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철학자 메를로-퐁티, ‘봄의 나르시시즘’ 

-조광제 (철학자)

 

보는 자는 그가 보고 있는 것에서 포착되기 때문에 그가 보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모든 봄에는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즘이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보는 자는 그가 봄을 수행할 때 그의 봄은 사물들을 대리하여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행하고, 흔히 많은 화가들이 말하듯이 나는 내가 사물들에 의해 주시되고 있음을 느끼고, 나의 능동성은 수동성과 동일하다.


몸 철학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유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우리의 눈은 마치 바깥 사물들이나 사건들을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충족될 수 없는 듯 보고자 하는 ‘욕정’으로 충혈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각을 통해 온갖 것들을 봅니다. 풍경을 보고, 그림을 보고, 사진을 보고,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고, 무용을 보고, 혁명을 보고, 상품을 보고, 신문을 보고, 텔레비전을 보고, 글을 보고, 심지어 ‘두고 보자’고도 합니다.

특히 우리말은 이 ‘본다’는 말을 아주 넓고 다양하게 씁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보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되면 아연실색 골치 아파집니다. 두말 할 것이 없다고요? 그거야 당연히 두 눈을 뜨고 있는 내가 보는 것이라고요.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 메를로-퐁티의 이야깁니다. 우리는 내가 보려고 하는 것만 보지 않습니다. 못 볼 것을 봤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눈을 뜨고 있는 한, 아니 심지어 눈을 감고 있어도, 도대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실상입니다. 보려고 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자꾸 보게 됩니다. 굳이 보려고 마음을 먹은 대상도 아닌데 주변에서 저절로 치고 들어옵니다.


보이는 것들은 보는 나를 제 마음대로 막 치고 들어와 나의 시각 즉 나의 봄을 가득 채웁니다. 화가 세잔은 “풍경이 내 속에서 자기를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풍경을 생각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풍경 저 놈이 나의 의식을 치고 들어와 자기를 생각한다니 도대체 될 법한 말인가요? 충분히 될 법할 뿐만


아니라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이 메를로-퐁티가 ‘봄의 나르시시즘’이라 명명하는 사태입니다.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여의 경지라 달리 말할 수 있습니다.

눈을 번연히 뜨고서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이러한 경지를 느끼게 되는 순간 우리는

화가가 되고 시인이 되고 예술가가 되는 정확한 길목에 들어선다 하겠습니다. 감각의

비의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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