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언어철학 


分析哲學


▶ 1강에서 논의한 베르그송의 사유와는 매우 대조적인 또 하나의 사유는 흔히 ‘분석철학’(또는 이 철학이 흔히 영국과 미국에서 주류를 이루므로 ‘영미 분석철학’)으로 불리는 사유 계열이다. 이 사유는 개념, 범주, 변증법 등 추상적인 사유를 거부하고 생생한 운동성을 지향한 베르그송과는 달리 오히려 논리학의 형식적 분석을 통해서 철학의 문제들에 접근한 사조이다.

19세기에 부울(george boole), 밀(john stuart mill), 프레게(gottlob frege) 등이 현대 논리학의 형성에 크게 공헌했으며, 이 중 프레게는 분석철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레게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전개되어 온 전통 논리학을 넘어서 현대 논리학을 건설하고자 했다. 전통 논리학이 주어-술어 구조라는 일상어의 구조를 토대로 이루어졌다면, 프레게는 수학적 형식화를 사용해 언어를 형식화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서는 구분되지 않는 논리 형식들(예컨대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이다”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을 수학적 명제 형식을 도입해 차별화한 것이 프레게의 공헌이다.

우선 논리학이 다루는 것은 명제이다. 명제는 문장과 구분된다. 또 논리학은 형식을 다루지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수학적 형식화를 통해서 일정한 집합은 변수로, 집합들끼리의 관계는 함수로, 그리고 특정한 경우는 상수로 취급된다. 그래서 ‘한국의 수도’, ‘일본의 수도’, ‘미국의 수도’ 등등은 ‘x의 수도’로 형식화된다. “로미오는 줄리엣을 사랑했다”, “이몽룡은 성춘향을 사랑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사랑했다” 등등은 “x가 y를 사랑했다”로 형식화된다. 형식화를 비판하고 그것이 왜곡하고 있는 무한한 질적 풍요로움을 강조했던 베르그송과 대조적으로, 프레게는 세계의 무수한 경우들이 공통으로 전제하고 있는 논리적 구조(logical structure)를 뽑아내고자 했다. 더 정확히 말해 프레게는 논리적 구조가 ‘gedanke’로서 자율적으로 존재하며, 그 논리적 구조에 함수값들이 들어감으로써 구체적인 세계가 성립한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프레게 및 그 후 이런 식의 사유를 발전시킨 사람들은 플라톤적 사유 양식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명제 논리학(propositional logic)은 어디까지나 진위 판별이 가능한 명제들만을 다룬다. 감탄문, 명령, ... 등등은 명제 논리학의 관심사가 아니다(이런 한계 때문에 후에 john austin, gilbert ryle, john searle 등은 분석철학을 일상 언어 분석으로 가져간다).

프레게의 형식화는 그 후 복잡한 발전 과정을 겪어 현대 논리학의 주춧돌이 되었다. ‘술어 계산(propositional calculus)’, ‘논리적 연결사들(logical connectives)’, ‘양화사들(quantifiers)’ 등과 같은 개념들이 개발되었다. “영수 아니면 철수이다. 그런데 철수는 아니다. 그러므로 영수이다” 같은 전형적인 논리적 형식은 ‘p∨q, -q, p’ 같은 식으로 정형화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전통 논리학의 형식들이 재정리되었고, 또 집합론의 도입으로(예컨대 벤 다이어그램) 더 정교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큰 공헌을 했다.


▶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에서 이러한 형식화를 일차적으로 집대성했다.

러셀은 우리의 일상 언어를 논리적으로 형식화함으로써 기존 철학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순수 논리학자, 수학자인 프레게의 사유는 러셀에 이르러 본격적인 철학적 함의를 갖게 된다.

예컨대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 같은 문장은 “어떤 x가 있고, 그 x는 현재 프랑스의 왕이며, 그 x는 대머리이다”로 분석될 수 있다. 이렇게 분석할 때 지시의 맥락과 서술의 맥락이 분명하게 드러나며, 이런 분석을 통해 전통적인 ‘존재론적 증명’의 맹점이 어디에 있는가가 밝혀진다.

또 하나의 예로 내포적 의미와 외연적 의미의 분명한 구분을 들 수 있다. 프레게는 논리적 형식화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두 의미(‘sinn’과 ‘bedeutung’)를 구분하게 된다(샛별과 저녁별의 구분, ‘플라톤의 가장 뛰어난 제자’와 ‘알렉산드로스의 스승’).

명제의 진위를 구분하는 것은 곧 각 변항들의 진위 구조를 통해서 계산된다. 이런 ‘진리표’에 의한 연산은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고안되었다.(예제: p∧q ∨ p∧-q)


▶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 - 1951)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유태계 명문 가정에서 태어났다. 베를린에서 공학을 공부했고, 프로펠러 설계에 몰두했다. 그 과정에서 점차 관심이 순수 수학에로, 그리고 철학에로 기울었다. 프레게의 권유로 러셀 밑에서 공부했으며, 철학자 무어, 경제학자 케인즈 등과 사귀었다. 1차 세계 대전에 참가했으며 전쟁 중에 배낭에 넣고 다니던 수첩에 생각들을 기록했으며, 그것을 토대로 1918년에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를 출간했다.

책을 출간한 후 철학을 버렸으며 오스트리아 시골 초등학교에서 교사직에 봉사했다. 자신에게 상속된 막대한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지금 내 삶에서 좋은 것 한 가지는 때때로 어린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준다는 것입니다.” 그 후 수도사의 정원사로 일하기도 했고, 누이의 집을 설계하기도 했다. 1929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자신의 전기 철학을 극복하는 사유를 시작했다. 그의 후기 사유는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bemerkungen)에 수록되었다. 이 책은 언어철학 외에도 심리철학의 중요한 통찰들을 담고 있다. “우리의 삶은 꿈과도 같다. 좀 나을 때 우리는 단지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깨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에 우리는 깊이 잠들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와 러셀을 통해 다듬어진 분석철학적 사유에 깊은 형이상학적 향기를 불어넣었다. 그의 삶은 스스로에게 무자비할 정도로 철저하고 고독한 철학적 삶이었으며, 가장 순수하고 엄격한 사상가(denker)의 모습을 보여준다.


▶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핵심 사상을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명확하게 말해야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요약했다.

이 책에서 전개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은 흔히 ‘그림 이론’이라고 불린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실재의 그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의 전기 철학은 표상/재현이라는 전통 사유의 테두리 내에서 전개된다. 언어는 세계를 그리는 명제들로 이루어진다. 명제들은 사고의 지각 가능한 표현이며, 사고는 사실의 논리적 그림이다.(여기에서 실재와 언어와 관념의 寫像 관계를 추구했던 고전 시대적 사유가 잘 드러난다)

실재와 언어의 관계가 간단한 것은 아니다. “철수가 내 옆에 있다”라고 말할 때, 실제 이 명제에서 ‘철수’라는 글자와 ‘내’는 옆에 있다. 그러나 이런 간단한 경우는 드물다. 때문에 여기에서의 그림이란 논리적 형식(logical form)이라 할 수 있다. 악보와 가수의 노래와 그 노래를 녹음한 cd, ... 등은 논리적 형식을 공유한다.(→ 번역의 문제와 비교)

그런데 이런 관계가 성립하려면 무엇보다도 ‘지시’(reference) 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단어는 복합적인 실재를 가리킨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그야말로 막연하기 이를 데 없는 복합체를 가리킨다. 그래서 분석이 요청되며, 명제들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끝없이 쪼개야 한다(→ 분석적 사유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과 비교). 이것은 물질을 쪼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이라 불렸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에 대한 그림을 제공하지 못하는 명제들은 ‘사이비 명제들’이라고 보았으며, 이런 생각을 토대로 전통 형이상학을 맹공했다. 그러나 칸트가 그랬듯이, 비트겐슈타인 역시 형이상학이 지향하는 세계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칸트가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했듯이,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가능한 모든 과학적 질문들이 대답되고 난 후에도, 삶의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논고』의 마지막 명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라”이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것은 신비한 것이다.” 바하만(ingeborg bachmann)은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시로 표현했다.


...()... 산에서 우리는

호수들을 보고, 호수들에는

산들이 비치고. 구름 의자를 탄 채

한 세계의 鐘들이 산들거리고 있다. 그 누구의

세계인지를 아는 것은 금지되어 있구나.

...()... von den bergen

sieht man seen, in den seen

berge, und im wolkengestühl

schaukeln die glocken

der einen welt. wessen welt

zu wissen, ist mir verboten. curriculum vitae.



후기 철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전기 철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언어철학을 제시한다.

후기 언어철학은 흔히 ‘사용론(theory of use)’라 불린다. 이제 의미는 그림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용을 통해서 이해된다. 자연과학적 언어만이 세계를 그릴 수 있다는 생각도 철회된다. 또 전기에는 철학의 고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심리적 차원들(지향성, 기대, 느낌, ... )도 논의된다. 이런 논의는 후에 심리철학(mind-body problem, philosophy of mind)으로 불리며 크게 발전했다.

공사장에서 지붕 위의 사람이 “벽돌!" 하고 외치면, 밑의 사람은 벽돌을 던져준다. 위의 사람은 “당신 내게 벽돌을 던져주시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래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다. 왜일까? 언어의 의미는 늘 어떤 사용의 맥락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언어 사용을 ‘언어 놀이/게임(sprachspiel/language game)’이라 불렀다. 이제 의미는 지시 대상과의 관계보다는 사용의 맥락에 중점을 두고서 분석된다. 자연과학도 하나의 언어 놀이일 뿐이다. 이런 식의 언어 이해를 언어학에서는 화용론(pragmatics)이라 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자연과학적 언어가 아니라 일상 언어를 분석한다. 일상 언어를 교정해서 이상(理想) 언어를 만들려 했던 꿈(카르납 등)이 일상 언어에 대한 섬세한 분석으로 대치된다.

일상 언어 분석은 비본질주의 철학을 가져다주었다. ‘게임’이라는 말은 어떤 본질을 가지는가? 체스 게임, 교실에서의 어린이들의 게임, 교육용 게임, 비틀즈가 말한 게임(♪“love was such an easy game to play"♬), 스포츠, ... 이 수많은 게임‘들’을 게임으로 만들어주는 본질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이들 게임들 사이에는 다만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s)이 있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니체와 베르그송이 수행했던 본질주의 비판을 언어철학적 차원에서 다시 확인해 주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생각은 현대 예술철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언어 게임을 가능하게 해 주는 기본적인 존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삶의 형태(lebensform/forms of life)’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4장에서 배울) 후설의 ‘생활세계(lebenswelt)’보다 다원화된 개념이다.


▶ 제 2차 세계 대전(1939-1945)은 유럽의 많은 사상가들로 하여금 미국으로 명명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언어철학과 (3강에서 배울) 비엔나 학파의 과학철학은 미국으로 이식된다. 미국은 19세기에는 유럽 철학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20세기 초에 퍼스, 제임스, 듀이 등을 통해서 ‘실용주의’라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사상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이제 20세기 후반에는 유럽에서 건너온 분석적-과학적 철학과 미국 토착의 실용주의가 통합되기에 이른다. 콰인(willard quine) 같은 사람이 이런 종합을 대표한다.

특히 퍼스의 작업은 미국의 ‘토착적인 분석철학’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분석철학의 역사를 그로부터 시작해 재구성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후 분석철학은 논리-언어철학에서 크립키, 데이빗슨 등을, 심리철학에서 김재권 등을, 과학철학에서 쿤 등을 낳으면서 발전했으며, 최근에는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많은 시도들 -- 로티의 신실용주의 -- 이 도래하기에 이르렀다.



참고 문헌


뮤니츠, 『현대 분석철학』, 박영태 옮김, 서광사

프레게, 『산수의 기초』, 박준용/최원배 옮김, 아카넷

러셀, 『서양철학사』(상, 하), 집문당

『수리철학의 기초』, 연세대학교출판부

『일반인을 위한 철학』, 집문당

『철학의 문제들』, 박영태 옮김, 이학사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천지

『철학적 탐구』, 서광사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 서광사

『확실성에 관하여』, 서광사

가버․이승종,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 민음사

해리스,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고석주 옮김, 보고사

구조주의 


바깥의 사유(구조주의)


‘근대성’이라는 것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고 있는 것일까? 인간이 정말 ‘주체’인가? 인간이 세계를 인식론적으로 ‘구성’하고(칸트), ‘노동(arbeit)’을 통해 세계를 인간화해 역사를 만들어나가고(헤겔, 맑스), ‘대자’로서 절대 자유를 구가하는(사르트르) 존재일까? ‘서구 근대성’이 삶의 모범 답안인가? 철학자들이 원했던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바로 근대의 자아도취적 주체철학이 결국 제국주의와 파시즘, 자연 파괴, 인간 소외로 귀착한 현대 사회의 비극에 사상적 토양을 마련해 준 것은 아닌가? 근대성을 수립한 것은 서구이기에 서구가 모든 가치와 의미의 기준이 되어야 할까? 근대가 이룩한 위대한 성과를 충분히 인정해야겠지만, 혹시 그 과정에서 ‘타자들(l'autre)'은 철학의 눈길 바깥으로 밀려난 것은 아닐까? 칸트, 헤겔, ... 의 철학은 결국 서구-남성-어른-문명인- ...의 사유가 아닌가. 구조주의 사상가들은 이렇게 근대성=’modernity'에 강한 의문을 던진다.


칸트의 예: 주체의 ‘의식’(왜 꼭 의식이어야 할까? 지극히 추상화된 인간)의 일정한 틀(감성의 아프리오리한 형식으로서의 시공간, 오성의 열두 범주, 구상력과 도식, ... )을 갖추었기에 인간은 바로 이러이러한 식으로 세계를 인식할 수밖에 없으며, 그 가능성의 조건 바깥은 알 수 없는 물자체라는 생각의 문제점.

주체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가 끝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 존재의 드러남을 통해서 오히려 주체의 범주가 바뀌어 가는 것이다. 흑체(黑體)는 물질의 연속성이라는 상식을 무너뜨렸고, 불확정성 원리는 근대 결정론의 금과옥조인 인과율을 무너뜨렸고, 물질-파 개념은 모순율까지 뒤흔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새로운 현상이, 세계가 열릴지 누가 알겠는가? 세계 속에서 주체가 변해 가는 것이지 주체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가 생각한 ‘선험적 주체’, 엄청난 두께의 비판서들, 그 안에는 미개인이나 어린이나 광인이나, .... 등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칸트의 주체는 유럽적-과학적-... 주체일 뿐이다.

사르트르의 예: 즉자와 대자를 날카롭게 나눈 사르트르. 거기에 동물이나 식물이 들어설 자리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의 의식만 대자인가? 인간이 그렇게 특별하고 잘난 존재일까? 그의 열정적인 현실 참여와 레지스탕스 운동에 큰 경외심을 바치면서도, 사르트르의 존재론 자체는 전형적인 이분법, 도시의 철학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제 철학은 ‘주체’가 아니라 주체의 ‘바깥’, 그리고 그 바깥에서 서성이는 타자들에게 눈길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미개인, 어린이, 여성, 동성애자, 변방, 유목민, 담론, 수인, 광인, 여백, 차이, 낙오자, ......


레비-스트로스와 라캉으로부터 오늘날의 데리다, 세르, 레비나스에 이르기까지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루어진 새로운 사유 혁명은 바로 이런 시대적-사상적 배경에서 등장했다. 그것은 타자의 사유, 바깥의 사유, 여백의 사유, 차이의 사유이다. 먼 훗날 철학사가들은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사유 혁명으로부터 그들 자신들의 ‘현대’를 가늠할 것이다. 오늘날 살아 있는 사유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루어진 이 사유 혁명을 소화해야 한다.

구조주의는 좁은 의미에서의 철학 사조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학/기호학(소쉬르, 퍼스 등), 정신분석학(라캉), 민족학/인류학(레비-스트로스), 문학 비평(바르트 등), 신화학(뒤메질), 사회학(부르디외), 발생적 인식론(삐아제), 역사(아날 학파), 철학(알튀세, 푸코), 나아가 생물학(자콥)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형성된 종합 학문에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이 사조에 참여한 사람들이 비엔나 학파처럼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학파를 수립한 것도 아니고, 또 흔히 이 사조로 분류되는 사람들 자신들이 스스로를 구조주의자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구조주의는 서로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서서히 형성되었으며, 훗날에 가서야 ‘구조주의’라는 딱지를 부여받게 된 어떤 느슨한 흐름, 분위기, 경향일 뿐이다. 때문에 이 사조를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떠나 추상적으로 일반화해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20세기 중반 서구 사상계를 지배했던 것은 실존주의와 맑시즘이었다. 두 사조는, 하나는 인간의 주체를 다른 하나는 역사의 객관적 법칙성을 강조했음에도, 결국 서구 근대 철학의 전형적인 적자였다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는 이런 흐름을 깨고 등장했으며, 그런 등장의 배면에는 바슐라르에 의한 합리주의적 계몽, 게루가 가르쳐준 철학사 독해 방식,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부활, 소쉬르와 퍼스의 언어학/기호학, 또 간접적으로는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의 후기 철학, 문학 비평의 새로운 경향 등이 영향을 주었다.

구조주의는 철학이기 이전에 우선 ‘인간과학 방법론’이다.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의 구조주의와 철학 사조로서의 구조주의는, 물론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조심스럽게 구분되어야 한다. 그것은 뉴턴과 칸트, 진화론과 베르그송, 수학과 분석철학이 구분되어야 하는 것과도 같다.

어떤 과학이 과학 자체로서 그치지 않고 그 과학의 근본 전제들에 대한 메타적 검토, 그리고 그 과학의 성과들이 인간 존재에 대해, 나아가 세계 전체에 대해 함축하는 의미에 대한 성찰로 나아갈 때, 그것은 철학적 성격을 띠게 된다. 예컨대 불확정성 원리는 물리학 이론이지만, 그것이 세계의 비결정성, 우연의 본성 등에 대한 성찰에로 이어질 때 철학적 성격을 띠게 된다. 진화론은 생물학 이론이지만, 그것이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상, 윤리의 근거 같은 문제들로 확대될 때 철학적 성격을 띠게 된다. 마찬가지로 구조주의는 우선은 언어학, 사회학, 정신분석학 등의 방법론이라는 의미를 띠지만, 그것이 세계와 언어의 관계, 인간의 본성, 문화의 의미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에 연계될 때 철학적인 사조로 화하게 된다.

이 점에서 현상학과 구조주의는 다르다. 현상학은 철학적 방법론이 먼저 생기고 그것이 여러 분야로 응용된 경우지만, 구조주의는 다양한 인간과학적 탐구들이 이미 형성된 이후 그것들이 어떤 철학적 함축을 띠게 됨으로써 하나의 철학 사조로 화했다고 볼 수 있다.(때문에 구조주의에 대한 이해는 철학 이전에 다양한 인간과학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구조주의 사유가 당대를 풍미했던 실존주의와는 전혀 상반되는 인간관을 함축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구조주의는 철학사의 한 장에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1) 구조주의는 철학에서 늘 기본적인 대립항으로 인식되어 왔던 대상(세계, 사물, 물체, ... )과 주체(의식, 영혼, 마음, ... )의 이분법을 버리고, 이 둘 사이에 어떤 제3의 차원이 존재한다고 본다. 이 차원이 바로 ‘구조(le structure)’이다.(인식론-존재론적 배경) 2) 구조주의는 이 제3의 차원이 바로 대상과 주체의 일정한 관계맺음을 지배한다고, 즉 대상과 주체는 자신도 모르게 -- 즉 무의식적으로 -- 이 제3의 공간(논리적, 법칙적 공간)을 통과해서 관계맺는다.(미술 시간과 생물학, 경제학 시간의 예) 3) 인류의 ‘문화’란 주체의 창조물이라기보다는 주체가 바로 그 무의식적 법칙에 따라 만들어낸 어떤 구조물이다. 즉 문화란 주체의 산물이 아니라 구조의 산물이다.(고주몽 신화와 파이톤 신화의 예) 4) 구조란 일정한 ‘소(素)들( ...ième)’ -- 음소, 신화소, 음식소 등등 -- 의 체계이며, 주체는 이 체계의 어느 ‘위치’에 자리잡는다.

구조주의라는 학문 방법론에 처음으로 철학적 함축을 부여한 인물은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이다. 구조주의가 서구적 주체, 서구적 근대성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나왔다면, 그 초입에 바로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는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이 놓여 있다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류학이라는 담론은 본래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를 잘 통치하기 위해서 발달시킨 담론이다. 즉 인류학은 제국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담론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전통을 공격함으로써 유럽에 의해 침탈 당한 未開文明에게 서구 지성인의 사과와 반성을 전달하고자 했다.

인류학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은 기능주의적인 입장이다. 기능주의는 한 사물의 의미를 그 사물의 역할, 기능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미개인에 대해 구조주의적으로 접근한다.(거북이, 독수리, 곰의 예) 근대 철학은 고전 철학이 ‘봄’의 수준에 머물렀으며 ‘함’의 수준으로 철학을 변환시키고자 했다. 구조주의는 어떤 면에서는 다시 ‘봄’의 철학으로 전환하려는 몸짓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구조주의는 ‘무의식’을 핵심으로 하며 이 점에서 현상학/실존주의와 날카롭게 대립한다. 무의식을 좁은 의미, 원래 의미대로 사용하면 정신분석학의 용어이다. 프로이트를 이어 라캉(jacques lacan)은 무의식을 탐색했으며,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을 통해 서구 근대적 주체(코기토, 선험적 주체)를 해체했다. 라캉은 주체를 ‘형성되는’ 것으로 봄으로써 현대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레비-스트로스가 인류학의 영역에서, 라캉이 정신분석학의 영역에서 구조주의적 사유 양식을 전개했다면, 알튀세(louis althusser)는 맑시즘의 영역에서 구조주의적 사유를 펼쳤다. 구조주의와 더불어 알튀세는 스피노자와 바슐라르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기도 했다.

알튀세는 맑스의 초기 사상과 후기 사상을 날카롭게 구분하고자 했으며, 전기 철학에 영향을 받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대조적으로 후기 사상에 주안점을 두었다.

알튀세는 구조주의적 인과론,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등을 비롯한 중요한 개념들을 남겼다. 현대 철학의 중요한 -- 어쩌면 가장 중요한 -- 요소는 ‘주체 형성’의 탐구이다. 주체는 주어진 것, 설명항이 아니다. 그것은 형성되는 것, 피설명항이다. 라캉이 주체형성론을 정신분석학적 테두리 내에서 전개함으로써 일정한 한계를 드러낸다면, 알튀세의 주체형성론을 문제를 사회-역사의 장으로 끌어냄으로써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구조주의에 철학사적 위상과 인식론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푸코(michel foucault)이다. 푸코는 실증주의적-다원주의적 구조주의를 시도했다. 그러나 푸코는 구조주의를 벗어나 독자의 사유로 나아간다.

푸코 사유에서 구조주의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것은 『지식의 고고학』과 『말과 사물』에서이다. 전자에서 푸코는 언표와 담론 개념을 다듬음으로써 현대 문화철학에 결정적인 틀을 제공했고, 후자에서 서구 학문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구조주의의 철학사적 위상을 밝혔다.

푸코의 사유는 유럽적 근대성에 대한 철저한 해부이다. 푸코만큼 유럽적 근대성을 처절하리만큼 적나라하게 해체한 인물은 없다. 이 점에서 푸코야말로 좁은 의미에서의 현대 철학의 입구에 서 있는 인물일 것이다.


주체의 새로운 얼굴

자크 라캉의 사상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캉(1901-1981)은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바슐라르 등과 더불어 20세기 중엽에 활동했다.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 맥락에서 새롭게 재창조했으며, 거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성찰을 가미함으로써 현대 사상의 핵심 인물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라캉의 사유는 깡길렘, 푸코가 그렇듯이 '정상과 비정상'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깡길렘과 푸코가 한 사회, 한 시대가 비정상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어떤 논리, 개념, 장치들, 배경들을 깔고서 그런 구분을 행하는가에 관심이 있다면(인식론적-과학사적 관점), 라캉은 처음부터 모든 인간은 비정상이라고, 더 정확히 말해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아픈 존재”(헤겔)인 것이다. 이 점에서 통상적으로 함께 ‘구조주의자’로 분류되지만, 그리고 라캉 자신이 말년에 자신의 담론을 수학화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지만, 라캉은 레비-스트로스의 투명한 합리주의와 대조된다. 그러나 라캉은 그 아픔이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본 점에서 역시 구조주의자이다.


무의식


라캉 사유의 성과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이으면서도 거기에 구조주의 언어학의 성과를 도입해 무의식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를 시도한 점에 있다.

정신분석학은 '무의식' 개념을 기본으로 한다. 우리가 의식하는 세계, 의식으로 행하는 경험 아래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가 놓여 있다.(그러나 ‘무의식’이라는 실체는 없다. 의식의 공백으로서, 의식의 배면으로서 발견되는 어떤 차원일 뿐이다) 라캉에게서 무의식은 어린 아기가 상징의 세계, 표상의 세계에 진입하면서 형성된다. 그러한 진입 이전의 세계, 즉 아기와 엄마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그 후의 세계 즉 상징과 표상의 세계에 억눌리면서 무의식이 형성된다. 즉 우리는 의식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아래에는 어린 시절에 발생했던 그러한 진입과 더불어 의식 아래로 들어갔으나 그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실질적으로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의식 세계가 상징의 세계, 표상의 세계라면 그 세계는 필연적으로 기표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표는 기의와 맞물린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소쉬스에게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고전적인 전제 위에서 활동했던 소쉬르와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사이에는 거대한 담론사적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더 정확히 말해,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기표-기의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며 때로 그 관계를 일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한다면(예컨대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떠다니는 기표’) 반대로 라캉의 경우 기표와 기의는 애초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 즉 이른바 ‘누빔점’이 존재한다.

기표는 그 안에 어떤 경험 내용을 담고 있다. “눈이 내린다”라는 기표는 눈이 내리는 현상(지시대상) 및 그 현상에 대한 경험 내용(기의)을 담고 있다. 그러나 라캉은 기표와 기의가 흔히 일치하지 않음을 말한다. 정치가가 “저는 대권 욕심이 없습니다”라고 극구 강조하는 것은 사실 은근히 대권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조심할 것은 이 정치가가 지금 의식적으로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 그 사람은 자신이 욕심이 없다고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무의식 속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즉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일치하지 않는가? 바로 무의식 때문이다. 기표는 대권 주자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그 정치가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지만, 대권 주자의 무의식의 움직임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라캉에게 인간이란 병자든 아니든 기본적으로 이런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의식과 기표, 그리고 그 기표가 명시적으로 가리키는 기의의 세계가 있는 반면, 또한 무의식에서의 움직임이 존재하는 것이다.

무의식은 ‘그것(es)’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그것’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를 뒤집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로. 라캉은 근대 철학의 대전제인 주체의 투명성, 주체가 “주어졌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주체의 밑에는 ‘그것’이, 무의식이 존재하며 주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거울 단계


어린 아기의 주체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가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라고 한다. 어린 아기는 아직 신체적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 이를 ‘조각난 몸’의 환상이라 한다. 이는 생물학적으로는 환상이지만 심리학적으로는 환상이 아니며, 누구나 겪게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이 환상은 후에 ‘정신분열증’이 생길 수 있는 잠재적 바탕을 이룬다고 한다)

이 조각난 몸의 환상은 ‘거울 단계’에서 극복된다. 거울 단계에서 아기는 거울에 비친 영상을 보고서(또는 어머니나 다른 아기들에게 비친 자신을 보고서) ‘동일화(identification)’의 과정을 겪는다. 아기는 동일화를 통해서 조각난 몸의 단계를 극복한다. 이 단계가 “거울 단계/국면”이다.

그러나 이 단계는 아직 본격적인 주체가 형성되지 않은 단계이다. 아기는 아직 이자(二者)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때에 아기는 아직 상징의 세계에 들어간 것이 아니며, 엄마와 자기를, 다른 아기와 자기를 혼동하는 전이성(transitivity)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아기가 자신과 세계를 연속적으로 이해하는 단계이며, 라캉은 이 단계를 ‘상상적’ 단계라 부른다.

이 단계는 나르시스의 단계이기도 하다. 물 속의 자기 영상에 반했던 나르시스처럼 이 단계의 인간에게는 아직 타인, 상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단계는 매우 행복한 단계이다. 그러나 그 행복은 자신이 통일된 어떤 존재라는 일정한 ‘오인(誤認)’에 근거하고 있다. 라캉에게 주체란 기본적으로 오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기는 이제 이런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건너가게 되며, 이 과정을 통해서 본격적인 한 ‘인간’, ‘주체’가 형성된다.

아기는 타인의 세계, 사회 세계에 들어가며, 그 결정적인 측면은 곧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다. 라캉은 이 차원을 상징계라고 부른다. 이것은 달리 말해 아기가 이제 기표들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기표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오히려 기표들의 장 속에서 주체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주체의 형성은 곧 상징계로의 진입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란 타인과의 관계 하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계로의 진입은 자기 소외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제 아기는 상징계라는 타자, 사회라는 타자 속에 들어가면 동일시의 환상에서 깨어나 차가운 자기소외(自己疏外)의 장으로 들어선다.(이 단계에서 아이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즉 타인의 시선을 매개해 스스로를 이해한다) 나르시즘의 단계, 거울 단계는 곧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며, 그 단계를 통과함으로써 아기는 이제 자기와 타자를 뚜렷이 구분하면서 하나의 주체로서 정립된다. 그러나 이 구분은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로서 세운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계에서 어떤 자리를 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레비-스트로스는 근친혼의 금지야말로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문화로 이행하게 한다고 말했다. 연속적 자연으로부터 불연속적 규범으로 넘어옴으로써 혈연과 결혼이 구분된다. 라캉에게서는 바로 거울 단계가 이 ‘자연과 문화의 돌쩌귀’ 역할을 한다. 아기는 거울단계를 거치면서 유기체에서 인간으로 화한다. 이 점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와는 달리 모든 형태의 생물학주의를 물리친다.

라캉의 사상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함축을 띤다. 주체가 자기동일적 투명성의 존재가 아니라 자기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타자 즉 상징계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은 근대적 주체 개념과는 판이한 주체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기토가 해체된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아기는 이자 관계에서 삼자 관계로 넘어간다. 이 때 아버지가 출현한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상징계의 은유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없는 고아의 경우라도 상관없다. 아버지는 곧 법(法)의 세계이며 달콤한 상상계와 대비되는 차가운 상징계를 상징한다. 아버지가 등장한다는 것은 곧 아기가 상징계로 진입한다는 것을 뜻한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건너가면서 ‘균열(die spaltung)’이 생긴다. 그 과정을 통해서 무의식이 구조화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이름’이다. 이름이 주체를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작용한다. 즉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리비도/성욕이 규범에 종속된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했듯이, 아기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증오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과정은 의식적 과저이 아니라 무의식적 과정이다.

아기에게 어머니는 하나의 결핍으로서 나타난다. 즉 어머니에게는 남근(phallus)이 결핍되어 있다. 이 때의 남근은 생리학적인 남근이 아니라 아버지의 상징, 법의 상징, 상징계의 상징이다.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이 바로 이 팔루스이다. 아기는 바로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자 한다. 즉 자신을 팔루스에 동일화한다. 아기는 어머니의 결핍을 채움으로써 어머니와 더불어 충족한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남자아이 중심의 설명이다.

아버지의 이름(nom)/기표는 곧 아버지의 “안돼(non)”이다. 즉 아버지/상징계는 금지로서 등장하다. 무엇의 금지인가? 바로 근친상간의 금지이다. 그것은 곧 연속성에 대한 갈망을 불연속으로 떼어놓는 과정이다. 연속의 자연에서 불연속의 문화로.(이 점에서 레비-스트로스와 통한다)

그런 분리를 거부할 때 아버지/법은 제재를 가하게 되며, 이 때문에 아기는 ‘거세(castration)’ 공포를 느낀다. 그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아기는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며 ‘자아의 이상(the ideal of me)’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상상계에서의 ‘이상적 자아(the ideal i)’와 다른 것이다. 이상적 나는 상상계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나이지만, 나의 이상은 상징계 속에서 타인의 눈길을 통해 형성되는 나의 모습인 것이다.

이 나의 이상을 가지게 되는 것은 곧 프로이트가 말한 ‘초자아(super-ego)’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비로소 주체가 성립한다. 그러나 이 주체는 상징계에 자리를 잡은 주체이지 상식적 의미에서의 주체가 아니다.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언표하는 주체(말하는 주체)와 언표되는 주체(말의 주체)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자아가 억압되고 소외되기 때문이다. 이를 ‘원억압(原抑壓)’이라 부른다. 이 억압은 의식적 억압과 구분된다. 이러한 억압은 필연적으로 ‘욕구불만(frustration)’을 불러일으킨다.(이 욕구불만도 의식 차원에서의 욕구불만과는 구분된다) 상징과 도덕이 욕구불만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불일치’라 하는 것이 나을 듯이 보이는) ‘부정(negation)’의 개념이 등장한다. 이렇게 도덕과 윤리는 균열, 틈, 입벌림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신경증과 정신병은 바로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성립한다. 즉 상징계에 대한 ‘거부’로부터 발생한다. 여성이 잘 걸리는 히스테리는 자신이 거세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남성에게서 잘 발견되는 강박증은 반대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지나친 기대 때문에, 즉 스스로를 계속 팔루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병들에 대한 치료는 기본적으로 상징계에로의 정상적인 진입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무의식의 구조


주체는 상징계에 들어감으로써, 기표들의 장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게 되며, 하나의 ‘인간’이, ‘주체’가 된다. 물론 인간, 주체라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는 근대 주체철학의 뉘앙스와 정반대이지만. 요컨대 기표의 상징적 질서가 주체를 구성한다. 이것이 라캉의 기본적인 ‘구조주의적 사유 양식’이며 그를 레비-스트로스에 이어준다. 그러나 이 상징계의 구체적인 내용은 레비-스트로스와 현저하게 다르다.

인간은 언제나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타인이 자신에게 ‘똑똑한 사람’이기를 요구하면, 자신은 타인의 욕망하는 그것을 욕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욕망이 지향하는 것은 곧 기표이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기표가 지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상징계, 같은 구조라 해도 레비-스트로스의 경우와 라캉의 경우는 현저히 다르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가 욕망이라는 기름기가 제거된 수학적이고 명징한 구조라면, 라캉의 구조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욕망 이외의 것이 아니다. 라캉에 이르러 이제 욕망이란 특수한 의미, 부정적인 의미를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 본성으로, 세계의 성격 그 자체로 대두된다.

요컨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현상학의 입장)이 아니다. 기표들의 장이 존재하고, 그 기표들의 장에 의해 주체 ― 의식적 주체 이전에 무의식적 주체 ― 가 구성되고, 그로부터 의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언어의 법칙이 먼저 존재하고 각개인의 무의식이 그 언어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다.

무의식이 언어적 규칙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언어적 규칙성은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이 무너진 상황에서의 규칙성이라 했다. 그렇다면 그 규칙성은 무엇일까?

한 가지 조심할 것은 기표가 떠다닌다고 말했다 해서, 기표와 기의 사이의 어떤 일정한 관계도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경우 정신분석학을 ‘과학’으로 정립하려 한 라캉의 시도는 좌절될 것이다. 라캉은 구조주의자인 한에서 합리주의자이며, 따라서 구조를 좀더 역동적으로 파악하려 한 것이지 합리적 파악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럴 경우 ‘구조’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구조’라는 말을 쓰는 한 문자 그대로 어떤 구조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라캉에게서 기표와 기의는 일정 지점(‘누빔점’)에서 만난다. 그 지점을 잡아내는 것이 라캉 사유에서 합리주의적 측면이다. 그러나 기표는 궁극적 기의에 끝내 닻을 내리지 못한다. 영원히 알 수 없는 기의의 심연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이 라캉이 합리주의에서의 한계를 긋는 부분이다.

라캉은 이 언어학적 구조들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은유와 환유라고 생각한다. 은유는 압축이다. “불타다”와 “사랑하다”는 “뜨겁다”라는 공통 요소를 함께-중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압축(condensation)이다. 또한 은유는 치환을 특징으로 한다. “부자가 되다”가 ‘돼지’로 치환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이란 바로 이런 은유의 언어로 되어 있다고 했다. 은유는 동시성을 기반으로 한다. “불타다”와 “사랑하다” 그리고 “부자가 되다”와 ‘돼지’ 사이에는 어떤 시간적 선후도 없기 때문이다.

환유는 다르다. 환유는 이행이다. “잔을 들다”는 “술을 마시다”의 환유이다. “잔을 들다”와 “술을 마시다” 사이에는 이행/이동의 관계가 성립한다. 환유에서 두 항은 치환되기보다는 조합된다. 그리고 환유에는 시간적 요인이 개입한다. “잔을 들다”는 “술을 마시다”의 앞에 오며, 또 그래야만 환유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참고로 제유는 부분으로서 전체를 나타내는 경우이다. 사각모는 대학을 나타낸다)

정신분석학자는 기표들(예컨대 환자의 말)을 분석함으로써(즉 그 언어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그런 말들이 뜻하는 환자의 ‘인생’)을 밝혀내고자 한다. 그런데 기표들과 기의들의 관계가 매끈한 일대일 대응을 이루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난점들이 발생한다. 라캉은 모든 열쇄는 결국 기표들이 쥐고 있으며, 우리는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만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의는 기표에 잡히지 않고 계속 미끄러진다. 물론 분석가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기의를 찾아낼 수밖에 없다. 분석가는 기표들이라는 낚시 바늘을 던져 기의들을 낚아낸다. 기표들과 기의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것이 성공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칸트의 물자체처럼, 메이에르송의 ‘탈합리적인 것’처럼 저편에 머무른다. 이곳을 라캉은 ‘실재계’라고 한다. 그것은 언어에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 세계 자체, 인생 자체일 것이다. 라캉의 사유는 상상계에서 출발해 상징계로 가지만 결국 실재계에서 끝난다. 아마 인생의 ‘의미’는 영원히 기호로 포착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 보다.


욕망과 운명


프로이트는 “그것이 있던 곳에서 나는 생성하리라(wo es war, soll ich werden)”고 했다. 나의 생성을 좌우하는 것은 무의식이다. 그것도 어릴 때 형성된 무의식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워즈워드)라는 말은 정신분석학에서 또 다른 뉘앙스를 획득한다.

그것은 나=자아에게 타자이다.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 타자=다름은 나의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나는 내 안에 나의 타자=무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정신분석학이 던져주는 가장 충격적인 메시지이다.

타자란 무엇인가? 타자는 언어, 기표의 장소, 상징계이다. 이 상징계는 어린아이가 상상계에서 그곳으로 옮겨갈 때 어린아이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다. 어린아이는 상상계의 달콤함과 환상을 포기하는 대신 상징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선다. 또 타자란 상호주체성의 장이다. 상호주체성은 개별적인 주체들 사이에서 추후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상호주체성의 장 내에서만 주체들은 주체들일 수가 있다. 상징계에 들어서는 동시에 개인들의 무의식에는 상호주체성이 각인된다.

헤겔에게서 한 인간의 주체성은 타자를 통해서만 ‘자아 속의 이상한 자아’로서의 타인을 통해서만 형성된다(인정투쟁). 라캉에서도 자아는 자신 속의 이상한 자신으로서의 타자=무의식을 통해서만 형성된다. 상징계는 팔루스이며 상징계를 채우고 있는 욕망은 팔루스에의 욕망이다. 팔루스는 욕망의 기표이다. 욕망은 팔루스라는 기표를 통해서 형성된다.

그런데 욕망(desire)은 욕구(need), 요구(demand)와 다르다. 욕구는 생리학적 필요이지만, 요구는 타인에 대한 간청이다. 어린 아기는 사탕을 욕구하지만 엄마의 사랑을 요구한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이에 비해 욕망은 보다 근원적인 것이다. 욕망은 어떤 구체적인 맥락에서의 부재가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에서 온다. 결핍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이미 형성되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이다. 인간은 그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며 따라서 그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그 원초적 결핍으로부터 욕망이 나온다.

욕망의 근원적 기의는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이미 상징계로 들어선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래서 욕망의 기표는 팔루스이다. 그러나 욕망 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 팔루스를 욕망하는 것은 주체가 되기 위한 것, ‘인간’이 되기 위한 것, 일종의 타협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형태로든 정신병을 앓기 때문에 거치는 통과의례이다. 그러나 도대체 욕망이 근원적으로 지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실재계를 영원히 알 수 없듯이 이 또한 알 수 없다. 라캉은 이 곳을 ‘신화의 세계’라 부른다. 인간은 어떤 쪼개짐으로써 갈라짐으로써 인간이 된다. 로고스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이 동시에 분열의 경험이라는 것이 인간의 얄궂은 상황이다. 따라서 욕망의 근원적 기의는 그 어떤 쪼개짐도, 갈라짐도 없는 그 어디일 것이다. 이런 욕망을 가지고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라캉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이다.

라캉은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한편으로 욕구와 유사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성애적(性愛的)” 측면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다. 충동은 생리학의 영역에서 정신분석학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존재한다.

인간이 욕망의 존재인 한 인간은 번뇌의 존재이다. 도덕이나 윤리는 상징계를 받아들임으로써 성립하며, 따라서 인간의 영원한 번뇌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라캉에게 번뇌를 해결하는 길은 우리가 왜 그렇게 번뇌의 존재일 수밖에 없는지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번뇌의 실체를 알게 되며 그로부터의 공허만 몸부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라캉의 사유는 스피노자 그리고 불교와 접맥된다.


라캉 사유의 의미


자크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받아들여 그것을 보다 넓은 지평에서 참신하게 재창조했다. 라캉이 프로이트와 구분되는 점은 프로이트와는 달리 극히 철학적인 성격의 담론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라캉을 통해서 정신분석학과 철학은 교차하게 되며, 그로써 주체, 자기, 욕망, ...을 비롯한 숱한 문제들이 새로운 지평에서 논의되게 되었다. 이 점에서 라캉이 현대 사상에 끼친 영향을 지대하다 하겠다.

라캉의 사유는 오늘날 슬라보예 지젝을 필두로 하는 ‘슬로베니아 학파’에 의해 계승되어 계속 확장되고 있다. 또 라캉의 사유는 문화예술 분야에 두드러진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현대 사상을 수놓고 있다.


 사회주의 사상의 전개



19세기에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마련된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은 이후 이론적-실천적으로 발전되어 나갔으며, 마침내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통해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소비에트연방공화국)이 탄생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을 비롯해, 동구, 쿠바, 인도차이나 반도, 북한 등등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났으며, 다른 한편 서구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도 맑스주의적인 체제 비판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20세기는 맑시즘에 의한 미증유의 역사 실험이 이루어진 시기이며, 무수한 사상적 투쟁과 실제 전쟁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1. 레닌과 러시아 혁명


- 19세가 말 러시아는 아직도 짜르(czar) 즉 ‘카이사르’에 의해 통치되던 봉건 국가였다. 사회는 극단적인 신분 체제였고, ‘치노프니크’ 즉 출세용 사다리 체제가 그 사회를 지탱했다.(지식인들의 ‘신분 상승’을 보장해 줌으로써 사회의 신분 체제를 유지하는 전형적인 장치. 고대 중국의 과거 제도나 오늘날의 고시를 생각하면 되겠다)


- 1961년 계산된 ‘농노 해방’ 이후 러시아 자본주의가 급작스럽게 발달. ‘인텔리겐챠’에 의한 ‘나로드니키’ 즉 ‘나로드(인민)’주의자들이 출현. 전통적인 ‘오브쉬치나(농촌공동체)’로부터 농민 사회주의로의 직접적인 이행을 주장. 바쿠닌의 무정부주의에서 잘 나타나듯이, 열혈청년들과 농민 대중들의 거리가 컸음.


- 나로드니키를 비판하면서 러시아 최초의 맑시즘 등장. 플레하노프(‘러시아 맑시즘의 아버지’), 악셀로드, 자술리치 등이 ‘노동해방단’을 결성해, 나로드니키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한편 산업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는 러시아 혁명을 꿈꾼다. 1889년 제 2차 인터내셔널. 플레하노프가 러시아 대표로 참석.


- 국제 사회민주주의가 ‘경제주의’로 흐르다. 레닌(vladimir lenin)의 비판: “투쟁의 목표를 임금 인상, 노동 시간 단축 등에만 둔다면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적 자본가 계급을 도울 뿐이다.” 경제주의의 이론적 배경: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레닌의 비판: “만일 경제 투쟁을 그 자체로서 완결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그런 투쟁 내에는 어떤 사회주의적인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레닌은 경제주의, 수정주의, 소영웅주의(테러리즘) 등을 모두 비판. 대중들의 정신 무장을 위해 《이스크라(искра)》를 창간.


- 레닌, 경제주의를 논박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1902)를 출간. 노동 운동의 자생적 요소와 의식적 요소 사이의 관계. 노동자 계급이 자생적으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여기에서는 ‘허위 의식’이 아니라 계급의식)를 획득한다는 경제주의의 주장을 논박. 자생적 요소는 노동조합적 의식에 그칠 뿐이며, 사회주의적 의식은 심도 깊은 과학적 지식에 기반해야만 가능하다.


-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 2차 대회’(사실상 1차 대회) 열림. 그러나 마르토프 등의 멘셰비키와 레닌 등의 볼셰비키로 분열. 멘셰비키의 유연성과 볼셰비키의 강고함이 충돌.


- 1905년 ‘피의 일요일’. 대중들이 짜르의 정체를 눈치챔. 총파업. 전함 뽀쫌킨에서 반란. 1905년 10월 13일,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소비에트 = 평의회)가 조직됨. 빠리 꼬뮨에 버금가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형태를 보임. 그러나 짜르의 기병대에 몰려 실패. 이후 스톨리핀 반동기(1906-1911년).


- 1912년 《프라우다》 발간으로 혁명 열기 다시 고조. 레닌,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사이에 『제국주의』를 저술. 독점자본주의론 전개. “자본주의가 ‘최고 단계’에 접어들어감에 따라 프롤레타리아도 최고 단계 즉 혁명에 접근하게 된다.” “제국주의는 플롤레타리아 사회 혁명의 前夜”. ‘조국의 패배’가 곧 노동자 계급 혁명의 전야.


- 1917년 2월 혁명. 짜르 체제 붕괴. 부르주아 임시 정부와 소비에트의 공존. 4월 3일 네닌 핀란드 역에 귀향.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레닌 「4월 테제」 제시. 프롤레타리아와 빈농이 혁명 주체가 되는 혁명 2단계로의 도약을 주장. 의회주의 공화국으로의 복귀 비판. 경찰, 관료, 군대 등 폐지. 토지의 국유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레닌은 끈질기게 설득. 레닌이 점차 힘을 얻게 됨.

10월 25일 마침내 무장 봉기. 무혈 혁명 이룩함. “사회주의 체제 건설을 위한 총진군.” 독일의 지원으로 백군(白軍)이 결성. 백군과 적군(赤軍) 사이에 3년간 치열한 전투. 연합군의 러시아 봉쇄와 경제적 궁핍.

1919년 제3 인터내셔널. 러시아 외에는 전반적으로 실패. 레닌 신경제 정책(new economic policy) 발표. 경제 발전을 위해 자본주의 일부 수용. 심지어 테일러 시스템까지 시도.


- 레닌, ‘문화 혁명’ 제창. 대중교육과 협동조합의 필요성 역설. 관료 제도의 위험성을 고발. 국수주의 비판. 1924년 레닌 사망. 유언에서 스탈린의 ‘거친 성격’에 우려 표명. 스탈린 제거를 명함. 트로츠키를 추천.

스탈린 권력 장악. 트로츠키와 갈등. 트로츠키, 망명지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 당함. 스탈린의 무리한 공업화로 무수한 농민들이 사망.


2. 헤게모니: 레닌과 그람시


- 레닌이 나로드니키를 비판한 것은 그들이 오브쉬치나에서 사회주의로의 직접적 도약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이미 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가 퍼지고 있었다. 즉,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었으며, 농민이 임금 노동자로 변하고 있었다. 화폐의 유통이 이미 자본주의를 확대시켰으며, 레닌은 자본주의의 발전이 기존 모순을 와해시키는데 과도기적인 공헌을 하리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레닌의 비판은 나로드니키가 러시아의 특수성을 강조했기 때문이 아니라(역사의 특수성은 레닌 자신의 주장이다), 그 특수성을 잘못 보았기 때문에 제기된 것이다.

레닌에 따르면 시스몽디 등에게서 볼 수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감상적(感傷的) 비판은 그릇되다. 생산력 개념과 생산 관계 개념을 분명히 구분해야 하며, 생산 관계를 비판하되 생산력은 인민들의 삶에 중요하다는 점이 인지되어야 한다.


-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쓸 당시 러시아의 혁명 세력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노동자 계급이었다. 따라서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게다가 레닌이 비판했던 사민당(=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결성되고 있었다. 그릇된 이론이 인민을 호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론은 지식인으로부터 나오지만, 그 이론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대중적 실천과의 연계고리가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레닌은 운동을 이끌어 갈 전위(= 아방가르드)가 필요하며 이 생각을 ‘당(黨)’이라는 개념에 집약했다. 철저하게 훈련되고 강철처럼 강인한 ‘직업적 혁명가들’의 존재만이 러시아 혁명을 완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가 성립 가능하다. 헤게모니를 통해 운동의 자연발생성을 극복할 수 있다.

헤게모니란 그리스어 ‘êgêsthai’ 또는 ‘êgêmoneuô’에서 유래했으며, ‘인도하다’ ‘안내하다’ ‘선도하다’ ‘앞에 서다’ 등을 뜻한다. 원래 ‘êgêmonia’는 군대의 최고 지휘부를 뜻했다. 레닌에게서 헤게모니는 대중을 사회주의적 투쟁의 흐름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대중의 모든 요구에 깊이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뜻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혁명적 주체’의 개념을 함축한다. 레닌은 역사에 대한 결정론적 해석 -- 맑시즘에 대한 진화론적 해석 -- 을 물리치고 주체적 힘과 정치적 주도권을 중시하는 맑스-레닌주의를 건설하고자 했다.


-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는 레닌을 이어 헤게모니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람시는 ‘진지전(陣地戰)’과 ‘기동전(起動戰)’을 구분한다. 기동전은 사회의 구조가 흔들리고 급박한 혁명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출할 때 필요하다. 그람시는 1917년 3월부터 1921년 3월(러시아 내전의 종식)까지는 기동적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람시의 당대 유럽에 필요한 것은 진지전이다.(이 점에서 그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 핵심적인 대상은 파시즘이다. 레닌이 제국주의 시대에 반제국주의를 위해 투쟁했다면, 그람시는 파시즘 시대에 반파시즘을 위해 투쟁했다고 할 수 있다.


- 1929년의 공황이 자본주의를 패망시키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이미 성숙했으며, 따라서 폭격을 해도 별 타격을 받지 않는 ‘참호(塹壕)’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은 단지 전쟁이나 혁명 또는 기타 방법에 의해 국가 권력을 쟁취하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시민 사회 자체를 정복해야 하는 것이다.(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의 시민들이 과연 사회주의적 ‘인간들’이었나를 상기할 것) 특히 그람시는 자본주의 국가의 손발이라고 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의 변화에 큰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시민 사회는 민족적 특징을 띠기 때문에, 헤게모니는 민족적인 특수한 토양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요청한다.


- 그람시에게 혁명이란 정치적-경제적-군사적인 것 못지않게 도덕적-인식론적-철학적-문화적인 것이다. 그람시의 도덕적-지적 혁명 개념은 레닌의 뭏화 혁명 개념과 상통한다. 진정한 개혁이란 관습을 철저하게 공격하고 문화와 사회,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헤게모니란 지도 장치(= 헤게모니 장치)를 만들어내는 능력, 동맹을 쟁취하는 능력,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그 사회적 기초를 제공해 주는 능력 등을 뜻한다.(그람시에게서 헤게모니가 어떤 ‘상태’나 다른 범주가 아니라 ‘能力’의 범주로 이해된다는데 주목) 그래서 어느 한 계급의 헤게모니는 어떻게 실행되는가,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에 이르는 과정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같은 물음들이 중요한 물음들로서 제기된다.


- 이밖에 그람시는 문화와 대중 사이의 관계, 지식인과 대중의 관계, 인문계와 실업계의 분리에 따르는 계급 분화, 카톨릭 교회의 헤게모니를 비롯한 많은 문제들을 그의 『옥중 수고』에서 논했다.


3. 사회주의 사상의 전개


- 루카치는 헤겔을 경유해 맑스를 읽음으로써, 경제 결정론을 비판하고 상부 구조에 대한 연구 특히 미학에 관련한 연구를 남겼다.


-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스탈린의 교조주의를 비판하고 인간의 실존을 잊지 않는, ‘체험된 세계’에 뿌리내리는 실존적 맑시즘을 전개했다.


- 모택동은 장개석과의 투쟁을 통해 중국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으며, 맑시즘과 중국의 전통을 이으려 노력했다. 모택동은 도가적 낙관주의를 견지했으며, 이 점에서 서구적 맑시즘의 분위기와 비교된다.



人生易老天難老

歲歲重陽

今又重陽

戰地黃花分外香


一年一度秋風勁

不似春光

勝似春光

료廓江天萬里霜


- 알튀세는 바슐라르 인식론과 구조주의의 방법을 도입해 구조주의적 맑시즘을 구성했다.


- 네그리는 스피노자, 맑스, 들뢰즈의 철학에 근거해 ‘아우토노미아’ 사상을 전개했으며, 가타리, 하트 등과 더불어 줄기차게 사회주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동구, 김일성의 북한,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쿠바, 호치민의 베트남 등을 비롯한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교조주의로 화한 당과 자본주의 경제와의 싸움에서의 패배를 통해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필요한 사회주의는 어떤 사회주의인가를 생각해 보자.


참고 문헌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박종철출판사

그람시, "감옥에서 보낸 편지“, 민음사

“그람시의 옥중 수고”, 거름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거름

모택동, "실천론, 모순론 외", 범우문고

알튀세, “『자본론』을 읽는다”, 두레

네그리․가타리, “자유를 위한 새로운 공간”, 갈무리

네그리․하트, “제국”, 이학사



근대성 비판


- 근대성이란 서구에서 16세기 말 이래 서서히 형성되어 발달한 삶과 사유의 양태를 뜻한다. 오늘날의 사회는 이 근대성이 극에 달한 초근대성의 사회이다. 따라서 근대성과 현대성을 연속으로 보는 한에서 근대성 비판은 곧 현대성 비판이기도 하다.

사실상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서나 철학은 비판(kritik)이다. 그럼에도 유독 ‘근대성 비판’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오랫동안 서구는 물론 서구를 추종했던 다른 문화들에 있어서도 근대성이란 삶의 모범 답안이었고 ‘근대화’란 역사의 기본 추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성 비판이 문제가 된다.


- 그런데 따지고 보면 19세기 말 이후의 대다수의 ‘비판적인’ 사유들은 모두 탈근대 사상들이다. 근대 사회에서 현실 비판이란 당연히 근대성 비판이겠기에 말이다.

19세기 말에 등장한 대표적인 근대성 비판은 맑스의 사유와 니체의 사유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19세기에 이르러 뚜렷이 모습을 드러낸 부르주아 사회, 관료 사회, 기술문명 사회, 대중 사회(‘기술’과 ‘대중’에 대한 생각에서 이 두 사람이 갈라진다)에 대한 빼어난 비판을 제시했다.

구조주의 또한 탈근대 사유이다. 그것은 구조주의가 근대성을 떠받쳐 온 가장 핵심적인 철학적 개념인 ‘주체’(더 정확히는 ‘선험적 주체’) 개념을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주의 입장에서 볼 때 맑시즘 또한 근대적이다. 구조주의에 이르러 근대성 비판은 훨씬 선명한 색깔을 띠게 된다. 그러나 합리성, 법칙성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구조주의 역시 그 후 비판의 대상이 된다.


-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20세기 중엽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를 사회학적-철학적으로 비판해 왔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현대 사회를 고도의 합리성(기술문명)과 고도의 반합리성(폭력, 광기 등)이 기묘하게 결합된 사회로 본다. 이 점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니체의 사유와 대립하며, 간접적으로 맑시즘과 연계된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유물론이자 경제 중심주의인 맑시즘과는 달리 ‘문화’(넓은 의미, 맑스의 ‘상부 구조’)에 중점적인 관심을 가진다. 이 점에서 이 학파의 작업은 막스 베버의 작업과도 통한다. 다소 도식적으로 말해, 맑시즘이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적인 전복을 꿈꾼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서구 사회 자체 내에서 좀더 부드러운 문화 혁명을 꿈꾼다고 하겠다.

이런 성격 차이는 한국 사회에서도 반영되었으며, 80년대에 운동권이 맑시즘을 기반으로 했다면 화이트칼라 지식인들의 상당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경도되었다.


-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사회과학 연구소에서 출발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유는 흔히 ‘비판이론(kritische theorie)’이라 불린다. 이 학파는 1923년 창설되었으나 처음에는 맑시즘과 실증주의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이 학파는 본격적으로는(여기에서 ‘본격적’이라 함은 초기의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으로부터 ‘비판적 사회철학’으로 넘어간 것을 말한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가 제 2대 소장으로 취임한 1930년부터 뚜렷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호르크하이머는 이 학파의 성격을 ‘사회철학(sozialphilosophie)’으로 뚜렷이 규정했으며, 이후 1932에 마르쿠제(herbert marcuse)가 또 1938년에는 아도르노(theodore adorno)가 들어오면서 활기를 띠게 된다. 그러면서 정신분석학이 또 하나의 주요한 관심사로 자리잡게 되며, 맑스와 프로이트의 회통이 모색되었다. 이 학파는 나치를 피해 1933-1950년에는 미국으로 망명갔으며, 1950년에 독일로 다시 돌아왔다.


-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실증주의(특히 당대에 큰 흐름을 형성했던 비엔나 학파의 논리실증주의)를 비판하고 변증법적 사유 양식을 구사했다. 현대의 과학기술 문명은 고도의 합리성을 구가하는 듯이 보이지만, 의미와 가치의 문제를 소홀히 하고 학자의 ‘가치 중립성(wertfreiheit)’을 강조함으로써 결국 지식이 자본주의와 지배 권력의 도구가 되어버렸다고 본다.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현대 사회인 것이다. 이것은 곧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 호르크하이머와 마르쿠제는 그람시나 루카치와는 달리 현대(20세기 중엽 당대)의 노동자들은 이미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졌으며 혁명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기울어졌다. 때문에 그들은 노동자들보다는 오히려 비판적 지식인이 혁명 세력이 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 점에서 그 후의 ‘학생 운동(student movement)’의 이론적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아도르노는 정치의 문제보다는 문화(좁은 의미)의 문제에 몰두했으며 현대의 기술 문명이 어떻게 얼굴 없는 대중을 만들어내는가에 주목했다. 아노르노는 문화가 하나의 ‘산업’이 되는 현상을 비판하고, 대중 문화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반대로 벤야민은 현대의 대중 문화(영화, 사진 등)가 기존 예술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를 무너뜨림으로써 새로운 미학을 창조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사회 운동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아도르노와 벤야민은 대중 문화에 대한 상반된 이해를 통해 갈라졌다.


-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현대 사회의 대중의 의식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히 정신분석학에 주목하게 된다. 특히 독일의 대중이 나치즘을 환영하는 것에 충격을 받은 이들은 오래 전에 스피노자가 제기했던 “왜 대중은 복종 받기를 스스로 원할까?”라는 물음을 다시 던졌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파시즘의 심리학에 상당한 관심을 쏟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초기에는 그 비합리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배척했던 정신분석학, 생철학, 실존주의 등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에리히 프롬은 정신분석학을 사회학적으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6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으며, 그 후에도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같은 인물을 통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특히 소통의 문제에 관련해 큰 공헌을 했다.


-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프랑스 푸아티에에서 외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기에는 주로 의학(특히 정신의학)을 연구했으며, 병리학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임상의 길로 가기보다 사상의 길을 걸어갔다. 동성애자로 태어난 푸코는 ‘타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박해에 깊은 회의를 품고 이후 자신의 실존적 체험을 철학으로 승화시켜 ‘타자의 사유’를 수립했다. 오늘날의 사유가 타자의 사유라면 푸코야말로 그 대변자라 할 것이다.

푸코는 사르트르 이래 모든 저항 운동을 이끈 투사였다. 들뢰즈와 함께 벵센느 실험 대학을 만들었고,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하면서도 줄곧 사회 운동을 주도했다. 푸코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저항 운동을 모든 다른 형태의 타자들(광인, 수인, 동성애자, 여성, 어린이, ... )로 확장했으며, 그런 활동은 그의 사유와 한덩어리를 이룬다. 푸코처럼 삶과 철학이 한덩어리로 얽혀 있는 사상가도 드물다.

한국 사회에서 푸코의 사유는 1990년대를 수놓았다. 80년대에 맑시즘을 통해 이해되던 현실이 더 이상 이전의 개념틀로는 포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변했을 때, 푸코가 그 이론적 프리즘을 제공했던 것이다.


- 푸코는 그의 스승인 조르주 깡길렘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깡길렘의 인식론을 보다 넓은 지평으로 발전시켰다. 깡길렘은 그의 학위 논문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이 문제는 그대로 푸코의 문제가 된다.

푸코는 한 사회에서의 나눔(division)의 메커니즘, 좀더 철학적으로 표현해 ‘존재론적 분절’의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정상인과 광인은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나뉘는가? 합법적 인간과 불법적 인간을 가르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푸코의 사유에는 늘 이 나눔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이 점에서 피상적인 이해와는 달리 푸코는 존재론자이다.

그런데 자연에서의 나눔(예컨대 생물학적 계통학)은 그렇다 치고 사회에서의 나눔은 항상 배제(exclusion)의 문제를 포함한다. 나눔이 있는 곳에 배제가 있다. 때문에 푸코의 사유는 이 배제의 문제를 파고들며, 그 결과 타자들(광인, 병자, 소외된 담론들, 囚人, 여성, 어린이, 노동자, ... )의 사유를 수립하게 된다.


- 푸코는 한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그물망, 주체와 세계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무의식적 지층을 드러내려 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사실 오늘날의 사유는 어떤 형태로든 구조주의를 영향을 받았으며, 철학사를 구조주의와 前구조주의로 나누어도 좋을 정도로 구조주의적 사유 양식을 결정적인 분기점을 형성한다. 그러나 푸코는 구조주의 사유를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변형시킨다.

1) 구조주의가 구조를 실체화하려 했다면, 즉 그것을 자연법칙과 같은 어떤 객관적 법칙으로 파악하려 했다면, 푸코는 구조라는 것을 인위적인 것, 자의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때문에 그의 구조주의는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평온한 구조주의나 이후의 탈정치적 기호학에서 탐구하는 구조주의가 아니라 정치, 권력, 배제, 탄압, 저항 같은 내용으로 채워진 역동적인-정치적인 구조주의이다. 구조주의를 이렇게 극복하는 과정에서 깡길렘과 더불어 니체, 바타이유 등의 사유가 큰 도움을 주었다.

2) 푸코는 한 사회의 무의식적 지층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비가시적인 ‘實在’를 이룬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드러난 배제 메커니즘들을 탐구한다. 이 점에서 푸코의 사유는 실증적 구조주의라 할 수 있다. 그는 ‘實在’에 대한 물음을 괄호치고 모든 탐구를 역사에 대한 탐구에 국한시킨다.

3) 푸코는 구조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라캉처럼 인간의 무의식 구조를 탐구하는 것은 푸코 입장에서는 매우 추상적인 사유, 칸트와 다를바 없는 사유이다. 구조는 문화적으로 다르고 시대적으로 다르다. 중국의 구조와 프랑스의 구조는 다르며, 르네상스 시대의 구조와 근대의 구조는 다르다. 이 점에서 푸코의 사유는 다원론적-역사적 구조주의이다. 이 점에서 그의 사유는 아날 학파의 역사학과 통한다.

푸코는 구조주의의 성과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렇게 그것에 결여된 정치와 역사의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사유로 나아갔다.


- 『광기의 역사』는 아마도 서양 철학사상 가장 독창적인 책일 것이다. 철학과 절대 모순을 형성하는 광기를 사유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우리 시대의 사유의 출발점을 이루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사유는 『광기의 역사』에서 출발한다.

푸코는 이 책에서 다채로운 논의를 전개하고 있으나, 그 중 몇 가지만 짚어보자. 1) 비본질주의: 니체와 베르그송 이래 비본질주의는 현대 철학의 기본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푸코는 비본질주의를 단지 추상적인 철학적 논의로만 다룬 것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서 본질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환’되는가를 추적한다.

2) 푸코는 ‘지식(savoir)’ -- 푸코의 전문 용어이므로 주의를 요함 -- 과 권력 사이의 끈끈한 연계성을 정신병리학(말미에서는 정신분석학)을 예로 전개한다.

3) 푸코는 타자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동일자의 눈길 또는 정의(définition)가 어떻게 타자를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주체성의 문제와 관련된다. 푸코는 주체성 -- 사실상 反주체적인 주체성 -- 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문제삼고 있다.(라캉, 알튀세 등과 비교)

4) 이 책은 서구의 ‘근대성’에 대한 환상을 송두리째 뒤집어엎고 있으며, 이 점에서 탈근대 사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서구 근대의 ‘지하실’에 들어가 그 음모, 고문 도구, 교활한 훈육 체계 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 『임상의학의 탄생』은 주제가 의학이어서인지 일반적으로 덜 논의되고 있지만 푸코 사유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푸코는 여기에서 ‘봄(voir)’과 ‘앎(savoir)’의 관계를 임상의학이 탄생하는 지점에 초점을 맞추어 낱낱이 해부한다. 이 책은 또한 죽음에 대한 비샤의 중요한 통찰을 세밀하게 분석해 주고 있다.


- 『말과 사물』은 서구 담론사에서 특히 생명, 노동, 언어라는 세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 푸코는 르네상스, 고전 시대, 근대, 그리고 오늘날의 ‘에피스테메’를 추적하면서, 박물학=자연사가 생물학으로, 부의 분석이 정치경제학으로, 일반문법이 비교 언어학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러한 과학사적 논의를 통해 푸코는 서구 담론사에서의 언어와 주체의 관계를 파헤친다. 르네상스 시대, 고전 시대, 근대, 현대로 변환되면서 언어와 주체가 어떤 연관을 가지는지, 그리고 ‘말과 사물’이 어떤 굴곡을 겪는지를 다루고 있다.

푸코는 칸트에서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의 서구 주체철학을 ‘인간학적 잠’에 빠졌다고 비판하며, 유명한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다.


- 『지식의 고고학』에서 푸코는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작업들을 되돌아보면서 그 방법론적-존재론적 기초를 다시 검토한다. 언표, 담론, 역사적 아프리오리를 비롯한 다양한 개념 장치들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재검토한다.


- 『감시와 처벌』은 서구 사회에서 죄의 개념과 처벌 양식이 어떻게 변했는가, 근대 ‘휴머니즘’이 표방한 처벌의 인간과는 과연 어떤 성격을 띠는가, 법의학, 형법학 등 근대적 지식들과 부르주아 사회의 권력은 어떤 상호 관계를 지녔는가 등을 탐구했다.

이 책은 또한 지정학(地政學)에 큰 시사를 던져주었으며, 신체적 차원과 담론적 차원 사이의 관계를 새로운 맥락에서 제시했다. 푸코는 이 책을 쓸 당시 열정적인 사회 참여를 통해 감옥 환경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 『성의 역사1: 지식에의 의지』는 『감시와 처벌』을 이어 서구 사회에서 성이 어떻게 다루어져 왔는가를 논한다. 『성의 역사』는 본래 6권으로 기획되었으나, 1권이 나온 후 푸코는 갑자기 8년 간의 긴 침묵에 들어간다.


- 『성의 역사』 2, 3권인 『쾌락의 선용』, 『자기에의 배려』에서 푸코는 새로운 정향을 보이는데, 그것은 그 때까지 권력이 주체를 어떻게 모양지우는지에 주목했다면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즉 주체가 권력의 장 안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주체화하려 했는지를 다루기 시작한다. 푸코는 이런 과정을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subjectification’이 아닌 ‘subjectivation’으로 표기한다. 그것은 예속과 주체화가 동시에 발생하는 과정이다.

또 하나 독특한 것은 그 때까지 언제나 근대를 다루어 오던 푸코가 이번에는 고대로 영역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푸코는 이 작업을 계속 이어가려 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완성하지 못했다.


카오스모스의 세계관


- 17세기 초에 새로운 자연과학이 탄생하면서 ‘자연철학’이라는 말은 자연과학 이전의 구닥다리 지식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었다.

오늘날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자연과학이 고도로 발전했지만 자연의 근본적-종합적 의미, 자연과 인간의 관계(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상), 자연과학적 자연과 다른 담론들이 이해하는 자연 사이의 관계 같은 문제들은 과학자들로부터도 또 철학자들로부터도 외면당해 왔다. 이 점에서 과학철학이나 생명윤리학과 더불어 요청되는 담론은 자연철학이다. 과학철학이 과학에 대한 ‘메타적’, ‘방법론적’ 연구를 맡고, 생명윤리학이 생명공학이 빚어낼 수 있는 비윤리적 상황을 맡는다면, 자연철학은 자연 전체에 대한 종합적 안목이라는 역할을 맡는다. 오늘날 상대적으로 과학철학은 많이 발전했지만 자연철학은 미진하다. 그것은 세부적인 영역을 파고드는 자연과학자들에게도 또 오래 전에 자연, 우주, 세계에 대한 관심을 상실한 철학자들에게도 버거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현상학, 해석학을 비롯한 반과학적 철학들을 선호하게 되고, 과학자들은 실험실의 좁은 세계에 폐쇄되고 있다. 한편으로 현실을 담지하지 못하는 인문주의적 철학들이, 다른 한편으로 이미 자본주의, 기술문명의 하수인이 되어 버린 과학들이 양극화된 것이다. 자연철학이 오늘날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은 이 때문이다.


-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과학적 성과들(물론 철학적 함축을 띠는 성과들)은 많다. 분자생물학, 카오스 이론, 프락탈 이론, 급변론, 우주론에서의 발견들(펄사, 빅뱅, 흑공 등), 사회생물학 논쟁, 여전히 열띤 논의를 불러오고 있는 진화론 등이 그것들이다. 여기에서는 이들 중 카오스 이론을 살펴보고 ‘카오스모스’의 개념을 익힌다.


-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대립은 모든 고대 담론에 공통된 소재이다. ‘카오스모스’란 두 말을 합친 것이며 혼돈과 질서의 중첩을 이야기한다.

카오스와 코스모스는 자연철학적 맥락 못지 않게 역사철학적 맥락도 함축한다.(장자의 예, 레비-스트로스의 예)


- 근대 과학은 (고대 철학으로부터 물려받은 환원주의), 분석적 사유 양식, 양화와 함수화, 그리고 기계론과 결정론을 그 기본 성격으로 가진다. 그러나 카오스 이론은 근대 과학의 이런 성격을 여러 면에서 극복하고 있다.

카오스 이론은 1960에 등장했으며, 영국의 기상학자인 로렌츠가 발견한 ‘카오스 현상’에 그 실마리를 두고 있다. 로렌츠는 대기방정식을 푸는 과정에서 카오스 현상을 발견한다.(그림 참조) x(t)는 대류의 세기, y(t)는 오르내리는 2개 흐름의 온도차에 비례하는 함수, z(t)는 온도 분포의 차가 모형으로부터 떨어진 정도, a는 ‘프란틀 수’(유체의 확산 계수와 열전도 계수의 비), b, c는 계수들.


- 로렌츠는 초기 조건을 0.506127로 잡았다가 계산을 간단히 하려고 0.000127을 뺐다. 컴퓨터에 작업을 맡기고 나갔다 와서 난생 처음 보는 놀라운 그래프를 보게 된다.

이 현상은 ‘초기 조건에의 민감성’, 자유도(自由度)의 증폭, 비선형성(non-linearity)을 특징으로 갖는다. 이런 특징들은 전에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세계의 숨은 비밀을 활짝 열어주고 있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는 그것과 비교해 비교도 할 수 없이 복잡한 진짜 세계의 한 ‘경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 이 카오스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제 몇 가지 개념 장치들과 가설들, 이론적 고안들이 제기된다. 그중 기초가 되는 개념은 ‘끌개’라는 개념이다. 다음 그림을 참조. 이 그림은 무산(霧散) 구조(또는 散逸 구조)를 잘 보여준다.


- 기존에는 세 가지 끌개가 있었다. 점 끌개, 원 끌개, 도넛 끌개이다. 로렌츠가 발견한 카오스 현상은 ‘이상한 끌개’를 보여준다. 어떤 점에서 ‘카오스 현상’이라는 말은 좀 아이러니하다. 왜냐하면 로렌츠가 발견한 것은 카오스가 아니라 어떤 새로운 질서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전의 질서에 상대적으로 ‘카오틱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중요한 것을 알려준다. (다른 맥락에서이지만) 구조주의를 이야기하면서 ‘바깥의 바깥’에 대해, 카오스에 대해 말했다. 이제 우리는 카오스란 무질서가 아니라 복잡한 질서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오래 전에 베르그송이 지적했듯이, ‘질서’란 다분히 인간중심적인 개념이다. 우리의 개념틀에 포착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거기에 “질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정치철학적인 맥락도 상기). 현대 과학이 발견한 것은 카오스가 아니라 카오스모스이다.


- 이상한 끌개와 더불어 카오스 현상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카오스 현상이 프락탈 현상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프락탈 이론과 카오스 이론이 만난다.


- 서구 철학은 오랫동안 변화하는 현상의 근저에서 불변의 실재를 찾아왔다. 그리고 이런 논리를 과학에 그대로 이전된다. 메이에르송이 역설한 ‘동일성’이 서구 사유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서구 학문의 근저에 깔려 있는 플라토니즘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시간의 철학을 제시한다.

카오스 이론은 현대 철학과 나란히 ‘존재에서 생성으로’의 이행을 강조합니다. 이제 고전 물리학을 특징짓던 탈시간성은 카오스 이론의 시간성을 통해 극복된다. 카오스 이론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를 강조하며, 이 과정을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시간이다. 프리고진이 베르그송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카오스 이론은 근대적 환원주의에 카오스 현상의 복잡성을, 분석적 사유에 분석 불가능한 운동을, 양화와 함수화 아래에 깔려 있는 카오스를, 그리고 기계론과 결정론에 맞선 세계의 비결정성과 유기성을 강조한다.


루이 알튀세: 맑시즘, 구조주의, 인식론


- 맑시즘은 20세기 철학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파장은 다양한 방식으로 퍼져나갔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통해 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했으며, 이후 트로츠키, 스탈린 등이 그를 이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의 초석을 놓았으며, 이 전통은 오늘날 네그리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맑시즘을 다소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었다. 중국에서는 마오처퉁에 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했으며,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 ... 등등이 잇달아 성립했다.

프랑스의 경우 pcf(프랑스공산당)가 성립했으며 이 기관을 통해 사회주의 운동이 퍼져나갔다. 프랑스에서는 뚜렷이 대조되는 두 종류의 맑시즘이 전개되었는데, 그 하나는 사르트르, 메를로-퐁티로 대변되는 ‘실존적 맑시즘’이고 다른 하나는 알튀세에 의해 대표되는 ‘구조주의적 맑시즘’이다. 전자가 맑스를 헤겔과 연계시켜 (교조적 맑시즘에 결여되어 있는) 인간 실존에 대한 변증법적 성찰로 나아갔다면, 후자는 맑스를 헤겔과 날카롭게 대조시키면서 후기 맑스의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에 초점을 맞춘다.


- 알튀세의 저작들: 『『자본』을 읽다』(i․ii, 공저, 1965),

『맑스를 위하여』(1967),

『레닌과 철학』(1969),

『입장』(1976)

『자본』의 연구에는 마셰리, 발리바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함께 참여했으며 ‘알튀세 학파’를 이루었다.


과학과 이데올로기


- 알튀세는 실존적 맑시즘이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인간주의적’ 맑시즘을 비판하고 맑스를 ‘과학적으로’ 읽기를 원했다. 이런 맥락에서 당대 사상계의 두 가지 주요 성과, 즉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학 및 바슐라르-깡길렘의 인식론을 맑시즘과 접맥시키고자 했다.


- 알튀세는 맑시즘 연구에서 당대까지 결여되어 있던 인식론(과학철학)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곧 맑시즘을 메타과학적으로 재정초하려는 야심을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맑시즘 ‘철학’과 실제 ‘정치’를 이으려 했다.

이런 맥락에서 알튀세는 특히 ‘이론(théorie)’이라는 개념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을 행했다.


- 알튀세에게 ‘이론’이란 언제나 ‘이론적 실천’이다. 그에게 이론과 실천의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론은 실천의 특수한 한 양상이다. 이론은 이론적 실천인 것이다. 후에 (알튀세의 영향을 받은) 푸코가 ‘담론’을 그 자체 하나의 실천으로 보았듯이, 알튀세는 “이론 없이는 혁명적 실천도 없다”는 레닌의 생각을 발전시킨다. 혁명 주체가 ‘자연발생적’ 단계에서 ‘의식화된’ 단계에로 이행하는데 이론적 실천은 필수적인 것이다.


- 알튀세에게 가장 기본적인 구분은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구분이다(훗날 푸코, 들뢰즈 등의 집중적인 비판 대상이 됨). 이데올로기는 ‘전(前)과학적 이론’이다.

이데올로기란 ‘표상과 관념의 집합’이다. 즉 맑스가 말하는 상부구조이다. 그리고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산물이다. 이데올로기란 표상과 관념이 하부구조(경제)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 성립한다. 그 점에서 일종의 ‘환상’이다. 그리고 환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을 정당화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 계급의식이 결여된, 사적 유물론 및 변증법적 유물론의 시각이 결여된 이전의 사상․철학들은 이런 역할을 해 왔다.


- 이데올로기 즉 일종의 ‘허위의식’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알튀세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도입한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자아가 자신을 떠받치고 있는 무의식을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주체요 중심으로 착각하는 것을 ‘오인(méconnaissance)’이라고 했다. 인간은 상징계가 자신의 무의식의 언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상징계란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요, 법이다. 라캉에게서 은유적 뉘앙스가 강한 이 개념들이 알튀세에게는 보다 현실적인 사회 저체가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회의 무의식적 법칙성을 깨닫지 못한채 스스로를 ‘주체’로서 세운다. 즉 ‘사회적 자아의 허위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알튀세의 사유는 한편으로 이 이데올로기/허위의식을 폭로함으로써 부르주아 사회 및 그 사회를 떠받치는 사상들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 ‘구조’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새로운 혁명이론을 제시하려는 사유이다. 여기에서 알튀세 사유의 구조주의적 측면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 알튀세의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그의 스승인) 바슐라르의 인식론이 짙게 깔려 있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과학과 전(前)과학은 날카롭게 구분되어야 한다. 전과학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 일상세계 속에서 가지게 되는 표상들, 관념들, 편견들, 한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들 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과학적 인식을 방해하는 ‘인식론적 장애물들’이다. 과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인식론적 단절’을 이루어야 한다(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 비교).

따라서 상식의 세계와 과학의 세계는 엄밀하게 구분된다. 전자가 ‘이미지들’의 세계라면 후자는 ‘개념들’의 세계이다. 과학은 경험의 세계와 단절됨으로써만 과학으로서 성립하는 것이다.


- 알튀세는 이런 바슐라르의 입장에 의거해 이데올로기인 헤겔 사유와 과학인 맑스 사유를 구분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인다. 이 점에서 맑스로부터 헤겔로 나아갔던 프랑크푸르트 학파, 실존적 맑시즘과 대조된다.


- 알튀세는 초기 맑스와 후기 맑스 사이에는 결정적인 인식론적 단절이 있다고 말한다. 초기 맑스는 경험주의 및 헤겔주의의 그늘에 있었고 때문에 그의 저작들에는 ‘인간 소외’가 중심을 차지한다. 즉 아직까지도 자본주의에 대한 감상적인 투쟁이나 ‘인간 해방’의 개념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845년의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 및 『독일관념론』을 분기점으로 맑스의 사유는 인식론적 단절을 이룬다. 초기의 ‘자유주의적 인간주의’는 사라지고 이제 ‘생산력’, ‘생산관계’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이어지며, 이전의 인간주의적 사유들은 ‘상부구조’, ‘이데올로기’로서 분석된다. 맑스는 (훗날 바슐라르가 정식화했듯이) 인식이란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그런 인식론적 통찰 위에서 자신의 정치경제학을 세울 수 있었다.

알튀세는 흔히 지적되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이 아니라 맑스 사유에서의 인식론적 단절을 지적함으로써 헤겔과 맑스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알튀세의 인식론


- 과학(양자역학, 생화학, 사적 유물론, ... 등등)과 이데올로기의 구분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런 구분을 가능하게 해 주는 기준은 무엇인가? 알튀세는 이 지점에서 ‘大理論(la théorie)’, ‘이론 일반’, ‘실천 일반’의 개념을 제시한다. 즉 다른 이론들(과학들 및 이데올로기들)에 비해 메타차원에 존재하는 대이론을 제시한다. 이 대이론은 곧 변증법적 유물론(= 유물변증법)이다. 그렇다면 대이론은 어떤 기준에서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는가? 대이론은 경험주의, 인간주의, 경제주의를 전과학들로서 비판한다.


- 1) 알튀세는 바슐라르를 따라 경험주의 및 실증주의를 통박한다. 경험론은 한 개인의 ‘의식’에 생겨난 ‘감각자료(sense-data)’를 출발점으로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원자적 개인의 존재, 개인을 ‘의식’으로 추상하는 태도, 감각자료의 이론중립성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을 내포한다. 이 지점에서 알튀세는 인식론적 맥락과 정치적 맥락이 사실상 밀접하게 묶여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다시 말해, 인식론에 있어 추상적 개인의 의식에서 출발하는 사유는 정치에 있어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개념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는 인식의 원질료는 감각자료가 아니라 ‘일반성 i(généralité i)’이라 본다. 일반성 i은 감각자료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복합적)관계의 산물’이다. 즉 그것은 한 개인이 ‘추상적으로’ 경험하는 인식질료가 아니라 ‘집단표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거기에는 이미 무수한 사회적 현실이 묻어 있다. 인식이란 추상화된 개인의 감각자료가 아니라 일반성 i에서 출발한다.


- 과학은 인식은 이 일반성 i을 비판함으로써 출발한다. 그 비판은 인식론적 비판인 동시에 정치적 비판이기도 하다. 과학적 인식은 일반성 i과의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 일반성 iii에 이른다. 즉 이데올로기에서 과학으로 변모된다.

여기에서 알튀세는 바슐라르를 넘어 일반성 i과 일반성 iii 사이에 일반성 ii를 삽입시킨다. 이것은 깡길렘의 인식론에 기반한 사유이다. 깡길렘은 바슐라르가 인식론적 단절을 강조한 바슐라르와 달리 이전 이론과 이후 이론 사이에 일종의 완충 지대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 완충 지대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지대로서 한 이론의 한계가 드러났으나 새로운 이론은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진화론의 예) 알튀세와 푸코는 깡길렘의 이런 입장을 각자의 맥락으로 변형시켜 받아들인다. 이로부터 알튀세의 ‘일반성 ii’ 개념과 푸코의 ‘지식(savoir)’ 개념이 등장한다.

일반성 ii는 일상성 i을 가공한다. 여기에서 가공한다는 것은 일반성 i에 섞여 있는 인식론적 장애물들을 떨어버리는 과정을 말한다. 일반성 ii는 이 과정을 뜻한다. 그것은 ‘재구성(reconstruction)’의 과정이다. 이 점에서 일반성 ii는 과학사적 개념이기도 하고 인식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경제학적으로 말한다면, 일반성 i은 이론적 실천의 원질료이고, ii는 생산수단이고, iii은 생산품이다.


-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반성 ii가 바슐라르에서처럼 ‘천재들’의 놀라운 작업을 통해서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구조주의자인 알튀세는 이런 주체주의적 설명을 거부한다. 역사는 생산양식(= 생산력 + 생산관계)이 변해 온 과정이며, 따라서 생산수단으로서의 일반성 ii 역시 이런 지평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식의 역사 역시 일반적인 역사의 지평에서 이해되며, 알튀세의 인식론서에는 ‘인식 주체’가 소멸하게 된다. 인식 주체 이전에 ‘문제틀(problématique)’이 있다. 주체는 이 문제틀 어디엔가 자리잡음으로써 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문제틀은 과학적 문제틀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이론적 실천’이 경험적 실천, 기술적 실천을 비롯한 이데올로기적 실천을 가공하는 과정이다.


- 일반성 iii이 경험 세계로부터의 단절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경험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인식은 경험‘으로부터’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에로’ 내려와야 현실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알튀세는 ‘현실의 구체(le concret-réalité)’과 ‘사유의 구체(le concret-de-pensée)’를 구분한다.


- 이와 같은 인식론에는 바슐라르 못지 않게 스피노자의 사유가 깔려 있다(그래서 바슐라르는 ‘진정한 스피노자주의자’로 불린다). 스피노자에게서 사유는 주체의 행위가 아니다. 주체의 사유 행위가 사유의 한 변양태이다. 그래서 알튀세는 스피노자에 입각해 구조주의적 맑시즘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 2) 알튀세는 또한 구조주의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현상학적 인간주의 역시 비판한다. 인간이 의식적 존재이며 주체적 존재라는 생각은 앞에서 보았듯이 환상이며,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형성되는 생각이다. 하부구조의 작용을 깨닫지 못하고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성립하는 관념론이 인간주의인 것이다.


- 3) 그렇다고 알튀세가 하부구조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이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또한 경제주의를 비판한다. 여기에서 경제주의란 교조화된 맑시즘으로서 모든 역점을 경제에 두는 스탈린적 맑시즘이다. 알튀세는 이 경제주의를 또한 ‘기계주의’라고도 부르며 또 ‘생산주의’라고도 부른다. (스탈린이 그랬듯이) 생산력의 증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 생각, 그리고 경제적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일방적이고 단선적으로 결정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은 인과율에서의 단순함과 역사철학에서의 선형성을 전제한다. 알튀세는 이런 생각을 ‘통속적 맑시즘’이라고 부르며 이 맑시즘이 강조하는 ‘경제 결정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알튀세 역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심금들(instances)’ 중에서 경제적 심급이 ‘최종 심금’임을 말한다. 그러나 한 사회의 ‘지배적인 모순’이 반드시 경제적인 것은 아니다. 이로부터 알튀세는 ‘중층결정(surdétermination)에 의한 모순’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게 된다


모순과 중층결정


- 알튀세가 교조적 맑시즘의 경제결정주의를 비판했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알튀세는 어떤 인과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알튀세는 ‘중층결정(surdétermination)’을 제시한다.


- 알튀세는 ‘모순과 중층결정’에 대해 논한다. 헤겔에게서 세계는 ‘정신(geist)’ 또는 ‘절대정신’의 자기전개이다. 즉 궁극적 실체는 절대정신이며 그 절대정신이 스스로를 조금씩 전개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그 전개는 밋밋한 펼쳐짐이 아니라 (오늘날의 개념으로 하면) 특이성들을 내포하는 즉 마디들을 내포하는 전개이다. 그 마디들을 헤겔은 ‘계기(moment)’라 부른다.

그런데 이 계기는 다름 아닌 모순들이다. 역사의 원동력은 ‘모순(widerspruch)’이다. 두 개의 모순이 갈등과 투쟁을 일으키고 그 갈등과 투쟁을 통해서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가 도래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절대정신을 스스로를 전개하는 것이다. ‘역사’란 바로 이렇게 절대정신이 스스로를 펼치는 과정(geschehen)이다.

알튀세는 이런 헤겔의 사유를 비판하며 특히 그 ‘총체성’ 개념이 비판된다. 헤겔에게서 시간과 모순이 강조되지만 절대정신 속에 이미 새겨져 있는 각본에 따라 펼쳐지는 시간과 모순은 진정한 시간과 모순이 아닌 것이다. 헤겔에게 세계는 절대정신이 ‘외화’되고 ‘소외’된 것이며(따라서 헤겔에게서 세계는 근본적으로 마이너스로 표상된다. 기독교와 비교), 따라서 세계의 전개는 적극적인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회복의 성격을 띤다. 그렇기 때문에 계기들과 모순들을 그들 자체로서 다루어지기보다는 이미 짜여진 실타래의 매듭들로서만 기능하게 된다.


- 알튀세는 이런 헤겔의 모순론과 맑스의 모순론을 다르다고 본다. 우선 헤겔에게서 실재는 정신/이성이며 정신/이성의 운동이 역사이다. 그러나 맑스에게서 실재는 물질이며 물질의 운동이 역사이다(이 때 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분할 것). 헤겔이 실재로 본 것은 맑스에게서는 ‘상부구조’에 불과하다.

헤겔의 총체성은 결국 사회와 역사를 등질화하고 단순화한다. 때문에 알튀세는 사회적 복수성(multiplicité)과 복합성(complexité)을 자체로서 다루어야 한다고 본다. 알튀세는 이런 맥락에서 ‘구조화된 사회 전체(un tout social structuré)’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 ‘사회 전체’라는 말은 ‘명목적’ 의미를 가진다. 즉 헤겔의 총체성과 다르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구조화된’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곧 한 사회가 여러 계열들/심급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계열들/심급들의 복수성과 복잡성을 상세히 파헤쳐야 함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 알튀세는 자유주의/자본주의에서 강조하는 개인과 사적 소유 개념 역시 비판한다. 근대 정치철학에서의 ‘개인’ 즉 소유권을 가진 경제적 주체로서의 개인은 그릇된 개념이다. 각각의 개인은 이미 자본주의 사회 전체의 구조 속에서 파악되어야 하며, 개인이 모여 사회가 된다는 근대 주체철학적 사유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요컨대 알튀세는 한편으로 헤겔적인 총체성을 비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결과적으로 사회와 역사는 형이상학적 총체성이나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 구조화된, 여러 계열들/심급들이 일정한 관계들의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 사회는 여러 결정성들(déterminations)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총체이다. 알튀세는 여기에 복수성과 복잡성 외에 ‘비동등성(inégalité)’을 도입한다. 이것은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불평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계열들/심급들의 위상이 동등하지 않음을 뜻한다. 때문에 각 심급들에서의 모순 역시 동등하지 않다. 그래서 결국 알튀세에게 있어 모순은 복합적-구조적-비동등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마오처뚱은 ‘주모순(主矛盾)’과 ‘부모순(副矛盾)’을 나누었으나, 알튀세는 이런 구분을 좀더 다원화고 좀더 역동화한다. 사회의 여러 모순들은 때로 역할을 바꾸고, 또 때로 교차함으로써 응축되기도 한다. 알튀세는 이를 라캉을 따라 ‘변위(déplacement)’, ‘응축(condensation)’이라 부른다.


- 알튀세는 모순과 중층결정에 대한 이론을 통해서 러시아 혁명을 분석한다. 왜 맑스의 예상과 달리 후진국인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는가?

헤겔적 총체성의 거부와 비동등성, 복수성, 복잡성의 원리에 따라 알튀세는 당대 러시아가 여러 가지 형태의 ‘실천양식들’로 분절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적 실천양식’, 혁명가들의 ‘정치적 실천양식’, 사제들의 ‘종교적 실천양식’, 지주들의 ‘봉건적 실천양식’ 등이 그것이다. 이런 여러 실천양식들이 중층적 모순을 형성하고 중층결정을 통해서 러시아 혁명을 낳았다는 것이다.


- 그러나 알튀세는 실천양식들, 심급들, 계열들의 복수성, 그리고 맥락에 따라 변하는 비동등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최종 심급’은 경제적 심급이라고 말한다. 즉 경제중심주의의 단순한 인과는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최종적인 심급은 역시 경제적 심급인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심급은 어떤 방식으로 최종 심급으로서 작동하는가? 경제는 다른 심급들에 단적으로 직접 작용하지 않는다. 마치 프로이트에서 성욕이 직접 나타나지 않고 꿈이나 ‘착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나타나듯이, 경제도 복잡한 중층결정을 통해서 우회적 원인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구조적 인과를 알튀세는 ‘환유’로 묘사한다. 이런 환유적 인과는 말하자면 ‘부재하는 원인의 효과’, ‘결과들 속에서의 원인의 내재’이다. 결과들 속에는 경제적 심급이 눈에 보이지 않게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에서의 내재적 인과론과 비교할 만하다.


- 모순과 중층결정에 대한 알튀세의 분석은 현대 사상에서 매우 소중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전히 맑시즘을 절대시하는 ‘비과학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고, 또 (복수성과 복잡성의 개념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거의 스피노자의 신의 자리에 해당하는) 결정적인 위치에 놓여 있음을 볼 수 있다. 알튀세의 분석을 충분히 습득하되, 사상적으로 보다 자유로운 입장에서(즉 처음부터 맑스를 전제하지 않고 - 그러나 맑스가 고전적이고 기초적인 사상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보다 다원적이고(즉 분석의 단위를 ‘界’로 잡는 것 - 그러나 계급 개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역동적인(보다 최근의 존재론들을 동원한) 분석이 요청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과 주체의 문제


알튀세가 현대 사상에 남긴 또 하나의 결정적인 공헌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 개념이며, 이 개념을 매개한 주체론이다. 이 이론은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알튀세는 국가론에서 ‘기구들’을 분석한다. 즉 추상적인 권력 개념이나 사법적인 개념들이 아니라 실질적인(‘material’이라는 말의 모든 뜻에서) 기구들을 분석한다. 이것은 후에 등장하는 푸코의 ‘전략들’이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배치들’과도 상통하는 개념이다.

국가는 지배를 위해서 기구들/장치들을 필요로 한다. 기구들에는 억압 기구들과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이 있다. 억압 기구들에는 군대, 경찰, 법 등이 있고,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에는 공장, 병원, 학교, 교회, 언론, 정치, 감옥, ... 등등이 있다. 억압 기구들은 무력에 기반해 있지만,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이하 ‘이데올로기 기구들’로 약함)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생각나게 하는 면이 있다.


- 1) 몇 가지 기초적인 사항들의 점검.


- 헤겔의 ‘총체성’과 맑스의 ‘사회적 전체’를 구별하기


- 하부구조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인 경제적 토대이며, 상부구조는 법률-정치(법과 국가)와 이데올로기(종교, 윤리, 정치, 문화, ... )로 구성된다.


- 고전적인 맑시즘에서의 ‘건물의 비유’는 부적절하다. → 상부구조의 존재의 본질과 본성을 특징짓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한 것은 재생산의 관점에 입각해서이다.

재생산의 관점이란 곧 생산 조건들의 관점이다. 여기에서 생산 조건들은 곧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조건들이다.


- 고전적인 맑시즘에서 국가는 억압적 장치이다. 경찰, 재판소, 감옥, 군대, 내각과 행정부 등이 모두 억압 장치들이다.

국가권력과 국가기구들을 구분하자. 국가권력은 계급투쟁의 대상이지만, 국가기구들은 또 다른 분석의 대상이다. 국가권력만으로는 사회와 역사를 분석할 수 없다. 국가기구들을 분석해야 한다.

국가기구들은 억압기구들로 환원되지 않으며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을 고려해야 한다.


- 이데올로기 기구들(aie)은 폭력에 의해 기능하는 억압기구들과 다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이 있다: 종교 aie, 교육 aie, 가족 aie, 법률 aie, 정치 aie, 조합 aie, 매체 aie, 문화 aie.

알튀세는 가족-기구와 법률-기구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한다. 가족-기구는 생산과 소비의 ‘단위’의 역할을 하며, 법률은 한편으로 억압기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데올로기 기구이다.


- 하나의 억압기구가 존재하는 반면, 다수의 이데올로기 기구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억압기구가 공적이라면, 이데올로기 기구들은 사적이다. 억압기구가 폭력을 통해 작동한다면, 이데올로기 기구들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작동한다.

그럼에도 두 기구들은 상보적이다. 억압기구는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을 동반하며, 이데올로기 기구들은 억압기구를 동반한다. 폭력과 이데올로기는 항상 함께 작동한다. 무게중심이 다를 뿐이다.


- 한편으로 다양한 이데올로기 기구들은 결국 지배계급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직간접적으로 복속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떤 계급도 이데올로기 기구들 위에서, 그리고 그것들에 헤게모니를 행사함으로써 국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레닌의 예)

계급투쟁은 이데올로기 기구들보다 상위의 개념이다. 계급투쟁은 하부구조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 2) 이데올로기 기구들의 중요성은 그것들이 ‘생산 조건들의 재생산’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산 조건들의 재생산은 생산력의 재생산과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포함한다.

생산력의 재생산은 다시 노동력의 재생산과 생산수단들(원료, 고정설비, 생산도구 등)의 재생산을 포함한다. 이 문제를 상세하게 파헤친 것이 맑스의 공헌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알튀세는 노동력의 재생산이 더 이상 공장에서의 문제만은 아니며 다른 국가기구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학교는 대표적이다. 즉 노동력의 재생산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야만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 여기에서 고전적인 경제적 분석들을 넘어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에 대한 분석의 필요성이 제시된다. 이 분석은 곧 생산관계의 재생산에서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의 역할에 관한 분석이다.


- 알튀세는 (서구)전통 사회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기 기구가 가족 기구와 교회 기구였다면, 성숙한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기구는 가족 기구와 교육 기구라고 생각한다. 정치 기구가 계속 바뀌어도 오히려 이 기구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교육 기구는 ‘노하우들’(언어, 산수, ... )과 지배 이데올로기(도덕, 국민윤리, ... )의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역할들’을 가르친다. 피착취자의 역할, 착취의 대리자 역할, 억압의 대리자 역할, 이데올로기 전문가 역할 등등.


- 3) 이데올로기는 결국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서 호명(呼名)한다.

주체는 각 개인들에 의해 ‘자명한’ 것으로 인지되는데 이 자명함이야말로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의 효과이다.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인지하지만 과학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한다. 이데올로기적 인지는 결국 ‘오인’에 불과하다.

대주체, 국가기구들은 사람들을 소주체로 부른다. 이것을 라캉의 “타인의 욕망을 욕망함”과 비교할 수 있다.


미셸 푸코: 담론, 권력, 주체


푸코는 서구 철학사에 있어 가장 독창적인 인물들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것은 그가 이전의 철학에서 본격적으로 문제화하지 못했던 ‘타자들’을 처음으로 철학적 수준에서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푸코의 사유는 현대 철학의 역사에 거대한 혁명을 가져왔다.

푸코는 외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의학과 철학을 함께 공부했다. 병리학 학위를 가지고서 한 때 병원에 있기도 했으나 본격적으로 의사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경력이 반영되어 그의 철학 전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학적 관심사에 의해 짙게 물들어 있다. 생애 후반부에는 열렬한 정치적 투사로 활약했으며, 사르트르를 이어서 프랑스 지성계 전체를 이끌었다. 벵센느 대학에 비판적 성격의 실험대학을 만들기도 했다. 말년에는 꼴레주 드 프랑스 교수를 맡았으며, 에이즈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푸코는 동성애자로 태어났으며 때문에 ‘타자’의 입장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개인의 감성이나 행동으로 표출하는데 그치지 않고 철학적 사유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푸코만큼 생애와 사유가 완벽하게 합치하는 경우도 드물다.

푸코의 저작들: 『고전 시대에 있어 광기의 역사』(1961)

『임상의학의 탄생』(1963)

『말과 사물』(1966)

『지식의 고고학』(1969)

『감시와 처벌』(1974)

『성의 역사 1: 지식에의 의지』

『성의 역사 2: 쾌락의 선용』

『성의 역사 3: 자기에의 배려』


‘병리적인 것’과 타자의 사유


- 피상적인 인상과는 달리 푸코 사유 전체를 관류하는 것은 하나의 존재론적 관심사이다. 그것은 곧 ‘존재론적 분절(ontological articulation)’의 문제 즉 나눔(division)의 문제이다.

세계가 우리에게 드러내는 가장 원초적인 존재론은 ‘多와 運動’이다. 그러나 어떤 ‘다’이고 어떤 ‘운동’인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로부터 존재론적 분절의 문제가 나온다. 이 문제는 연속/불연속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푸코는 이 전통적인 문제를 매우 새로운 방식으로 다룬다. 푸코는 사회-역사적 맥락에서의 모든 나눔들이 명료하지도 않거니와 늘 순수 인식적 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 즉 권력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나눔은 동일자와 타자를 가른다. 푸코의 사유는 이 ‘타자’의 사유 즉 동일자의 ‘바깥’에 대한 사유 또는 동일자와 타자를 나누는 ‘경계선/극한’에 대한 사유이다.


- 나눔의 체계는 배제(exclusion)의 체계이기도 하다. 푸코의 사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배제의 문제를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푸코는 바깥의 사유이다. 현상학의 내면성을 거부하는 바깥의 사유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푸코에게는 넓은 의미에서의 구조주의자로서의 측면이 있다. 또 푸코는 나눔을 가능하게 하는 경계선을 사유했다는 점에서 경계선에, 극한에 선 사상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푸코는 타자의 문제를 사유하되 그것을 프랑스 인식론의 전통에서 사유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거꾸로 말하면 푸코는 프랑스 인식론을 전혀 다른 길로 이끌어 갔다고 할 수도 있다.

프랑스 인식론은 늘 ‘과학사’를 메타적으로 검토해 온 전통이다. 푸코는 바로 이 전통에 서서 정신병리학, 임상의학, 인구학, 우생학, 통계학, 범죄학, 형법학, 법의학, 정신분석학, ... 등등의 담론들을 분석해 온 것이다.

다시 말해 푸코는 한편으로 타자라는 문제를 다루었으나, 푸코를 푸코이게 해 주는 것은 그가 그 문제를 담론 분석(더 정확하게는 ‘지식’의 분석)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다루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푸코가 다룬 ‘지식들’을 유심히 보면 대개 인간의 신체/생명 및 법/권력에 관한 담론들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그의 문제의식이 “권력은 신체를 어떻게 다루는가?”라는 것에 집중되어 있음을 뜻한다.


- 담론을 다룬다는 것은 곧 담론의 형성과 변환을 다루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한 담론, 또는 여러 담론들의 ‘가능성의 조건’을 다루는 것이다. 이 점에서 푸코는 선험철학자이지만, 기존의 선험철학들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요컨대 푸코의 철학은 타자의 존재론이자 담론/지식의 인식론이지만, 그의 존재론도 인식론도 기존의 철학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 푸코는 스승인 깡길렘을 따라, 그리고 그 자신의 실존적 체험을 따라 ‘정상과 병리’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그 결과 쓰여진 것이 『광기의 역사』이고, 이 책이 현대철학의 문턱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푸코는 여기에서 우선 ‘정의(definition)’의 문제를 다룬다. 광기를 정의한다는 것의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광기는 늘 ‘합리성(rationality)’의 부정으로서 정의되었으며, 합리성의 규정이 바뀌면 그에 따라 광기의 규정도 바뀌어 왔다. 푸코는 정의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요컨대 광기라는 타자는 합리성이라는 동일자를 가능하게 하는 침묵의 거울로서 작용했던 것이다. 푸코는 이 맥락에서 중세의 나병과 고전 시대의 광기를 비교한다.


- 푸코에게서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지정학(地政學)’이다. 푸코는 타자의 장소들을 탐구한다. 나병환자 수용소, 제네랄 오피탈, 감옥, 제한구역, 빈민가, 홍등가, ... 등등. 논리적 정의와 지리적 장소는 서로 구분되면서도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 ‘definition’의 음미.


- 고전 시대의 병원인 제네랄 오피탈은 병자, 농부, 상이군인, 낙오병, 실업자, 극빈학생, 광인 등이 섞여 있는 ‘heterotopia’이다. 인간은 자기 의지에 관계없이 분류된다. 부정의 논리를 통해서 분류되는 것이다. 분류는 늘 권력을 함축한다고 푸코는 말한다.

의사의 성격 또한 특이했다. 그들은 의사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제들이자 공무원들이었다. 그들은 시대의 질서를 이탈한 사람들을 교화하고 교정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낙인, 화형대, 감방, 지하감옥 등을 관리했다. 푸코는 당대의 경제학적 맥락을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부르주아 사회의 ‘모랄’을 지적한다.


- 19세기가 되면서, 특히 프랑스 대혁명 이후(푸코의 역사적 연구에서 프랑스 대혁명은 항상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이해된다), 유럽에는 ‘휴머니즘’이 도래한다. 휴머니즘은 자유․평등․박애를 기조로 새로운 ‘근대 사회’를 건설하게 된다. 그러나 푸코는 바로 휴머니즘과 ‘근대성(modernity)’이야말로 부르주아 계급이 세계를 보다 “세련되게” 통치하려는 장치였다고 고발한다. 이 세련됨이란 곧 ‘지식들’의 건설로 나타난다. 푸코는 이렇게 형성된 현대 사회를 ‘훈육 사회’라고 부른다.


- 이런 맥락에서 푸코는 19세기 이래의 정신병리학 및 정신분석학을 검토한다. 푸코는 근대의 정식의학과 정신병리학이 말하는 ‘과학성’의 밑바탕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다양한 ‘장치들’을 드러낸 것이다.


- 『임상의학의 탄생』과 『말과 사물』은 ‘고전 시대’의 인식 체계와 근대의 인식 체계를 대비해 보여 주는 대표적인 저작들이다. 푸코는 르네상스 시대의 비합리적 사유 체계, 고전 시대의 합리주의, 그리고 근대 이후의 복잡한 발전을 꼼꼼하게 분석함으로써, 각 시대의 ‘에피스테메’들을 드러내고, 그 작업을 통해 인식의 상대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 『말과 사물』(1966)은 같은 해에 출간된 라캉의 『에크리』와 더불어 구조주의의 절정을 이루는 작품으로 널리 회자되었다. 푸코 자신은 ‘구조주의자’라는 명칭에 대해 마뜩치 않아 했고 또 실제 그를 구조주의라는 틀에 가두는 것은 부당하지만, 적어도 『말과 사물』 및 그 후에 발간된 『지식의 고고학』(1969)은 푸코 사유의 구조주의적인 측면을 뚜렷이 드러내 주는 작품들이다.


주체철학 비판


- 말과 사물은 유명한 서문으로부터 시작된다. →

푸코는 중국의 백과사전에 대한 이 인용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낸다. →

요컨대 푸코는 주체와 대상의, 인간과 사물의 직접적인 만남은, 적어도 인식의 수준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 사이에 하나의 장, 무의식적 규칙성들의 장, 선험적 질서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험적 장(champ transcendantal) -- 객관적 선험 -- 이 사회적, 역사적으로 가변적이라고 생각할 때,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구조주의가 성립한다.

『말과 사물』은 1)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에피스테메(l’épistémè)의 변환을 그려준다. 2) 그 과정에서 주체의 탄생과 죽음을 논한다.


- 1장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다룬다. 푸코는 이 그림을 분석함으로써 우리에게 오늘날 매우 익숙한 ‘선험적 주체’ 같은 것은 고전시대에는 없었다는 것을 논한다.


- 2장은 고전시대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그 전단계로서 르네상스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논한다: 친화, 조응, 유비, 동감/반감. 르네상스 시대는 ‘상징적 의미’가 지배한 시대였다.


- 3장은 고전시대 전반에 대한 논의이다. 봄과 읽음의 관계, 유사성을 통해 본 세계가 무너지는 과정, 언어의 위상 변화 등이 핵심적으로 논의된다. 푸코는 여기에서도 엄밀과학에서의 과학혁명이나 담론공간 하부에서의 경험주의적 담론들이 아니라 그 사이에 존재하는 ‘지식들’에 초점을 맞춘다.


- 4, 5, 6장은 고전시대의 지식들, 즉 일반문법, 자연사, 부의 분석이 상세하게 논의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고전시대에는 아직 ‘人間(homme)’이라고 하는 존재는 없었음을 논증한다.


- 7장부터는 2부이다. 7장은 19세기가 되면서 고전시대의 에피스테메가 무너지고 새롭게 등장한 근대적인 에피스테메를 그린다.(3장과 대칭) 칸트에 의한 ‘선험적 주체’의 등장, 역사적 시각의 형성과 헤겔 ~ 베르그송에 이르는 거대 서사의 전개, 근대 문학의 등장, 기호논리학과 해석학의 대립 등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그리고 8장에서는 자연사/박물학에서 ‘생물학’으로의 변환, 부의 분석에서 정치경제학으로의 변환, 일반문법에서 비교언어학으로의 변환을 다룬다. 이제 모든 담론이 말하고, 일하고, 생명체로서 살아가는 인간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 9장은 칸트 이래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서구의 ‘주체철학’을 다룬다. 푸코는 여기에서 ‘유한성’의 문제를 다루며, 이 문제가 어떻게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 코기토와 비사유, 시원의 후퇴와 회귀로 변주되는가를 분석한다.


- 10장은 구조주의를 다루고 있으며, 주체철학의 죽음, ‘선험적 주체’의 죽음을 논한다. 푸코는 『말과 사물』의 부제인 ‘인간과학의 고고학’을 처음에는 ‘구조주의의 고고학’으로 하려 했다고 한다. 즉 이 책은 결국 구조주의에 대한 메타적 정초의 성격을 띤 책이라 할 수 있다.

구조주의를 통해서 이제 근대적 주체의 죽음이 발생한다. 레비-스트로스는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라는 환상을 해체시켰고, 라캉은 순수 자아라는 환상을 해체시켰다. 알튀세의 사유 역시 인간주의적 맑시즘을 해체시켰다. 푸코는 이제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다. “바닷가 모래 위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기어가듯 인간의 얼굴도 지워지리라.”


언표와 담론


- 『말과 사물』이 역사적 성격의 책이라면, 『지식의 고고학』은 논리적 성격의 책이다. 이 책은 푸코가 그 때까지 했던 작업들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작업들을 방법론적으로 정초한 책이다. 그래서 매우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책이다.


- 푸코는 언어를 ‘명제’의 관점에서, ‘상징’의 관점에서, ‘문법’의 관점에서, ‘담화 행위(speech act)’에서 보지 않고 ‘언표’의 관점에서 본다. 푸코는 언표를 명제, 상징, 문법, 담화 행위 이전에 존재하는, 이것들의 ‘가능성의 조건/장’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a, z, e, r, t의 예.


- 푸코는 언표가 언표일 수 있는 조건으로서 네 가지를 제시한다. 1) 언표는 늘 그 상관자를 가진다. 2) 언표는 늘 주체와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 3) 언표는 언제나 장을 형성한다. 4) 언표는 ‘물질성’을 가진다.


- 보다 조직화된 수준에서의 언표들의 집합은 ‘담론(discours)’을 형성한다. 원래 대화를 뜻했으며 또 경우에 따라서는 ‘논구(論究)’로 번역되던 이 말이 푸코에 이르러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 『말과 사물』 및 『지식의 고고학』에서 푸코는 대상과 주체가 직접 관계 맺는 전통 철학의 도식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사유틀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지나친 언어중심주의라는 또 정적인 사유라는 한계를 드러내면서, 푸코는 ‘계보학’이라는 또 다른 길을 찾아나선다.


타자의 사유=푸코는 『광기의 역사』로부터 『성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타자들’이 분리되고 배제 당해 온 역사를 서술했다. 푸코는 한 시대의 합리성이 어떻게 타자들을 감금했는가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이 점에서 그의 사유는 일차적으로 타자의 사유이다.


담론/지식과 권력=푸코 사유의 본격적인 특징은 그가 타자의 사유를 ‘담론(discours)’에 대한 분석, 특히 ‘지식(savoir)’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진행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 점에서 그의 사유는 알튀세, 캉길렘, 세르 등과 통한다.

푸코는 지식을 분석하되 권력과의 연관성 속에서 논한다. 바꿔 말하면 푸코는 권력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논의 대상으로 지식을 선택했다고도 할 수 있다.


주체의 문제=담론, 권력의 문제와 더불어, 아니 이 두 문제를 꿰면서 푸코 사유의 전체를 관류하는 문제는 주체의 문제이다. 푸코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조건짓는 바탕에 대해 집요하게 사유했고, 인간의 사유와 행위와 언어를 지배하는 객관적 선험 또는 역사적 아프리오리가 무엇인지를 찾았다. 그리고 말년에는 인간이 그런 조건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어떻게 스스로를 주체화해 가는지에 관심을 쏟았다.


근대성 비판=푸코 사유를 거시적으로 보면 근대성 비판이라는 성격을 띤다. 또 근대성이라는 것이 서구에서 산출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것은 서구 사회 비판이라는 성격도 띤다. 이 점에서 푸코의 사유는 탈근대-탈서구를 모색하고 있는 비서구 지역의 사유에도 심대한 함축을 가진다.


지식, 권력, 주체=푸코의 첫 번째 대작인 『광기의 역사』(1961)는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광기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타자들은 스스로를 스스로가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자들에 의해 규정 당한다.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고전 시대로 넘어가면서 ‘대감금’이 발생한다. 푸코는 당대의 합리주의 사상, 절대왕정, 프로테스탄티즘의 도래, ... 등등이 형성하는 에피스테메 안에서 어떻게 광기가 다루어졌는가를 상세하게 논의한다.

19세기 인권사상(humanism)이 도래하면서 ‘정신병리학’을 비롯한 여러 지식들이 등장한다. 푸코는 이것을 ‘발전’으로 보기보다 ‘훈육 사회’의 도래, 지식과 권력(특히 생체권력)의 공고한 관계, 부르주아 사회의 특성과 관련시켜 논한다.

푸코의 이 작품은 그에게서 지식, 권력, 주체의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를 이미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광기의 역사』에서의 작업은 2년 후에 출간된 『임상의학의 탄생』(1963)에서도 다루어진다. 이 저작은 『광기의 역사』보다는 더 인식론적인 저작으로서 그 문제의식은 『말과 사물』로 넘어간다.


주체와 언어=『말과 사물』(1966) 및 『지식의 고고학』(1969)은 푸코 사유의 이론적인 측면을 잘 드러내는 저작들이다. 『말과 사물』이 역사적 서술의 형태를 띤다면, 『지식의 고고학』은 논리적 분석의 형태를 띤다. 두 작품은 근본적으로 주체와 언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말과 사물』은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생명, 언어, 노동에 관련된 담론사를 추적하고 있다. ‘에피스테메’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

르네상스: 해석학과 기호학의 결합. 유사성(ressemblance)을 에피스테메로 봄.

고전 시대: 상징에서 기호로. 가시성의 의미. 분석적 사고. ‘표상(representation)’을 에피스테메로 봄. 자연사(= 박물학), 부의 분석, 일반 문법을 서술.

근대: 기호의 해체. 언어에 따른 여러 가지 담론들의 등장. 생물학, 정치경제학, 비교문법의 탄생. 주체철학의 등장: 유한성의 분석론.

현대: 구조주의의 등장. 선험적 주체의 죽음.

『지식의 고고학』(1969)은 주체 이전의 언어를 논리적으로 탐구하고 있으며, 언표장의 개념과 담론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권력의 계보학=『감시와 처벌』(1974)은 고고학에서 계보학으로 넘어가는 작품이다. 『광기의 역사』에 오히려 가깝다. 근대 훈육 사회를 본격적으로 탐구. 감금의 형태들을 분석함. 이러한 사유는 『성의 역사 1: 지식에의 의지』(1976)로 넘어간다. 성을 지식화하려는 ‘진리에의 의지’를 다룸.


새로운 모색=주체의 윤리학=푸코는 원래 『성의 역사』를 6권으로 계획했었다. 그러나 첫째 권을 출간한 1976년 이후 갑자기 푸코는 8년 간의 긴 침묵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세상을 뜨기 바로 전인 1984년 2권인 『쾌락의 善用』과 『자기 돌보기』를 펴낸다. 이 공백은 어떤 의미를 띠는가? 그것은 『쾌락의 선용』에 붙은 매우 긴 서문에서 잘 나타난다.

푸코는 지식-권력의 그물망이 주체들을 어떻게 구성해내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러나 이제 각 개인이 이 그물망으로부터 어떻게 자기를 구성해내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이로부터 ‘주체화(subjectivation)’의 개념이 등장했다.

푸코는 자신의 사유를 늘 ‘탈현존시키려(déprésentifier)’ 노력했으나, 『쾌락의 선용』에서는 ‘경험’을 다시 이야기한다. 경험이란 “어떤 문화에 있어 주체성의 형태들이 지식의 영역들, 규범성의 유형들과 맺는 상관관계”를 의미한다. 달리 말해 푸코는 이 책에서 성을 둘러싼 지식, 권력, 주체의 상관관계를 파헤치고자 했다.

푸코는 여기에서 욕망과 욕망하는 주체에 관한 역사적, 비평적 작업을 시도한다. 이 지점에서 푸코는 욕망론이라는 최근 사유의 흐름에 합류한다. 푸코는 ‘욕망의 해석학’, ‘주체의 해석학’, ‘자기의 해석학’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계보학’이라는 개념도 여전히 사용한다. 그러나 주체의 ‘윤리학’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이것은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 자기의 주체 정립에서의 진리의 놀이들을 다루는 것이다.

푸코는 ‘실존 가꾸기(technologie d'existence)’, ‘자기 가꾸기(technologie de soi)’도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행동 규칙을 정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들의 특이한 존재 속에서 스스로를 변형시키며, 그들의 삶을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닌, 어떤 양식(style)의 기분에 부합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신중하고도 자발적인 실천”이다. 푸코는 이런 실천을 바로 그리스에서 읽어냈다. 그것은 곧 ‘문제구성(problématisation)’과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실천들(pratiques)의 문제이다.


미셸 세르


미셸 세르=세르(michel serres)는 1930년 프랑스의 아장에서 태어났다. 1949년에 해양대학교에 입학해 공부했으며, 1952년에는 에콜 노르말에 들어갔다. 1955년에 아그레가시옹(교수자격시험)을 통과했다. 그 후 몇 년 동안은 뱃사람이 되었으며 여러 곳을 전전했다.(세르를 흔히 ‘여행자’에 비유하는 것은 학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968년에는 라이프니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 논문 『라이프니츠의 체계와 그 수학적 모델들』은 현대 라이프니츠 연구의 금자탑을 이루었으며 동시에 구조주의적 사유 양식에 일정한 철학사적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60년대에 그는 미셸 푸코와 더불어 클레르몽-페랑 대학 및 벵센느 대학(빠리 8대학)에서 가르쳤다. 그 후 소르본느에서 과학사 연구의 총책임을 맡게되고, 한림원에 들어간다. 세르는 미국에서도 가르치고 있으며, 1984년 이래 빠리와 스탠포드 대학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헤르메스-세르=세르가 초기에 펴낸 다섯 권의 저작들은 ‘헤르메스 연작’으로 불린다. 『헤르메스 1: 소통』『헤르메스 2: 개입』『헤르메스 3: 번역』『헤르메스 4: 분배』『헤르메스 5: 북서간 이행』.

헤르메스는 여행의 신이자 메신저이기도 하다. 세르는 담론의 세계를 여행하는 순례자이다. 수학에서 시로, 물리학에서 철학으로, 미술에서 소설로, ... 무수한 담론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지치지 않고 여행하는 타고난 여행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여행을 통해서 세르는 담론과 담론 사이에 소통의 다리를 놓고, 서로 상관없이 보이는 담론들을 개입시키고, 하나의 담론을 다른 담론으로 번역하고, 다채로운 담론들을 보다 넓은 공간 위에서 분배하기도 한다.

또 세르는 메신저이기도 하다. 한 담론에서 획득한 통찰을 다른 담론으로 가져가는, 한 담론에서 얻어낸 통찰을 다른 담론으로 건네주고 교류를 펼치는 메신저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해, 세르는 방대한 담론의 장 -- 기본적인 구분은 역시 자연과학과 인문학이다 -- 을 오가며 각 담론들 사이를 응시한다. 물리학, 시 같이 정확하게 구획된 담론들이 아니라 그 구획이 배제한, 그 구획 때문에 인식의 저편으로 밀려간 그 어두운 사이를 응시한다. 이 점에서 그는 여행자인 동시에 발견자이다. 세르의 작업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돌로지’의 정신과 상통하며, 실제 세르는 자신이 공감을 느낀 “유일한” 현대 철학자로서 들뢰즈를 지명하고 있다.


인식론적 장/담론의 공간=세르는 그의 스승 바슐라르와는 달리 과학과 비과학 사이에 날카로운 선을 긋지 않는다. 그는 자연과학과 인문학, 신화, 예술 등 모든 형태의 담론들을 평등하게 바라본다. 여기에서 평등하다는 것이 대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더 못한 이론이 있고 더 나은 이론이 있으며, 더 못한 작품이 있고 더 나은 작품이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일단 ‘인식론적 장(epistemological field)’ 또는 ‘담론의 공간’이라는 넓은 지평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매우 구체적인 차이들은 정확히 지적되어야 하지만, 과학을 특화해서 과학과 ‘비’과학으로 양분하는 것은 잘못이다.

모든 담론들이 속해 있는 공간, 이 공간이 다양한 담론들을 가능하게 해 주는 선험적 조건이다. 세르는 이 선험적 조건, 우리가 ‘객관적 선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탐구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그의 사유 역시 구조주의적 바탕을 띠고 있다. 그러나 세르는 이 객관적 선험을 총체화해서 파악할 수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이 선험의 파악은 각 담론을 가능하게 해 주는 개별적 조건들(원리, 개념, 물질적 바탕, 주체의 조건 등등)을 비교하고 보다 넓은 관점에서 통합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때문에 우리는 이 객관적 선험에 귀납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무수히 그어지는 선분들(담론과 담론을 잇는 다리들)이 조금씩 형성하는 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세르는 현대에 있어서도 총체성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철학자이지만, 그의 총체성은 헤겔적인 총체성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고 하겠다.

우리는 세르의 객관적 선험을 푸코가 탐구했던 언표장, 들뢰즈(와 가타리)가 탐구했던 ‘전개체적-비인칭적 장’, ‘잉여성의 장’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소통의 철학=세르 철학에는 여러 가지 국면들이 있지만, 그 핵심은 역시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이야말로 세르 사유의 핵심에 놓여 있다. 이러한 소통은 매우 어려우며 자칫 모호한 뒤죽박죽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세르는 이런 소통을 매우 위험한 항로인 ‘북서간(北西間) 이행’으로 비유한다. 소통이란 꼼꼼한 비교를 전제하며, 이 점에서 세르는 조르주 뒤메질의 인도-유럽 신화 연구나 르네 지라르의 인류학적 연구를 높이 평가한다. 개벌적인 선험적 조건들의 비교를 통해 보다 넓은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위상공간으로서의 소통공간=세르의 소통 이론은 하버마스의 소통 이론과 대조적이다. 하버마스는 소통의 이상적 상황을 찾았고 그 선험적 조건을 사유했다. 반면 세르는 오히려 소통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늘 소통은 완벽하지 못할까 하는 물음을 추구했다. 우리는 이것을,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장애물들’에 비교해, ‘소통의 장애물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세르는 이 장애물들을 ‘노이즈(noise)’라고 부른다. 신호가 갈 때 언제나 노이즈도 동반된다. 세르는 이 노이즈를 적극적으로 탐구하고자 했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기존 사유의 테두리를 넘어 보다 포괄적인 사유의 장을 개척한 후기구조주의의 일반적 흐름에 합치한다.

담론과 담론 사이에 노이즈가 끼어드는 것은 담론의 공간이 평평한 유클레이데스적 공간이라기보다는 복잡한 위상공간(topological space)이기 때문이다. 위상공간은 특이성들이 분포되어 있는 공간이고, 따라서 이 공간의 형태를 연구한다는 것은 곧 특이성들의 분포를 연구한다는 것을 뜻한다. 세르의 처녀작 『라이프니츠의 체계』은 이 위상학 -- 라이프니츠의 용어로는 위치해석(analysis situs) -- 의 기본 개념들을 찾아냈으며, 이 개념들은 헤르메스 연작에서 다채롭게 활용된다.


수학과 신화=이 공간을 탐구하는데 세르는 서로 매우 상반되는 두 가지 도구를 사용한다. 하나는 라이프니츠에서 비롯된 논리학, 수학, 그리고 현대의 정보 이론 등 이른바 ‘형식 과학들(formal sciences)이다. 이 점은 (후기)구조주의자로서의 세르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점이며, 그를 르네 톰의 작업과 비교할 수 있게 해 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신화로서(뒤메질, 지라르와 관련되는 지점), 세르는 인간의 원초적 담론인 신화들이 인간 사유의 곳곳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유문법들을 형성한다고 본다. 이것은 예술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첨단의 현대 과학에서도 그렇다. 그 예로서 복잡계 과학(카오스 이론)과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哲學詩)를 들 수 있다. 루크레티우스가 제시한 ‘클리나멘’은 ‘초기 조건에의 민감성’과 매우 유사한 사유문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제3자 배제=노이즈는 소통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노이즈는 소통에 필수적인 조건이다. 노이즈는 명료한 메시지가 그로부터 마름질되어 나오는 장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노이즈의 저항 없는 메시지는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노이즈는 두 사람의 소통 사이에 끼어드는 제3자와도 같다. 이 제3자를 배제함으로써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진다. 모든 형식적 체계(formalism) -- 객관적 선험을 구성하는 공간들 -- 도 제3자 배제의 과정을 거쳐서 성립한다. 이 점에서 세르의 사유에는 비판적 합리주의(메이에르송 등)의 흔적이 있다. 경험적 세계는 雜多 -- 그러나 베르그송에게는 ‘절대적인 질적 풍요로움 -- 이며, 이 잡다로부터 형식적 체계가 마름질되는 것이다. 세르의 사유는 베르그송으로부터 합리주의로 나아가며, 부르바키로부터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참고문헌

세르, 『해명』, 박동찬 옮김, 솔

『헤르메스 4: 분포』, 이규현 옮김, 민음사



삐에르 부르디외


부르디외=1930년 프랑스 베아른에서 탄생. 에콜 노르말에서 철학을 공부. 빠리 귀족층과 교육 분위기에 반발. 아그레가시옹을 받았으나 학위 논문은 쓰지 않음. 알제리에서 군복무. 식민지 상황을 보면서 전투적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 키움. 후에 레비-스트로스와 레이몽 아롱의 조교를 지냄. 1968년 이래 ‘유럽사회학센터’를 세워 활동. 1981년에 꼴레주 드 프랑스 교수. 『구별짓기』(1979), 『실천적 의미』(1980), 『호모 아카데미쿠스』(1984)를 비롯한 30여권의 저작이 있다. 부르디외는 미국의 촘스키와 더불어 ‘신자유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개관=부르디외는 알제리 지역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키웠으며 현장 조사의 방법을 세련화했다. 부르디외는 비자본주의 지역이 자본주의에 맞닥뜨리면서 어떻게 변화하는가, 원주민들의 삶의 뿌리가 어떻게 뽑혀나가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1968년을 전후해서 부르디외는 교육사회학 및 문화사회학 연구에 매진한다. 부르디외는 학교 사회가 얼마나 ‘상징적 자본’과 ‘상징적 폭력’에 지배되는가를 적나라하게 폭로했으며, 동시에 문화라는 것을 사회학적 방법으로 접근하는 연구들을 다수 남겼다. 『구별짓기』에는 이러한 부르디외의 관심사들이 종합적으로 나타나 있다.

1972년에 나온 『실천이론의 소묘』, 1980년의 『실천적 의미』, 1997년의 『파스칼적 성찰』은 부르디외의 철학적 사유가 잘 나타나 있는 저작들이며, 후기구조주의의 인식론적 기반을 확인할 수 있는 저작들이다.

1980년대 이후에도 줄기차게 사회 활동과 학문 활동을 병행하고 있으며 특히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의 중심에 서 있다.


아비투스


행위자와 구조=사회학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 중 하나는 개인과 집단, 행위자와 사회의 문제이다. 그런데 사회의 본질을 ‘구조’ 개념으로 포착하고 있는 오늘날, 이 문제는 결국 행위자와 구조의 관계가 된다. 과거의 사유들이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이라는 근대적 전제 위에서 움직였다면, 초기의 극단적 구조주의는 개인을 구조 속에 완전히 함몰시켜버렸다. 후기구조주의는 이런 담론사적 과정을 염두에 두고서 개인과 구조의 관계에 대한 보다 세련되고 균형 잡힌 이론을 세우고자 한다. 그런 노력이 특히 사회학적 형태로 나타난 경우가 부르디외의 사유이다.


아비투스=부르디외의 이런 작업을 응축하고 있는 개념이 아비투스 개념이다. 아비투스는 실존(existence)의 조건이다. 전형적인 구조주의적 사유이다. 개별적 실존의 삶의 가능 조건이 아비투스이다. 아비투스(habitus)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에토스(ethos)’와 ‘헥시스(heixs)’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르디외의 사유가 놀랍게도 ‘습관’에 대해 집요하게 성찰해 온 정신주의(spiritualisme)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발견한다. 부르디외는 정신주의의 문제의식 --- 기계성과 생명, 객관 세계에서의 개인/주체, 노력의 문제 --- 을 이어받되 그것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회학적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아비투스 개념에서 우리는 이미 부르디외 사유의 철학적 배경을 예감할 수 있다.


계층화와 아비투스=부르디외가 아비투스를 “사회학적으로” 사유했다는 것은 곧 이 개념을 계층화(stratification)와 연관지어 사유했음을 뜻한다. 계급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계층이 더 어울린다.(맑스와 부르디외의 차이)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특정한 계층에 관련된 조건들에 의해 생산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즉 한 주체가 한 계층에 속하게 됨으로써, 그 계층을 내면화함으로써 가지게 되는 것이 아비투스이다. 이 점에서 아비투스란 주체에 내재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개체에 내재하는 형상을 생각할 수 있는 것과도 같다(그러고 보니 이 생각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습관론의 대가인 라베송이다).


성향들의 체계=아비투스는 성향의 체계이다. 즉 어떤 계층 안에 속한 사람으로 하여금 일정한 방향으로 행하게 만드는 성향들의 체계(système des tendances)이다. 이 점에서 인식론에서의 ‘에피스테메’(푸코) 개념과 매우 흡사하다. 즉 한 시대에 속한 사람들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조건들의 장이 에피스테메라면, 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게 만드는 조건들의 장이 아비투스인 것이다. 이 장은 인간 바깥에 놓여 있는 장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각 개체 내부에 들어와 있는 장이다(메를로-퐁티와 비교).

그런데 이 아비투스는 “구조화된 구조이며 구조화하는 구조”이다. 그것은 한번 형성되어 변화가 없는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화된 구조이다. 그런데 이 구조화는 완벽하게 주체 이전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구조는 분명 주체들의 상호주관적 활동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 변동’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사회 변동이 합리적 인간들의 투명한 계약 같은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생각 또한 엉뚱한 생각이다. 부르디외는 ‘사회적 장(champ social)’과 개개인의 ‘의식’(반성철학을 염두에 둔 표현)이 상호 작용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부르디외가 사르트르를 공격하면서 메를로-퐁티를 자신의 철학적 배경으로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비투스의 예들=부르디외가 초기에 몰두했던 알제리 사회 연구를 예로 들어 보자. 알제리는 화폐제도와 신용체제가 도입된 이후에도 자본주의를 충분히 내화하지 못했다. 왜인가? 한계효용론에 따르면 알제리인들이 실업을 감수하면서도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이것은 알제리 사회의 독특한 아비투스, 그리고 그 안에서의 개인들의 의식을 고려에 넣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알제리인들은 자본주의적 시간과 다른 시간-아비투스에 살고 있었고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또 베아른 지방(자신의 고향)의 결혼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화폐가 종이가 되었고, 때문에 지참금에 입각해 있던 이전의 결혼 제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또 도시 문화가 들어오면서 각 가정의 장남들은 뒤쳐지게 되며 때문에 유난히 장남들의 독신이 많아진다. 이것은 장남들의 아비투스와 관련된다. 그들의 아비투스와 새로운 아비투스가 부딪쳐 정체성에서의 혼란이 빚어진 것이다.

68년을 전후해 부르디외는 문화적 지배가 학교를 통해 재생산된다는 테제를 계속 발전시켜 나간다. 이것은 곧 알튀세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개념을 발전시켜 나간 것이기도 하다. 부르디외가 개척한 ‘상징적 자본’ 개념은 맑시즘을 보완하는 중요한 개념 장치이며, ‘상징적 폭력’ 같은 개념은 사회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었다.


기억, 신체와 아비투스=부르디외의 아비투스는 실존의 조건이 내면화되어 형성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기억과 신체가 문제가 되며, 이것은 후기구조주의 사유가 베르그송, 메를로-퐁티 등의 사유와 접맥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기억이란 객관과 주관이 만나 형성된 사건들의 총체이며, 신체란 객관과 주관이 포개지는 ‘삶의 장(l'espace de la vie)’이기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베르그송, 메를로-퐁티 등의 사유를 통해서 초기 구조주의의 추상성을 극복하고 행위하는 인간을 조명했다고 볼 수 있다.


주체화=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존재인 한 주체 개념은 늘 철학의 중심 주제일 수밖에 없다. ‘subjectum’이라는 말의 의미 변화, ‘existence’라는 개념의 의미 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체 개념은 근대․현대적 사유를 대변한다.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성과를 전제하면서 다시 주체를 사유하고자 하며, 이 맥락에서 등장한 말이 ‘주체화(subjectivation)’이다.

푸코는 주체화를 신체를 축으로 전개한다. 왜냐하면 신체란 권력의 작용점이자 저항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부르디외 역시 신체를 중시하는데, 신체야말로 아비투스와 의식이 공존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대 사회는 객관적 장과 ‘주체화의 점(들뢰즈와 가타리의 표현)’을 동시에 사유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신자유주의 체제는 무역에서의 ‘보호’ 개념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세계를 ‘무한 경쟁’의 체제로 몰고 가고 있다. 그것은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선진국들의 이익을 위한 체제라고 할 수 있으며, 빈익빈 부익부를 계속 증폭시켜 나가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의 논리가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논리이다(초국적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사업이 월드컵인데, 그 월드컵의 기본적인 아비투스가 국가, 민족인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부르디외는 이런 신자유주의 체제에 줄곧 저항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 철학아카데미 자료실 http://www.acaphilo.org/PDS/?tb=J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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