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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과 작은누이

 

  

내가 운동을 시작한지 별로 안 되었을 때 처음으로 사수대를 결의하게 되었다.

운동을 시작한 짧은 기간 동안 경찰들과 몸싸움은 있었지만,

대로변에서 지대로 싸울 것이 예상되는 판에서는 처음이었다.

내 가슴은 전후좌우 100미터로 요동치고.


첫 임무는 안테나였다.

어떤 지정장소에 있으면서 경찰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다.

경찰은 내가 서있던 길과 다른 방향으로 왔고

투쟁대오와 격렬하게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 멀리서나마 보였다.


투쟁대오는 방향을 꺾고 내가 있는 곳과 점차 멀어져갔다.

지금 같으면 손전화기로 후딱 연락을 해서 어찌 하겠지만,

당시는 그 문명의 이기는 소수의 자본가만이 가질 수 있을 때였다.

안테나의 필요성은 소멸되었다고 판단,

멀어진 대오와 거리를 좁히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본대오에 간신히 합류했고, 대략의 소통을 한 후

2차 격돌이 예상되는 지점에 결합하기 위해 본대오를 나섰다.

다시 심장이 쿵쾅쿵쾅거렸다.

마음을 다잡으며 안면에 마스크를 쓰려는 순간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는 무엇인가가 뒤통수에 레이져를 쏘는 기분이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 레이져의 출처가 나의 친누이라는 것을 알았다.

둘 다 3초간 얼음이 되어 버렸다.

3초가 지나 해동이 되자 난 마스크를 쓰며 앞으로 나섰고

나의 작은누이는 대여섯명을 선동하면서 선전전을 다시 시작했다.


작은누이를 투쟁장소에서 만났다는 알싸한 충격으로

경찰과의 대치상태는 머리에 크게 입력이 되지 않았다.

그 여파로 한숨을 크게 쉬다

발 앞에 떨어진 최루탄 가스를 깁게 빨아드렸고,

결국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반기절 상태로 본대오로 질질 끌려나오고 말았다.


그 이후 작은누이가 운동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난

집에 들어와 작은누이 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방에서 무수히 돌아다니는 씨뻘건 책들과 문서

그리고 무슨무슨 선대본, 무슨무슨 실천단같은 T들이 다량 검색됐다.


아이고, 이 인간이


후에 안 사실이었지만, 작은누이는 여러 집회에서 이미 날 보았다고 한다.

작은누이는 자기 캠에서 대오지도를 하는 역할을 맞고 있어

내가 있는 대오가 옆으로 올 때면

‘천천히 갑시다’ 혹은 ‘거리가 멀어집니다. 빨리갑시다’이러면서

나와 마주치지 않게 했다고 한다.

이 사악한 것!


작은 누이가 속해 있는 캠과 내가 속해 있는 캠은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쁘락션을 거는 관계였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공동활동도 많이 하고

접촉의 면을 넓히던 시기였다.

나는 운동을 막 시작하던 때였기에 상세하게 모르고 있었지만,

작은누이의 경우 그 내용을 상세히 알고 있을 위치였다.

하이고, 내가 움직이는 걸 보면서

지 혼자 얼마나 킬킬 거렸을 지 안 봐도 비데오다.

그 생각을 하면 아직도 이 인간이 대략 재수없다.


그 이후 작은누이와는 집보다는 집회에서 만나는 시간이 많아졌고

이래저래 둘이서 할 얘기꺼리도 많아졌다.


그리고 상부상조를 했다.


과외를 충분히 할 수 있는 학벌인 작은누이는

“어이, 요번에 선거나가는 데 결의금이 필요해”라는 식의 얘기를 하면

풍부한 자금력으로 나에게 보조하고는 했다.


작은누이는 늦은 귀가와 외박으로 인한 집의 탄압이 골칫거리였는데

나의 방만한 삶을 부모님께 설명하며

작은누이에게만 강요하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느냐며

부모님을 설득(이라기 보다는 윽박)했다.


그리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위험한 집회같은 경우는 서로 격려하며

친남매이자 동지의 길을 걸었다.


이런 둘 사이에 불문율이 있었다.

정파적인 문제는 토론하지 않았고

서로의 문서를 훔쳐보지 않으며

각자의 민감한 개인적이며 정치적 문제는 알아도 모른 척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작은누이는 졸업을 앞두게 되었고

학생운동 이후가 큰 문제로 부딪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문제는 불문율에 따라 묻지 않았다.


작은누이는 결국 한국노총 산하의 연구소에 취직을 했다.

작은누이가 속해있던 그룹은 소규모 조직으로

학생운동 이후의 전망을 함께 건설할만한 조직의 상태가 아니었다.

해당 주체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작은누이는 그렇게까지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어중간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 어중간한 결정은 반년만에 사직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졌고,

곧 일반적인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길을 걷게 했다.

그리고 난 곧 군대에 가서 작은누이의 자세한 행보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전역 이후도 작은누이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작은누이에게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그녀에게 운동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살아있는지

아니면 단절되었는지, 혹은 원망하는지 아는 것이 두려웠고

그 동안 둘의 정치적 대화는 단절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군대가기 전까지는 그녀가 속해있던 그룹과

최소한 선은 남아있던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남아있는 그 선만큼 그녀의 표정이

어두웠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난 약간의 방황의 시기를 넘겨 운동을 다시 시작했고

곧 정식적으로 한 정치단체의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그 얘기를 작은누이에게 했다.

그 이야기는 나의 삶에 대한 고백이기도 했지만,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소’라는 질문이기도 했다.


‘많은 고민을 했었겠네. 열심히 하고 이젠 너의 삶을 돌아보렴’

그녀의 짧은 대답으로 더 이상 그녀가 운동과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있음을(혹은 단절 당했음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작은누이는 다시 공부를 하고 있고

난 그냥 살아남아있다.


작은누이를 운동과 멀어진 한 사람으로 바라볼 때

그 사람은 작은누이로만 보이지 않는다.


그녀뿐 아니라 전망의 문제와 조직의 문제로

운동판을 떠난(밀려난) 사람들을 봐왔기 때문이다.

내 작은누이는 내 조직의 동지이기도 했고,

다른 조직이지만 함께 운동을 했었던 어떤 동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몫을 고스란히 개인이 져야 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운동하는 자들의 기억에서 버림당한 그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은누이를 생각할 때면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살아남아서 나에게 비판을 가해야 하는 것 아냐?

살아남아서 그 무능한 조직들에게 욕을 해야 하지 않아?

살아남아서 치졸한 운동판을 공격해야 하는 거 아냐?

살아남아서 나와 했던 이야기를 지켰으면 안 돼?

살아남아서 나와 대화할 수 없는 거야?


그래도 작은누이가 고맙다.

이제는 아파하지 않아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씩씩하게 만들어가서

이제는 웃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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