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운] 복싱은 삶이요 연극이다

2007/02/14 13:03
 

복싱은 삶이요 연극이다

 

지난주에 열린 한 아마추어 복싱 대회에 갔었다. 곧 복학할 제자가 복싱을 배워 처음으로 하는 경기라서 응원을 해주고 싶었다. 요사이 케이원(K-1)이나 프라이드와 같은 격한 운동이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줄 알지만, 그런 싸움질은 복싱과 크게 다르다. 순수한 아마추어 복싱도 잊혀진 스포츠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서울시 신인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 대회는 아마추어 복싱연맹 주최로 신인을 위해서 일년에 한번 열린다. 한번 출전하면 다시는 출전할 수 없는 것이 대회의 규칙인 모양이다. 전국 신인 아마추어 복싱대회가 있지만, 권투 체육관이 주로 서울에 있기 때문에 서울 대회는 아마추어들을 위한 전국대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대회가 열리는 대학 복싱체육관은 낡고 비좁았다. 선수들은 구경 온 이들과 함께 바닥에 누워 쉬면서 차례를 기다리거나 서서 몸을 풀어야 했다. 이들이 제대로 옷을 갈아입을 곳도 없어 보였다. 연맹이 구청의 체육관을 빌려서 진행해도 이것보다는 나은 대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추어들은 죄다 완강하게 주먹을 쥐고 링에 올랐다. 서툰 선수들이지만 허투로 하는 시합은 없었다. 어둠 속에 눈이 빛나 보였지만 몸은 얻어맞고 위태롭게 흔들리기도 했다. 링 아래에는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선수들이 늙은 코치가 되어 자신의 과거를 더듬고 있었다. 어린 아마추어 선수와 늙은 코치는 희망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복싱이 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혼자 추는 춤도 아니고 둘이서 추는 춤도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복싱은 격한 스포츠이긴 하지만 삶의 격정과 슬픔이 묻어 있다. 아마추어 복싱은 육화된 순수이다. 젊은 아마추어들 선수들에게 복싱은 삶의 동력과도 같아 보였다. 말하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좁은 링에서 이리 움직이고 저리 피한다. 상대방과 갈등하는 복싱은 살아야 한다는 욕망의 소산일 터이다. 나는 그것을 순수한 아마추어 복싱에서 발견했다. 그들은 주먹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쓰러지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함이야말로 링 위에 오른 그들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일 터이다.


복싱을 즐기는 제자를 보면서 삶과 연극 그리고 복싱은 참으로 많이 닮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의 결과이고, 말과 같은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 어떤 것을 생산하는 씨앗이다. 그러므로 삶과 연극 그리고 복싱에서 말하고자 하는 욕망은 삶의 큰 자장이며 밑변이다. 말 없는 삶이 있을 수 없고, 삶 없는 연극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복싱은 육체적 긴장을 넘어서는 절실함이다. 내 앞에 바로 상대가 있고, 나와 상대는 서로 뚫어지게 쳐다보아야 한다. 다른 곳을 볼 수 있는 눈은 링 위에 없다. 연극은 말하는 예술이되, 말하는 이들이 등장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현재의 예술이다. 복싱은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저 아마추어 선수들은 2분 4회전 동안 쓰러지지 않은 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쓰러져 지리멸렬해지면 금세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링 위의 삶은 눈물겨운 좌초이며 끝장이다. 한 생애가 몸부림치는 것이 아마추어 복싱이다.


연극이 말하는 이들을 위해서 공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처럼, 복싱은 링이라는 공간 위에서 벌어진다. 복싱은 주먹 이전에 링이라는 공간의 역사이다. 연극은 사람이 사는 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예술이다. 독백, 방백, 고백, 침묵 등. 이 모든 것이야말로 연극이 말하는 형식들이다. 복싱에서 주먹을 내미는 잽, 훅, 어퍼컷이라는 것은 주먹으로 말하는 형식이다. 선수마다 주먹을 내미는 특기가 다른데, 그 이유는 개인의 기억과 밀접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수마다 다른 주먹의 형식은 그가 관계맺고 있는 가족과 사회라는 그물망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격렬하게 내미는 주먹이 있고, 공허하게 주고받는 주먹이 있다. 말의 형식은 삶의 형식이고, 집단적 기억의 형식은 연극의 형식이라고 한다면, 복싱은 지극히 개인적 삶의 형식과 형식의 대결이다.


말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 삶을 들여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복싱에서 발을 움직이고 주먹을 내미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생각해 보라, 제 삶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솔직해야 하며, 말하기는 곧 자신에게 말걸기가 아닌가. 제 삶은 모두 제 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복싱에서 주먹은 말이고, 주먹을 내미는 것은 말걸기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복싱에서 링은 큰 세상을 이루는 하나의 작은 세상이다. 여기서 각자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다. 복싱의 미덕은 마지막 종소리가 울린 후, 뜨거운 눈물과 땀, 증오가 아닌 피로 범벅이 된 몸들이 첫사랑의 연인들처럼 껴안으며 서로 상대방의 역사 속으로 들어갈 때이다. 이 순간 얕은 패배도, 초라한 승리도 없다.   


제자는 이제 자신을 겨우 말하기 시작했다. 제 삶을 말하기 위해서 그는 힘들게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했고, 그것을 몸으로 말하기 위해서 링에 올랐다. 그가 치른 첫 번째 경기는 그가 육체로 구현한 삶의 연극이었으리라. 그의 삶과 아마추어 복싱은 짝패이다. 처음으로 링에 올라 타인들 앞에서 경기를 하는 것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야만 하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그래서 권투하는 이들의 시선은 낮은 곳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반목이 없는 그들은 언어의 순수성과 같은 것을 고민한다. 제자도 어느 날 링에서 육체가 몰락하는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더 크게 그의 생애를 알 것이다.


안치운/호서대학교 연극학과 교수, 연극평론가

(출처 : 한계레 신문 2007. 2. 9. 책과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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