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의 미학

2004/09/03 18:48
문신의 미학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조폭들의 전유물에서 관능적인 패션 아이템으로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머리가 나빠서 이 얘기를 엄마한테 했는지 모르겠다. 3년 전에 문신을 했다. 뉴욕에 출장갔을 때였는데 당시 묵고 있는 호텔이 그리니치빌리지에 있었다. 한때 예술가들과 보헤미안, 밥 딜런 같은 포크 뮤지션들의 보금자리로 유명했던 동네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클럽보다 옷가게나 타투숍이 즐비한 상업 공간으로 쇠퇴해 있었다. 그때 혼자 타투숍에 들어갔다. 결코 술김이 아니었다. 맥주 한잔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샤워를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갔다. 문신 견본이 진열된 두꺼운 책자를 두권이나 봤지만 마음에 드는 문양이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도안을 그려 타투이스트(문신 시술자)에게 보여줬다. 이제는 아무도 외치지 않는 ‘사랑과 평화’. 내 스스로 하트 문양과 ‘Peace’라는 영문자를 연결해 소박한 도안을 그렸다.


△ 사진/ 김태은

세상의 모든 타투이스트들은 스스로를 예술가라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한 화려한 문양을 원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디자인이 너무 단순하니까 컬러나 음영을 넣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NO Color, No Shadow.”

잉크 묻은 바늘이 내 어깨죽지의 얇은 살갗을 뚫어주길 기다리며 문신 시술대 의자 위에 숫처녀처럼 앉아 있었다. 두렵고 떨렸다. 첫 번째 바늘이 내 살갗을 관통할 때 양팔의 솜털이 곧추섰다. 그리고 점점 시간이 지나자 온몸에 얼얼한 열기가 번졌다. 난 바늘이 살갗을 뚫으며 내 어깨죽지에 ‘사랑과 평화’를 아로새길 때 느껴지는 내 몸의 감각에 최대한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 감각이 바로 문신의 미학이며 관능이라 여겼다.

예전에는 문신이 조폭 아저씨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확실히 하나의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무엇보다 안젤리나 졸리, 위노나 라이더, 주드 로, 조니 뎁,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할리우드 스타나 베컴과 안정환 같은 축구 스타들의 공이 컸다. 주변에도 멋진 타투를 자랑하는 스타들이 부쩍 많아졌다. 공효진은 가리기도 쉽고 드러내기도 쉽다는 이유로 발등에 별 모양을 새겼고, 양 어깨죽지에 천사의 날개를 그려넣은 모델 이유의 타투도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특히 얼마 전에 결혼한 이혜영은 엉덩이 부분에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인디언 부족들의 자유와 희망을 상징하는 새의 깃털을 새겼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레이저로 문신을 지우거나 다른 그림을 덧입혀 원래 글자를 은폐하려는 ‘헛짓’을 한다는 것이다. 당시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헌사 또는 같은 할리우드 스타와의 애정을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한 용도로 문신을 했던 안젤리나 졸리나 조니 뎁 같은 스타가 그 대표적 예이다. 특히 ‘위노나 포에버’라고 새긴 조니 뎁이나 ‘섹시 새디’라고 새긴 주드 로의 문신이 제일 어리석게 느껴진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에 빠지게끔 디자인되어 있는데, 동시에 그 사랑 안에 머물지 않게끔 디자인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말인가?

나중에 눈꼽만큼이라도 후회할 것 같으면 차라리 헤나를 해라. 진짜 문신의 미학을 아는 사람들에게 헤나는 쉽게 입고 벗는 양말짝 같은 패션 아이템에 불과하지만 나중에 레이저로 지울 바에 차라리 헤나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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