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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22
    해태시절 나의 추억들(3)
    MC P.I.G

해태시절 나의 추억들

 
(MC P.I.G의 해태시절 추억들은 쪼기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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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프로야구 게시판에서
sports님의 '해태시절 나의 추억들' 무단 펌..

 

 

 

해태 시절 야구가 요즘들어 부쩍 그립다. 그렇다고 지금 기아가 싫다는건 더더욱 아니다...

단지 그시절 추억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다는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엔 아버지 손을 잡고 야구장엘 자주 갔다

나는 해태 어린이 회원 잠바....아버지는 항상 창 넓은 밀집 모자를 쓰고 가셨다

표를 끊고 긴장된 마음으로 경기장 계단을 올라가면 구장 전광판 부터 보고 오늘 누가 나오나

자세히 한번 살피고 자리를 잡는다..

당시 야구장 의자엔 등받이가 없었는데 그땐 그다지 불편함을 못 느꼈다

(아마 요즘 그런 시설이면 불평이 많았지만.....)

그래서 뚱뚱하거나 덩치 큰 아저씨들은 의자 두개에 앉기도 했다.

 

요즘 흔한 치어리더도 거의 볼수 없었고(포스트시즌 아니면 한국시리즈 정도 올라가야 그때

나오는정도..아마 전속 치어리더도 없었고 그냥 그때 그때 불러서 응원했던걸로 기억한다)

응원이라야 임갑교 아저씨의 호루라기소리에 맞춰서 전통 응원박식인........337박수를 치고

해태 이겨라 김봉연~!!! 김성한~!!! 머 이정도의 아주 단순한 구호들뿐이었다.

 

대신 텃세는 정말 심했다 3루측에서 경기를 보면 아저씨들이 항상 상대팀 덕아웃앞에서

상대선수 이름부르면서""" 00아 이제 경기 끝났으니 빨리 짐싸라...오늘밤에 서울 올라가려면

지금부터 짐 챙겨야지...."" 코치들에게도 버럭버럭 소리지면서 야유하고.....아마 지금 그런다면

그 아저씨들은 고소당할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관중들이 좋아했던 선수가 삼성의 이만수였다.

이만수는 정말 스타 기질이 있는 선수였다....관중들이........만수바보~!! 만수바보~!!! 하면 타석에

들어가기전에 손 흔들면서 씨익 웃어줬던 그때 이만수 선수의 표정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럼 관중들이 한바탕 웃고 안타쳐도 박수쳐주고 그랬다......

 

경기중에........외야 플라이라도 나오면 관중들은 한명의 열외(?)도 없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냥봐도 플라이인데 일어나서 홈런인척 하는것도 아니고..)

초등학생인 나는 키가 작으니 자꾸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아저씨들 틈 바구니에서 무척이나

정신 사납던(?) 기억이 난다.

 

5회가 넘어가고 날이 어두워 지면 여기저기서 술취한 아저씨들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이때 등장하는 타잔 아저씨들.....

요즘은 돈주고 시켜도 안하겠지만...그때는 술취한 타잔들이 경기장 그물에 올라가는일이

자주 있었다. ...종종 여자 타잔도 한번씩 나온다(그땐 대박이지)

 일부 팬들은 그걸 즐기기도 하고 내심 언제 타잔 나오나 하고 기대하기도 한것 같다.

경기 후반에가면 응원 가요로..이난영의 구슬픈 노래 목포의 눈물이 자주나왔고......

"""사아아아공에에에엥 뱃노오오오래~~~~""""

야구장 자주 다닌 덕분(?)에 난 초등학교 소풍때도 목포의 눈물을 부른 기억이 난다...ㅎㅎㅎ

 

또한 야구장내에 편의점이 없던 시절이니...

모든 주류나 음료수는 빨간 고무다라이에 얼음 동동 띄워서 판매를 했다

그래서 경기초반엔 음료수가 시원한데 후반으로 갈수록 얼음이 없어지니 덜 시원하고

사람들이 많이 오는날엔 음료수가 빨리 동이 나니 사먹지 못하는날도 종종 생겼다

 

경기가 끝나면 사람들은 경기장 주변 포장마차에 들러 국수도 먹고 곰장어에 소주도 한잔

하시고... 집에 오는 택시안에선 기사님도 처음 묻는 질문이

'오늘 해태 이겼어요? 김봉연 홈런쳤어요?" 이런 안부 인사였다.....

 

그때는 쫌 논다는 초딩들은 학교갈때 항상 글러브 끼고

가방엔 테니스공 한개정도는 담아가지고 다녔다.

점심때 남자애들은 무조건 야구했고 방과후에도 야구하고

일요일엔 타학교랑 게임도 하고

한번은 우산동의 모 초등학교애들이랑 게임하는데 당시 선발 투수는 내가 했다

구속보다는 전 롯데 자이언츠....최동원 선수의 투구폼 흉내를 잘내서 ....애들이 재미 있다고...그

냥 어부지리로 내가 한것이다..근데....그쪽 애들이 너무 잘해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지던기억이 난다

 실력으로 안되니 우리는 후반부터...... 되지도 않는 억지를 써가면서 상대....투수가 던진볼이

 다 볼이라면서(심판이 따로 없으니 목소리 큰쪽이 이김) 주자 만루를 만들어 놓고 깊숙한 안타를

 홈런이라고 박박 우겨서 우리가 이긴 기억이 난다 ㅎㅎㅎ

  

그후 중학교때 무등경기장 주변으로 이사가면서 나의 야구장 출입은 더 빈번해 졌다...

지금은 모르겠는데 그땐 7회이후엔 경기장 문을 개방해서 무료입장을 시켜주었다

광주천변에서 친구들과 공차다가 7회정도가 되면 걸어서 경기장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문이 열리면 뛰어가서 경기를 보곤 했다.

 

특별히 기억 나는것은 9회말이 끝나고 상대선수들은 짐을 챙겨 다들 버스타고 가는데

해태 선수들은 전부다 남아서 다시 그라운드로 뛰어나와 청백전 같이 2회정도

게임 연습을 더 하는것이었다

 

어떤 팬들은 해태가 원래 선수구성도 좋고 해서 우승을 자주 했다고 하는데

난 그말에 절대 동의 할수 없다

 해태는 그야말로 땀의 결과의 팀이다.

상대에게 홈경기에서 대승하고도

경기내용이 맘에 들지 않으면 남아서 다시 재연습을 하는팀이었다.

아마 지금 프로야구선수들에게 그런 훈련을 시키면 모르긴해도 반란(?)일어날게다....

 

그덕에 7회에 공짜로 들어가서 연습게임 2회까지 근 5회게임을 볼수 있었다....

 

또 9회에 경기가 끝나면... 어린애들(?)은 누구 할것없이 전부 외야펜스를 넘어서 경기장에 뛰

어 들어갔다 들어가서 마운드쪽으로 그냥 달린다...지금 생각해보면 왜 달렸는지 알수 없지만.......

그때는 그랬다..

 

달려가서 마운드에도 한번 올라서 보고 1루에서 2루까지 뛰어보기도 하고 .....

슬라이딩 하는애들도 있었다.....ㅎㅎㅎ

 

 요즘들어 해태가 무척이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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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해태시절 나의 추억들은...

 

1. 불펜에 선동열 등장..

- 불펜에서 등번호 '18번' 선동열이 몸을 풀기 시작하면, 경기는 뒷전인채,

선동열의 등번호때문에 1루측 관중들이 한목소리로

"플레이~ 플레이~ C8번!"을 외쳐댔다.

특히 뒷부분의 'C8번!'의 뉘앙스는 충장로에서 시비가 붙어져 내던진 그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보통 남자들은 군대시절, 소대별로 축구복을 맞추는데 나는 당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문제적 번호 '18번'을 달았다. 그들은 '18'이 무얼 의미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뒤늦게 '황새' 황선홍의 백넘버가 18번인줄 알게 된 몇몇 놈들이 후회했지만,

나는 이미 '18'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열씨미 똥볼을 날려대며 욕을 먹고 있었다. ㅋㅋ 

 

2. 잠실구장에서 쩌렁 쩌렁 울린 '김대중!'

-DJ가 대통령이 되기 전, 몇년도인지는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날은 잠실에서 LG와 경기가 있었다.

경기가 졌는지, 이겼는지도 기억나진 않지만, 잠실구장을 LG와 함께 가득 메웠던 해태팬들이

경기가 끝난뒤, 경기장을 빠져나가면서, "김대중!" "김대중!"을 연호했었다.

실내라서 쩌렁쩌렁 울리던 그 음향은 아직도 내 귀에 선하다.

(C8~ 김대중슨상님! 재임때 광주에 야구장이나 하나 쌈빡허니 지어주지 그랬쏘~)

여튼 당시의 '목포의 눈물'은 광주구장 최고의 응원가였지만, DJ가 대통령이 되고 난 뒤,

그 '목포의 눈물'은 더이상 야구장에서 울리질 않았다.

요즘 가끔 응원단장이 가사까지 불러주고, 심지어 가사판까지 제작해서 시도는 하지만,

같이 따라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고, 심지어는 잘 모르는 팬들도 있다.

목포(신안 하의도)가 고향인 DJ가 대통령이 되고나서 그들의 '눈물'이 없어져서 그런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3. 야구장에서 오바이트하던 그들...

-전남대를 다녔던 피아쥐는 당시 학생회 활동을 했었다. 요즘 학생운동하는 친구들은 슬럼프에

빠진 동지들을 어떻게 달래주는 지는 잘 모른다.

그때 당시 우리 과학생회는 이런 저런 일들로 모두 지쳐할때, 과학생회 깃발을 들고

단체로 야구장을 가곤 했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전대정문 '초가 왕족발'에 들러

족발을 사고, 사장님에게 온갖 아부를 떨어 족발을 썰고 남은 뼈다귀들까지 몇봉지 그득하게

얻어가곤 했다. 뼈다귀들은 운동장 투척용이 아니라, 돈이 부족한 우리에게 족발로는 배가 안차

뼈다귀에 붙어있던 얼마 안남은 살점까지도 훌륭한 안주꺼리가 되었던 것이다.

(생각해보건데, 당시 짱돌로 정확하게 전경의 화이바를 맞춰대던 인간들의 포스와 제구력이라면,

능히 족발뼈다귀로도 상대팀 투수의 관자놀이를 강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양동통닭' 몇마리도 함께 훌륭한 안주가 되었다.

1회부터 시작된 음주는 스트라이크에 한잔, 볼넷에 한잔, 병살에 한잔, 안타에 한잔, 홈런에 한잔

에러에 한잔....이렇게 끝없이 이어져 3회부터 실신모드에 들어가는 인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5회나 6회쯤 되면, 어김없이 몇몇 인간들은 광주구장 스탠드에 오바이트를 해댔다.

그러나, 당시 해태의 팬들은 구장 스탠드에 오바이트를 해대는 인간들에게 화를 내기는 커녕,

무관심한 듯, 힐끗 돌아볼뿐 아무일 없었던 듯 다시 경기에 몰두하는 공력을 보여주었다.

그때는 그랬다....정말...

7회쯤 되면 우리는 과학생회 깃발을 힘차게 펄럭이며 '광주출정가'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아무도 우리에게 불평하지 않았고, 우리와 함께 노래 부르며, 술을 더 주시곤 했다.

이쯤 되면 해방구가 아닌가??? ㅎㅎ

"해태로 단결 투쟁!! 올해도 우승하자!!"

 

4. 고3수험생 야자를 선생님이 포기하게 만든 그들..

93년 고3시절 그때의 한국시리즈는 잊을 수 없다.

해태와 삼성이 맞붙어 광주에서 1승1패 후 대구에서 박충식의 전설의 완투쇼에 이은 무승부,

4차전을 다시 삼성에 내주어 1승 2패 몰린 해태는 잠실로 올라와 내리 3연전을 이겨버리며

시리즈 전적 4승 1무 2패로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당시 이종범은 한국시리즈 MVP였고, 그 레전드의 서막을 완성하게 된다.

그때 고3이었던 우리는 수능을 앞두고 있었고, 야간 자율학습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반 친구들은 대부분 소매에 리시버(레시바! ㅋㅋ)를 꼽고 몰래 야구를 듣고 있었고,

점수를 낼떄면 고3 교실은 모두 나즈막한 환호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우리를 모두 대학에 잘

보내고 싶었던 교사들에겐 나즈막한 소리가 아니라, 미친듯한 환호성으로 들렸으리라.

결국, 꼰대들은 포기했고, 그때 우리 모두는 교실에서 교실 천장에 달려있던 티비로

한국시리즈 마지막경기를 함께 볼 수 있었다.

그날, 기분이 좋아서 쏘주를 먹었는지, 삐루를 먹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어쨌건 우리는 미쳐있었다.

 

...............

 

쓰다보니 너무 쓸게 많다..

업무시간 잠시 짬을 내 쓴다는게 계속 쓰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담에 2탄을......

아..갑자기....쏘주가 확 땡기네....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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