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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재단사람 뉴스레터 이달의 동화冬花책] [뉴스민] 가해의 연대에서 떨어져나오기_ <하늘을 덮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_ 진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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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재단 사람 뉴스레터 뉴스레터 #008_201403 '이달의 동화(冬花)책' 바로 가기

 

대구경북 민중언론 [뉴스민] 노는날_ Books 바로 가기

 

 

 

가해의 연대에서 떨어져나오기


 

진냥 (전교조 대구지부 조합원)

 

 

  • 《하늘을 덮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이라는 책의 표지는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는 검은색 하늘이다. 어두움이 뒤덮은 하늘. 누군가는 이 표지를 보고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절망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성폭력 피해자는 으레 시꺼먼 어둠 속에 갇혀 울며 바싹바싹 말라 사라져가는, 회복 불가능한 치명타를 입은 모습으로 상상되니까.

     

    그러나 이 표지에는 ‘잊고 싶은,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1639일 생존과 지지의 기록’이라는 말도 적혀 있다. 부디 이 책을 접하는 사람들이 이 말을 잊지 않길 바란다. 이 책은 피해자가 슬퍼하고 아파한 상처만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 ‘생존’과 ‘지지’를 기록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하늘이 시커멓게 덮은 것은 성폭력 사건 때문만이 아니라 사실을 조작하고 왜곡하고 외면하는, 그래서 생존자를 지지하지 않고 돌아선 수많은 뒷모습들이라는 것을. 그 뒷모습들을 겪어내면서 생존자는 지금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을.

     

    진상규명특별위원회 결과가 나오자 전교조 대외협력실장 조연희가 내게 연락했다. 술을 먹었다면서 울먹이며 말했다. “박정훈과 손애라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교육운동에 헌신한 훌륭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잘못이 없어요. 그들이 징계를 받으면 나도 살아갈 희망이 없어요.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용서해주세요. 선생님이 용서만 하면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어요.”(91쪽)

    정진후 위원장은 나에게는 6시쯤 만나자고 했다. 나하고만 만나자고 했다. 대리인과 나를 분리하여 만나자고 하는 위원장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되지 않았다. 불안하고 만나고 싶지 않았다.(98쪽)

     

    이 책의 1부는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피해생존자가 시간대별로 자신의 심경과 경험들을 스스로 쓴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고 2부는 해당 조직(민주노총, 전교조)의 ‘해결 과정’에 대한 평가와 여러 사람들의 지지 선언, 3부는 정진후 후보 철회 싸움 과정과 참고자료들의 모음으로 되어 있다. 그 중 1부를 읽고 나면 우리는 매우 뚜렷하게 드러나는 하나의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피해생존자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받았다는 것과 ‘혼자’ 있기를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피해자에게 설명해라, 증명해내라 요구하기도 모자라 가해당사자들을 용서하고 위로할 것까지 요구했던 시간들의 기록. 문제 해결 전 과정에서 힘을 모아 가장 지지받아야 할 피해당사자를 계속 무력화하려는 시도. 이 얼마나 익숙한 폭력인가. 가진 자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증거를 들이대며 죄를 뒤집어씌운다. 삼성은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에게 산재를 스스로 입증해내라 요구한다. 형법상에도 변호인을 둘 권리가 보장되어 있지만 학교에서 열리는 징계위원회에서는 학생에게 어떠한 변호도 대리인도 허용치 않으며, 심지어 몇 시간이고 학생부실에 구금해놓고 진술서를 쓰라 강요한다. 상대방을 철저히 고립시키고 무력화해 자신들의 요구만을 관철하는 모양이 똑같다. 민주노총과 전교조라는 운동 세력이 성폭력이라는 사건을 마주했을 때 택한 것은 피해생존자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오히려 피해생존자의 존재를 지우고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폭력이었다. 심지어 “이 사건이 공개되면 ‘조중동’에 공격당할 것이니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 “우리는 훌륭한 사람이다”라며 가해자들은 자신의 연대를 넓히고 다졌다.

     

    나는 민주노총의 조합원이자 전교조 조합원이다. 이 사건은 내가 조합원인 기간에 일어난 일이며 이어지는 후속 가해들 역시 내가 속한 조직이 행한 일들이다. 나는 직간접적으로 이 폭력의 가해당사자이다. 그것도 변명이 허락되지 않는 가해자. 이 사건을 소문처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내가 접한 성폭력 사건, 내가 속한 조직이 저지른 폭력에 대해 나 스스로를 가해자로도, 피해생존자의 지지자로도 위치시키지 않았다. 그저 소문을 흘려들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렇게 나 역시 내 손으로 하늘을 덮었다.

     

    백서의 의미는 △성폭력 피해생존자가 하고 싶은 말을 경청하고 지지하는 의미(치유의 백서) △민주노총과 전교조에서 사건이 미결 처리됨을 공론화(사건 처리의 백서) △운동사회 반성폭력 운동의 눈으로 본 사건의 역사(기록의 백서) △피해자 중심주의와 피해생존자의 권리 실현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운동 사회에 대한 분석(연구의 백서) 등이었다.(395쪽)

     

    처음 이 책의 서평을 부탁받았을 때 나는 전교조 조합원 탈퇴서를 쓰고 나서야 이 서평을 쓸 수 있겠다, 전교조를 탈퇴 해야겠다 결심했었다. 그러나 그 후 6개월이 흐르도록 나는 전교조를 탈퇴하지 못했다. 이 책에서 피해생존자 역시 한참 동안 전교조 조합원으로 멤버십을 유지했다. 어떤 사람은 물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런 일을 겪고도 피해생존자가 (바로) 탈퇴하지 않을 수 있냐고.

     

    하지만 이 책은 전교조와 민주노총을 미워하고 척지라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왜 나의 하늘을 덮었냐고 비난하고 야단치지 않는다. 지지자와 생존자들이 어떻게 싸우고 살아왔는지를 기록하며, 또한 이런 노력에도 왜 운동사회는 오히려 가해당사자들의 연대세력으로 남아 있는가 하는 질문을 무겁고 날카롭게 던지는 책이다. 그리하여 동시에 《하늘을 덮다》는 내가 접한 어느 책보다도 독자들과 함께하고자 팔을 벌리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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