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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6/12
    아포산 1
    봄날
  2. 2005/06/12
    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
    봄날
  3. 2005/06/08
    아포산에 오르다
    봄날
  4. 2005/06/07
    재앙의 땅에서 만난 아이들
    봄날

아포산 1

아포산을 향해 출발했다. 길떠난 시간이 새벽3시..

 

다바오 시내에서 키다파완으로 가는 차를 탔다.

버스라 짐작했었는데 우리가 오른 차는 대형화물트럭 뒷칸이었다.

이곳에서는 큰 화물트럭도 사람이 타는 대중교통일 뿐이다.

 

우기시즌이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자 트럭 승무원들이 천막을 치기시작했고 사람들은 그 천막안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화물칸에 벌러덩 누었다. 그리고 비오는 하늘을 보았다.

별이, 그리고 새벽 달이 눈에 들어왔다.

'삶은 이렇게 전혀 다른 방향으로도 이어지는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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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

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

지난 4월 26일 밤 12시경 필리핀 마귄다나오(Maguindanao)의 한 마을에서 무장 군인들이 부인과 그의 아이들이 공포에 떨고 있는 앞에서 하킴(가명)을 체포했다. 군인들은 3일 동안 하킴의 온 몸을 꽁꽁 묶고 조사하였으나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자 되돌려 보냈다. 물론 군인들은, 체포영장 제시는커녕 체포 이유에 대하여 전혀 고지하지 않았으며, 체포 당일에는 하킴을 고문했다. 같은 날 그 무장군인들은 하킴 집 근처에 있는 두 집에 영장도 없이 무단 침입하여 무기를 찾는다며 가재도구를 헤집어 놓았다. 사건 내용만 보자면, 일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인권침해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피킷에 있는 코코넛 나무. 맨 앞에 있는 나무는 온 몸에 총알 흔적 투성이다. 윗 부분은 폭탄으로 잘려졌다.

그러나, 이곳 피해자들은 동트기 전 자신들이 살고 있던 동네를 떠나 다른 동네로 도망가야만 했다. 언제 또 군인들이 쳐들어올지 몰라 두려웠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고 살던 이들은 동네를 떠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언제 돌아갈 것이냐는 질문에, 집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이 떠나지 않는 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과의 인터뷰가 사건 발생일로부터 약 1개월이 지난 뒤 이루어졌는데, 그 때까지도 그들의 눈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민다나오의 국내 난민들

민다나오 섬은, 1997년·2000·2003년 정부와 이슬람해방전선(MILF, Moro Islamic Liberation Front) 사이의 세 차례 큰 내전을 겪었다. 민다나오 섬에 가면 아직도 전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총알 흔적이 남아 있는 코코넛 나무들과 완전히 전소해 버린 집들. 그러나 무엇보다 아직까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수만 명의 국내 난민들(Inernally Displaced Persons, IDPs, 아래 상자설명 참조)이 전쟁의 비극을 그대로 전달해 준다. 2003년에는 약 20만 명의 국내 난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피투폰(pitoopon)에 있는 난민센터

무고한 이들은 생명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옷가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전쟁 지역에서 빠져나왔다. 일부는 친척집으로 피난갔으나, 대다수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의 학교나 관청 마당에 모였다. 몇 개월 그곳에서 피난 생활을 한 후 부근 빈터에 임시 처소를 짓고 공동생활에 들어갔다. 식량 배급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선단체에서 식수를 위한 우물을 만들어주기 전까지는 마실 물도 제대로 구할 수 없었다. 많은 아이들이 설사병으로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들 대부분이 농민인지라, 피난과 동시에 일자리를 잃었다. 아이들은 피난 생활 초기에는 교실이 없어 학교에 못 갔고, 계속되는 피난생활 기간 동안에는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그냥,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

전쟁이 종료 된지 2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돌아가더라도 마땅히 먹고 살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전쟁으로 경작지와 경작에 사용한 동물들을 모두 잃어 버렸다).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도 이들의 발길을 막고 있다. 실제로 지난 2월, 격전지 중 한 곳이던 피킷(Pikit)에서 불발탄이 터져 밭에서 일하던 주민이 큰 상처를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난민센터이든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아이들이었다.

하킴의 가족들과 난민센터에서 만난 분들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인가요?" 그들은 주저없이 이야기한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사는 것, 그것이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다. 그냥,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


전쟁을 멈추기 위해 나선 사람들

민다나오 섬에 사는 국내 난민들은 난민에 대한 지원과 안전한 복귀를 주장하는 시위를 통해 그들의 힘(Bakwit power, Bakwit은 따갈로그어로 국내난민을 의미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전쟁의 피해자로 남아있을 수만은 없다면서, 전쟁 감시 역할을 자처하며 주민들을 조직하고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전쟁 감시를 위하여 주민들이 '반타이 시스파이어'(Bantay Ceaserifre, 전쟁감시)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지역 주민 한 명씩 돌아가면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전쟁과 군인들의 인권침해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들은 전쟁과 인권침해에 상당 부분 노출되어 있다.

"평안하셔야 합니다. 제발…아무 일 없어야 합니다." 하킴 부인의 손을 잡으며 간절히 기도했다. [민다나오=이상희]

국내 난민에 대하여

'국내 난민'(IDP, IDP가 국내유민, 피난민, 국내 유랑민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은 '무력충돌,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폭력 상황, 인권침해, 자연 또는 사람에 의해 발생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 기존 거주지를 떠날 수밖에 없거나, 떠나도록 강요받은 사람들'로서, 국경 안에서 이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반면, '난민(refugee)'이라 함은 국경 밖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1999년 발표된 미국 난민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 국내 난민 발생률이 4위라고 한다. 필리핀에서 국내 난민이 생기는 주된 이유는 무력충돌(특히 민다나오 섬을 중심으로)이다. 그리고, 인프라 관련 프로젝트나 경제 특구 등의 정부계획으로 도시 빈민들이 국내 난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농촌에서는 경작지를 비경작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또는 다국적 기업의 광물 채취과정에서 많은 국내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많은 국내 난민들이 불안, 공포, 충격, 산만 등의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유엔은 국내 난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내 난민 가이드 원칙(UN guiding principles on internal displacement)을 제정하였다. 이 원칙에 따르면, 시민들이 비자발적이고 무분별하게 주거지로부터 이탈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정부 당국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국내 난민이 발생하더라도 난민기간 동안 이들을 충분히 보호하고, 복귀나 재정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위 원칙에서 금지하고 있는 비자발적 이탈에는, 1)정치적 분리나 인종 청소, 기타 민족적·정치적·인종적 구성인원을 변경할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이탈 2)무력충돌 상황에서 안전보장이나 군인들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탈 3)강제와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탈 4)피난을 갈 정도로 안전이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재앙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탈 5)대규모 처벌로 이루어지는 이탈 등이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매해 발생하는 수재민은 국내 난민으로서 위 원칙에 따라 보호되어야 한다. 또한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도, 이전 예정지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하여 국내 난민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위 원칙의 적용을 검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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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산에 오르다

산이 싫었다.

기억속에서 산을 타본 기억이라곤 전경들에 쫒겨 오갈 때가 없었을 때 뿐이었다.

 

99년 처음으로 산에 올랐다.

산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과 산에 대한 두려움으로 산에 오르면서 울고 말았다. 

하지만 산에 오르면서 누군가를 맘속 깊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산을 찾았다.

 

2004년 또 다시 산에 올랐다.  

한번쯤 꼭 오르고 싶은 산이었지만 이젠 '이별'을 고하는 산행이었기에

그 흔한 사진한장 간직하지 못했다.

 

묻어둔 추억들이 너무 많기에 다시는 오르지 못할 것 같은 산을 다시 찾았다.

 

2005년 5월 필리핀의 산에 올랐다.

필리핀에서도 가장 높다는 산에, 가장 험하다는 산에

폭우를 뚫고 3박4일간의 산행을 시도했다.

 

거대한 산을 마주대하면서

길조차 제대로 나있지 않은 무성한 나무와 수풀을 뚫고 길을 오르고 또 오르면서

그렇게 정상에 오르고 나서 

산에 대한 두려움과 산을 통해 얻은 인연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감 한자락, 삶에 대한 욕심 한자락을 얻어왔다.

 

그때 그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고난의 산행을 통해 얻은 겸허함과 자신감으로 살 수 있다면

내 인생에도 봄날이 찾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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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의 땅에서 만난 아이들

재앙의 땅에서 만난 아이들
미군기지 철수의 땅, 수빅과 클락 방문기
 
"과학자들조차도 사방가도는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지역이라며 땅의 심각한 오염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정부에 지역폐쇄와 경고문구 게시를 요구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차는 이미 밀라 '국제 미군기지정화운동 연합'(Alliance for Bases Clean UP International: ABC International) 사무국장이 가리 킨 위험지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입구부터 시작된 인가는 뜀 없이 이어졌다. 10여분쯤 더 달린 후 차는 어느 집 대문 앞에 멈췄다. 하나 둘, 아이를 안은 엄마들이 집으로 모여들더니 작은 마당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 아이는 님플, 심장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성장과 발육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이 아이는 존말이에요. 간에 문제가 있지요. 이제 두 살밖에 되지 않은 이 아이는 자궁질환을 갖고 태어났고, 조지와 에드워드는 각각 11살인데 둘 다 소아마비를 앓고 있어요. 그리고 이 아이는……." 영어를 못하는 아이들의 엄마를 대신해 밀라가 아이들의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의학용어로 시작된 설명은 끊임없이 이어지더니, "아이들 대부분이 빠른 시간 안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지만 돈이 없어 병원에 가는 것조차 어렵다"는 말로 끝났다.

갑자기 화가 북받쳤다. '왜 계속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인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이미 아이들로써 그 심각한 위험이 증명됐음에도 불구하고 왜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기대하며.' 하지만 화는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았다. 누구라고 떠나고 싶지 않았을까? 이 저주받은 땅을. 하지만 그들은 갈 곳이 없다. 애초부터 조금이라도 선택의 여지가 있었더라면 미군에 의해 저주받은 클락(Clark)의 사방가도에는 발조차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방가도는 미군의 기지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클락에서도 환경오염이 가장 심각한 곳 중 하나이며, 이 지역 주민들 대부분은 미군기지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에드워드와 그의 엄마. 그의 웃음은 너무 해맑았다.


사방가도의 아이들. 미군이 남긴 재앙이 언제 이들의 웃음을 빼앗아 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88년 미군 주둔의 역사

마닐라에서 불과 70∼80킬로미터 떨어진 수빅(Subic)과 클락이 미군기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건 필리핀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뒤부터. 1880년대까지 스페인 해군의 선박수리소가 있었던 수빅에는 1903년 해군기지(Subic Naval Station)가, 클락에는 1910년 공군기지(Clark Air Base)가 만들어졌다. 1946년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배가 끝난 뒤에도 두 기지는 굳건히 유지됐다. 필리핀과 미국은 1947년 기지협정(Military Bases Agreement)을 체결하고 99년간 무상 기지임대에 합의했다.

하지만 1966년 마르코스 대통령이 미군기지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오면서부터 철옹성 같던 기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르코스는 기지협상을 재개하여 임대기간을 25년으로 감축시키는데 성공했으며, 1970년대부터는 기지 사용과 관련된 보상 문제를 제기해 일정금액의 경제지원을 약속 받았다. 그리고 1991년 필리핀 상원은 미군 기지임대 연장안을 거부했다. 88년 미군기지 주둔의 역사가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미군은 91년 철수했고, 두 지역에는 기지전환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수빅과 클락은 경제특구로 지정됐다. 미군의 아시아 최대 기지였던 수빅과 클락이 천혜의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관광과 레저, 경제지구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수빅과 클락의 재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떠난 기지에 드리운 재앙

"저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수빅 피해자들의 조직 '수빅 자연자원보호 운동본부'(Yamang Kalikasan Aming Pangangalgaan: YAKAP, 아래 수빅 운동본부) 사무실에서 만난 리노는 이렇게 자신을 설명했다. 일흔을 넘긴 리노는 1957년부터 미군기지와 관련된 일을 해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미군을 위해 일했으며, 괌 기지에서 일하기도 했다. 35년 동안 미군기지에서 일하면서 그는 석면을 비롯한 여러 가지 화학물질에 노출됐고 오염됐다.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이미 결핵 등의 질환으로 고인이 된지 오래다. 마일도 마찬가지다. 미군기지에서 청소일을 했다는 마일은 "쓰레기를 치우다가 (화학물질 냄새에) 여러 번 기절했습니다. 관리인은 이 사실을 다른 동료들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했고, 저는 계속 몸이 안 좋았지만 직장을 잃을까봐 아프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후에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폐암을 선고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리노. 그는 수빅 미군기지를 손바닥처럼 꿰고 있었다.


마일은 죽을 날만을 기다리면서 산다고 했다. 폐는 물론 심장과 혈액에도 이상증세가 나타나고 있다.


재앙은 수빅기지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일했던 노동자들은 물론 그들의 자녀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리고 미군 철수 이후 기지로 사용됐던 건물들이 공장 등으로 임대되면서 그곳에서 일했던 노동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이어졌다. 제이슨(8)이 바로 그런 경우다. 제이슨의 아빠는 해군기지에서 일했으며, 엄마는 미군철수 이후 핸드폰 조립 공장으로 임대된 미군건물에서 3년간 일했다. 그때 잉태된 제이슨은 생후 3살 이후부터 백혈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일했던 동료 가운데 한 명은 유산했으며, 한 명은 제이슨과 유사한 증세를 보이는 아이를 낳았다. 회사에 책임을 묻기도 했지만 사측은 관련성을 부인했다.

6개월에 한번씩 수혈받아야 한다는 제이슨은 "내가 더 아파지는 거냐"고 묻는다고 한다. 제이슨의 다른 다섯 형제들 역시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거나 잦은 두통을 호소한다고 한다.


조지(가명)는 24년 동안 미군의 무기공장에서 '무기재료'를 만드는 일을 했다. 본인은 신장에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때 낳은 두 자녀 모두 심각한 뇌성소아마비를 증세를 보이고 있다. 아이들은 혼자 힘으로는 몸을 뒤집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하수구멍을 통해 오염된 물이 미군기지 안에서 하천과 바다로 무단 방류됐다.


'미군기지정화 민중운동본부'(People's Task Force for Bases Cleanup: PTFBC) 필리핀 대표인 부기는 "턱없이 부족한 재정과 전문적인 조사인력 확보의 한계, 게다가 미군이 정수시설을 설치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염물질을 바다와 강 등으로 방류했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상황을 집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확인한 것만으로도, 미군기지 노동자로 일하면서 화학물질 오염으로 숨을 거둔 사람만 300명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95년 수빅 관리청이 투자유치를 위해 수빅 44개 지역에 대해 실시한 환경조사에 따르면, 사격연습장·병원소각장 등 11개 지역에서 오염물질이 검출됐다.


화산폭발로 미군기지에서 생활…최대 피해자는 아이들

클락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1991년 6월 클락 미군기지 인근에 있던 피니투보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존의 터전에서 내몰린 주민들은 미군이 철수한 기지 안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클락 공군기지 본부로 사용됐던 캅콤(Clark Air Base Command: COBCOM)에만 약 2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미군기지로 사용됐던 땅위에 집을 짓고 밭을 가꾸고, 우물을 파서 식수로 사용하면서 2년에서 5년가량 생활했다. 가끔 물에서 냄새가 나거나 이물질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생존'이 절박했던 이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화산폭발로 캅콤에 이주해서 3년을 살았습니다. 요리를 하고 세탁을 하고 씻기 위해 물을 사용했습니다. 그때부터 온 가족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물 때문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손자는 뇌성소아마비를 앓고 있고, 저 역시 피부병과 두통, 위장장애 등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클락 피해자들의 가족을 위한 공동행동'(Sama-Samanhg Aksyon at Ugnayan ng Mga Pamilyan ng Biktima: SAUP, 아래 클락 공동행동) 사무실에서 만난 노마가 말했다. 노마는 "캅콤에서 나오고 나서 알았습니다. 물이 오염됐으며 이로 인해 저희 가족 말고도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한 질환을 앓거나 병에 걸렸다는 것을. 저는 단지 평화로운 생활을 원할 뿐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나쁜데도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캅콤에 거주했던 다른 이들의 상황도 전혀 다르지 않다. 케빈은 소아마비를 앓고 있다. 11살인데도 제대로 발육이 되지 않아 6∼7세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는 엄마의 품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미 케빈의 동생은 병마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았다. 10살이 채 되지 않은 라베스 역시 독극물에 의한 오염으로 인해 뇌성소아마비와 백혈병을 앓고 있다.

노마와 그의 손자. 노마는 사람들이 클락을 잊지 않는다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꼭 다시 만나자"는 말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케빈은 혼자 힘으로는 혼자서는 물조차 마실 수 없다. 그래서 케빈의 엄마는 24시간 그의 옆에서 떠나지 못한다.



정부 독극물 오염 확인…보상과 복구는 전무

상황의 참혹함은 이미 정부와 전문가 집단의 조사에 의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96년 캐나다 병리역학 전문의인 로살리 베르텔 등 독극물 전문가들이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클락 공군지기 인근 13개 지역에 거주중인 여성 761명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미 독극물에 감염된 상태였다. 특히 캅콤에 거주했던 여성들 가운데 당시 임신을 했거나 아이들이 있었던 경우에는 아이들의 상당수가 머리가 빠지거나 피부병, 암 등의 질환을 보였다.

이후 진행된 다른 조사에서도 많은 수의 아이들이 중추신경 마비, 선천성 심장병 그리고 언어장애 등 희귀병에 걸려 있음이 확인됐다. 환경오염 문제가 붉어지면서 클락 개발공사 역시 우물과 지하수 수질 검사와 토양검사를 실시했다. 검사 결과 폴리염화비페닐 등이 검출됐으며, 14개 지역이 폐쇄되거나 개발이 보류된 상태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치료와 배상은 물론이고 환경오염지역에 대한 복구 정화작업 역시 시행되지 않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미군이 철수한 클락 캅콤에 많은 재원을 들여 엑스포공원을 건설했다. 하지만 부서진 미군 건물 등에서 끝없이 날리고 있는 석면 등의 화학물질과 토양에 스며든 오염물질의 악취 등으로 인해 엑스포 공원은 개장 후 바로 문을 닫았다.


현장을 방문했을 때도 몇 명의 아이들이 물을 뜨기 위해 우물가로 모여들었다. 이 우물은 99년 필리핀 정부가 사용금지 명령을 내린 곳이다.


여전히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오염된 땅에서 밭을 갈고 농작물을 키우고 있다. 바로 인근에는 대규모 한국 농산물 작물 단지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야채와 과일 등은 필리핀 각처의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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