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정신이 없는 시대

2008/04/17 17:59
 

[박노자] 정신이 없는 시대


[출처] “씨알의 소리" 기고문: 정신이 없는 시대 

만감: 일기장 2008/04/16 21:42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12875 


밑에다가 제가 방금 써놓은 <씨알의 소리> 200호 기고문을 첨부합니다. 비관적인 글로 보실 분들이 계시겠지만 요즘 특히 "학교 자율화"와 같은 망동들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제게 고통입니다. 저도 고등학교 졸업 반 때에 입시 공부를 하긴 했는데, 길어야 하루에 3-4시간 동안 따로 집에서 자습하는 정도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낮 3-4시에 돌아오는 것은 물론이고, 이 "입시 공부"를 하는 동안에 고대, 중세 아시아 지역의 "아세아적 생산양식"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들의 글을 읽느라고 정신 없었습니다. 입시 공부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 사학에나 한 눈을 팔 수 있었던 것은 그 때 소련의 상황이었는데, 학교에서 하루에 15시간 정도 갇혀 있는 한국 아이들을 보면 "이게 그냥 범죄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나중에 무리한 노동으로 과로사나 당할 노동자들을 그렇게 키우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요... 하여간, 이게 제 글입니다


"요즘 필자에게 두려운 일이 하나 생겼다. 인터넷으로 한국 신문을 보기가 두렵다. 내가 3년이나 살았던 정겨운 나의 서울이 어떻게 돌아가나 궁금해 죽을 지경인데도, 신문을 보기가 두렵다. 신문을 볼 때마다, 인간으로서 참아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 하도 많이 나오기에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마음이 더 편하다. 예컨대 학교에서 “자율화”가 이루어져 이제는 성적순으로 “열등반”과 “우등반”을 편성해도 좋다는 기사를 읽으니 정말이지 거의 심장이 마비되는 듯한 감이었다. “자율화”? 파시스트 독일의 수용소 대문에 “노동은 너희들을 자유로이 한다”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던데, 수용소에서 “자유”를 들먹이는 것이나 학생 사이의 “계급화”가 공식화된 학교에서 “자율”을 들먹이는 것이나 오십보백보인 듯하다. 다음 단계는 어디까지일 것인가? 전교 몇 등인가를 특별한 명찰에다 써놓고 이를 교복에다가 착용케 할 것인가? 아니면 “열등생”들에게 아예 교복을 다르게 입게 할 것인가? 이제는 “우등생”과 “열등생”의 급식과 학습 공간이 차별화되는 학교도 생긴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다음 단계는 더 과감하리라고는 쉽게 상상되어진다. 옛날에는 도스토에브스키가 “아이의 눈물 하나 흘리게 하는 대가로 천당에 가는 일이라면 차라리 천당을 거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이의 눈물 따위는, 친구를 사귈 때에까지도 맨 먼저 성적 순위와 부모의 아파트 평수를 확인하는 것이 요즘 일반화돼 가는 나라에서는 별 것도 아니다. “열등반” 학생들이 하루 종일 울어도 열등감에 사로잡혀 말을 잃는 그들의 부모 말고는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들의 입시 지옥의 문제는 “눈물”의 문제가 아니고 “피”의 문제다. 한국 10대 후반기 청소년들의 사망 원인으로서는 교통사고 그 다음으로는 두 번째는 자살이다. 학생들을 상대로 한 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47%의 응답자들이 자살 충동을 느꼈고, 13%가 구체적인 자살 방법도 궁리해봤고, 6%가 실제로 자살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물론 미국만 해도 청소년 중에서의 자살 시도한 이들은 8-10%에 달하긴 하지만, “학업 스트레스”, “성적에 대한 교사와 부모의 꾸지람”이 자살 충동의 주된 원인으로 등장되는 것은 한국의 특징이다. “우등반”과 “열등반”의 세계에 갇혀 있는 아이들에게는 죽음만이 돌파구로 보이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그런데 성적을 비관한 아이의 자살이나, 입시에 “실패”한 아이의 자살은 대한민국에서 “충격적” 뉴스가 되어 지속적인 관심을 끄는 경우가 많은가? “실패자”가 – 비록 아이의 몸이라 해도 – 경쟁에서 치었으면 죽음을 택할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느 사이에 거의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몇 명의 낙오자가 자살하든 미치든 학교의 경쟁력, 나아가서 대한민국 전체의 경쟁력이 강화되기만 하면 뭐가 문제냐는 것은 다수의 사고 방식이다. 자칭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끔찍한 전체주의에 어울릴 법한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의 논리가 잘도 통한다.


지금 우리는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도전을 직면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주기적 위기와 지구 전체의 환경 위기가 서로 맞물려 미증유의 위기 상황을 유발한다. 한편으로는 무리한 도시화와 공업 시설의 농토 잠식, 연료 생산을 위해 곡물 재료의 무모한 남용, 이상 기온으로 빚어지는 흉작 등으로 말미암아 세계적 식량 위기가 도래하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부실한 주택 금융 등과 같은 사기적 수법을 기반으로 했던 “금융 자본주의”의 신화가 산산 부서져 세계 자본주의 핵심부에서 금융 경색, 소비 위축, 장기적인 침체 내지 경기 후퇴의 조짐이 나타난다. 식량 자급률이 27%밖에 안되고 수출 의존률이 70% 넘는 한국은 지금 곧 “태풍의 눈”, 즉 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될 확률이 높다. 세계 곡물가격 폭등으로 인한 빈민층 (즉, 인구의 약 20%)의 생존 위협 가시화와 인플레이 압력 강화, 교역 조건 악화로 인한 수출 둔화 추세와 대기업 위주의 경제 구조에서의 신규 고용 창출의 침체, 늘어나기만 하는 청년 실업률…. 생계형 자살과 생계형 범죄의 대폭적 증가, 전체적인 사회적 불안의 확산 등은 이미 뻔히 내다 볼 수 있는 미래다. 위기와 불안의 늪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합리적으로, 상생적으로 사고한다면 마구 미쳐가는 “세계 시장” 대신에 우리 사회가 모두들의 이해 관계를 고려하여 시장 영역에 대한 통제를 대폭 높여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화가 빈민층 확대의 원인인 만큼 기업의 이윤율을 다소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비정규직 고용 사유를 최대한으로 줄이고 불가피한 경우 이외의 외주화를 법적으로 금하고, 부유층의 세금 부담을 대폭 늘리는 동시에 그 돈으로 빈민층을 위한 공공 고용도 늘리고, 군비 동결과 복지 비용으로의 점차적 전환의 쾌거를 이루는 등 “약자 중심의 경제”를 만드는 것은 지금 이 시대의 과제다. 우리가 자신들에게 고백하고 싶지 않지만 결국 극소수를 제외한 절대 다수는 어떤 방식으로든 무한 경쟁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피고용자, 즉 잠재적 약자가 아닌가? 그런데 오늘날 교육 정책으로 봐서는 이명박의 정부는 이 미증유의 위기에 정반대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약자에게는 경찰 국가의 총칼이 닥치고, 강자에게는 “경쟁”의 미명하에 그 영역의 무한 확충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백골단의 부활”과 재벌과 대통령 사이의 “핫라인 개통”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상징적이지 않는가? 이 길로 끝까지 가면 그 종착역은 브라질에서 볼 수 있는 현상, 즉 빈민굴들을 통제하는 마약 밀매 집단들과 경찰들 사이의 정기적이다 싶은 총격전이 벌이지고, 신규 고용이란 계약도 없는 “비공식 부문”에서만 이루어지고 소수의 정규 고용자가 계속 줄어들기만 하는 상황일 것이다. 아이들의 사교육비를 버느라고 부업 삼아 일본의 유흥가로 “갔다 오는” 한국 중산층 하부의 부인들을 보시기 바란다. 이와 같은 “부업”이 정상이 되고, 성매매와 각종의 범죄가 일상의 유기적 일부가 되는 것은 “열등반”과 “우등반” 사회의 미래다. 사실, 그 미래에 접어들어 “사회” 그 자체도 증발될 것이다. 제발 “열등반”으로 전락되지만 않기를 바라면서 끼라면 끼고 까라면 까는, “개성”을 “독특한 명품의 소지”나 “특별한 성형수술의 성공적 실시”쯤으로 아는 “절대 순응형” 인간들을 통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돈과 공포일 것이다. 표피적인 “민주”가 남는다 해도, 이 “사회성이 없는 사회”의 내면은 파시스트적일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미래를 원하고 있는 것인가?


함석헌이 옛날에 “평화”의 평 (平)자의 깊은 의미를 설명할 때에 “막힌 기운을 뚫게 하는 것”, “시원한 정신 상태”, “답답함이 없는 정신의 자유”라고 이야기했다. 시원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에서는 평화가 있다. 아침 7시에 등교하고 저녁 10시에 귀가하는 청소년의 기운은 어떤가? 그가 – 아직 군대에 끌려가지도 않았지만 – 이미 “평화” 아닌 “전쟁” 중에 있는 것이고, 그를 이 전쟁으로 내몬 이 정신병적 “사회” 자체도 매일 매일씩 부단한 “자기와의 전쟁”을 치른다. 홉스가 “모두와 모두의 전쟁”이 원시 시대의 상황이라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 후기 대한민국의 현실일 뿐이다. 고등 야만이라 할까? 결국 이 전쟁 판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따로 없다. 남는 것은 다수의 스트레스와 불쾌한 하루하루, 상당수의 고질적 우울증, 늘어나기만 하는 끔찍한 범죄, 마음 속에 누적된 분노를 풀어보려고 방화라도 할 수 있는 새로운 “남대문”을 찾으러 다니는 무수한 “원한 (怨恨)의 인간”들이다. “열등반” 출신들도, “우등반” 출신들도 똑같이 이 대한민국 (大恨憫國)에서 서로를 짓밟으려고 고통스럽게 발버둥치다가 고통스러운 노후를 거쳐 고통스러운, 한이 많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고득락 (離苦得樂)의 미거 (美擧)를 이루자면 똑같이 태어나고 똑같이 함께 살다가 죽는 중생 사이의 우열 (優劣)을 가리는 우 (愚)부터 벗어나는 것은 첫 순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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