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희망의 새해 : 사다리 오르기보다는 원탁 만들기를!


1. 2005년 한국: 풀뿌리 민중의 척박한 현실을 다시 돌아봅니다.

1980년대 이후 하나씩 강화된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이 온통 지구촌을 뒤덮고 있습니다. 초국적 기업과 세계금융자본, WTO와 IMF가 온 세상을 하나의 시장으로, 하나의 공장으로, 하나의 이윤 공간으로 재편하려 듭니다.

미국은 이라크 전에서 손을 떼는 듯이 보이지만 여전히 중동 지역에 대한 기득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갈수록 미국의 존재와 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가 강하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애국주의가 수많은 이라크 민중은 물론 수많은 미군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2005년 가을에는 APEC 회의가 부산에서 열렸고 그 부당성과 반민중성이 고발되기도 했습니다. 풀뿌리 민중의 입장에서는 국제회의가 우리나라에서 열린다는 것이 별로 영광스런 것도 아닙니다. 부자들의 잔치에 지나지 않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홍콩에서 WTO 각료회의가 열릴 무렵 수천 명 농민들이 농촌과 농업 죽이는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러 갔다가 11월 중순의 여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시 무자비한 탄압을 받고 왔습니다. 그럼에도 한국 민중의 불굴의 투쟁 의지는 세계를 놀라게 한 것도 사실입니다.

여느 해나 마찬가지로 2005년도 이 척박한 한반도 안에서 희망을 만들고자 하는 여러 가지 싸움이 많은 한 해였습니다. 이미 2004년부터 벌어진 LG칼텍스 정유사 노조의 해고자 투쟁도 해를 넘기며 2005년 벽두를 장식했고, 또 2004년 3월에 총 31명에게 해고 통지가 됨으로써 시작된 철도청 새마을호 계약직 여승무원의 정규직화 투쟁이 2005년 연초에도 해를 넘기면서 지속되었습니다. 2004년 12월에 나온 선전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몸이 아파도 웃어야 했습니다. 집안에 슬픈 일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 손님을 맞았습니다. 사람이 부족해서 한 달에 300시간을 노동했습니다. 실컷 부려먹고 갖은 거짓말로 회유하더니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소모품처럼 내쫓아도 되는 것입니까? 저희는 노동조합도 없습니다. 계약직이라 눈치 보며, 차별을 묵묵히 감수했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이런 식으로 쫓겨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힘없는 저희들이지만, 최소한의 의사표시로 리본을 달게 되었습니다. 승객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시민선전물, “우리는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 계약직 여승무원의 눈물을 안고 달리는 새마을호”]

2005년 1월에는 기아자동차 하청투쟁(보성 투쟁)이 시작되어 고용보장, 현장 탄압 관리자 해고, 산업안전법 준수 등 요구를 걸고 싸우다 6월 말에는 보성 사장을 퇴출시키는 등 ‘작은 승리’로 매듭이 되었고, 같은 6월에는 비정규직 노조가 설립되어 조직화 사업과 더불어 9월의 거점 파업까지 전개되었습니다. 이들의 투쟁에 대해 한노정연 장효안 연구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열사 정국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비정규직 열사 정국이다. 누군가의 피가 마르기 전에, 그 죽음에 대한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른 열사가, 그리고 또 다른 열사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으며 심지어는 열사로 ‘칭’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논쟁하는 웃지 못 할 상황까지 연출되고 있다.”[<현장에서 미래를>, 2005년 10월호, 145쪽]

2005년 9월 4일 저녁에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정문 맞은 편 골목에 있는 비정규직노조 사무실 3층 옥상에서 비정규직 해고자 류기혁 조합원이 줄에 목을 매 자결했습니다. 또 일주일 뒤 부산에서는 김동윤 화물연대 조합원이 “유류보조금을 세무서에서 압류해 살기가 힘들다.”며 투쟁조끼와 머리띠를 매고 분신을 하였고 3일 뒤에 사망했습니다. 또 경남 함안에서는 9월 14일, 점심 식사 뒤 휴식을 취하던 미등록 이주노동자 응웬 치쿠에트 씨가 출입국관리소 단속반원들이 승합차에서 내리는 줄 알고 ‘목숨 걸고’ 도망치다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다음날에는 여수에서 3주일 이상 천막 농성 중이던 김익준 조합원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35년 전인 1970년 11월의 전태일 열사 분신 때와 별 다름이 없고 또 역시 1년 전인 2004년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이던 박일수 씨는 분신하기 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하청노동자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옷을 갈아입고
한여름 점심시간 쉴 곳이 없어 그늘을 찾아 헤맨다.
한겨울 점심시간 쉴 곳이 없어 바람 피할 곳을 찾아 헤맨다.
… 한 인간으로 이 사회에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이며 기득권 가진 자들의 배를 불려 주기 위해 제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차별과 멸시, 박탈감, 착취에서 오는 분노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9월 26일에는 세종로 정부청사 앞에서 장애인교육권연대 주최 학부모 결의대회가 열렸습니다. 울산에서 상경한 김옥진 회장은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말을 크게 외쳤습니다.

“제가 두려운 것은 여기 방패를 들고 나와 있는 무장한 경찰도 아니고, 협박을 하는 어용 장애인단체장들도 아닙니다. 오직 두려운 것은 인간답게 살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아이의 눈빛입니다.”

2005년 7월에는 아시아나 조종사 노조가 노동시간이나 휴가 등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려고 파업을 벌였고, 역시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도 12월에 파업을 벌였습니다. 여전히 보수 언론은 현장의 목소리를 겸손하게 듣기는커녕 ‘노동귀족’ 운운하며 파업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부채질했습니다. ‘하루 매출손실 300억 이상’ 따위의 뉴스는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지 않고 일을 할 때 얼마나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지 증명해줄 따름이었습니다.

11월 11일 농민의 날을 즈음하여 정용품, 한상민 등 농민이 절망적인 농업 현실에 비관하여 자결하였고, 특히 11월 14일엔 경북 성주군에서 귀농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던 오추옥 여성 농민이 “쌀 개방 안돼”, “우리 농민 다 죽는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을 했습니다. 또 11월 15일에 '쌀협상 국회비준 저지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했던 전용철 농민과 홍덕표 농민이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끝내 소중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12월 들어서도 전남 나주와 영암에서 두 분의 농민이 음독 자결했습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이렇게 안타깝게 온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12월 중순에는 WTO 각료회의를 저지하기 위해 농민과 시민사회단체 대표 2,000여 명이 홍콩으로 원정 시위를 갔습니다. 일부는 홍콩 경찰에 주동자로 몰려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안 그래도 잘못된 농업 정책 탓에 산더미 같은 농가부채에 시달리고 게다가 수시로 홍수와 태풍, 폭설까지 농민을 괴롭히는데 WTO마저 농업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듭니다. 2003년 9월, 멕시코 칸쿤에서 자결한 이경해 열사의 후손들이 부단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비참한 현실을 제대로 막아야 할 터입니다.


2.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봅니다.

과연 이러한 풀뿌리 민중들의 피 흘리기가 얼마나 지속되어야 할 것인가? 물론 아무런 피도 흘리지 않고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진보가 가능할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 현실의 삶의 구조가 어떤지 똑 바로 읽어내야 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다리 질서’입니다.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구조, 그러면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긴 하지만 그 가능성이 매우 제한된 구조입니다. 이 질서는 쉽게 말하면 ‘열심히 사다리를 올라가라. 능력과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올라갈 수 있고, 일단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떡고물을 많이 먹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대한 함정이 있습니다. 삶의 구조로서의 사다리 질서는 우리가 주말에 등산을 가는 것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등산의 경우는 앞서 가는 사람을 끌어내리거나 올라오는 사람을 발로 내려치지는 않는데, 삶의 구조로서 사다리 질서는 위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제한될 수밖에 없고(그렇지 않으면 사다리 질서 자체가 허물어지므로) 앞서 가는 사람이 뒤에 오는 사람을 경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있는 사람은 윗사람에게 눈치 보고 아부하고 아랫사람에게는 겉으로는 친절한 듯 하지만 교묘하게 갈구고 통제를 잘 해야만 자기 자리가 유지됩니다.

이런 식으로 이 비인간적, 반생명적인 사회경제 체제 안에서 제 아무리 성실히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봐야 결국에는 바로 그 주어진 사회경제 체제, 즉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사다리 오르기에 불과할 뿐, 그리하여 그 체제를 오히려 강화 또는 유지할 뿐, 근본적으로 전혀 새로운 변화는 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풀뿌리 민중의 싸움도 그것이 사다리 질서 자체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그냥 주어진 틀 안에서 좀 더 많이 사다리 오르기를 요구하는 싸움이라면 수없이 피를 흘리고도 별 다른 희망을 만들어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모든 풀뿌리 싸움에 있어 성공을 위한 관건은 소통과 연대입니다. 때로는 자본과 권력에 의해, 문화나 생활방식에 의해, 또 때로는 좌절감과 실망감에 의해 서로 나누어지고 파편화된 개인과 집단, 조직들이 서로 마음의 벽을 깨고 서로 교감하며 굳세게 단결함으로써 생동하는 연대를 얼마나 열어내는가,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또 강조하고픈 것은 소통과 연대를 통해 쟁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들의 내면에서부터 대안적인 질서를 상상하고 논의하고 밑그림을 그려내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투쟁하고 쟁취해봐야 또다시 사다리 질서에 갇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의 풀뿌리 운동에서 많은 성취가 있었음에도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지지부진하거나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 모두가 사다리의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좌절감이나 위화감에 분통이 터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다리 사이가 매우 넓어서 오르기 힘들다고 투덜대거나, 사다리 사이에 유리 천정이 있어 더 이상 오를 수가 없다고 피해의식을 갖기도 합니다. 또 “나는 열심히 올라가고자 하는데 먼저 꼭대기에 오른 놈이 내가 한참 오르고 있는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분노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위로 오르던 이들이 실수로 또는 윗사람이 발로 차서 불쌍하게도 까마득히 먼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고도 자신만을 성공할 것이라며 두 눈과 두 귀를 막고 무조건 올라가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사다리 질서 안에서 움직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표가 결코 사다리 질서 안에서 더 높은 곳을 더 많이 올라가려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그 무엇이 대안적인 질서가 될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원탁형 질서’가 될 것입니다. 원탁형 질서는 이 세상 모든 나라, 모든 사회가 원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듯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평등하게 교류하고 상호 존중하는 질서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집니다.

원탁 질서 안에서는 학력별, 성별, 국적별, 출신별 등 별의별 분열의 경계선으로 차별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유일한 차이는 자신의 잠재력과 개성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차이로 수용하고 존중하면 이 질서 아래 모든 사람은 든든함과 풍성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윗사람 아랫사람이 구분되지 않고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서 의논하고 토론하며 건강한 비판을 통해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천히 가더라도 사람냄새 맡으며 올바르게 가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탁형 질서는 우리 풀뿌리가 지향하는 목표일뿐만 아니라 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3. 원탁형 질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만일 우리가 사다리 질서의 비인간성, 반생명성에 확실한 입장을 가지면서 원탁형 질서에 대해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면, 마침내 그 실현 방안에 대해 생각할 차례입니다.

제가 보기엔 첫 걸음이 원탁형 질서를 목표나 과정으로 신념화하는 것입니다.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새로운 신념화를 해야 합니다. 기존 사다리 질서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교육과 언론, 사회 분위기 따위를 통해 이미 공공하게 세뇌되어 있는 ‘사다리 질서에 대한 믿음’을 과감히 털어 내야 합니다. 마음은 사다리 질서에 빠져 있으면서 몸만 원탁형 질서를 만들겠다고 하면 그것도 헛빵입니다. 차라리 당장에 몸은 사다리 질서에 끼어 있더라도 마음부터라도 ‘내면적 사표’를 써서 원탁형 질서를 절실히 원하기 시작하면 서서히 몸도 빠져나올 틈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원탁형 질서를 사회적 삶의 구조 속에 구현해야 합니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직업평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유기농 농민이나 학교 선생님이나 건강한 집을 짓는 목수나 공원 청소를 잘 하는 관리인이나 병을 치료하는 의사나 좋은 연극이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나 법을 다루는 판검사나 사회적으로 비슷한 대접을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일을 수행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나 여건 마련은 각기 다르므로 사회가 적절한 선에서 마련해주되 순수한 인건비 내지 노력에 대한 보상은 비슷하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행복과 사회행복에 모두 기여하는 직업들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비슷하다면, 우리 자신이나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취향이나 적성에 맞춰서 진로를 선택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간적, 경제적 낭비가 훨씬 줄어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각기의 분야에서 정말 열성을 다할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효율성도 오를 것입니다.

직업평준화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미 중고교 평준화에서 우리가 경험한 바, 최소한 형태상으로는 평준화를 통해 무의미한 살인적 경쟁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교평준화를 넘어 대학평준화, 대학평준화를 넘어 직업평준화까지 쟁취해야 원탁형 질서의 윤곽이 제대로 잡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평준화라는 것이 개성을 말살하는 획일화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개성과 차이를 존중하는 평준화, 이것이야말로 희망적인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평준화를 하면 사람들은 자기 계발을 위한 노력을 않을 것이고 조직이나 사회 전체가 정체될 것이 아닙니까? 제가 생각하는 원탁형 질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가진 잠재력이 자기행복과 사회행복에 동시에 도움이 되는 한, 각자의 잠재력이 운전 면허증 시험의 합격 기준처럼 7~80점을 넘어설 경우에 합격증을 줌으로써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직업과 무관하게 비슷한 대접을 하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행복과 사회행복에 도움되는 일,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하되, 그것이 사회적으로 일정한 인정과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지나친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들도 자신이 적합한 일을 찾아서 나름의 기여를 하도록 격려하고 도와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질서를 얼마나 현실화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크게 보아 위로부터의 길과 아래로부터의 길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당연히도 이 두 길이 다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가장 우선적인 것은 아래로부터의 길입니다. 풀뿌리 민중이 자신의 삶의 터전 모든 곳에서 이런 바람을 일으켜야 합니다. 원탁형 질서의 바람, 이런 바람을 곳곳에서 만들어내야 합니다. 따지고 보면 예전의 우리 농촌에서 농민들이 두레나 품앗이를 하면서 만들었던 바람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던가요? 또 오늘날에는 청주의 우진교통이나 진주의 삼성교통에서 노동자자주관리를 하는 운수노동자들이 일으키는 바람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또 유기농산물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주는 생협 운동을 하시는 분들도 바로 이런 바람을 일으키는 분들이고 녹색 화폐(지역통화) 운동을 하는 분들도 바로 이런 바람을 일으키는 분들입니다. 저도 그런 바람을 만들어내려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저는 지난 5월부터 저희 마을에 터무니없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선다 하여 건설자본과 싸움을 하는 와중에 마을 이장이 되었습니다(cafe.daum.net/nantwoforum 참고). 마을 이장이 되어 주민들과 같이 마을 운명을 함께 만들다보니, ‘아, 바로 이런 것이 풀뿌리 운동의 진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과에 관계없이 어디에 살든 삶의 터전에서 함께 논의하고 함께 물결을 만들어가는 것, 바로 이런 것이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마을 이장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마을과 직장, 우리가 사는 그 모든 곳에서 뜻이 맞는 사람들과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원탁형 질서를 만들기 위해 서서히, 그러나 끈질기게 땀 흘리는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바로 이런 아래로부터의 바람과 함께 물론 위로부터의 바람이 함께 맞물려야 합니다. 그러나 원칙은 아래로부터 바람이 훨씬 강해야 하고 그 저변이 대단히 넓어야 합니다. 그러한 아래로부터의 바람에 못 이겨 넘어가듯이 위로부터의 바람이 올곧은 입장에서 이끌어주고 측면 지원할 때 비로소 원탁형 질서가 더욱 완성된 형태로 창조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대체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부단히 되묻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핵심은, 식의주 생계 해결과 삶의 질(건강과 여유, 인격과 평등, 공동체, 생태계) 향상입니다. 이것에 도움이 되는 일은 장려하되, 그렇지 않는 것은 없애거나 줄여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질 중심 구조조정입니다. 지금까지의 경쟁력 중심 구조조정이 자본과 권력을 위한 것이라면 삶의 질 중심 구조조정은 사람과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급하게 원탁형 질서를 만든다고 덤빌 것이 아니라 그 만드는 과정 자체가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원탁형 과정’입니다. 그래야 생명력이 있습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내면적으로 장엄함과 결단력이 필요하지만, 항상 심각하고 무거워야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힘든 점이 있더라도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과정에 내면에서부터 행복하고 즐거워야 합니다. 원탁형 질서의 궁극적인 목적도 행복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4. 결국은 ‘기득권 허물기’의 문제입니다.

부디 새해부터는 절망과 좌절보다는 희망과 용기가 샘솟는 그런 삶의 과정이 되길 빕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노력하고 투쟁하고 피를 흘려도 사다리 질서 안에서는, 그 질서를 인정하고 그 위에서 움직이는 한에서는 희망이 없다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남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저 높은 곳에서 떡 하니 버티고 있는 수구적 기득권층들을 어떻게 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일부 진보적 인사들 중에서 기득권층에 편입된 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득권 허물기의 문제입니다.

우선 일부 진보적 인사들의 기득권 편입 문제는 스스로 기득권 일부를 기득권 체제, 즉 사다리 질서 자체를 허무는 데 써야 합니다. ‘자기 부정을 통한 자기 긍정’입니다. 높은 곳에 앉아서 기득권 체제의 달콤한 떡고물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제를 허물기 위해 팔방으로 노력하면서 하나씩 원탁형 체제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정규직은 내 월급과 노동시간을 줄이더라도 비정규직과 함께 가야하며, 관리직은 권한과 보수를 줄여서라도 생산직과 함께 가야 합니다.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풀뿌리에서 바람을 일으켜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수구 기득권층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형성한 강고한 먹이사슬의 연대 구조를 하나씩 허무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모든 그물코는 결정적인 것 하나만 제대로 풀어헤치면 나머지는 술술 풀리기 마련입니다. 이미 많은 곳에서 구멍이 생기고 있습니다. 더욱 가열 차게 밀어붙여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도 아래로부터의 바람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뭉치고 외치는 만큼 세상은 달라집니다. 물론 그러한 변화가 또다시 사다리 질서에 갇히지 않도록 만드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요컨대, 내 안에서부터 기득권 구조, 사다리 질서에 대한 믿음을 과감히 털어내고 나눔과 배려의 구조, 원탁형 구조에 대한 신념을 강하게 가지면서 소통과 연대라는 사회적 실천을 해나갈 때 비로소 새로운 희망의 싹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희망의 싹이 톡톡 터지는 소리, 이것이 우리 풀뿌리에게는 진정한 복이 아닐까 합니다. 새해에는 이런 의미의 복을 많이 받으시길 빕니다. 그리하여 농민-노동자-빈민-여성-학생-지식인 등 모든 풀뿌리가 생동하는 연대로 두려움 없이 사다리 질서를 허물고 원탁형 질서를 창조하는 새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강수돌(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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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6 07:28 2006/02/06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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