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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서평_서열 파놉티콘, 우리 교육의 절망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본(준)> 공동대표인 장혜옥 선생님의 서평입니다.
                                                                                             녹색평론 96호(2007 9-10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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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 파놉티콘, 우리 교육의 절망



<입시공화국의 종말> 김덕영 지음 인물과 사상사(p.300)
<한국사회 교육신화 비판> 이철호외 지음 메이데이(p.281)

절규

우리나라 교육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학생, 학부모, 교사 모두 미치지 않고서는 적응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20년-30년 동안 ‘오직 정답 찾기 공부’만 하면서, 학부모들은 제 자식 1점 1등이라도 더 높이려고 무한정 사교육비를 ‘빈 독에 물 붓기 투자’하면서, 교사들은 입시교육과 인간 교육 사이에서 ‘부적격, 무능력 비판의 직격탄’으로 소신을 잃어가면서, ‘미치지 않고서야 우리 모두 이럴 수 있나’ 탄식하게 만든다. 우리 교육제도는 또 얼마나 미친 듯 널뛰기를 했던가. 입시 제도는 해방 이후, 입시 중압을 완화하고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크게는 16차례, 작게는 무려 50여 차례 수정되었지만, 해결은커녕 더욱 차별과 억압, 양극화는 깊어지고 사교육비는 무한정 늘어나, 이제는 ‘교육이 미쳤다’ ‘교육이 망조가 들었다’라는 말을 누구나 서슴없이 하게 되었다. 해마다 수능 무렵이면 대형 교육 사건들이 터지고, 황우석 사태를 거쳐, 명망 높은 교수들의 논문 표절 사건들, 요즘 연일 터지고 있는 유명인들의 학력, 학벌 위조(?) 사건들은, 교육을 매개로 한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부끄럽고 참담하고 절망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영어와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세계화, 정보화 사회를 위해, 정부는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 7차 교육과정을 시작으로, 만 명을 먹여 살릴 한 명의 엘리트를 키우기 위해 경쟁과 경쟁력이 강조되는 평가(서열) 중심의 교육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이 사회를 20대 80의 사회라고도 명명했다. 그러나 만 명은 절규한다. 밥상 아래로 던져 주는 밥은 싫다고, 한 명 때문에 만 명이 최저 임금의 비정규직이 될 수는 없다고. 이런 절규를 교육 속에서 발견하고, 예리한 분석과 풍부한 현실 자료를 통해 고발하고 있는 두 책을 읽으며 이 시대 교육 절망을 고통스럽게 공감하였다. 아울러 교육이 변하지 않으면 파국적 종말을 보게 될 것이기에 거짓 신화부터 어떻게 걷어내어야 할지 교육 일선에 선 우리들의 책무를 무겁게 느꼈다.    

대학의 식민지배, 한국 교육의 비극

<입시 공화국의 종말>에서 김덕영님은 이런 우리나라 교육 현실을 ‘입시 공화국’이라 명명하고, 교육이 곧 ‘감옥(파놉티콘)’이 되고 만 현실을 각종 사례(p)를 통해 질타한다. 인재는 바로 감옥에서 길러지고 있다. 학교라는 감옥은 한 점이라도 높은 점수를 낼 수 있도록 시험성적, 학교석차로 감시와 처벌을 하는 공간이다. 가정이라는 감옥은 부모가 직접 억압하는 일대일 규율로 감시와 처벌이 더 심해진다. 감옥 중의 감옥은 학원이다.(p25-28) 오후 3시 하교해서 새벽 1-2시까지 이어지는 일과는 학원이 관리한다. 하루 18시간 운영하는 기숙학원, 절대 밖으로 못나가게 하는 자물쇠반까지, 학원 감옥도 진화를 거듭하고 그것에 학부모들이 앞장서니 현대판 파놉티곤이 따로 없다. 학생들은 교복이란 수의을 입고 획일적인 공부 기계로 주조된다.

감옥에서 길러지는 ‘인재’들은 한국 축구에 대한 영국 언론의 평가처럼 ‘쉼 없이 뛰는 조그만 선수들’이다.(p32-34) 축구 선진국 유소년들의 훈련 시간이 하루 2-3시간인데 비해 우리 선수들은 4-7시간에 이른다. 한마디로 성적지상주의의 학원축구인 셈이다. 감옥에 갇혀 쉼 없이 ‘정답’을 찾는 아이들은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사유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 주어진 문제에서 출제자의 의도를 맞추기 위해, 가능성 있는 모든 문제를 거듭거듭 반복해  풀어보는 것이 ‘학습’이다. 정답을 고르는 일은 출제자와 일체가 될 수록 쉬워진다. 대학입시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한국 교육은, 학생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개인이 지닌 잠재력과 장점을 찾아내는데 역점을 두는 외국 학교와 대비된다.(p39-40) 대학의 공부도 그 본질에서는 중등학교의 객관식 문제와 다름없다. 강의 시간에 배운 내용을 얼마나 충실히 외워서 주어진 시간에 적어내느냐가 대학의 시험이기 때문이다.    
근소한 차이로, 입학할 대학이 바뀌는 현실에서 ‘쉼 없이 뛰는 조그만 선수’들은 각종 심각한 정신 장애를 겪고 있다. 서울 초중등학생들의 25.7%가 특정 공포증, 강박증,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반항장애 등 각종 정신장애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체벌 문제도 공교육과 사교육에서 달리 반응한다. 몸은 정신과 함께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개인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이므로 체벌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입시 전문가가 아닌 학교 교사의 체벌에 대해서는 저항하고 교사를 폭행하는 사례도 생기지만, 입시를 전문으로 하는 학원의 체벌은 학생, 학부모 모두 당연시한다(p51). 대부분 아이들은 늘 상대적 하위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거듭되는 패배감과 적대감을 교사나 부모, 친구들뿐 아니라 사회의 불특정 다수에게 폭력적인 행동으로 드러낸다. 우리네 학교는 기회주의 출세주의를 가르치는 동시에 수많은 아이들을 폭력자로 만드는 것이다. 지난번 미국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조승희 사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논술을 보자. 논술식으로 치러지는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나 독일의 아비투어는 고등학교 교사들이 문제를 직접 출제하고 채점한다. 가르친 주체와 평가하는 주체가 동일하다. 한국의 논술은 고등학교 교육과 대학 교육의 연결고리가 없으므로 사교육을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다. 2003년 전국에 63개였던 논술학원이, 서울대가 논술을 강화한 2006년 465개가 되었고, 같은 해 서울시에는 1804개 학원이 증가했는데 그중 43%는 강남 지역에서 문을 열었다. 학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에 따라서 교육 기회가 불평등하게 분배된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다.(p72-73) 서울대가 논술을 통해 추구하려는 것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 위에 세워진 지배적 패권 집단을 공고히 유지하고 확대 재생산하려는 것이다. 즉 논술을 통해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싹쓸이’하려는 것이다.(p76-79) 논술 같은 반칙이 횡행하는 것은 대학이 서열화 되었기 때문이고, 이 모든 현상의 원흉은 학벌사회이다.

외국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대학 서열화가 근대 한국인들이 성취한 ‘유일한 세계적 문화 유산’이 되었다. 학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서열화를 부추기면서 한국 교육을 망치는 주범은 이른바 ‘일부 명문대’와 문제 해결의 능력도 의사도 없는 ‘허약한 국가’와 대학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보수 언론’이다.    

명문고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준화 정책은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불평등이라는 대원칙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입시 경쟁은 기회의 불평등에서 시작한다. 운이 좋아 상류층 집안에 태어나면 명문대 진학의 가능성이 커진다.(p90-91) 그래서 대학 평준화가 시급한데도 보수 언론들은 고등학교 평준화마저 깨뜨리고 고교등급제 등을 통해 옛 명문고를 부활시키려 한다.(p97-98) 이는 명문고와 명문대를 연결하려는 패권적인 엘리트주의에 대한 열망이다.

외국에서 보는 한국의 교육은 ‘웃음거리’이다. 과열된 교육열, 비교육적인 선행학습을 위한 사교육, 광기의 영어 열풍, 교육 엑소더스 유학, 기러기 아빠 등이다. ‘미친 짓’도 있다. 혀 수술, 해체되는 가족, 외국에도 등장한 ‘학원(Hagwon-영어나 독일어가 없어 그냥 우리말로)'이다.

한국의 교육은 정권에 따라, 장관에 따라 춤추듯이 바뀐다. '이해찬 세대‘라는 말처럼 교육의 주체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배제한다. 명문대들이 입시 요강을 발표하면 초중등학교는 일희일비하고, 수능이 끝나면 교육 그 자체가 끝나버리고 만다. 고등학교 교육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대학교육도 끝나버린다. 이런 교육에 사교육비를 무한 지출한다. 거대한 4차 산업이 된 사교육은 한 해 33조를 빨아들이고 있다.(p146-147) 사교육 종사자는 41만명이 이르고 대졸자 진출 직업 1위를 차지한다. 사교육비 지출 비중이 OECD 국가 평균은 GDP 1.3%인데 한국은 3.4%이다. 사교육은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다. 어학시험, 자격시험, 대학편입학, 공무원 시험, 임용고시, 고등고시, 심지어 사법고시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 들어가서도 사교육에 의존한다. 학점관리와 취직을 위해 대학생들도 과외를 한다. 1점이라도 다른 사람과 차이 나야 하므로, 사교육은 소수 정예화, 고급화, 엘리트화로 끊임없이 진화한다. 공교육도 진화하는데, 그 시발점은 외국어고등학교와 과학고등학교이다. 여기서 다시 자립형 사립학교와 영재 고등학교, 국제 고등학교들로 진화한다.(p156) 그러나 이 모든 진화는 교육의 다양성, 특수성 발달에 하등 기여하지 못하고 고작해야 교육의 불평등화, 계층화, 집단화, 블록화, 파벌화 정도에 기여할 것이다. 한국 교육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초중등학교가 대학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 서열이 폐지되어야 하고, 대학 평준화가 이뤄져야 한다.

희대의 논문 조작 사건으로 전 국민을 우롱하고 전 세계에 한국 이미지를 먹칠한 서울대 황우석, 이병천 교수의 사건은 우리 대학의 국제 경쟁력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이다. 한국 대학의 국제 경쟁력을 가로막는 요소는 표절과 조작, 근친상간과 동종 교배, 패거리 문화, 사학 비리, 무자비한 비정규직 노동력(보따리 강사)의 착취,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인 교수 학생 및 선후배 관계, 막가파 경쟁, 부정 행위와 성적 부풀리기, 취업 전선에서 완전히 소외된 지방대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p199) 특히 ‘표절’은 대학을 넘어 전 사회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마광수 연세대 교수, 이필상 고려대 교수, 김병준 교육부 장관, 박재윤 아주대 총장, 송자 교육부 장관, 김윤식 서울대 교수 등이 모두 표절 시비를 겪었고, 출판계도 대중가요계도 표절 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p206, 212) 표절이 범죄 행위인데도 이 땅에서 ‘관행(?)’이 되는 것은 바로 입시 교육의 폐해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주어진 남의 지식을 반복해서 외우고 정답을 고르는 훈련이 결국 남의 것을 베끼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한국 교육의 비극은, 경쟁을 하지 않아야 할 초중등 단계에서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무한 경쟁을 강요하고, 진정으로 경쟁을 해야 할 대학에 입학하면서 경쟁이 끝난다는데 있다. 근대 사회는 절대적으로 다양해야 하고 그 다름과 차이를 통해 더 강해질 수 있는데(p230-231), 성적과 서열로 정리된 한국의 엘리트들은 허약하다. 20년 넘게 정답 찾기만 배운 덕에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도 정답 찾기에 몰두한다. 지난 정권들에서 통치 엘리트들이 찾아낸 정답은 경제 개발, 조국 근대화, 세계화, 지식기반사회, 정보화, FTA시대 등이다. 교육엘리트가 찾은 정답은 BK21, 천재론(p237-240), 신지식인 등이다. 쉼 없이 뛰는 조그만 선수들인 엘리트는 끊임없이 정답을 찾아내고 그것으로 사회 전체를 극과 극으로 뒤흔들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축적되는 것은 없다. 한 시절 정답은 결국 오답이 되고, 그 결과 사회는 근본부터 흔들리게 된다.

한국의 지도층, 부자들에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고귀한 자들의 의무)’가 없다. 그들의 행태는 권력과 지위의 남용과 오용, 부정부패, 탈세, 정경유착, 온갖 특혜, 부동산 투기, 패거리 문화, 이중 국적, 원정 출산, 병역 기피, 표절, 외화 밀반출 등으로 얼룩져 있다. 이 역시 입시 위주 교육이 중요한 요소로 작동했기 때문이다(p256). 또래 친구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두 거꾸러뜨려야 할 적으로 보고, 만인에 대한 민인의 투쟁으로 20-30년을 보낸 인격이 어떻게 남을 위해 고상해 질 수 있겠는가? 학부모들과 협의(?)까지 하며 이뤄졌다고 하는 모 외국어고등학교의 성적표 조작(p258-260)은 ‘비천한 자들의 의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세상에 정답은 없는데, 정답을 고르는 객관식 ‘찍기’ 시험을 수 십 년 치르며 성장하는 한국인들은 시험 이외의 영역에서도 ‘점수 딴다’라는 말을 폭넓게 사용한다. 정답도 없이 주관식이어야 할 논술도 0.01점까지 철저하게 점수로 계량하여(p266) 확실하게 줄 세운다. 남이 준 정답을 찾는 객관식 시험은 개인을 유아기적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지식이 종속되어 노예 정신을 기르게 하는 폐단이 있다(p275). 노예는 스스로 정답을 제시할 수 없다. 그저 찾아야 한다. 애매모호하면 주인의 의도를 헤아려서라도 정답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공부하는 '기술'과 시험 보는 '기술'이 중요해진다(p277). 바로 여기에 한국 교육의 근본적인 위기가 있다.

정답 찾기를 그만 하자(p286). 인생에 정답은 없다. 사유의 자율성, 이는 성숙하고 자유로운, 근대적 인간이 갖춰야 할 정신세계의 기본적인 특징이자 전제 조건이다. 문화적 근대화의 첫걸음이다. 창의성과 개체성이 실종된 교육은 파쇼 국가가 선택하는 교육이다. 아이들의 무한한 잠재력을 키워줄 수 있는 교육, 개인의 인권과 인격이 최소한이라도 보장되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깊은 공감이 울려왔다. 필자의 절망은 곧 우리의 절망이다. 그러나 시험과 서열, 학벌의 폭력을 오히려 지지하고 찬양하는 세력이 완강하게 있는 현실에서, 중고등학교까지 모두 입시 체제로 바꿔야 하고, 대학 정책 중 3불(기여입학제 금지, 고교등급제 금지, 본고사제 금지)을 폐지하고 학생 선발권을 완전 자율화해야 하며, 학교를 영리법인화하고, 세계를 향해 초중등교육도 개방하자는, 지금보다 더 극심한 ‘자율 경쟁 체제’를 신봉하는 정치 세력들이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들의 공감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그렇지만 이대로 가서, 학벌을 좇아 서열 공부만 시키면서 우리 아이들을 정서장애자, 거짓말쟁이, 사기꾼, 투기꾼, 폭력자로 키우는 것은 곧 ‘공화국의 종말’을 부르는 길이므로, 교육에 절망하는 필자의 경고를 우리 모두에게 울리는 신문고로 들어야 한다.          

한국 교육의 17가지 신화

<한국사회 교육신화 비판>에서 이철호님 외 17분의 교사, 교수,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신화에 젖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교육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한국 교육의 17가지 신화는 1부 근본 뿌리에서부터, 2부 교육 본연의 가치를 부정하는 내적으로 생성된 신화와, 3부 그것을 개혁으로 포장한 신자유주의 허구적 교육이 어떻게 신화로 만들어지는지를 분석한다. 필자들은 17가지 신화로 굳어진 교육 문제에 대해, 실상을 밝히고 현상을 분석하고, 지향해야 할 희망적 대안들도 제시하며 전망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혹자는 현실성이 없다고 비웃을지 모르나 필자들의 올곧은 열정에 공감하며 고맙게 읽었다.  

홍세화님은 군국주의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근대식 학교는 곧 통제를 전제로 한 ‘군사학교’였고, 자발적 복종의식을 키우는 교육을 했는데, 이렇게 구조화된 교육이 현재까지 변함없이 이어지면서 타율적 질서의식과 경쟁의식이 바로 학교를 통해 형성되었음을 지적한다.(p41-43) 더구나 부모들도 ‘나 같이 살면 안 된다’며, 부모보다 더 출세하고, 친구를 확실히 이기도록 강요하면서 결국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가정과 학교에서 키워 주었을 뿐 아니라 미디어까지 가세하는 현실에 탄식한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서열의 혁파를 통한 근본적인 의식 변화를 촉구한다.

송경원님은 공교육의 부실과 사교육의 번성은 인과관계가 아님을 주장한다. 사교육비는 맞벌이 부부의 유아 단계 보육을 위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일차이고, 이후 입시 승리를 위한 제로섬 게임에서 무한대의 사교육비가 발생한다고 분석한다. 공교육은 평등과 공공성을 기본 정신으로 모든 아이들에게 골고루 교육시키는 것이 원리이지만, 입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필살기, 비법, 지름길이 있어야 하므로 다양 무한한 사교육이 ‘나만의 비법’으로 강화되는 것이다.(p53-55) 따라서 일류대, 일류학과 입시 필살기를 정점으로한 무한 사교육비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일류대, 일류학과의 거품, 즉 서열의 거품을 빼야 하는데 대학 평준화 같은 획기적인 입시 정책 전환이 그 지름길이라고 주장한다.  

이철호님은 입시제도가 50여 차례 바뀌었지만 대학 서열 체제는 더 견고해지고 학벌사회는 더 굳어지고 사교육 불평등은 더 심해지고, 초중등교육이 입시에 더 종속된 현실을 개탄한다.(p63) 더구나 2008년 입시안은, 학생들이 사용하는 ‘저주받은 89년생’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란 끔찍한 용어에서 보듯, 내신-수능-논술을 모두 압박하고 있고, 그 중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입학 변별력으로 반영할지에 대해서는 대학이 결정하기 때문에 종속은 더 심해졌음을 지적한다.(p68-69) 그렇기 때문에 이젠 단지 입시 절차가 아니라 입시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학서열체제와 학벌사회 해체만이 유일한 해결책이고 그래야 교육을 통한 민주적인 사회나 공동체 통합에 기여할 수 있다고 호소한다.  

나영님은 교육과정을 왜 꼭 국가가 통제하고 편성해야 하는가? 질문한다. 일제 이후 학교의 기본틀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7차례 대대적인 교육과정 개편이 있었지만, 권한은 교육부가 독점하면서 주기적인 전면 개정 방식을 통해, 국가주의 교육의 지배 구조를 더욱 견고히 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교육을 실제로 책임지는 사람들(교사)과 수혜 당사자들(학생, 학부모, 민중)이 엮어가는 현장성이 전혀 없었음을 개탄하며(p79) 앞으로 교육과정은 지식뿐 아니라 예술 및 노작, 문화가 살아나는 방향으로 잡아야 하고, 편성 권한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양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박거용님은 사립학교를 사유재산으로 보는 시각에 비판적이다. 우리나라 중등 및 대학 교육의 과도한 사립 비중을 지적하며(p90-91) 국민 세금과 등록금으로 운영하는 사립 대학들이 인사, 재정, 교육과정 운영에 100% 재량권을 휘두르면서도 실상 법정 전입금은 2%에 불과한 현실을 꼬집는다. 국립대학을 법인화(민영화)하고, 사립대학을 영리법인화 하려는 움직임 속에 오히려 사립중등 및 대학까지 국공립화를 추진하여 교육의 공공성을 높이는 것이 더 희망적임을 역설한다.

이민숙님은 교원평가가 과연 교사의 질을 높일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교사, 학생, 학부모가 각각의 교사를 1년에 한두 번 5단계 체크리스트로 하는 다면평가 방식은 인격적인 대면과 신뢰로 구축되어야 할 교사 학생의 인간 관계를 깨뜨리는 반교육적 정책이며, 결국 학생 성적을 기준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어 교육의 총체적 질이 떨어진 영국, 미국, 일본 사례를 통해(p106-108) 얼마나 터무니없는 비교육적 정책인지를 고발한다. 정부는 평가를 통한 교육, 즉 학교평가, 교원평가, 학생 성취도 평가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전면적’인 서열, 경쟁체제를 만들어서 인건비등 재정을 최소화하겠다는 경제 중심의 발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학교자치를 현실화하고 학생, 학부모의 주체적인 참여 의지를 길러주는 교육 중심의 발상으로 정책을 잡는 것이 올바른 전망임을 말한다.

이병호님은 우리 시대 돈과 권력이 학벌을 통해 재생산되는 구조에 절망한다. 일정한 학벌이 공직을 독점하고 빈부격차가 대물림되는 사회 현상이 이제 누구라도 체감하는 지경에 이른 현실을 개탄한다. 직업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교육은 각각의 특성에 맞는 개별성을 키워주어야 하고, 그들이 곧 사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므로 교육 공공성도 지키고 키워주어야 하는데(p128-129) 우리 사회는 이미 학력, 학벌이 계층이동을 막고 있으니, 과감하게 ‘할당’하고 ‘제한’하는 제도를 통해 교육 양극화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형빈님은 현 입시제도가 내신, 수능, 대학별 고사(논술 등)로 지정되어 있지만 사실상 대학이 선발의 핵심 권력을 가지면서 대학 입시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소위 고등학교 성적인 내신에서, 각 교과별 학기별 등급별 등을 종합 처리하면 입시 변별력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일부 유력 대학들이 공교육 교육과정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행태와(p141) 수능, 논술 등을 강조하여 사교육을 부추기는 행태, 부모 재력에 따른 서열을 만들어내는데 앞장서고 있는 행태를 질타한다. 따라서 중등교육의 정상화와 공정한 경쟁을 위하여, 대학이 선발 권력을 행사하지 않도록 제도화할 것을 주문한다.

이강훈님은 학생정보공개법의 제정을 문제 삼는다. 이는 결국 학교별 시험 성적 공개를 요구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학교 등급제가 자연스레 현실화 하고 말 것을 우려한다. 교육 격차를 해소하겠는 발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오히려 학교, 학생 정보 공개를 통해 격차는 더 심해지고 그 결과 고등학교 입시 부활이 탄력을 얻게 될 것임을 걱정하면서, 학생들의 개인 정보를 무차별로 수집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공개하는 행위가 곧 범죄임을(p159) 강력하게 경고한다.


김태정님은 의무교육이 과연 진정한 교육인가 질문하며,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p168-169) 초등학교, 중학교가 의무교육이라고 하나 이는 국가(경제, 경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기능을 담당했고, 고등학교는 입시로, 대학교는 위계질서를 재생산하는 구조로 살인적인 사교육비를 투입하게 할 뿐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교육이 시장의 상품 같이 돈으로 만들어져서는 희망이 없으며 무상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체제를 개편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치열님은 OECD 국가 중 우리나라 공교육비는 23위이나 사교육비는 1위인 통계 자료를 보여주며(p181) 십대 어린 나이에 인생이 결정나기에 십대 교육에 광신도들이 되고 마는 현실을 질타하고, 제도 밖의 저항으로써 여러 대안교육을 소개한다. 공동육아에서 출발하여 생태, 평화, 영성, 인권, 자유, 평등, 민주, 공동체 가치를 실현하는 대안교육들의 특징과(p192-195) 자유로운 아이들, 성찰하는 교사들의 새로운 전망을 그린다. 교육은 ‘사람을 키워내는 일’이기에 전사회적 변혁 프로젝트와 함께 대안교육이 나아갈 방향도 함께 그린다.

천보선님은 교육 이민의 현 실상을 고발하며, 교육이민을 줄인다는 발상에서 진행하는 교육개방이 오히려 교육을 영리 사업화하는 우를 범한다고 지적한다. 초중등교육을 개방하는 외국이 없다는 사실과, 모든 나라가 교육을 다 개방하는 것처럼 홍보하지만 실상 WTO 교육개방 양허안을 제출한 나라는 148개국 중 11개국에 불과하고 대부분 영어권 국가라는 사실을 밝히며 우리 정부가 ‘엉뚱한 경쟁’(p210)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촉구한다.

조진희님은 쓰나미가 된 영어 광풍에 대해 제발 정신 차리자고 읍소한다. 초등부터 영포(영어 포기자)가 30% 이상 늘어나는 현실과 영어능력이 사교육비와 비례하는 현상을 고발한다. 영어 능력이 일류대, 좋은 직장, 높은 임금을 얻는 황금 열쇠로 둔갑한 현실, 영어 비용으로 억대를 쓴다는 강남 사교육 행태(p216), 제트, 벨트주니어 같은 영어 시험을 치르는 초등 실상(p218) 등에도 불구하고 10년에 이르는 초등 영어 교육 효과가 증명된 사례는 없다고 한탄한다. 영어는 우리 사회에서 이제 ‘권력’ ‘마법’ ‘괴물’이 되었고 초등학생 167명에게 무상급식을 제공할 수 있는 돈을, 원어민 1명을 위해 쓰는 낭비도 상식이 되었다. OECD 가입국가 초등아이들은 평균 주당 35.2시간을 공부한다는데 우리 아이들은 무려 50시간을 공부한다. ‘죽는 것만이 대안’이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20%에 이르는 끔찍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도 초등 영어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충심으로 선언한다.

최현삼님은 고등학생들의 학력 저하를 막기 위해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이하 자사고)를 건립해야 한다는 논리를 정면 반박한다. 교육의 특성화, 학생 학부모의 선택권, 학교 운영의 자율권에 대한 주장이 자사고 설립의 핵심 근거였지만 6개 시범학교는 입시 명문고가 되었고 엄청난 사교육비 주범이 되었으며 오히려 획일적인 입시 교육을 조장하는 나쁜 사례가 되었음을 고발한다. 부모의 재정 능력에 따른 학교 선택은 결과적으로 교육 기회의 차별(p240)이므로 자사고 정책의 폐지를 강력히 제기한다.

임재홍님은 로스쿨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세계화 시대에서 국제 통상과 국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우수 인력을 배출하기 위해 설립한다는 취지에 정면 반박한다. 법조계 인력이 우수하지 않았던 것은 소수가 독점적 지위를 누리도록 구조화 돼 있기 때문인데, 로스쿨은 부자들의 잔치 교육으로 소수의 독점적 지위는 계속될 것이 뻔하다는 지적이다. 법률뿐 아니라 교육, 보건의료, 문화, 복지 분야의 전문대학원제도는 국공립 체제로 사회 공공성을 발현하도록 지원하되, 특별히 지방대학에게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유리님은 교육에 대한 한미FTA의 허구를 지적한다. 한미FTA 이전에 정부는 벌써 규제 완화를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고, 자발적인 선 개방 조치로 이미 개방의 물꼬는 다 열어둔 것에 탄식한다. 미국식 수능시험이라 할 수 있는 SAT가 언급되자 이미 국내 대학들이 입시 요강에 넣고 있으며 사교육이 진행되는 현실, 만약 대학의 SAT 전형을 규제할 경우 투자자국가제소권으로 분쟁이 일어나 속수무책이 될 수도 있는 미래를 암담하게 고발하며, 교육은 상품이 아니고 국제 교역 대상품도 아님을 강력히 주장한다.

배태섭님은 대학의 위기는 우리 정부가 나서서 조장하고 심화한다고 격분한다. 병적으로 서열화된 대학을 보면서 과연 국제적인 서열은 어느 수준인지 참담하게 묻는다. 1980.7.30교육개혁 조치로 졸업정원제가 도입되면서 늘어나기 시작한 대학은, 1995.5.31 교육개혁안의 대학 설립준칙주의에 의거 2배 이상 급속히 팽창되었고(p271), 청소년 80%가 대학을 가는 현실에서 이제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취업 준비기관으로 전락했다. 대학의 특성화, 법인화, 구조조정으로 양적 축소를 하려고 하지만, 지난해 15개 대학을 통폐합하려던 시도가 소송, 분규, 징계 등을 거치며 5쌍으로 그친 사례에서 보듯 한계를 지적한다. 영리법인화 도입 등 정부의 분별없는 대학정책을 개탄하며 대학 시장화 정책을 폐기할 것을 촉구한다.

17가지 교육 신화를 관통하는 핵심은 ‘서열 경쟁 교육’이다. 교육이 입신양명, 양육강식, 우승열패, 적자생존, 승자독식할 수 있는 ‘경쟁 도구’가 되었고, 경쟁의 꼭지점 사다리, 그 변별력을 위해 ‘서열’이 핵심 기재가 되면서 우리 아이들이 죽음 같은 공부에 내몰리고 있다. 더구나 윗 서열은 가지가지 선행 학습을 돈으로 무장해서야 차지할 수 있으니, 돈이 없는 집 아이들은 초중고 각 단계를 거치면서 열등과 패배를 내면화하고, 잘 살아보겠다고 매진하는 교육을 통해 오히려 영원한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주체적, 실존적 자각과 교육 혁명

이 암담한 현실을 넘어, 입시를 아예 없애고 대학도 평준화하여 무상으로 교육 시키며, 누구라도 자신의 능력과 취미 희망에 따라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사회가 만들어 주는 것! 그런 날들을 그리며, 교육의 새로운 혁명을 꿈꾸는 자들의 진지한 담론을 읽으며 마음이 몹시 두근거렸다. 문제는 ‘실천’일 것이다. 자유로운 사회 문화적 존재로서 민중 모두가 천부의 ‘교육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교육 혁명의 그날이 우리 곁에 올 수 있도록 ‘실천’의 엄중함을 깨닫는다. 두 책은 나 자신부터 어떤 실천을 해야 할지 성찰하고 탐색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그러나 교육체제에 대한 신화를 비판하면서 교육 주체에 대한 몇 가지 신화를 놓친 아쉬움이 크다. 먼저 ‘미성년자 학생은 결정할 권한이 없다?’라는 신화이다. 우리 아이들은 교육 절망의 중심에 있다. 수 십 년 동안 오직 공부에 매여 살고, 공부를 안 하는 순간 낙오자, 일탈자가 되어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동시에 거부당하고 마는, 매해 매번 실패와 열등감을 겪으며 친구를 적으로 경계해야 하는, 서러운 존재들이다. 이들에게 스스로 능력과 가치를 발견하게 하고 공동체 정신을 심어주며 관계의 아름다움을 깨우쳐나가도록 ‘학생 인권’과 ‘스스로 나서기’에 교육혁명의 초점을 맞출 일이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일반적인 치마바람에서 강남엄마로 특화하기까지 사회신화로 굳어진 ‘아이 교육 수준은 바로 엄마 수준이다?’라는 ‘모성신화’이다. 엄마 한 사람의 독점적 양육보다 아버지, 친척들, 학교 공동체, 이웃들이 함께 키운다면 더 훌륭한 아이로 자랄 확률이 높다. 그 과정에서 또래 친구들은 누구보다 좋은 ‘또 하나의 나’이다. 아이 곁에 인생을 함께 살, 친구도 없고 이웃도 없는데 아빠의 경제력과 엄마의 학력, 정보력이 아이의 일류대 학벌을 결정한다는 서글픈 통계가 신화가 되는 사회는 절망이지 않은가?

‘교사의 수준이 교육을 결정한다?’는 신화도 꼭 짚어봐야 한다. 근대 공교육의 교사는 정부가 운영하는 시스템에 의해 양성, 임용, 연수, 계발의 전 과정을 거쳐 배출 육성된다. 교사가 국가(자본)주의 교육의 하수인이 될 것인지, 자유로운 근대 시민을 기르기 위한 교육자가 될 것인지, 민중을 위해 자각하고 희생하는 노동자가 될 것인지는 교사 개개인이 선택할 수 있겠지만, 견고한 교육 체제는 교사 개인의 결단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다. 다양한 신화로 굳어진 교육 체제의 그물망에 놓여 있는 교사는 바로 그 교육 체제 속에서 길러진다. 교육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시스템의 개선, 교사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려는 열린 사회의식, 교권에 대한 신뢰와 경청을 제도화할 수 있는 지점은 없을까 고민이 깊어진다.

무엇보다 교육 절망의 한가운데 있는 학생, 학부모, 교사의 주체적 실존적 자각이, 필자들의 분석을 통해 보다 명료해진 각각의 신화를 뚫고, 교육 혁명을 이끌어나갈 힘으로 꽃피우길, 책을 덮으며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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