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재면(混在面)을 향해

2007/01/23 17:45

혼재면(混在面)을 향해  “나를 가르는 분절선을 무너뜨리고 독창적 꼴라쥬를 생성하라.”

- 이정우 (철학자)

 

 

우리의 삶은 층화(層化)되어 있는 삶이다. 생물학적으로 우리는 ‘인간’이라는 층에 속한다. 우리는 새나 곤충이 아니다. 한 사람은 사회학적으로 부유층, 중산층, 등의 층의 어느 하나에 속한다. 대학에 들어갈 때 우리는 수목형 구조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이과냐 문과냐? 인문대학이냐 사회대학이냐? 문학이냐 역사냐 철학이냐? 우리의 삶은 시간적으로도 분절되어 있다. 초등학생 6년, 중학생 3년, …

우리의 삶은 층화되어 있고, ‘영토화’되어 있다. 사회는 항상 선택을 요구한다. 그래서 한 인간은, 언어학에서 말하는 통합체와 계열체처럼, 선택지들에서의 선택의 계열로 구성된다.

철수는 “경기도 사람이고, 기독교도이고, A 대학을 나와 B 회사에 다니고, …”

이러한 구조는 자연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정치적이다. 사회는 기호체제(記號體制) ― 기호체계가 아니다 ― 이다. 기호들의 분절로 이루어진 거대한 기호체제인 것이다.

노마디즘은 분절선들을 가로지르는 탈주선을 찾는다. 그러나 탈주선은 어디에나 있다. 세계의 근원은 氣이고 氣 자체가 애초에 생성이요 잉여이기 때문이다. 분절선들이 본래적이고 인위적으로 탈주선을 찾는 것이 아니다. 분절선들 자체가 본래의 氣에 작위(作爲)의 그물을 던져 코드화 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어떤 체제도 동일성으로 고착되지 못하며, 그 아래에는 항상 탈주선들의 누수(漏水)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힘, 탈주선들로 표현되는 힘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들의 욕망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다. 욕망은 氣의 근본 성격이다.

분절선들을 무너뜨리고 삶의 꼴라주를 만드는 것, 이것은 혼재면(plan de consistance)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주어진 격자의 어느 한 섹터를 선택하기보다는 격자를 가로지르면서 고유의 꼴라주를 창조해내는 것, 그것이 한 인간의 ‘스타일’이다.(격자의 한 섹터를 선택하는 것, 그것도 하나의 스타일이다) 큰 인간은 그만큼 독창적인 꼴라주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장자가 말한 “化而爲鳥”의 경지, 물고기가 변해 새가 되는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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