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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촛불시위의 원인과 특징” 2012/05/15
  2. 이어달리기 2012/05/15

사회학의 기초이해 기말 레포트

 

“촛불시위의 원인과 특징”

 

 

내가 처음 집회에 참가했던 90년대는 동원되는 집회의 문화와 아직은 그에 동의하는 다수의 ‘학우 대중’이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집회에 참가하는 모든 학생들은 ‘운동권’으로 분류되곤 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은 집회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동원되는 집회는 더 이상 문화적 다수를 점하지 못하고, 집회에 모이는 이들은 더 이상 ‘운동권’이 아니다. 지배세력 뿐 아니라 기존의 운동세력 조차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학문의 영역에서도 새로운 과제로 제기되는 것이다. 물론 변화는 하루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지만, 그동안의 변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로 2008년 5월부터 시작된 촛불시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촛불시위의 원인은 직접적으로는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전면적 수입개방이었다. 이전 정권에서 이미 개방한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전혀 다른 양상의 시위가 전개된 것은 단지 ‘쇠고기’ 문제가 아니라는 분석이 필요하다. 한미FTA가 진행될 때만해도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찬반 논쟁은 오히려 찬성 쪽도 ‘우리도 값싼 쇠고기 좀 먹어보자’라는 말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촛불시위는 처음에는 그리 크지 않았다. ‘노무현은 조중동과 싸웠고, 이명박은 초중고와 싸웠다’는 의미심장한 유머에서 알 수 있듯이 중고생들이 청계천 광장에서 들기 시작한 촛불이 점차 확대되어 광화문, 시청을 넘어 거리를 가득 메우게 된 것이다. 중고생들이 촛불을 든 이유에는 급식을 통해 미국산 쇠고기의 공포와 직접 맞닥뜨리게 된다는 여론 때문도 있겠지만, 이와 함께 이명박 정권의 교육 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저항과 맞물려서 나타난 것이다. 인수위 때부터 영어몰입교육을 들고나와 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 의지를 표방한 정부는 ‘평준화’로 대변되던 이전 정부와 대변되는 엘리트 교육의 대변자임이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보였다. 촛불이 남녀노소를 막론한 전국민적 저항으로 확대된 배경에도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전반적인 불만의 확산이 바탕에 깔려있었다. 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치면 노무현 정부도 만만치 않았는데, 왜 2008년 5월에 대규모의 촛불시위가 형성된 것일까.

다시 직접적으로 촛불을 점화한 원동력인 왜 미국산 쇠고기로 돌아가 보자. 갬슨은 집합행동의 틀을 비정의의식과 정체성의 요소, 그리고 대행자의 요인으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비정의의식은 개인 또는 집단에 대한 불공정한 처우, 즉 정당하지 못한 불평등과 관련된 불만과 그러한 상황에 대한 도덕적 분노 등에 근거한 집합의식을 말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불만스러운 상황에 책임이 있다고 인식되는 ‘그들’과 그에 대칭되는 ‘우리들’을 구분짓는 집합적인 의식이 집합적 정체성이고 대행자의식은 자신들의 불만스러운 조건과 정책을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다는 집합적 신념이다.즉 집합행동의 틀 구성의 문제로 분석해보면 극단적인 양극화를 ‘표방’한 정권에 대해 인식하고 있던 불평등의 심화와 더불어 캠프 데이비드에서 헐값에 국민의 건강권을 넘겨준 것에 대한 정권의 실책이라는 부당함에 대한 자기정당성 획득이 초기의 집합적 의식을 형성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게 촉발된 촛불시위가 확대된 것에는 정부의 끊임없는 미숙한 아니 고전적 방식의 대처방식이 한몫했다. 군홧발에 짓밟히는 여대생 동영상이 급속하게 확산된 것은 촛불을 든 평화적 시위에 대한 정권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사건이었고, 이는 도덕적 우위라는 정당성 확보와 관련이 있다. 물론 국가에 의한 공권력과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저항폭력이 다른 범주일 수 있지만, 물리적 힘을 가한다는 의미에서의 폭력에 대한 배제는 특히 시위대 내부의 규제가 작동하면서 강화되었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규제와 비폭력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섞이면서 6월 10일에는 2시간 여의 ‘스티로폼 논쟁’까지 있었다. ‘명박산성’으로 대표되는 정권의 폭력성에 맞서 시위대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안에서 축제를 즐기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측과 어떤 방식으로든 경찰과의 충돌이나 위험의 소지는 최소화해야한다는 측은 폭력과 비폭력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드러내었다. 촛불로 대변되는 평화적 시위에서 한 단계 진화된 시위의 방식이 폭력적 방식이 아닌 비폭력의 방식이어야 한다는데 대한 전반적인 동의와 비폭력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차이가 드러난 것이다.

이번 촛불시위의 또다른 특징은 무엇보다 자발성이다. 과거의 집회에서 ‘민주시민 함께해요’를 외치던 시위 참가자들과 시민의 경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초기 촛불시위에서 깃발을 내리라던 논쟁은 물론 정치적인 방어의 성격도 있었지만, 깃발 자체가 집회에서 갖는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단체 위주의 동원이 아닌 개인들의 참여가 다수를 점하면서 집회의 주도세력 자체가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누군가 든 깃발에 모이는 방식, 즉 깃발과 그 아래에 모인 개인들이 아닌 촛불을 들고 그저 그 자리에 함께 하기만 하면 되는 방식은 경계가 사라질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맥락이다.

자발성이 중요한 이유는 배후설과 맞물려 그 자체가 촛불을 드는 정당성을 대변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배후설은 촛불은 드는 시위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잘 드러내준다. 시위대를 움직이는 실체가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다수의 군중이 모이는 것이 가능하겠는가하는 의심이 그것이다. 반면 촛불시위에 참가한 시위대는 그러한 배후설을 비웃으며 누군가의 ‘사주’도 받지 않은 채 거리로 나온 스스로의 자발성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자발적 시민들의 분노는 정치적 배후가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의 이미지와 맞물려 촛불시위를 확대하는 원동력의 일부가 되어 왔다. 광우병 대책회의가 촛불의 의제를 5대 쟁점으로 확대하면서 성격 ‘변질’에 대한 우려가 내외부에서 터져나온 것은 이러한 성격의 반작용이라 하겠다.

이러한 자발성이 가능했던 것은 또 다른 이번 시위의 특징인 인터넷을 통한 급속한 정보의 확산과 여론형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웹 2.0 시대의 특징인 참여와 개방이 UCC, 아고라 등으로 나타났고, 주류언론의 아젠더 셋팅은 이전의 중요성을 상실해갔다.

 

시위에 있어 자발성은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저항세력의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다.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지인 한 사람이 이번 촛불시위가 미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하는 이명박 정권의 치밀한 계획 하에서 형성된 것이 아닐까하는 얘기를 진지하게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의도’가 시위를 촉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편하긴 하겠지만, 실제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자발적인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모였고, 그 다양성이 새로운 시위를 만들어갔다. 최근 아고라에서 진행된 논쟁을 보면 깃발에 대한 거부는 단순히 조직이나 지도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기존의 운동세력 내부에서의 권위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공개적인 토론과 소통을 통한 새로운 중심 혹은 전위의 구성은 촛불시위의 진화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사회학의 기초이해 수업 레포트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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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5 08:13 2012/05/15 08:13

이어달리기

from as a student 2012/05/15 08:09

성의 사회학 2008년 1학기

정광숙 외, 『이어달리기』, 길찾기, 2006

 

 

 

여성과 노동, 이 두 범주는 나에겐 상당한 교집합을 갖고 다가왔다. 20대 초반 대학을 다닐 때까지 실질적으로 스스로 여성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본 적은 없었다. 물론 가정, 학교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여성임을 자각해야 하지만, 그것이 ‘상처’로 다가오진 않았다. 졸업 등으로 나가서 만나는 사회는 너는 여성이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동(력)을 팔아야하는 여성이라고 강제한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여성이 팔고 있는 것이 여성인지, 노동인지 혼란스러워졌다. 그것이 나누어지는 어떤 것이던가. 모두 그저 나 일 뿐이다. 여성으로서의 나와 노동하는 나. 우리가 노동시장에서 팔고 있는 것은 ‘성’이니 ‘노동’이니 하는 어떤 추상이 아니라 그저 구체적인 나, 우리 자신이다.

 

책 『이어달리기』속에서는 매 페이지마다 내 이야기, 친구의 이야기, 그리고 엄마의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그런데 다 읽고도 그저 멍할 뿐인 나는 더 이상 분노도 절망도 없이 그저 한 켠으로 툭 던져놓을 뿐이다. 익숙해졌기 때문에?

IMF 이후 좁아진 취업문 앞에서 같은 이력의 남학생들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이력서를 써 내야했던 친구, 수십 장의 이력서를 쓰고 어쨌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직장을 얻었지만, 그 안은 이전에는 겪지 못한 남성들의 세계였다. 대기업 정규직인 그 친구가 ‘그래도 너는 자유롭지 않느냐’며 부러워하곤 하는 나의 삶은 정반대. 친구가 남성문화 속에서 남성의 질서를 뼈저리게 느낄 때 그러면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더욱더 ‘남성’화되는 길을 택할 때(물론 그 기업에서는 용납되지 않았지만) 나는 스스로 ‘여성’일 때 더 많은 시급을 보장받는 서비스 비정규직의 노동을 해야 했다. 물론 다르지 않다. 『이어달리기』의 여성들이 모두 여성 노동자이듯이 친구와 나도 여성 노동자이고, 우리 모두 어쩌면 ‘공감’의 주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안 될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든, 그리고 사회가 공고하게 다져놓은 바둑판 같은 격자 속에 하나하나 갇혀 있는 것 같다. 이 격자는 쉽게 넘나들 수 없고, 심지어 등급화되어 있기까지 하다. 수번 같은 이름표를 하나씩 달고 다른 칸으로 한 칸 한 칸 옮겨가고 싶어하면서 그저 그 너머에는 뭔가 다른 삶이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가진다. 어제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는 결혼을 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결혼을 한 어떤 그녀는 다시 취업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결혼과 직장을 동시에 가진 어떤 여성은 또...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 너머에 별 거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어떠한 격자로 갈지 ‘선택’마저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희망이 없지 않느냐고. 그래서 조각조각 나뉘어진 공간 속에서 저마다 괴로워하는 삶이 지속될지라도. 누군가는 ‘짱돌’을 들라고 했다지만, 내 기억에 짱돌은 늘 시위대를 향해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의 삶이 지속되는 이유가 아닐까.

이렇게 끝내긴 좀 아쉽다.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격자는 늘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질문은 쉽지만 대답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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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5 08:09 2012/05/15 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