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위원회] 이거 하믄 뭐한다우?

2010/04/21 10:38

이직보원(以直報怨) : 원한을 바름으로 갚는다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이거 하면 할수록 참 어렵다. 벌써 이 일을 시작한지 4년이 되어가면서 노하우가 쌓이고 요령이 생길 법도 하지만, 매번 현장에서 부딪칠 때마다 쉬운 것이 없다. 특히 시골마을 어르신들이 가지는 우리 위원회에 대한 궁금함을 질문할 때, 답하기가 참으로 곤혹스럽다.
 

그 중 가장 답하기 힘든 물음은 "(전라도 할머니) 이거 하믄 뭐한다우?"이다. 이 물음은 그분들의 삶의 오랜 경험에서, 또는 국가에 대한 불신과 짜증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막연한 기대감에서 던지는 가벼운 말일수도 있지만, 국가의 법을 지켜 일을 하는 조사관 입장에서는 함부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늦게나마 한국전쟁 전후 시기 발생한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그 동안 그 진실을 밝히기 어려웠던 우리 역사를 생각해보면 대단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일은 전쟁의 폐허와 깊은 상처를 딛고 국가와 지역공동체를 복원하고 재건하는 과정에서 이미 이야기되고 정리되었어야 할 문제이다. 특히 전쟁 중에 발생한 ‘민간인 학살’에 관한 문제는 인류의 전쟁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 경험과 기억이 생생히 보존되고 있을 때 해결해야 정상적인 일이 된다. 60년이 지나 ‘사건을 해결’한다는 발상은 어떻게 보면 우리 역사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된다.

 

근대 이후 우리 역사는 몇가지 사실이 중층으로 복합되어 있다. 일제 강점하의 친일과 독립운동으로 구분할 수 있는 사실이 있고, 외세에 의한 해방과 분단, 그리고 그 이후 남북과 좌우의 대립을 통한 상반된 국가 건설 프로그램의 진행이라는 사실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남과 북에서 ‘왜곡’된 형태로 결합되어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사실들은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을 정면으로 관통하고 있다. 그래서 어렵다.

 

이 문제를 어떤 사람들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며 (가해자에 대해) 구체적 처벌이나 불이익을 주지 못하는 것을 원통해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다 지나간 일을 지금 들추어 그 동안 근대화의 과업들을 성취하는데 기여한 사람들을 매도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비판하고 반대한다. 그래서 어렵다.

 

그 동안 우리 사회는 물질적 수준이나 민주주의 수준 그리고 국민 의식의 성숙이라는 점에서 많은 진전을 이루었다. 생각해보면, 좌우 대립의 피비린내 위에서 쌓아올린 이 성숙함 위에서 혹시라도 과거의 ‘왜곡’이 있으면 그것을 푸는 방향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정치적 견해와 사상을 달리 한다는 이유로 암살과 불법적인 폭력, 학살, 고문이 일상화된 시대를 돌이켜 볼 때, 지금의 사회적 갈등과 충돌은 그 피비린내 나는 시절과 비교해서 꽤 성숙(?)된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아직 사회적 갈등의 원인으로 제공되는 보수와 진보라는 말의 사용이 왜곡되게 이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해방이후 진행된 불법적인 폭력과 학살을 제대로 밝혀 국가의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 오히려 ‘보수’에 가깝고, 인류적 삶에 주목하면서 과거에 붙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하는데, 일부 언론매체와 어르신들이 잘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제 "이거 하믄 뭐한다우"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원한을 덕으로써 갚는다면 어떠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면 은혜에 대하여는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되물으면서 ‘원한은 곧음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지금 우리에게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以德報怨)’는 명제는 사실 아직 요원한 이상세계이다. 우리 모두의 실력이 그렇다. 그렇다고, 대립과 원한을 확대하고 반복하는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다(以怨報怨)’는 발상은 우리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원한을 바름으로 갚는다(以直報怨)’는 생각이 알맞은 것 같다.

 

공자의 지혜를 빌려 할머니의 물음에 답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올곧게 진실을 밝히는 것이 통합과 일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가 올바름(直)이 원(怨)을 해결하는 지혜를 얻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그런데, 공자의 지혜를 할머니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그래서 참 어렵다.

 

- 2010.4.21. 새벽. (위원회 소식지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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