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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평론54호_서평] 참여와 자치 위에 세워진 녹색공동체들의 연방_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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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와 자치 위에 세워진 녹색공동체들의 연방


서영표(제주대 교수/사회학)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 1921~2006)이 녹색사상과 녹색운동에 남긴 자취는 넓고 깊다. 사회생태론social ecology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구성했지만 이론 속에 머물지 않는 활동가이기도 했다. 북친이 가지는 이러한 무게를 생각할 때, 이제 많은 사람이 (때로는 모두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녹색’을 외치고 있고 사회이론 영역에서도 환경과 생태가 중요한 주제로 떠오른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도 북친의 저작 중 극히 일부만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회생태론의 철학〉(1997, 솔), 〈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1998, 민음사), 〈휴머니즘의 옹호〉(2002, 민음사)가 번역되어 있고 북친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문순홍 선생의 〈생태학의 담론〉(아르케), 번역서인 존 S. 드라이제크의 〈지구환경정치학 담론〉(에코리브르), 케롤린 머천트의 〈레디컬에콜로지〉(이후) 등에 실린 몇 개의 장에서 북친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앞에서 언급된 북친의 저작들은 철학적으로 무겁고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환경이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비전문가들이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간략하게 소개된 설명만으로 북친 사상이 가지는 깊이를 가늠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얼마 전에 출간된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이후 〈코뮌주의〉)는 이러한 공백을 메워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독자라도 충분히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가독성이 높은 북친의 글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가 제기한 거의 모든 이론적 쟁점을 포괄하고 있는 동시에 극적이지만 근본적 입장까지는 포기하지 않았던 마지막 10년 동안의 사상적 전환도 읽어 낼 수 있다.

 

지금까지 소개된 사회적 생태론은 생태적 아나키즘과 동의어로 읽혀졌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북친 스스로가 제기한 아나키즘 비판은 녹색정치이론을 발전시키는 데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조숙한 사회주의자 그리고 시대를 앞선 생태주의자

 

사회적 생태론

사회적 생태론의 핵심은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생태위기는 사회 안에 존재하는 “지배, 위계조직, 가부장제, 계급 그리고 국가의 위기”에서 연원한다는 점이다(북친, 1997, 166). 북친에게 이러한 사회적 모순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거래, 그칠 줄 모르는 산업 확장, 기업의 이해 증진과 진보를 동일시하는 태도 등” 환경파괴의 근원을 제공하는 요인들에 의해 작동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북친은 환경파괴를 우려하면서도 정작 “시장사회의 본질을 간과하는 사람들”이 녹색운동을 주도하고 있다고 본다(19). 이들은 “사적 차원의 정신적 갱생”에 매달리며, 기업, 국가, 관료제의 폐해를 줄이는 제도적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북친이 보기에 녹색운동과 자본주의는 “상호공존이 불가능한 모순개념”임에도 ‘녹색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화해시키려는 부질없는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22). 자본주의 사회는 도덕적 고려나 윤리적 설득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무한한 경제성장과 경쟁의 확대”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인 것이다(53). 한마디로 “현대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비도덕적”이며 “도덕적 호소가 먹히지 않는 체제”라는 것이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 현장에서 지젝이 일갈했듯이 문제는 탐욕스러운 금융자본가가 아니라 체제 그 자체인 것이다.

 

의식의 변화나 영성적 체험에 호소하지 않고 자본주의적 현실과 지배와 위계의 질서 그 자체를 문제 삼는 북친이 제도적 개입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녹색 가치와 태도는 “실질적이고 객관적인 제도의 확립”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육아에서 노동과 놀이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 전반의 변화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48). 이러한 입장은 사회적 생태론이 생태맑스주의와 사회적 생태페미니즘과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다. 머천트가 사회생태론의 이름 아래 맑스주의와 북친의 사상을 함께 다루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Merchant, 1992: ch. 6).

 

 

아나키즘

북친이 제창한 사회생태론은 오랫동안 아나키즘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의 사상은 생태적 아나키즘ecoanarchism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물론 문순홍처럼 북친의 사상을 곧바로 아나키즘과 등치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문순홍, 2006: 126~127). 문순홍이 이런 언급을 한 이유는 1990년대 중반 이후 감지된, 그리고 <코뮌주의>에 잘 표현되어 있는 북친 스스로의 아나키즘 비판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언급했듯이 북친이 맑스주의에 대해 환멸을 느낀 후 아나키즘에 경도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스스로 아나키즘 역사에 대한 책을 출간했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아나키즘 전통 속에 위치시켰다. 개인사를 되돌아보면 북친은 아나키즘 자체를 전면적으로 수용했다기보다는 맑스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급진적 좌파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나키즘으로부터 거리를 둔 이후에 그가 제시한 정치적 전략은 자치적 공동체와 밑으로부터의 민화, 그리고 이들의 연합체인 연방으로 요약될 수 있다. [...]

 

북친이 맑스주의를 비판하는 근거 중의 하나는 맑스주의가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으로 생각하는 계급모순은 위계구조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점 때문이다. 북친은 “위계구조는 노동착취에 기초한 경제적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계급(사회)보다 위계구조가 역사적으로 더 뿌리 깊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계급사회에 변혁이 일어난들, 그리고 그 변혁이 아무리 경제적 평등을 지향한 변혁이었다고 하더라도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는 수천 년 동안 존속해 오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한다. “계급지배가 종식되고 경제적 착취가 사라진다 해도 정교한 위계구조와 지배 체계가 사라진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44). 북친은 이러한 근거로부터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의 출현을 설명한다.

 

“자연을 지배해야겠다는 ‘생각’은 다름 아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사회의 지배구조는 또한 자연계를 위계적 존재의 연쇄 구조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런 자연관은 역동적 진화의 관점, 즉 생명계가 주체성과 유연성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관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정적인static 자연관이다. [...]”

 

 

자연주의적 변증법과 위계

[...]

 

가능성과 잠재성 그리고 실재

[...]

 

리버테리안 지역자치주의

[...]

 

 

비판적 논평

지금까지 〈코뮌주의〉에 담겨진 북친의 생태사상의 흔적을 더듬어 보았다. 깊고 넓은 그의 사상을 짧은 서평을 통해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모든 위계구조에 반대하는 급진적인 코뮌주의 사상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변증법적 자연주의에 대해 요약해 보았다. 그의 주장이 크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는 투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모든 사상과 주장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사상이 그렇듯이 북친의 사회생태론은 강점과 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북친 사상의 강점은 앞에서 드러났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약점을 다루어야 할 차례이다. [...]

 

두 번째 쟁점은 북친이 사회문제의 근원으로 제시한 ‘위계구조’에 관한 것이다. 북친 자신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경험했던 맑스주의의 위기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경제적 모순에서 직접 도출하는 ‘경제적 결정론’과 많은 사회적 갈등과 투쟁을 계급으로 설명하려는 환원론에 대한 비판을 불러왔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론가들과 실천가들이 좀 더 유연하고, 개방적이지만 맑스주의적 패러다임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다양한 제안을 했다. 맑 스주의의 위기와 그것의 변형 또는 전화로 가득 찼던 한 시대를 마감하고 사회적으로 평가했을 때 이 시기가 남겨놓은 유산은 사회적 모순과 투쟁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맑스주의가 제시했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구조적 분석의 끈은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페미니즘 운동으로부터 거대담론이 아니라 일상에 주목하는, 일방적인 지도가 아닌 참여와 토론에 기반을 둔 운동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맑스주의 안으로 넘쳐 들어 왔다. 녹색운동으로부터의 충격은 자연적 한계로부터 독립된 인간사회라는 ‘사회학주의적’ 분석틀의 한계를 인식하게 했다. 페미니즘 운동과 더불어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인권운동은 교조와 독단이 아닌 다양성과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를 일깨워주었다. 이 모든 현실운동으로부터의 충격을 흡수하면서 맑스주의는 닫힌 ‘체계’가 아닌 열려진 ‘기획’으로 ‘전화’된다. 하지만 그러한 전화에도 여전히 ‘맑스주의’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모순의 근거, 그리고 그것을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는 근거를 ‘지금 여기의’ 자본주의적 질서로부터 찾기 때문이다. 초역사적으로 주어져 있는 ‘보편적 인간성’이나 초월적인 ‘도덕적 원리’가 아니라, 비록 자본주의적 모순으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 변형되어 존재하는 역사적인 사회적 투쟁과 그것을 통해 형성된 ‘역사적 가치’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분명 전화된 맑스주의가 제시하는 사회분석과 정치전략은 북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전자는 북친처럼 계급보다 더 근본적인 ‘위계’를 상정하지 않는다. 아마도 위계는 다양한 사회적 모순과 투쟁이 드러나는 형식일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주어진 구체적 조건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모순과 투쟁의 내용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것은 자본주의적 질서 안에서 인식될 수밖에 없다. [...]

 

여기서 제기된 문제는 북친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녹색사회를 꿈꾸는 우리시대 비판이론이 가지는 한계이다. 북친은 전 생애를 통해 이러한 한계를 드러내고,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북친이 제시한 이론적 패러다임이 충분한 이론적 자원을 제공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북친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시 맑스로, 그리고 맑스를 전화시키려 했던 맑스주의자들의 시도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진보평론The Radical Review 54호(2012 겨울) 서평 바로 가기

_ 머레이 북친 지음, 서유석 옮김,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
머레이 북친
메이데이,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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