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생성을 논하는 접속의 논리학 ‘리좀(rhizome)’

- 이정우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저작 『천의 고원』에서 중심이 제거된 세계의 논리학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제거된 중심은 초월적 중심만이 아니라 내재적 중심이기도 하다. 서구 신학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초월적 중심으로서의 신, ‘선의 이데아’…등만이 아니라 내재적 중심(예컨대 ‘태극’), 나아가 근대 철학이 제시한 ‘선험적 주체’ 같은 내재적 중심도 거부된다.(내재성을 가장하는 초월성의 한 예를 난바라 시게루의 ‘공동체 민주주의’에서 볼 수 있다)

들뢰즈의 초기 작업은 이런 입장을 정립하기 위한 지난한 철학사적 연구들로 채워져 있다.

리좀의 논리학은 ‘접속’의 논리학이다. 그것은 관계의 생성을 논한다. 고중세의 실체 중심적 사유가 현대의 관계 중심의 사유로 전환한 것은 사상사의 큰 성과이지만, 관계의 그물이 고착화될 때 이번에는 관계망이 실체의 역할을 대체한다. 관계 자체가 생성할 때에만 본질주의가 극복된다. 리좀은 다양한 접속들을 통해서 관계가 생성해 가는 장(場)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배치, 다양체, 추상기계를 중심으로 하는, 어지러울 정도의 다양한 개념들을 통해서 리좀의 논리학을 구성한다.

리좀의 세계는 개체들 ― 집합적 개체들까지 포함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기계’(스토아 학파의 ‘體’) ― 이 일정한 동일성으로 고착되지 않고 계속 생성하는 관계들을 통해서 변해 가는 세계이다. 그것은 氣가 개체성에 갇혀 제한되기보다 계속되는 생성으로 개체성을 변화시키는 세계이다. 개체는 氣를 제한하지만, 氣는 그 개체를 넘어서는 ‘잉여’이며 개체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해 주는 힘이다. 세계를 일정하게 조직된 氣, 일정한 체계에 따라서만 존재할 수 있는 氣로 파악할 때, 氣의 잉여는 이해되지 못한다. 선험적 理를 전제할 때 氣는 理의 체계에 입각해서만 이해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서구의 수목형(樹木型) 사유를 비판하고 동양의 리좀적 사유를 찾았지만, 이것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주자의 ‘이일분수(理一分殊)’ 체계만큼 수목형 사유를 단적으로(거의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체계가 어디 또 있겠는가. ‘분수’라는 말만큼 수목형 사유의 사회학적 변용을 잘 보여주는 개념이 어디 또 있겠는가. 문제는 서양/동양이라는 지역적 구분이 아니라 수목형/리좀형의 사유상의 구분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氣를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시대에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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