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성당 후배교사에게서 '뒤늦게' 선물로 받은 <도요새>를 읽었다.
일 년 전 마니또 선물을 해가 바뀌고 나서야 받은 것이다.
덕분에 기다림이 사채 이자처럼 불어나서
다른 책보다 더 급하게 읽기 시작하였다.
허나 지은이와 작품의 문체가 눈이 들어오면서부터는
책 읽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아우토반처럼 내달려 지나칠 그런 풍경의 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시인 하종오가 지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다.
도요새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통해
인간의 궁극적인 과제 중의 하나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시인만의 실타래같은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
말랑말랑하면서도 무언가가 끊이없이 줄줄이 나오는 그런 실타래 말이다.
(이런 걸 두고 함축적 시언어라고들 한다.)

 

어느 형태의 삶이든지 각기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이 '가장 도요새다운 도요새'가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이다.
과연 나다운 내가 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가장 진부하면서도 솔깃한 아침드라마같은 화두이다.

 

이 작품은 그 동안
'내 영역 안에서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가'만을 고민한 내게
조금 더 긴 호흡법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내 삶이
엎어지면 코닿을 위치만 따져온 근시안적 행태의 연속이었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이 역시 변명이 절대 절대 아니다.)
다만 조금 더 길게 보는 법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을 뿐이다.
아무튼 내 삶에 이 이야기는 완전히 새로운 북두칠성이 아니라
순풍과도 같은 의미로 작용하였다. 내가 가진 생의 나침반의 방향을
뒤흔들지 않으면서 조용히 뒤를 밀어주어 내 항해의 기술을 한 번 더
시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시 내용으로 돌아와서,
작품에는 세 가지 삶의 모습이 등장한다.
책 뒷표지에 적힌 해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북두칠성'으로 비유되는 신, '허공의 세계'로 선정되어 있는 유토피아,
'지상의 세계'로 함축되어 있는 현실"은 운명에의 순응, 신념의 실천,
현실의 방황을 의미한다. 주인공 '고요한별빛도요'는 이 세 공간을
모두 비행하며 그곳의 참된 의미를 하나씩 맛본다. 이 작은 도요새의
힘겨운 방황은 우리네 사춘기의 성장통을 닮았다. 선거철 정치인의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평생 지고 가야할 업보와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는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까지 계속해서 이 성장통을 앓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방황과 고통 속에서도 한낱 나락으로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덧붙여 가장 와 닿았던 구절 하나.

 

"특별하다는 건 남들이 하지 않는 앞선 생각을 하고 실천한다는 뜻이야.
 앞선 생각이란 자신 뿐만 아니라 남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생각인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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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0 20:58 2008/01/20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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