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서울역에 가면 길바닥에서 장기판 벌여 놓은 야바위꾼들이 제법 있었다. 대개는 장기판 벌인 녀석만이 아니라, 돈 내고 장기 두는 손님이나, 둘러서서 분위기 잡는 구경꾼들까지 한 통속으로 보면 틀림없다. 그렇게 거나하게 판을 벌려놓고, 이제나저제나 순진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야바위에 속지 않으려면 그 판에서 자기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은 같은 조직에 속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말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도 도저히 이길 방책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때는 게임에서 빠져 나와 게임규칙 자체를 뜯어봐야 한다. 게임의 규칙 자체를 남이 이길 수 없게 짜는 게 야바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런 게임은, 그 규칙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평균적 아이큐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게임에 무턱대고 들어가기보다는, 그 시간에 야바위꾼의 뒤통수를 갈길 궁리나 하는 게 좋겠다.

박정희 논쟁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이 논쟁은 예외 없이 "박정희의 공(功)과 과(過)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크냐"는 식으로 진행된다. 게임 규칙이 이렇게 놓여지면 그 안에 들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공이 크든, 과가 크든, 25년 전의 죽은 독재자가 졸지에 중요한 인물로 컴백하는 효과를 거두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이 야바위판에서 휘파람 불며 유유히 빠져나가는 게 좋겠다. "박정희는 죽었다. 아무리 애무해도 그의 물건은 서지 않는다."

신드롬의 이데올로기

5년 전이던가? 그때는 지금보다 더 했다. 때는 바야흐로 IMF 전야, 사람들은 잘 풀리지 않는 경제에 대한 불만을 박정희에 대한 향수로 표출했다. 영악한 언론사들은 바로 이런 대중심리에 영합해 박정희 띄우기에 나섰다. 신문사들이 교대로 돌아가면서 박정희 신드롬을 부추겼고, 조선일보에서 아예 한 면 전체를 통으로 써가며 매일 박정희 전기를 내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박정희가 IMF 사태의 해법이 될 수는 없는 일, 잠시 후 박정희 신드롬은 급속히 가라앉아 버린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경제가 잘 안 풀리면 사람들은 좋았던 시절,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끔찍했던 과거의 좋았던 측면만을 기억하는 법이다. 그래서 다시 박정희 향수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정치적 동기까지 겹쳤다. 지금 한나라당의 대표는 박정희 대통령의 귀하신 따님이 아닌가. 그러니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박정희 뒤로 결집할 정치적 이유까지 생긴 셈이다. 이게 지금 다시 반짝하고 있는 소위 박정희 향수의 본질이다. 이 논쟁(?), 애써 리바이벌 해야 이미 5년 전에 다 정리된 얘기다.

한때 박정희 신드롬에 고무되어 박정희 기념관 짓겠다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신문을 보니, 국민들의 자발적 후원이 거의 없어 사업 자체가 취소될 처지에 놓였다고 한다. 이게 대중들의 평가다. 한 마디로 대중들이 입으로 박정희를 높이 띄우는 데에는 어떤 경제적, 혹은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얘기다. 그것을 떠나서 정작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문제가 되면, 그토록 박정희를 그리워하던 이들이 아주 냉랭한 태도로 돌아서는 것이다.

신화, 민중창작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던가? 자기 책에 그는 "Das Volk dichtet"(민중은 詩作을 한다)이라는 독일어 속담을 인용했다. 한 마디로 민중은 어떤 이야기라도 만들어낼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신화는 민중들의 집단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뜻일 게다. 실제로 수많은 영웅들의 신화를 만들어냈던 그 아득한 그리스의 민중들처럼, 이 땅의 민중들 중의 적어도 일부는 21세기에 접어든 이 시대에도 계속 영웅시를 지으려는 강한 열망을 갖고 있다.

'신화'를 의미하는 'mythos'는 원래 '제멋대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는다. 신화적 사고방식에 대항해 합리적 사고방식을 내세운 철학자들이 '신화'라는 말에 그런 부정적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어쨌든 신화는 구술문화에 속하고, 철학은 활자문화에 속한다. 이는 세계를 이해하는 두 개의 상이한 틀 사이의 대립이다. 구술문화에 속하는 이들은 세계를 영웅들의 행위를 통해 이해하고, 활자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세계를 법칙들의 연관으로 설명하려 한다.

가령 폭풍우의 원인을 설명한다고 하자. 활자문화에 속한 이들은 이를 온도, 기압, 증발과 같은 비인격적 용어로 설명하려 할 것이다. 반면 구술문화에 속한 이들은 폭풍우 속에서 어떤 인격적 힘을 찾으려 한다. 폭풍우, 그것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진노다. 경제발전이나 경제위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구술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경제위기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그것의 '범인'을 찾아 심판하기를 좋아한다. 또한 경제발전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그것의 '은인'을 찾아 감사부터 하러든다.

은총과 믿음

박정희에 대한 논쟁은 그의 '공과 과'에 대한 정치적 논쟁이 아니라, 실은 두 개의 사고방식 사이에 벌어지는 문화적 논쟁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사회의 구술문화층과 활자문화층 사이의 공시적 충돌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좀 산다고 하는 서구의 그 어느 나라에도 자기들이 그만큼 먹고사는 공로를 특정 개인에게 돌리고 감사해대는 어법은 아예 존재하지를 않는다. 이 재미있는 정치적 의인법은 우리 사회에 아직 강하게 남은 어떤 시작(詩作)의 욕구, 즉 영웅서사시를 갖고 있었던 구술문화의 잔재다.

박정희 추종자들의 태도를 보면 재미있게도 우리 어머니의 그것을 닮았다. 독실한 신자이신 어머니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님의 은총으로 설명한다. 그 어떤 사건이 터지고, 그 어떤 사안이 걸려도, 어머니는 그 배후에서 결국 주님의 손길을 읽어내고야 만다. 내가 일해서 번 돈도 어머니의 머릿속에서는 주님이 주신 축복으로 설명된다. 운이 좋은 것은 주님의 은총이요, 운이 나쁜 것은 주님이 내리신 시험으로 간주된다. 이 반석 같은 믿음을 과연 어떤 논리로 깰 수 있을까? 또 그것을 깨어서 무엇하겠는가?

경상북도 구미에 있는 박정희 생가에 가면, 아직도 그 초상사진 앞에서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노인들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박정희 신드롬의 종교적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다. 가끔 대학의 교수들 중에서도 논문식 글쓰기로 박정희 영웅시를 쓰는 해괴한 분들이 계신데, 그들은 모종의 범주 오류에 빠져 있다. 이들은 자기들이 가진 전제자체가 '신화적'이라는 것을 의식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화적 내용과 과학적 형식은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

주체성의 문제

남이야 마징가 제트를 구세주로 섬기든, 도널드 덕을 하나님으로 모시든, 간섭할 게 못 된다. 박정희 덕분에 먹고산다고 믿는 사람들은 영원히 그 믿음을 갖고 살아가면 된다. 그 믿음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헌법이 보장하는 신앙의 자유는 맘껏 누릴 일이다. 아직도 청학동에서 상투 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존재로써 이 사회를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만드는 것처럼, 21세기 넘도록 박정희를 추종하는 이들도 그 존재로써 인류학적으로 보존가치가 매우 큰 문화상품이 될 수 있다.

박정희는 그 추종자들에게 심리적 '아버지'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나이가 아무리 먹어도 자신을 그의 '자녀'로 생각하는 것처럼, 박정희를 가부장으로 모신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자신의 그의 '자녀'로 생각한다. 발달심리학적으로 보면 그들은 아직 자의식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독자적으로 무슨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지 못한다. 자기들은 오직 '지도자'를 만나야 비로소 존재를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들의 의식의 바탕에 강하게 깔려 있다.

그들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서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기를 원한다. 그들은 스스로 행동하지 못한다.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서 자신들을 끌어주기를 바란다. 그들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서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기를 기대한다.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위대한 지도자를 갖는 것이라고, 경제를 되살리는 유일한 길도 훌륭한 지도자를 갖는 것뿐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자기가 자신을 다스리는 자율적 정체, 즉 민주주의의 능력이 없다. 사실 이념적 방향만 다를 뿐, 박정희 추종자는 실은 김일성 추종자와 본바탕이 같다.

경제 문제

경제가 어렵다. 대충 풀릴 경기가 아닌 모양이다. 수출은 늘어도 내수는 살지 않고, 경제는 성장해도 고용은 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백약이 무효라는 푸념을 하는 상황이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까? 구술문화에 속한 이와 활자문화에 속한 이는 이 상황을 각각 다르게 이해하며, 그것을 극복하는 방안도 각각 다른 식으로 마련할 것이다. 구술문화에 속한 이는 경제문제에 대단히 인격적인 접근을 하고, 활자문화에 속한 이는 그 문제를 건조하게 비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가령 구술문화에 속한 이는 현재의 경제위기가 정치적 지도력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것이다. 만약 노무현이 박정희와 같은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다면, 애초에 경제가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박정희, 전두환 때만큼 경제가 고속으로 성장하던 시절이 있었던가? 이것으로 보아 경제를 성장시키려면 역시 권위주의적 리더쉽을 다시 도입해야 마땅하고, 그 리더쉽 아래 온 국민을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총화 단결시켜야 한다. 그러면 아직도 고속성장이 가능하다. 박정희 추종자들은 아마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반면 활자문화에 속한 이는 위기의 '범인'이 아니라 그것의 '원인'을 찾으려 할 것이다. 경제에 위기가 왔다면, 그것은 경제적 소통의 어느 지점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소통의 시스템 자체를 튼튼하게 만드는 길을 찾을 것이다. 아울러 위기를 극복하게 해줄 힘도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끌어낼 것이다. 경제를 발전시켜온 것도, 앞으로 경제를 다시 회생시킬 것도 각각의 경제주체들의 합리적 판단과 적절한 행동뿐이다.

"바람이 왜 부는가?" 어떤 이는 온도의 차이에 따른 기압의 차이, 그로 인한 공기의 이동 등등을 얘기할 것이다. 이런 과학적 설명의 건조함을 싫어하는 이들은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풍백'이라는 가설을 더 선호할 것이다. 둘 다 맞는 얘기다. 바람은 기압의 차이로 공기가 이동하는 현상이자, 환웅과 함께 이 땅에 내려온 풍백이 일으키는 조화이기도 하다. 이 두 견해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를 놓고 논쟁하는 것은, 부처님과 예수님의 대결만큼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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