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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8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의 육체가 성장판이 닫히면  성장을 멈추듯이 의식이나 성격도 일정한 정립기를 지나면 더 이상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삶에 대한 너의 태도는 좋지 않으니 이렇게저렇게 바꾸도록 해봐.'라는 따위의 충고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닐까.

 

육체에 한계가 있듯 정신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 아닐까. 내가 우사인 볼트 만큼, 아니 그보다 두 세배 더 훈련을 한다고 해서 그 만큼 빨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육체를 이루는 유전자의 한계가 분명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신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아무리 의식적으로 마음을 고쳐먹으려해도  한번 틀 잡힌 마음, 정신이 바뀔까.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정신의 한계란 육체의 한계와는 좀 다른 개념이다. 육체는 스피드나 파워 같은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면에서 우열을 가릴 수 있겠으나 정신이나 마음, 심성이나 기질 따위는 우열을 가리기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선량함이나 관대함 또는 담대함 같은 사회적 덕목이 있긴 하지만 그런 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고 그런 인성의 일부만 가지고 함부로 정신의 우열을 논할 순 없다. 정신의 우열을 논한다는 것은 인격 나아가 존재의 우열을 논하는 것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이 길어졌는데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한 번 고정된 정신, 마음 상태가 변하기는 내가 우사인 볼트 만큼 빨라지는 빨라지는 것 만큼이나 어렵지 않을까 하는 거다. 정신, 마음 상태의 고정이 유전자 탓인지 아니면 유년 또는 소년기의 자라난 환경 탓인지, 아니면 복합적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게 지금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미 나의 정신은 고정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라고 묻는 노래도 있지만, 사람의 본질이 변하는 것 같진 않다. 시간이 지나고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보이지 않았던 인성이 나타나는 것이 변했다고 느껴질지언정 '어, 이 사람 많이 변했네.'라고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변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큰 병이나 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사람이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경우를 영화나 문학, 가끔은 현실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또는 불현듯, 아니면 오랜 수행을 거쳐 '깨달음'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다. 그러나 이는 특별한 경우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고난 아니면 어려서 생성된 성격, 기질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좋든, 싫든, 말이다.

 

가끔씩 '뜨끔' 한다. 내 성격과 기질의 단점을 지적하는 느낌을 받았을 때.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냐고, 여지를 남기지 않는 열정으로 '오늘'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여기저기서 쿡쿡 쑤실 때.

 

그래, 맞는 말이고 정말 공감도 하지만 성격이 안따라주는 건 어찌할까. 마음은 리오넬 메시인데 발은 개발이라 자꾸 알을 까는 것만 같은 느낌.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자꾸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나, 누구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오늘만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자꾸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내일을 계산하는 나. 나 나 나...

 

고흐나 앙리 루소의 그림을 볼 때 마다 이런 나를 질책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가슴은 비수에 찔린 것처럼 '뜨끔', 얼굴은 '화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으로 뒤돌아 쭈구리고 앉아 나즈막히 중얼거린다. "자꾸 그러지 마요. 나도 이렇게 살고싶진 않지만 생겨먹기를 이렇게 생겨먹은걸 나보고 어떡하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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