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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
- 구로동맹파업


양규헌 | 불안정노동철폐연대 대표

 

 

격동적으로 흐르는 세월의 강물은 정체된 22년을 향해 거슬러 올라간다. 기억의 조각들이  반대방향을 향해 역행하기에는 너무도 긴 여로를 방황하며, 뜨거운 투쟁의 열정을 복원하려는 몸부림이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긴장이 감돌던 투쟁현장에서 묵묵히 날렸던 깃발도, 전태일 열사 정신을 계승·발전시킨다던 비장한 깃발도, 노동해방쟁취를 향해 뜨겁게 휘날렸던 희망의 깃발도 묻혀가는 민주노조운동의 위기국면에서, 구로동맹파업이 20주년을 맞으며 격동하는 기억을 더듬고 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생환하는 현재’라는 확신으로 미풍에 나부끼는 민주노조 깃발을 힘차게 세워내려는 안간힘이 책 전반에서 담겨있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도표에 따라 형식적으로 나열하는 연표가 아니라, 노동운동의 교훈이란 좌표를 85년 그들로부터 세워낸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을 연대정신으로만 한정하거나 투쟁을 나열식으로 전개하는 건 구로동맹파업의 성격을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구로동맹파업을 보다 정확한 관점으로 보는 건, 85년 당시 활동하던 동지들의 민주노조정신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동지들이 가졌던 노동자계급의 희망은 무엇이었는지, 대우어패럴과 효성물산, 선일섬유, 가리봉전자 노동조합이 군사정권의 엄혹함에도 불구하고 총파업을 선뜻 결의한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동맹파업에 계급의 운명을 생각하며 연대투쟁을 했고, 그 동맹전선에 단계적으로 합류했던 부흥사 등등의 동지들 가슴 속에 담겼던 정신과, 지금 그들은 동맹파업을 어떻게 회고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70년대 유신정권의 몰락은 민주노조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동일방직, 원풍모방, 그리고 YH투쟁은 직·간접적으로 유신정권의 몰락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세는 부르주아 정치권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정치·사회적 쟁점을 부각시키고  정세반전에 핵심 고리 역할을 한다.
10.26 이후 사북을 비롯한 경인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이 ‘서울의 봄’으로 이어졌고, 투쟁의 고양국면에서 광주민중항쟁은 신군부의 총칼로 역사의 비극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등장한 신군부는 노동운동을 집중적으로 탄압했다. 민주노조세력에 대한 정화조치와 삼청교육대, 노동법개악을 통해 산별노조체계를 기업별노조체계로 바꾸고, 정치활동금지와 제3자개입 금지 등을 신설함은 물론, 노동조합 예산조차도 신군부의 지침에 의해 관.항.목이 짜여졌다(국회가 아닌 국보위를 통해).

뿐만 아니라 민주를 지향하는 노동조합은 업무조사권을 발동하여 노동조합 활동자체를 회사의 인사기능으로 재편했으며, 복지활동만 하는 게 선진조국을 향한 노동조합의 기본 임무로 인식시키고, 순응적 노동문화 정착을 위해 공장새마을 운동을 강화했다.

그러나 노동현장에서는 민주노조운동의 명맥을 잇기 위한 노력들이 암암리에 진행된다. 종교활동을 통해 노동기본권을 배우고, 야학을 통해 사회구조적 모순을 인식하며, 노동운동사를 통해, 노동자 철학을 통해, 전태일 열사를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기본정신을 학습하고 노동자가 역사에 주역임을 확인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을 위해 노조결성과 지역연대 조직을 조심스럽게 진행한다.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비밀리에 받은 가입원서를 빼앗길까봐 팬티 속에 감추고 다니며 두려움에 떨면서도 노동조합 결성에 열망을 태웠던 동지들에 의해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노동조합 부서를 중심으로 지역 소모임을 통해 연대를 확대했고, 노동자들을 활동가 그룹으로 끊임없이 양성해 냈다.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지역연대는 임금투쟁 준비부터 착실히 진행되었다. 임금노예가 아니라 당당한 노동자의 이름으로 자본과 교섭을 하고 단결된 힘으로 요구안을 쟁취했을 때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라며 삶의 희망을 발견한 동지들의 모습이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노동조합 일상활동을 통해 전태일 정신계승을 결의해왔던 동지들은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임원이 구속된 상황에 대해 “같은 노동자가 구속되었는데 당연히 싸워야 한다”고 단정해 버린다. 효성물산과 선일섬유와 가리봉전자는 당일 확대간부 수련회를 갖고 진지한 토론으로 결전의 날을 정하고 현장에 들어가 비밀리에 동맹파업에 대한 조합원결의를 모아낸다. 짧은 시간은 아니었으나 모든 공장에서 결전의 시간까지 철저한 보안이 유지되었다.
85년 6월 24일 오후 2시, 4개 노조 전 조합원은 역사적인 동맹파업에 들어갔다. 농성장에는 ‘노예로 살 것인가! 싸워 이길 것인가’, ‘살인정권 물러가라!’, ‘한국노총 자폭하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했던 동지들의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공통점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전태일 열사정신을 해방정신이라고 강변했으며, 둘째 노동운동의 기본은 연대투쟁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확신 속에서 한국노총의 반노동자적 작태에 대해 비판을 넘어 분노를 담고 있었다. 물론 70년대 노동운동의 한계를 연대취약이라고 진단하고, 연대만 조직되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점에서 거대한 자본의 위력을 과소평가했던 부분도 부정할 수는 없다.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했던 동지들이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쳤던 전태일 열사 정신을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이유는 열사의 외침 속에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첫째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지배 권력에 대한 분노이며, 세 번째는 노동자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를 압축해서 우리는 “전태일 열사의 해방정신”이라고 가슴에 새겼으며 그 정신은 지금까지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으로 자리하고 있다. 구로동맹파업은 전태일 열사정신이 관통된 투쟁이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서막을 울리는 투쟁이었다.
파업에 참가한 조합원들에게 분명 두려움은 있었다. 구속되면 집에 알려질 것이고, 가족들이 받아야 할 충격을 감당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그리고 호적에 빨간 줄이 가며 사회적으로 매장 당한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이들이 선뜻 투쟁대오에 합류한 것은, 같은 노동자에 대한 무한한 동지애의 표현이었고, 노동운동의 미래를 위한 거대한 몸부림이었다.

 

 

6월 24일 시작된 동맹파업은 6일 동안 단전, 단수에 굶주리며 싸운 동지들이 폭력침탈에 의해 해산됨으로써 장엄한 동맹파업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투쟁에서 구속자가 43명, 불구속 38명, 구류 47명을 비롯해서, 해고 1,500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후 각 노조에서는 해고자를 중심으로 모임을 만들었다. 각 사업장 모임에서는, 복직투쟁(출근투쟁)을 하며 소식지 배포와 학습 등으로 내부 역량강화에 주력하였다. 복직투쟁 과정에서 나타난 살인적인 폭력 때문에 해고자들은 현장에 있는 조합원들과 결합하지 못하고 지역으로 결집하여 ‘구로노동자 연대투쟁 연합’을 발족했다.
해고된 동지들은 전태일 기념관에 모여 학습도 하고, 어두운 적막과 긴장이 감도는 서울의 새벽거리를 돌며, 비밀리에 구로동맹파업의 정당성과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홍보물을 돌리며 민주노조운동의 정착에 대한 열정으로 가리봉 집회를 조직했다. “노동자를 영원히 노예로 부리려는 독재정권과는 한 치의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8백만 노동자가 민주노동운동의 깃발아래 모이는 그날까지 선봉에 서서 굽힘없이 싸워나갈 것을 선언한다.” “노동자를 탄압하는 폭력정권은 물러가라!”


85년 6월 24일, 구로동맹파업으로 해고된 노조원들이 7월 23일 가리봉 오거리에 모여 선언한 ‘노동자 연대투쟁 선언-노동운동 말살정책을 분쇄하자’는 선언문 중 일부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노동자 연대투쟁’에 대해 구로동맹 파업은 ‘정치성’을 분명히 드러내며 향후 ‘노동자정치세력화’의 화두를 던졌다.

그리고 해고된 동지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구속된 동지들이 법정투쟁에 전념하고 있었다.

“노동자의 투쟁은 인간답게 살려는 삶의 기본이기에 손바닥과 손등을 분리할 수 없듯이 노동자에게 있어서 삶과 투쟁은 분리될 수 없다”고 법정 항변하는 동지들의 모습에서 희망이 배어난다. 이어서 동지들은 “우리는 탄압, 구속, 해고로 우리는 많은 것을 얻는다. 이런 인식 속에서 운동은 질적 발전이 필연인 것을 확신한다” 며 전두환 정권은 “자본가에 의한 자본가를 위한 자본가 정권이며, 노동자와는 상관이 없다” “부패하고 병들어가는 이 세상에서 노동자만이 사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유능한 의사이므로, 노동운동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며 노동운동에 대한 정당성과 소신을 피력하며 법정을 뜨겁게 달궜다.
석방된 동지들과 합류한 해고된 동지들은 두 갈래의 진로를 설정한다. 노동자정치조직건설에 매진하는 동지들과, 노동현장을 향해 새로운 결의로 강한 발걸음을 내딛으며 공장 활동을 통해 노동조합 건설에 매진하며, 작지만 거대한 전망을 향해 치닫는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접하며 ‘이제야 비로소 노동자 세상이 열린다’고 확신하며 수년간 가슴에 쌓였던 한을 풀기라도 한 듯, 움츠렸던 어깨를 펴며 변혁에 대한 전망을 안고 더욱 운동에 매진한 동지들도 있지만, 평범한 소시민이 되어 치열한 생존과 싸우기에 여력이 없는 숱한 동지들도 분명히 구로동맹파업의 진정한 주역이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두 번 회전하는 동안 피보다 진한 동지애를 나누었던 동지들은 각박한 삶속에 묻혀 

희미한 인연에 끈을 안타까워할 즈음, ‘구로동맹파업 20주년’을 맞는다. 중후한 40대 중반의 인생을 20대의 발랄함으로 바꾸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20년 만에 만나는 동지들은 형용하기조차 어려운 눈물로 뜨겁게 끌어안는다. 서로 ‘어떻게 살아왔냐?’며 안부를 나누며 그들은 다시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20년이 경과한 지금도 구로동맹파업 주역의 상당수는 자신의 인생을 미싱과 떼어놓지 못한다.


방송국에서 기획한 구로동맹파업이, 학생운동 출신들이 주도한 것으로 방영되는 걸 보며 ‘구로동맹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를 두 번 죽인다’며 분노한다. 보다 섬세하지 못하고 상업성 관심 끌기에만 몰두하여 편성한 방송기획에 대한 질타인 동시에 진실 왜곡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구속되고, 얻어터지고, 해고되고, 상처받으며 투쟁에 자신을 던졌던 동지들에 가슴 속에는 심장을 역류하는 분노와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이 깃들어 있음이 보인다.
“투쟁이 있었기에 정치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생겼고, 올바른 인생에 대해, 정의로운 인생에 대해 분명한 기준을 갖는 기회였기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추호도 후회는 있을 수 없다는 선명함이 돋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은 구로동맹파업의 뜨겁고 불꽃같은 시간 때문에 짧은 순간이지만 행복을 말할 수 있다는 그들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우려하는 지금 22년 전 동지들을 통해 노동자 희망의 깃발을 다시금 발견한다.

 

구로동맹파업의 동지들이 22년이 지난 뒤 한 자리에 모였다.

한 자리에 모인 구로동맹파업의 동지들 사진_민중언론 참세상 이꽃맘 기자

 


노동자는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신자유주의의 산물인 비정규 노동자들의 고용불안과 처절한 삶을 접하며 계급적 연대투쟁에 대한 안타까움에 속이 아리다는 동지의 말 속에서 해방을 향한 깃발이 다시금 나부끼기 시작한다.

구로동맹파업을 담은 책 2권(아름다운 연대,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은 역사를 쓴 게 아니다. 그렇다고 리뷰는 더욱 아니다. 20년 전의 오늘을 살아가는 노동자계급의 삶을 말하고 있으며 그날의 동지들을 통해 노동운동의 나침반으로 빛나는 증언이다.
이 책들은 시대를 역류하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노동운동의 좌표를 설정하고 있다. 묻혀 지고 이름 없는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보다 정확한 노동자 언어로 현실 민주노조운동을 향해 장엄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끝으로,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노동해방의 끄나풀을 부여잡고 보다 선명한 메시지를 이 책을 통해 전달하기 위해 불철주야 심혈을 기울였을 유경순 동지에게 뜨거운 동지애를 전한다. 기억에서 멀어져 가는 22년 전 그날의 구로동맹파업의 주역 50여명으로부터 구술을 받으며 책을 완성했다는 유경순 동지의 저력과 열정이 하나하나 스며들어 책 전반에서 뜨거움으로 녹아 심장으로 전해 온다.



 

<질라라비>는 우리말로 '해방자'를 의미합니다.
<질라라비>는 불안정노동철폐연대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불안정노동철폐연대는 '불안정노동철폐운동'을 자기 과제로 하는 동지들의 연대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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