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대세계의 역사2, 극동의 여명, 그리이스세계] / 삼성출판사, 1982.


농민이 세운 최초의 국가권력


진승, 오광 두 사람은 전원을 모아놓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사내대장부가 어차피 죽을 바에야 거사를 해서 후세에 이름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왕후, 장군, 재상이라고 해서 우리들과 별로 씨가 다르다는 것은 아닐 게다.”


이 말에는 봉건적인 압박 밑에 놓인 농민의 삶을 위한 욕구와 신분제도에 반대하는 투쟁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9백명의 병졸이 일제히 소리를 높여 이 호소에 호응하고, 함께 최후까지 싸우겠다고 맹세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진승을 장군으로 추대하고 오광을 도위(병마를 관장하는 관)로 하여, 중국 역사상 최초로 농민 자신의 무장부대를 결성하였다.


반란군은 우선 대택향을 점령하고 이어서 근현을 공략, 다시 서쪽에 진격하여 여러 현성을 함락시켰다. 그들은 도처에서 민중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무기를 갖지 않은 농민은 쟁기, 괭이, 대창을 무기로 이에 가담하여 적의 무기를 빼앗아 스스로 무장하였다. 시초에는 불과 9백명이었던 반란군이 1개월도 못되어 병거 6,7백량, 기병 1천여기, 보병 수만을 거느린 강대한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반란군은 거듭 서쪽으로 진격해나가서, 진현을 함락하였다. 진현은 전날 전국시대에 초나라의 도읍이던 도시이다. 진현에 입성한 진승은 추대를 받고 왕위에 올랐다. 백관을 두어 정부를 만들고 국호를 ‘장초(張楚)’라 했다. 이것은 초나라를 확장하여 크게 한다는 의미 같지만, 어쨌든 여기에서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일어난 농민이 세운 국가권력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이에 호응하고 각처의 농민도 궐기하여 그들을 압박했던 지주, 권력가, 지방관리를 죽이고 진조타도(秦朝打倒)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진승은 정권수립 후 즉시로 오광을 ‘가왕(임시의 왕)’에 임명하고, 그로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진나라 도읍 함양의 문호인 형양을 향하여 진격시키는 동시에, 또 군사를 사방에 파견하여 삽시간에 광대한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오광이 형양을 포위하고 있을 때 진승은 또 전국시대의 생존자인 장군 주장을 시켜 직접 함양을 공격케 하였다. 주장은 진군 도중 수많은 반란농민을 받아들여, 함곡관에 도착했을 때는 병거 1천량과 장병 수십만의 대군으로 팽창되어 있었다. 이 대군을 몰고 함곡관을 돌파하여 함양에 가까운 희에 도착하였을 때는, 봉기한 이래 겨우 2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반란군의 세는 최고조에 달하여, 진조의 붕괴가 목전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진나라에서는 함양의 상비군을 출동시키는 동시에 사면령을 내려 여산릉에서 복역하던 죄수와 노예를 방면하고, 대장 장한에게 명하여 이들을 이끌고 반격을 가하게 하였다. 반란군은 수는 많았으나 말하자면 오합지졸이라서 전투의 경험도 없었고 게다가 적지에 너무 깊이 들어가서 원군이 뒤를 따르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몇 차례인가 접전한 끝에 함곡관 밖까지 쫓겨나와 일단 태세를 정비하려 하였지만 진군의 추격을 받고 면지싸움에 패배하여 주장은 자살하고 말았다.


또 오광의 부대는 형양을 포위공격 중이었으나 여간해서 성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던 중, 내부싸움이 일어나 오광은 부하 손에 죽고 부대는 무너져 버렸다.


이 2개의 부대는 진왕의 주력군이었던 까닭으로 이 양군의 실패에 의하여 반란군은 갑자기 불리한 정세에 빠졌다. 그 해 2월 장한은 승승장구하여 반란군의 수도에 육박하였다. 진승은 필사의 방어전을 시도하였으나 미치지 못하고, 마침내 성을 버리고 동쪽으로 탈주하는 도중 불행히도 차부의 배반으로 살해되었다.


진조타도의 봉화를 올린 지도자들은 이렇게 해서 차례로 넘어졌다. 진승의 정권은 근근 6개월간 유지되었을 뿐이지만 그들의 영웅적인 싸움은 그 후계자에 의해 완수되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01/11 14:59 2006/01/11 14:59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plus/trackback/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