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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8/19
    더 살기 어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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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6/24
    [빌어옴]최근 읽은 글 중 최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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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8/06/11
    촛불, 그리고 투표와 투표사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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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8/04/29
    약값, 참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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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8/04/24
    치우고 살자, 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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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8/04/16
    며칠전 아내와 다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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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8/04/14
    역시 대표성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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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8/04/07
    참 많은 걸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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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8/04/07
    원칙과 정체성이라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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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8/04/04
    참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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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살기 어려워질까?

아무래도 그렇겠다.

물가상승률과 임금상승률의 대책없는 이별로 인해, 실질임금상승률이 지지부진한 것도 그렇지만,

가계의 부채가 많아지면서 가처분 소득이 적어지는 것도 문제.

이 놈의 사회는 빚을 져서라도 쓰지 않으면 안굴러가는 사회니, 심각할 수 밖에.

미국의 서브프라임 문제는 올 하반기에서 내년 상반기를 어떻게 버티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올해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던 선거 자체에 따른 유동성 증가가 위기를 지연해줄수도 있겠다 싶다) 우리의 사정이야 더욱 나빠지는 것 말고는...

아래 글에서 보이듯, 이자율이 8%정도로 고공행진을 하게되면, 은행빚이 있는 사람들은 은행 먹여살리느라고 자기 먹을 것도 없어진다. 원금 갚기는 언제하나?

지난 4년간 은행 이자만 매월 45~50만원 정도 냈던 입장에서 보자면(이마저도 최근엔 50만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가슴을 쓸어내릴만한 사건이다.

햐~~. 어찌 살꼬.

참, 최근 갔던 어떤 까페에는 현재의 부동산 가격이 거품이다 아니다로 갑론을박을 하던데.... 내용보다는 '세상에 전문가들 참 많구나'라는 생각만 들더라.  내공들이 장난 아님--**

누군가 회의가 많으면 망한다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런 저런 회의에 끌려다니는 우리 조직은 이제 곧 망할려나?^^


일본과 유럽 경제가 본격적인 경기 둔화를 맞이한 가운데 미국 또한 금년 하반기에 경제성장률이 제로에 근접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더욱이 현재 미국의 신용경색현상이 1980년대 말의 저축대부조합 파산 때보다 심각한 수준에 있다는 주장이 있는 등 미국 경제의 향방에 세계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한편 국내도 건설 및 부동산 경기둔화, 금리상승 등으로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와있다. 2000년 이후 국내 가계부채는 2000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국내 가계부채는 2008년 1/4분기 현재 640조 4,724억 원으로 전년동기 586조 5,169억 원 대비 9.2% 증가하였다. 현재 국내 가계부채 규모 증가율(2000년 대비)은 미국에 비해 크고, 금리 상승세가 지속될 경우 금융리스크느 지금보다 더 높아질 전망이다.
2007년 말 국내 가계부채의 개인 가처분소득 대비 비율은 미국에 비해 다소 낮으나, 2000년 대비 증가율은 66.0%로 미국 39.4%보다 29.6%p 크다. 또, 시중금리의 기준이 되는 91일물 CD금리는 2008년 8월 11일 현재 5.76%로 2007년 8월말의 5.29% 보다 0.57%p 상승하였다.
이에 따라 주택담보대출 변동금리가 연리 최고 8% 내외로 1년 전의 6.38% 보다 1.5%p 이상 상승하여 주택담보대출자들의 이자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더욱이 고용 부진, 주택 경기 둔화 등으로 가계 대출 부실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2008년 6월 신규 고용 증가 규모가 14만 7,000명으로 2007년 6월 31만 5천 명의 절반에 그쳐 임금 소득 증가세가 둔화되고 있는 것도 가계의 주택담보대출 이자 및 원금 상환 부담을 가중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처럼 금리 상승, 고용 불안 등의 지속으로 가계부채 상환 능력이 약화될 경우 국내 소비 침체 현상이 더욱 심화되면서, 현재의 경기 둔화세를 더욱 가속시킬 우려가 있다. 따라서 정부는 중소기업이나 저소득층에 대한 안전망을 강화하는 한편 경기 침체의 장기화 억제를 위한 다양한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현대경제연구원 실물경제실 실장 이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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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옴]최근 읽은 글 중 최고!!

배병삼이라는 교수는, 도올선생과 함께 논어를 공부했다는 것 정도 밖에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한겨레에 싣곤하는 칼럼은 정말 읽을 맛이 난다고 생각한다.

 

아래에 빌어온 글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글이다. 리더쉽의 문제에 대해 고민, 고민하게 만들다. 독백의 구조라... 무시무시하다. 역시 愼獨의 가르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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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배후의 리더십 / 배병삼 
    
 
»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영·정조 시대는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기였다. 특히 정조는 경학에 밝았다. ‘경연’이란 본시 신하가 임금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제도인데, 정조는 도리어 그 자리에서 신하를 가르쳤다. 그가 던진 질문은 정약용 같은 신예에게조차 평생 화두가 될 정도였다. 이런 정조의 위상을 군사(君師)라고 칭한다. 임금이자 스승이라는 뜻이다. 큰 영예다. 플라톤이 꿈꾼 이상적 군주, ‘철학자·왕’을 몸소 시현한 셈이다.
 
한데 정조가 죽자 정국은 곧 세도정치라는 반동으로 추락한다. 하면 어째서 황금기가 그토록 짧고도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을까? ‘임금이자 스승’이라는 영예 바로 그 속에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맹자라면 이 지적에 찬동하리라. 그는 전국시대 혼란의 뿌리가 “스승 되기 좋아하는 버릇”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임금들이 자기 가르침을 받는 신하는 좋아하지만, 임금을 가르치는 신하는 싫어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

 

힘으로 말하는 사람이 권력자요, 이치로 말하는 사람은 스승이다. 둘 다 혼자서 말하고, 또 아래를 향해 말하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니 ‘스승이자 군주’의 말은 힘으로나 이치로나 거역할 수가 없다. 여기서 완벽한 독백의 공간이 탄생한다. 독백 속에는 권력은 가득 차 있지만, 함께하는 정치는 부재한다. 세도정치의 씨앗은 ‘군사’인 정조가 뿌린 게 맞다.

 

정조가 죽고 난 후, 정약용은 대화와 논쟁 속에 정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형에게 부친 편지 속에서 요순 정치의 핵심이 “제 목소리로 스스로 말하기”에 있다고 들뜬 필치로 쓰고 있는 것이다. 정조의 통치가 독백적 구조인 탓에 파산하고 말았다는 것,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길은 소통, 즉 대화와 논쟁을 통해 정치를 복원하는 데 있음을 그는 알아챈 것이다.

 

최근 대통령은 총리를 위시한 각부 장관과 청와대 참모진을 대대적으로 교체하려 한다고 들었다. 아마 맹자라면 대통령을 가르칠 정도의 인물을 선발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조언할 것이다. 또 말은 그들로 하여금 하게 하고, 대통령에겐 듣기를 권할 것이다. 듣는 귀는 말하는 입보다 높이 달려 있으므로, 귀담아들으려면 몸을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곧 일을 제대로 알려고 든다면, 겸손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정치가의 필수 덕목이 된다는 점도 지적하리라.

 

한편 다산이라면 현 정국의 문제가 보고하고 지시하는 회의 방식에 있다고 진단할 것이다. 앞 정권의 “계급장 떼놓고 토론하기”는 지나치다 하더라도, 제 목소리로 제 주장을 내세워 쟁론하는 회의 방식은 꼭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할 테다. 이름은 ‘회의’(모여서 함께 의논함)라고 해놓고 윗사람 혼자서 말하고 나머지는 듣고만 있는 것은 조그만 학교에서 큰 기업에 이르기까지, 이 땅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병폐다. 요컨대 국무회의든 참모회의든 자기 업무를 담당자들이 큰 소리로 주장하고 대통령은 그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기, 이것이 다산이 권하는 회의(소통)의 모습이라는 것. 덧붙여 대통령을 뜻하는 영어, 프레지던트(president)가 본시 ‘사회자’를 뜻함은 이 대목에서 함께 참고할 만하다.

 

독백 속에는 ‘함께, 더불어’가 부재한다. 내 사람을 공공기관에 심는 것도 고작 독백의 구조를 확산시킬 따름이다. 독백적 조직은 너의 것일 뿐 우리의 것일 수 없다. 위기가 발생하면 그 책임 역시 단 한 사람에게 귀결한다. 나머지 사람에겐 그들의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촛불사태가 지목한 것도 오로지 한 사람이었고, 그 촛불을 끌 사람도 단 한 사람뿐임을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제대로 된 사람을 뽑아 “필요한 게 뭡니까?”라고 묻는 배후의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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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그리고 투표와 투표사이

 

1. 비폭력이라는 상징재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비폭력이라는 도덕의 철갑이 없었더라면 촛불의 절반 이상은 켜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집회가 일상인 이들에겐, 집회가 비일상인 이들이 말하는 비폭력이라는 도구는 코르셋보다도 숨을 조일 것이 분명하다. 100명 정도 모인 집회는 전경버스에 가로막혀 숫제 전경을 상대로 집회를 하는 촌극을 낳고 있다. 사업주의 위법은 법적 절차의 유연함으로 하루이틀 지연되는 반면 그 피해자인 노동자의 삶은 기하급수적으로 하강한다.

 

현존하는 모든 사상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털봉숭이 영감님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법이라는 놈이 다가오는 속도에 있어 이건희와 나 사이엔 무궁화호와 KTX 의 차이보다 더 큰 갭이 존재한다.

 

그래서 근자에 촛불의 힘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비폭력이라는 상징재가 이명박보다는 노동자들을 얽매는 것은 아닐까라는 '하지 않아도 될' 우려를 하고 있는 즈음이다.

 

 

2. 최장집과 강재섭

 

결국 대안이 문제인데, 오늘 <경향>과 <프레시안>, 그리고 간접적으로 본 <찌라시 3인방>을 보다 깜짝 놀랐다. <경향>은 어제 집회에 참석한 최장집교수를 스케치한 기사를 실었는데 최교수 왈 "이제 거리의 정치가 아니라 정당이 제역할을 해야할 때다"고 했다. 뒤이어 강재섭 왈 "촛불 참가자들은 이제 집에 돌아가고 국회가 역할을 하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찌라시 3인방> 역시 거리->국회의 등식을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요구했다.

 

적어도 최장집교수와 강재섭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라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이런 유사성의 원인은 뭘까?

 

나는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한다. 최장집 교수는 그동안 정치경제적 이슈가 정당 분화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의 진보정당 지지는 균형잡힌 정당 제도를 바라는 일종의 '미적 태도' 이상은 아니다. 강재섭이야 당연히 국회로 이슈를 가져오고 싶을 것이다. 일단 180석에 육박하는 안정적인 의석이 있으니 뭐든 주무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으리라. 이런 강재섭의 꼼수는 찌라시s와 공명한다.

 

다시 대안을 생각하면, 제도적 해결방법과 비제도적 해결방법만 있는 듯이 보이는데 일종의 제3의 길이 있지 않나 싶다.

 

 

3. 투표와 투표사이

 

선거라는 것이 단 하루의 우발적이고 감성적인 결정으로 4년이나 5년간의 '지배자'를 뽑는 장치에 불과하다면 이를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현행 우리의 대의제 민주주의에 있어 한번 내려진 '투표'의 결정을 번복하거나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투표 자체는 매우 중대한 정치적 행위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정치적 행위가 4년이나 5년의 장기적인 지속성을 가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투표와 투표사이의 정치가 중요해진다.

 

나는 진보정당이, 그리고 시민사회단체가 관심을 가져야할 공간은 바로 투표와 투표 사이의 정치적 공백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라는 문제라 생각한다. 진보정당이 제도와 비제도의 사이에 존재하는 준제도적(그도 그럴 것이 정당은 제도의 산물이지만 의석이 없다면, 제도 밖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방식들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구체적인 방법들은 찾아질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라면, 예를 들어 국민청원제도, 각 행정사항에 대한 의견 개진 운동, 일상적인 시민발언활동 조직 등등) 그래서 최장집과 강재섭이 수렴하는 이상한 상황도 벗어나면서, '법적 테두리에서 할만큼 하고 시위를 하라는' 도덕적 상징재를 무력시켰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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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값, 참 답답하다...

紅知님의 [신명나는 그러나 서러운 굿판 해볼까나!] 에 관련된 글.

 

블로그 홈에 걸린 포스팅을 보고, 응원하는 댓글을 달려다가 관뒀다. 신나고 기운나는 댓글이 아니라 기운빠지는 댓글의 문구만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그것을 치료할 방법이 있음에도 단지 돈때문에 치료받지 못한다는 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도 내 딸 미소에게 이런 이야길 하면, '왜?' '왜?'만 반복할 듯하다.

 

상식적인 일인데도, 그리고 어린아이의 머리속에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이고 산다는게 고역이다. 그러니 싸울테지만... .

 

신약의 약값에 대해 담당자가 '가격은 신만이 알것'이라고 했다는데, 그 신은 '제약회사'가 틀림없을 테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가졌으니 신의 이름을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어떤 온건한 경제학 책에서도 제약회사의 신약 개발 동기로 '이윤추구'를 내세우지 않는 책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막대한 투자비용을 감당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회가 사람의 '선함', 그리고 '공감능력'만으로 그런 투자가 가능하고, 가능해야 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어떻하나. 세상을 굴리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런 점에선, 치료의 사회적 기능이 문제다. 쿠바의 사례에서 보듯이 딱히 이윤이 아니라하더라도 세계 최고의 의료체계를 갖출 수 있다. 다만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보는 한에선 끝없이 불가능한 것이고,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는 세상에 그것보다 쉬운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솔직히 날 건강하게 나아준 부모님의 은혜 따윈 잊어버리고 산지 오래되었으나, 최근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 나서야 모든 부모들이 가지는 공포를 맛보고 있다. 이 아이들이 아프다면... .

 

참, 답답한 하루다. 홍지님! 서럽기만 하지, 전혀 신나진 않는다구욧!! 그런 포스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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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고 살자, 쫌!

대략 닷찌분량의 문서들을 버렸나 보다. 이제 사무실을 비워야 하니 버리는 것이 正道.

 

이래 저래 다른 사람의 손때가 묻은 자료들을 뒤적이며 남겨둘것은 남겨두고 버릴 것은 버리게 분류를 했다. 그런데 참 기분이 묘하다. 1년 남짓 죽어라 갈등하던 사이였는데도, 그가 남겨둔 자료들을 보니 이 사람 참 열심히 살긴 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거 참.

 

뒷담화같아서 전부를 공개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난 그가 '이 바닥의 유연함을 악용하고 있다'는 혐의를 가지고 있었다. 출근시간 지 맘대로고, 중간에 회의랍시고 사라지고 등등. 워낙 이쪽 동네가 노무관리나 조직기강 이런데에 알레르기니 어쩔 수 없다 해도 참 곤란했다.

 

한 사람이 그러면, 한 사람만 편하다.

 

모두다 그러면, 일이 안된다.

 

이런 딜레마를 벗어나려면, 뭔가의 약속이 필요했는데 그런 것들이 번번히 깨지곤 했다. 그래서 뿔난 유치원생 처럼 그를 미워했다. 에휴~~. (물론 공식적으로 말도하고 하긴 했는데,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어'라는 표정에 오히려 내가 한방 먹었다)

 

그래도, 몰랐는데, 그 친구 참 열심히 일했더군. 이곳 저곳에서 끌어모은 자료들(흥, 태반이 안본거더만)을 보니 일 욕심도 언뜻보이고, 이런 저런 메모들을 보니 고민의 흔적도 보이더군.

 

이제 이런 아련함도 끝. 나도 이제 뛰어야 하니.. 거 참.

 

오전 내내 먼지마시면서, 사무실 정리한 소회가 남아 끄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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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아내와 다퉜다

 

며칠 전 아내와 다퉜다. 이미 몇 달전부터 퇴직이 예상되었던 상황에다, 앞으로의 전망조차 불투명하다.

어찌되었던 난 나대로 살아왔던 것이었다.

 

내 아내는, 아주 전투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다.

아마도 그녀에게 운동이란 것은 '상식' 너머의 것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난 아내의 그 상식을 존경한다.

 

그런데 며칠전엔 바로 상식의 문제 때문에 다퉜다.

이미 두 아이의 엄마인 아내는 내 재취업의 조건으로 적정한 생활비를 요구했다.

이제 태어난지 두달도 안된 아이와, 막 두돌이 지난 천둥벌거숭이를 키우고 있는 아내로선,

당연했다.

 

하지만 이런 조건은 잠정적으로 파산선고가 나버린 내 진로에선 불가능이었다.

 

그런 고민이 깊어가면 갈수록 삶이란 것이 팍팍해지고,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가정의 호사조차 거추장쓰러워 졌다고 느꼈다.

어찌된걸까. 여전히 아내와 두 아이는 내게 축복이고,

나의 이념은 흔들리지 않고 있음에도,

그것들이 저주와 파산으로 다가오다니.

 

초조해 할일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달렸으니, 걸을 때도 있고, 앉아서 잠시 쉴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오해 쉬지는 못할 것이다. 은행 대출금 이자에, 각종 공과금에 .... .

게다가 첫째에가 어린이 집이라고 갈라치면,

 

정말 내가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둘째가 태어나고부터 나와 자고 있는 첫째의 얼굴을 본다.

밖에서 텔레비전이니 책이니 보고, 아이가 누워 있는 방안에 들어가

옆에 누우면 벽쪽을 보고 자던 아이가

내 쪽으로 돌아누우며 팔과 다리를 올려 놓는다.

 

그런 가족이란, 내가 더 떨어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안전망같은 거다.

그렇게 다퉜는데도 다음날 변함없는 목소리로 '자갸 오늘은 일찍와~~'하고 주문하는

내 아내도 있다.

 

연초에 토정비결을 봤을 땐 이렇지 않았다.

 

그걸 믿지 않았으면 지금의 마음이 더 가벼워 졌을까?

또 다른 선택의 순간이, 아주 많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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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대표성의 문제다

 

간단한 문제다.

 

100명이 사는 동네에서 대표를 뽑는다.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를 따른다고 하자.

 

산술적으로만 보자면, 51명이 넘는 지지를 얻은 쪽이 대표가 되는 것이 타당하다. 그것이 다수제의 의미인 민주주의에 부합한다.

 

그런데, 후보가 3명이라고 하자. 박빙이다. 그러면 어느쪽이든 34명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이 역시 다수제의 원리에 부합한다. 어떤 나라에선 이를 다수의 지지로 만들기 위해 결선투표제라는 제도를 도입하기도 한다. 그래야 다수의 지배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몇 해전 프랑스에서 우익이었던 국민전선이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하자, 선거연합이 일어났다. 이는 결선투표제의 결과이다.

 

지난 12일자 <경향신문>에서는 지난 총선의 대표성 문제를 제기했다. 정리된 표가 바로 옆의 것이다.

 

경기 안산상록을에서 당선된 홍장표라는 사람을 보자. 전체 유권자가 11만명인데 그를 지지한 사람은 1만명 남짓이다. 유권자의 13% 지지만으로 지역의 대표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 사람 뿐인가? 수두룩하다.

 

이거 이상하지 않은가? 난 이런 제도를 민주주의라 배운 기억이 없다. 다수제를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13%의 지지만으로 지역 대표가 되다니, 이는 민주주의의 배반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투표하지 않는 것'도 정치적 의사표현의 방식이라 한다. 다시말해 정치적 행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행위로서 유효하려면, 행위의 영향이 나타나야 한다. 고작 13%의 지지만으로 국회의원을 선출해놓고도 '이거 잘못되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귀찮아서이건 정치적 목적에서건 투표 당일날 집을 나서지 않은 사람은, 적어도 정치적으론 '샘샘'인 셈이다.

 

이들이 적극적인 정치행위로 '귀찮아서 투표하지 않은 사람'과 구별되려면, 일단 투표소엔 가야했다. 그리고 백지로 기표함에 넣던지, 아니면 고의로 무효표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 표가 적어도 13%보다 많았으면, 아니, 그런 무효표가 1위와 2위의 격차보다 컸으면 선거자체가 무의미했다.

 

결국, 어떤 의미도 없는 정치적 행위(라는 자기위안) 덕분에 13%의 지지는 '적극적 의사표명 집단의 과반수'라는 의미를 획득했다. 여기서 나부끼는 것은, 스스로 권리를 포기한 자들은 발언할 기회가 없다는 깃발이다.

 

이런 구도하에서 최연희가 또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가 우리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만만세!

 

나는 기권이 아니라 무효표를 조직하는 운동이, 선거 보이콧이라는 명제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혼자만 시골 내려가 자급자족하면 세상이 바뀌나? 그리고 이 놈의 민주주의에 대한 것부터 뜯어 고치는 운동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최소한 다수제라도 어느정도 반영될 수 있는 구조로 전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에 반면, 지속적으로 풀뿌리 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중요하다. 하지만 풀뿌리 운동을 현재의 대의민주주의 제도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상정하게 되면 지는 싸움이 된다. 이는 구조의 문제다. 구조는 거시적인 작동원리에서 부터 미시적인 조작체계까지 개입해야 바꿀 수 있다.

 

개인의 각성도는, 원칙적으로, 집단의 각성도와는 별개의 사안이다. 아무리 훌룡한 민주주의자가 있어도 지역감정이, 학연/지연이 판을 치는 집단에서는 힘도 못 쓰는게 현실이다. '그래서 뭐 하자는 거냐'고 짜증이 날테지만, 적어도 난 '선거제도'를 바꾸는, 절대 만만하지 않는 싸움을 시작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게 다른 어떤 주장보다고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우선적인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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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많은 걸 배웠다

이른바 '심상정 단일화'를 둘러싼 논란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이를테면, 진보정당의 원칙과 정체성이라는 것. 그리고 제도화의 의미에 대한 것. 그리고 소위 변한다는 것.

 

수차례 밝혀왔듯이 나는 심상정 단일화를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진보신당의 당면과제는 '살아남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앞의 부분에 대해선 예외없는 융단폭격을 맞은 셈이다.

 

전혀 억울하지 않다. 당연하다.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라, 불과 4년전의 나만 되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니, 내가 민주노동당이니 진보신당이니, 제도정치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뭐 이제 내일 모레면 어떻게든 결판이 날 것이다. 진보신당도 그 결과에 따라 존폐의 기로에 설 것이다. 나는 진보정치의 미래를 낙관하지만, 살아가는 동안은 힘들 거라고 본다. 결국 나의 역할은 진보정치의 완성이 아니라 흔적을 만드는데 있다고 생각해왔다.

 

주변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설득력있게 말하기 참 힘들다.

 

내가 왜 작년 연말부터 올해초까지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는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동지는 몇개월의 불면증을 호소했는지. 그런 개인적인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으며, 그런 '불안이 나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는지를.

 

원칙과 정체성, 부르주아 정치의 속성, 합의와 대의의 과정, 당활동가의 성장을 전제로 한 진보정당. 이런 고민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나에겐 질식할 것 같은 문제들로 다가왔다.

 

내게 절망인 것은, 헌신이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진보신당의 활동가들이다. 소위 민중진영내에선 당활동가만큼 씹기에 좋은 대상도 없다. 아니 이제까지 민주노동당도 그런 처지였다고 생각한다.

 

2004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함께 해왔던 연대사업이었는데, 소위 민중단체인 어느 곳에서 난데없이 '정당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회의에서 당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자신들의 활동이 '정치적 이유'로 해석되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난, 이를 순결주의라 부른다.

 

2006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바다이야기가 한참 논란일 때, 의정부에선 화상경륜장 싸움으로 정신이 없었다. 결국 경륜을 운영하는 국민체육진흥공단과 갈등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때 공단 노조위원장이 찾아왔다. 경륜에 딸린 노동자들의 생계는 어쩔려고 그런 주장을 하냐고. 나는 이를 자기중심주의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FTA투쟁이 한참일때, 골프장 싸움을 하는 곳에 연대를 하고 있었다. FTA집회와 골프장 대책회의가 겹쳤을 때 주저없이 골프장 대책회의에 결합했다. 이에 대해 단체활동가들은 나에게 '몰정세적'이라며 조소했다. 나는, 역으로 이를 정세주의라고 생각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애정도 없는 날선 비판을 가지고 진보신당을 요리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들은 대부분 맞다. 타당한 주장을 통해 당을 발기발기 찢어놓고 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책임은 논란의 주역이 지게되고 위대한 역사적 논평가들은 스스로의 승리에 도취된다. 나는 이를 '좌파 나르시시즘'이라고 여긴다.

 

내가 옳다고 우길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경험들은 오로지 개인사에 속하는 경험들이며, 나의 주장이 그런 방향으로 흐르게 된 정신의 배경에 가깝다. 한 방향으로 가지고 못하고 끊임없이 틴들현상을 보이는 나의 입장과 주장이, 너무 위태로우면서도 지나치게 당연하다고 느껴진다.

 

갱신되지 않는 이론에 대해 절망했다. 20세기 초의 소련 역사는 꿰고 있으면서, 같은 시기 조선제국의 끝자락에 대해선 무지한 '외국인'들이 싫었다. 체게바라의 편지글에 열광하면서 일제시대 박치우와 같은 사회주의 운동가의 존재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짜증났다. 왜, 영국 노동당에 대해선 잘 알면서, 우리의 진보당에 대해선 무지한가? 우리의 교훈은 어느쪽으로부터 오는 것이 타당한가?

 

결국 넋두리에 지나지 않지만 이 기억을 잊지 않을 것이다. 다들 어떻게들 살아가는지, 얼마나 원칙과 정체성에 치열하게 살아갈지를 볼 것이다. 과연 옳은 주장들이 옳은 삶을 결정지을지도 분명하게 지켜볼 것이다.

 

나 역시 악랄하게 버틸 예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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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과 정체성이라는 문제

역시 주말이 지나니, 뭔가 정리하는 글들이 나오긴 한다. 블로그 홈에 있는 '심상정 단일화'에 대한 글도 이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전제를 이야기하자. 나는 '채경'님이 쓴 글에 동의한다. 글의 시작에서 끝까지 완결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도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건 내가 개량주의자라서 그런가? 아니면 부르주아 제도정치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인가?

 

1.누가 말하는가?

 

내가 민주노동당에서 많은 연대 단체와 사업할 때 늘 듣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민주노동당 일 못한다'는 것과 '심상정 노회찬이 너무 튀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작년 연말 대선후보 선출 때의 논란들.

 

글쓴이는 말했다. 운동권 띠나고, 순결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판이 나오면 끝난 거라고!

 

동의한다. 이는 말이 가지는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발화가 발화자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즉 진성성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왜 진보신당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진보신당안에서 당원간의 토론이 바깥의 논란에 근거로 쓰이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최소한 진보신당 내부의 당원토론은 그야말로 당원토론이기 때문이다. '당원끼리 다 먹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렇게 되던 저렇게 되던 진보신당을 살려보겠다는 뜻으로 하는 말들이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글쓴이가 인용한 분이 다시 사과글을 올렸다는 점을 빠뜨렸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신당에 비판하는 사람이 반드시 진보신당의 당원일 필요는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 특히 이 '진보넷'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말하고픈 것은,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말해달라는 것이다.

 

2. 진보신당 그후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총선결과에 따라 진보신당은 존속과 해체의 갈림길에 처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진보신당 이전에 소위 선도탈당파에 대해서는 민주노동당의 주사파와 상응하는 반감을 가지고 있다.

 

묻자, 그들이 왜 민주노동당을  그렇게 흔들어놓고 나왔나? 그건 원칙과 정체성이라는 알리바이 아니었나?

 

모르겠다. 그 여파로 순식간에 운동의 전망이 흔들려버린 사람에게 원칙과 정체성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말이다. 내가 더 기분이 상하는 것은, 그런 인간들이 대부분 자기 먹고 살길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언제부터 이 놈의 진보정당은 노조나 사회단체 상근자들이 감놔라, 배놔라 정신없는 곳이 되어 버렸나?

 

솔직하게, 내주변에도, 진보신당 쪼개졌다고 하면 박수치며 좋아할 사람, 많다. 알고 있다. 그에 대한 이유도 충분히 제출되고 있다. 심노 인물중심주의, 총선이라는 시기에 급조된 선거중심주의 등등.

 

그렇게 진보신당이 사라지면, 혹은 다른 세력과의 연합으로 새로운 운동체가 만들어진다고 한다면, 그곳에는 다들 참여해 힘을 보탤 수 있겠나?

 

솔직히 내 편견이다. 내 주의의 사람에 한정해서 보자면, 그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정치적 원칙과 정체성으로 환원되는 것을 무수히 봐왔다. 아니, 내가 왜 정당운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운동이나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의 술자리 안주가 되어야 하는가?

 

3. 나의 원칙과 전망

 

난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충분히 동의하는 주장에 대해서도 기를 쓰고 반대했던 때가 두번 있다. 한번은 학생일때 국민승리21과 청년진보당이 공존하던 시점이었다. 나와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은 청년진보당으로 갔다. 난 그들에게 '자기 만족'에 '지적 나르시시즘'이라며 비난했다.

 

생각해보면, 그 때 청년진보당을 선택했던 이들이 옳았다. 난 아직까지 당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 때 그사람들은 다른 직장을 다니면서 건실한 '비판적 사회인'이 되어 있으니 말이다.

 

두번째는 바로 최근이다. 심상정 단일화 문제를 둘러싼 것인데, 아주 우습다. 원칙과 정체성이라고? 하하.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하하. 누군 몰라서 하는 말인가?

 

개량의 페해를 말한다면, 독일 사민당의 베른슈타인분파에서 부터 90년대 중반 일본 사회당까지 역사적 사례도 많이 알고 있다. 그리고 한동안 많이 읽히던 레이코프의 '꼬끼리'를 근거로 한 '프레임' 이론에 근거하면 아주 논리적으로 개박살을 내놓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심상정 단일화 찬성이냐고? 나의 비전은 '진보신당의 존속'에 있기 때문이다. 다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데, 진보신당의 존속은 나에겐 또 다른 실천의 장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그리고 실제로 제도정치에 맨얼굴을 닿지 않아본 인사들보다 지난 4년동안 별 그지같은 인사들 한 가운데서 고군분투했던 심상정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회찬도 신뢰한다.

 

진짜 운동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가깝게는 주변의 사람들도 그렇고, 크게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서도 그렇다. 문제는 그런 갈등을 공개적으로 하고, 그 선택의 양방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4. 운동권 귀족들

 

시민사회운동도 10년씩은 넘는 구력을 가지고 있게 되니, 아주 우스워졌다.

 

100만원 안밖의 열악한 노동조건은 가슴아프지만, 스스로에 대한 갱신없이 감놔라 배놔라는 참견주의는 도통한 것으로 보인다. 노동조합은 마찬가지 아닌가? 단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넘쳐나는 것이 원칙주의자들이다. 지역연맹과 중앙을 가보면, 사회주의 이론에 빠삭한 이들이 줄을 섰다. 문제는, 대부분 그런 주장들이 논평용 근거라는 거다.

 

시민단체는 어떤가? 나는 시민단체에서 '모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법제도 과정과 흐름도 제대로 모르면서 '주의주장'만으로 선명성을 주장한다. 나는 왜 보통의 시민단체들이 참여연대를 백안시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만큼 제도투쟁이라고 열심히해서 바꿔놓은 성과가 있는 단체가 시민행동이나 경실련을 빼곤 어느 단체가 있는가?

 

더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민주노동당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심지어 당원으로 가입하지 않은 것을 당당하게 자랑거리로 말하는 이들이 각종 행사후원 등등도 너무나 당연하게 요구한다는 것이다. 하하하.

 

5. 편견들, 편견들

 

알고 있다. 내가 심한 편견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난 절망했다.

민주노동당이 쪼개질때 도저히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당을 나온 상근자가 500명은 넘을 것이다. 지역까지 합치면 더 하겠지. 그들은 순식간에 실업자가 된 것과 동시에 민주노동당 상근자였다는 캐리어를 가져야 한다. 난 이들처럼, 자신들이 걸어왔던 인생에 배신당한 이들을 알지 못한다. 같은 운동권 집단에서도 이들에게 관대한 시선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도, 또 다시 주위에선 그들의 등을 떠밀어 진보신당에 우겨놓고 또 욕해댄다.

 

이 무슨, 콜로세움 노예경기도 아닌 상황이란 말인가?

 

나의 편견은 이런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난 이글을 블로그 홈에도 검색도 안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꼭 이 글을 쓰고 싶었기에 쓴다. 다만 '평발'이란 나의 아이디를 보고 나의 맨얼굴을 떠올릴 몇몇 지인들을 위해 둘것이다. 난 내가 존경하는 지인들이 민주노동당의 분당때문에 한달 넘게 불면증에 시달리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나 역시 지난 연말에서 올 초까지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다.

 

나약해서 그런것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짧게 겪어본 정당운동은, 말만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더라. 그리고 원리 원칙이 매 순간 필요하것이 아니라, 큰 그림의 이정표로서 필요하더라.  그 말이 꼭 하고 싶었다.

 

나도 여건만 됐으면, 공부'나' 하는 건데 참, 이 무슨 뻘짓 인생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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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려운 일이다.

워낙 욕먹는데 익숙하다보니 별로 걱정이 되진 않지만,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논리들과 감정들은 수용이 안된다.

이런 비교는 그렇지만, '너도 해봤어'라는 식은 피하자. 낭비적일 뿐더러, 건질게 하나도 없는 싸움이니 말이다.

나는 이번 심상정 단일화를 두고 기본적으로 찬성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뭐 이에 대한 정치적 판단에는 다른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게 구조에 대한 이야긴지, 사람에 대한 이야긴지 헤깔리기 시작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심상정이라는 인물에 신뢰를 바탕으로 이야기한다. (이런 말 하면 또 인물중심론이라고 욕하겠지만, 세상에 어떤 사람도 무늬가 없는 사람이 있는가? 에휴)

자본주의의 문제, 미제국 중심의 군사주의, 분단 현실, 불안해지는 노동조건(법무부는 오지랖도 넓다, 파업권에 지나치게 훈수를 두고 있다), 성장위주의 경제정책.

이런 현상들은 눈에 보이지만, 각각이 발생하고 나타나는 양태가 다르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건 우선 순위의 문제가 아니라 영향의 범위와 개입의 효과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내 아이가 선천적 장애가 있다.(실제 내 둘째 아이의 똥꼬도 이상하다) 이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으론 두가지라고 생각한다.

1. 그와 같은 이상이 있어도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들던가

2. 그와 같은 이상을 완전히 고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던가

하나의 현상을 둘러싼 해법은 '동일하게 그 해법을 향한다'하더라도 다른 방식이 있다. 문제는 이런 방식들이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이 아니다. (세상에 이렇게 결정되는 문제는 그렇게 많지 않다.)

앞서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도 마찬가지다.

각각의 다른 해법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방법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따져 봐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말이다. 정치는 다른 면도 있더라는 거다. 우린 개발하면 건설업자 먹여살리는 거다라며 거품을 물지만, 실제로 낙후된 지역주민들은 그거 안하면 죽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말하는 비정규직. 나와 나이차이가 10살 가까이 나는 군대동기들, 대부분 비정규직이어도 민주노총 싫어한다. 그렇다고 비정규직 노조원이냐고? 아니, 노동운동 자체를 싫어한다. 그중 한놈은 삼성 천안 공장에 다닌다. 백혈병 운운.. 걱정되어서 전화했다.

자기는 백혈병 걸린다는 것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이 놈이 잘못된건가? 이건 이쪽 저쪽의 잘잘못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이런 상황은 '선거'라는 공간에서 더욱 그렇다. 내가 심상정 단일화를 지지하고, 또 지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심상적이 필요하다는 이유가 제일 크다. 그리고 절대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아무리 변해도 권영길보다는 나을거라는 생각에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것이고, 아무리 무능해도 서민을 위한 정책 한 두개정도는 내놓지 않겠냐는 거다.

모르겠다. 나도 학생땐, 그리고 조그만 단체나 조직에 있을 땐 좋았다. 내겐 분명한 비전과 확고한 원칙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물론 그게 아예 없었기 때문에 이모양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인정..)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에 동지들만 있고, 연대해야될 대상들만 있을 땐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데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 절대 다수다.

소수인 내가 다수인 그들을 '없는 존재' 취급하더라도, 사실 '없는 것'은 내 자신 아닌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심상정 효과'가 가능하다면, 나중에 더욱 원칙적이고 분명한 입장을 가진 이가 심상정을 딛고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그 다수들에게 접근해나가는 것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은 한다.

내 주변에도, 이번 단일화때문에 '진보신당'이 싫어졌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심정적으론 나도 그렇다. 그런데, 억지를 부리고 있다. 아니다라고.

내가 틀렸으면 좋겠다. 심상정의 단일화가 보수 꼴통 정당의 2중대가 되어버리고 마는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 차라리 개인적으론, 그게 편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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