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바로 휴식...

2008/05/07 00:23

[박노자] 나의 사랑, 列子 

만감: 일기장 2008/05/04 03:37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13213 


한번 제게 한 기자 분께서 "列子를 왜 좋아하느냐, 도교 철학에 무슨 진보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느냐, 고대, 중세 귀족들의 세상 도피의 방법이 아니었느냐"라고 물어보신 적이 있었어요. 글쎄, 특히 남북조 시대의 현학풍은 그랬다고 볼 수 있지만 도가 원전들을 보면 아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제가 학생 시절에 한문을 익혔을 때에 제게 가장 감동을 준 列子의 이야기 중에서는 이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자고은 공부에 지쳐 공자에게 고하기를 '쉴 곳을 원하옵니다'. 공자가 가로대 '인생에서 쉴 곳이란 없소'. 자공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제게 쉴 곳은 전혀 없단 말씀오리까?' 공자가 가로대 '저 무덤의 구덩이를 보라. 윤택해 보이지? 으뜸가는 것 같지? 크지? 아름다운 솥처럼 보이지? 그게 쉴 곳인 줄로 알라!' 자공이 말하기를 '크도다, 죽음이여! 군자는 당신을 휴식으로 알고, 소인은 당신에게 복종하도다. 공자가 가로대 '사여, 이걸 똑똑히 알라. 인간은 흔히 삶의 즐거움을 알아도 삶의 고통스러움을 모르고, 늙으막의 고달픔을 알아도 늙으막의 여유로움을 모른다. 죽음이 나쁘다고만 알지 죽어서 쉰다는 걸 모른다는 것이다"


"子 貢 倦 於 學 , 告 仲 尼 曰 : 「 願 有 所 息 . 」 仲 尼 曰 : 「 生 無 所

息 .」 子 貢 曰 : 「 然 則 賜 息 無 所 乎 ? 」 仲 尼 曰 : 「 有 焉 耳 . 望 其

壙 , 如 也 , 宰 如 也 , 墳 如 也 , 如 也 , 則 知 所 息 矣 . 」 子 貢

曰 : 「 大 哉 死 乎 ! 君 子 息 焉 , 小 人 伏 焉 . 」 仲 尼 曰 : 「 賜 ! 汝 知

之 矣 . 人 胥 知 生 之 樂 , 未 知 生 之 苦 ; 知 老 之 憊 , 未 知 老 之 佚 ; 知

死 之 惡 , 未 知 死 之 息 也"


이게 뭐가 진보냐고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조용한 태도는 "지욕" (止慾), "지족" (知足)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을 적당히 조절하고 남들의 욕망들도 나의 욕망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나의 욕망만을 주장하는 태도를 버린다는 것이지요. 죽음이 바로 휴식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서울대 입학에 목숨을 걸겠습니까? 자본주의의 생산/소비의 주기는 바로 "극도로 발전된 자기 중심의 욕망"을 자극해 이용하는 것인데, 도가의 가르침은 이 욕망에 대한 조절권을 "나"에게 돌려줍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총체성"의 이해지요. 삶도 죽음도 "나"의 일부분이다, 죽음도 삶만큼 긍정시하고 좋게 여겨야 한다 - 이렇게 보는 사람은 결국 우주삼라만상 그 전체를 "나"와 같은 것으로, "나"를 만물 중의 유기적인 하나로 알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자본주의라는 것이 혐오스럽다기보다는 한같 무의미한 우둔한 이들의 작난일 뿐입니다. "국가 경쟁력", "국익", "우등반"... 이러한 언어 그 자체는 도가를 익힌 사람에게는 웃음을 자아낼 뿐이지요.


하여간 저는 마르크스와 열자, 그리고 법구경을 동시에 읽으면 오히려 제 맛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천적 운동을 하시는 분들께 열자와 장자 등을 적극적으로 권고해드립니다. 그러한 정도의 책을 읽어야 "무슨 단체/조직의 회원", "무슨 사상의 추종자"가 아니라 진짜 "생각하는 갈대"가 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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