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받은 자는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 평가는 권력과 일정한 형태로 관계되어 있다.
2) 평가의 외부성은 자기신뢰에서 출발하는 드러냄이어야 한다.


0. 엄청난 책더미들을 배경으로 TV에 등장하는 전문가 집단들이 우리들을 대신하여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국회의원 나리들이 유권자들을 대신하여 정치하는 것과 같이 볼품없고 형편없는 일이다. 국가나 제도적 권력이 지니는 장치들과 더불어 신체, 사회, 성, 영혼, 경제 등 우리가 기정의 사실이라고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개념들의 ‘객관성’을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연 평가로 인해 부여된 ‘객관성’은 당연한 것인가? 우리들의 삶의 과정에서 진행되고 있는 당연한(?) 시험이나 평가에 대해 스스로 깊이 음미하고 사유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1.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사회적으로 믿을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가는 개인의 정보이면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평가를 받게 되는 것과 관련해서 개인적 동기와 더불어 사회적 동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운 거시적인 규모의 왕족이나 권력자들의 정치적 역사보다는 가족, 음식, 주거 등과 같은 미시적 사회사를 연구한 페르낭 브로델(Femad Braudel)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사소한 생활의 변화조차도 사회․정치적 영향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으며, 일부 세력은 그런 사소한 것들을 정치적으로 주도하거나 이용하기도 한다고 이야기 했다. 더 나아가 미시적인 개개인 삶의 과정이나 변화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사유한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효과적인 훈육방법으로서의) 시험은 감시하는 위계질서의 기술과 규격화를 만드는 상벌 제도와 기술을 결합시킨 것”이며, 또한 시험이나 평가는 “규격화하는 시선이고, 자격을 부여하고 분류하고 처벌할 수 있는 감시”라고 말했다.

3. 감옥, 학교, 병원과 같은 기구들은 평가에 의해서 유지된다. 이 기구들은 평가 말고는 할 일이 없는 평가가 전부인 조직이다. 죄인, 학생, 환자와 더불어 간수, 교사, 의사도 평가기계로 작동한다. 죄인, 학생, 환자는 평가받음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정체성이 형성되고, 간수, 교사, 의사는 평가자의 위치에 있음으로 해서 자신들의 권력이 유지된다.

4. 평가는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눈에 보이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수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일 뿐이다.

5. 평가는 비교이다. 평가결과를 측정하고 동시에 상벌을 부여할 수 있는 한 자신과 타인들과의 끊임없는 비교가 점점 더 중요해진다. 따라서 평가는 궁극적으로 서열화를 요구한다.

6. 평가는 대상이 존재하며, 그 대상을 계량화, 숫자화 시킨다. 대상을 숫자화 시킨다는 발상은 구조주의적 생각이다. 구조주의 사유는 우리가 이세계에서 경험하는 현상들이 아무리 다양하고 복잡하게 보인다 해도 그것들을 내포하는 어떤 구조가 존재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전세계 사람들이 모두 식사를 한다. 그런데 그 밥 먹는 양태들이 무한히 복잡하다 해도 우리는 그 심층에서 어떤 법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식사법의 구조이다. 이 구조와 법칙을 가지고 ‘식사’라는 현상을 이해한다. 구조주의는 구체적인 것들을 추상적인 것들 속에 용해시킨다. 다양하게 들끓고 하나로 상징하기 힘든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전체적인 구도를 그린다는 생각이 구조주의이다. 이런 시스템의 핵심적 기술은 숫자화이다. 공무원들이 공문서를 통해 숫자로 다양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원래 공무원들이 숫자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근대사회의 거대한 담론이 구조주의이며, 그 담론의 핵심인 국가조직의 공무원들이 숫자로 세상을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구조주의적 사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7. 평가는 기준이나 표준이 존재한다. 그 기준점은 100점이 아니라 0점이다. 0점을 어디에 위치 지을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하다. 따라서 평가는 통제를 위한 장치이며, 거기에는 권력이 작동한다. 0점의 위치선정에는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준을 설정하고, 그것을 장악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권력이다. 더 정확히는 그런 욕망이 현실화된 구체적인 장치들이 권력이다. 평가는 권력이다.

8. 이런 평가 권력은 복종하는 자에게 드러나지 않고 중독되게 만든다. 모든 행동이나 능력은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평가결과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더 생각해보자. 개인은 자유롭다.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가 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신(神)이 인간을 심판을 하기 위해서 부여한 것이다. 자유를 부여하는 것은 책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자유로운 능력은 높은 평가를 유도한다. 그런 평가결과는 당신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당신이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높은 점수와 낮은 점수의 평가결과는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신의 심판이라는 소용돌이를 벗어날 수 가 없다. 외부에서 심판하는 한 개인의 능력측정으로서의 평가는 복종하게 만드는 규율장치인 것이다. 평가는 심판이며, 우리는 거기에 깊이 중독되어 있다.

9. 평가는 형사재판보다 훨씬 가혹하다. 시간(지각, 결석, 일의 중단), 활동(부주의, 태만, 열의부족), 품행(버릇없음, 반항), 말투(잡담, 무례함), 신체(단정치 못한 자세, 부적절한 몸짓, 불결) 및 성의 표현(저속함, 추잡함)등이 처벌 된다. 생각보다 권력이 치밀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푸코는 평가를 “지극히 사소한 일을 처벌하는 데에 모든 것이 이용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모든 사람이 처벌되고 처벌하는 보편적 구조 속에 포획되어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규칙 위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일체의 사항, 모든 일탈행위이며, 예를 들어 병사는 요구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때마다 ‘죄’를 범하는 것이며, 아동의 ‘죄’란 경미한 규칙위반과 과제 달성의 무능력 등인 것”이다. 이런 평가는 “일탈 행위을 없애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명료하게 정해진 ‘인위적’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보이는 것만 평가하면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영역까지 통제하려는 것이 평가의 의도이다.

10. 자기배려에 기반한 드러냄이 최고의 평가이다. 복종하게 만드는 권력이 개입하지 않고 자기신뢰에 따른 자발적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네이버(www.naver.com) [지식in]글 따위에서 별점이나 내공을 부탁하는 행위, 자기 자신의 사진을 올려 요염함을 뽐내는 것은 새로운 자발적 평가행위이다. 거기에는 0점도, 기준점도, 숫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질서가 부여되지 않는 그 무엇에서 자신이 직접 기준점이 되며, 그 기준이 언제나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계획한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하고 외부평가를 통해 서열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평가는 이처럼 ‘주어진 것’을 넘어 자발적으로 ‘만들어져야’하는 것이다. 평가는 스스로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지 외부에서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이제 통제와 조작에 대한 저항의 문제가 발생한다.

11. 길들어진 사회적 기계에서 자율적 주체로 자신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는 기존의 구조주의적 분석과 사유를 벗어나 새로운 무의식 분석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율적 주체성을 생산하는 방식. 새로운 주체성을 생성하는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평가받은 자는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2006. 10. 15.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Trackback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nomad22/trackback/64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