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 불면과 일리야

2007/01/23 17:52
 

레비나스 - 불면과 일리야

- 조광제 (철학자)

 

 

“불면은 불면의 상태가 끝나지 않으리라는 의식, 즉 우리를 붙잡고 있는 ‘깨어 있음’의 상태를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 목적도 없이 깨어 지키고 있는 상태. 여기에 묶여 있는 순간, 시작점과 종착점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한 번쯤 불면에 시달려 보지 않은 사람은 시인이나 예술가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면의 위력에 사로잡혀버리면 정말이지 얼마나 황당한지요. 불면의 이유를 아는 자는 진정 불면증을 앓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런 이유도, 아무런 목적도, 아무런 동기도,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찾아오는 것이 불면이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기 싫은데 깨어 있을 수밖에 없는 깨어 있음만큼 진저리쳐지는 일도 드물 것입니다. 무슨 열정이 배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비애가 배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정확하게 걸려들었다는 느낌 외에는 특별한 느낌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 불면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불면의 지경에서 사물은 어떻게 다가오던가요? 불면을 앓고 있는 나만 부조리하고 황당하던가요? 그게 아니지요. 상황 전체가 부조리하고 황당했습니다. 그러니 그 상황 속에서 사물들 역시 각자의 경계를 상실한 나머지 하나로 덩이지고 말았지요. 저 멀리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 다가와 내리 누르는 것도 아니고, 그저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허공에 붕 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지요. 밤 짙은 시각, 불을 끄고 누웠기에 그런 것이 아니지요. 설사 불을 환하게 밝혀 놓았다 할지라도 사물들은 그렇게 마치 뱀이 벗어놓은 허물처럼 멍하게 서 있을 뿐입니다. 불면은 그렇게 해서 잠들지 못하는, 잠들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나 자신마저 그러한 허물로 변신하여 덩이져 있는 사물들 속으로 끌고 갑니다.


그럴 때, 그렇게 불면이 나 자신을 엄습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으로 다가올 때, 존재론적인 근본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고 본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오늘날 의미 있게 유행하고 있는 타자의 철학을 건립한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내세웠던 글귀는 그가 쓴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문예출판사)의 한 대목입니다. 그 근본 상황에서 열리는 존재를 레비나스는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불가능한 ‘il y a'(일리야)라고 합니다. 불면과 일리야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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