓글 보내온 곳 2009/05/10 23:43

    marishin님의 [&lsquo;촛불 담론&rsquo; 논쟁이 본격화하려나] 에 관련된 글. 지식인들이 촛불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논쟁하는 것도 참 좋은 현상이다. 그런데, 이분들이 촛불이라는 어떤 현상을 최대한 객관화 하는 동안, 그 촛불들은 '우리는 누구였나, 우리는 그 때 왜 그렇게 했나,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나' 를 무쟈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음 좋겠다. 그리고 그들이 할 수만 있다면 이 논쟁을 할 때 자신을 하나의 촛

  2. Subject: 난독증이 생겼습니다 먼 댓글 보내온 곳 2009/05/14 15:31

    촛불논쟁이 한창이랍니다. 안또니오 네그리 사마의 전도사 조정환씨와 랑시에르와 라깡 사마의 추종자 이택광 선생께서 촛불의 성격에 대한 논쟁을 진행중이시랍니다. 엄청난 사건이었던 만큼 분석은 필수겠지요. 저는 그런 분석 및 논쟁이 활발하다는 것에 대해 참으로 환영하는 사람입니다. 근데 제가 이 분들 글을 독해하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난독증은 아닐까 하는 심각한 우환이 생겨버렸습니다. 사실 좀 끼어들고 싶은데 독해가 안되니 난감합니다. 좀..

  3. Subject: 말을 하라. 우리의 말을! 먼 댓글 보내온 곳 2009/05/16 09:51

    조정환-이택광의 촛불 논쟁에 냉소를 보낸 이유는, 그들이 구사하는 전문용어들의 난해함이나 현학적인 그들만의 리그를 비판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진지한 토론이 결국 생산적인 담론을 생산해낼 수 있던 없던 간에 그런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진지함이라는 것이 사라져 버린 곳에서 치열하게 그들이 배운 것들을 이용해보겠다는 시도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내용이던, 어떤 주제로든간에 진지함이 서린 논쟁들은 장려할 만한 것이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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