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달리기

from as a student 2012/05/15 08:09

성의 사회학 2008년 1학기

정광숙 외, 『이어달리기』, 길찾기, 2006

 

 

 

여성과 노동, 이 두 범주는 나에겐 상당한 교집합을 갖고 다가왔다. 20대 초반 대학을 다닐 때까지 실질적으로 스스로 여성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본 적은 없었다. 물론 가정, 학교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여성임을 자각해야 하지만, 그것이 ‘상처’로 다가오진 않았다. 졸업 등으로 나가서 만나는 사회는 너는 여성이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동(력)을 팔아야하는 여성이라고 강제한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여성이 팔고 있는 것이 여성인지, 노동인지 혼란스러워졌다. 그것이 나누어지는 어떤 것이던가. 모두 그저 나 일 뿐이다. 여성으로서의 나와 노동하는 나. 우리가 노동시장에서 팔고 있는 것은 ‘성’이니 ‘노동’이니 하는 어떤 추상이 아니라 그저 구체적인 나, 우리 자신이다.

 

책 『이어달리기』속에서는 매 페이지마다 내 이야기, 친구의 이야기, 그리고 엄마의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그런데 다 읽고도 그저 멍할 뿐인 나는 더 이상 분노도 절망도 없이 그저 한 켠으로 툭 던져놓을 뿐이다. 익숙해졌기 때문에?

IMF 이후 좁아진 취업문 앞에서 같은 이력의 남학생들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이력서를 써 내야했던 친구, 수십 장의 이력서를 쓰고 어쨌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직장을 얻었지만, 그 안은 이전에는 겪지 못한 남성들의 세계였다. 대기업 정규직인 그 친구가 ‘그래도 너는 자유롭지 않느냐’며 부러워하곤 하는 나의 삶은 정반대. 친구가 남성문화 속에서 남성의 질서를 뼈저리게 느낄 때 그러면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더욱더 ‘남성’화되는 길을 택할 때(물론 그 기업에서는 용납되지 않았지만) 나는 스스로 ‘여성’일 때 더 많은 시급을 보장받는 서비스 비정규직의 노동을 해야 했다. 물론 다르지 않다. 『이어달리기』의 여성들이 모두 여성 노동자이듯이 친구와 나도 여성 노동자이고, 우리 모두 어쩌면 ‘공감’의 주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안 될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든, 그리고 사회가 공고하게 다져놓은 바둑판 같은 격자 속에 하나하나 갇혀 있는 것 같다. 이 격자는 쉽게 넘나들 수 없고, 심지어 등급화되어 있기까지 하다. 수번 같은 이름표를 하나씩 달고 다른 칸으로 한 칸 한 칸 옮겨가고 싶어하면서 그저 그 너머에는 뭔가 다른 삶이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가진다. 어제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는 결혼을 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결혼을 한 어떤 그녀는 다시 취업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결혼과 직장을 동시에 가진 어떤 여성은 또...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 너머에 별 거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어떠한 격자로 갈지 ‘선택’마저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희망이 없지 않느냐고. 그래서 조각조각 나뉘어진 공간 속에서 저마다 괴로워하는 삶이 지속될지라도. 누군가는 ‘짱돌’을 들라고 했다지만, 내 기억에 짱돌은 늘 시위대를 향해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의 삶이 지속되는 이유가 아닐까.

이렇게 끝내긴 좀 아쉽다.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격자는 늘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질문은 쉽지만 대답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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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5 08:09 2012/05/15 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