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기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당수 박헌영 (1)
『이정 박헌영 일대기』 / 임경석 / 역사비평사 / 2004
10여년의 '고투' 끝에 되살려낸 박헌영의 삶과 죽음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가수 김정구가 부른 '눈물젖은 두만강'이다. 박헌영의 친아들 원경 스님에 따르면 이 노랫말의 지은이는 가수 김정구의 친형 김용환이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정신병자 흉내를 내 병보석으로 출감한 후 1928년 8월 부인 주세죽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했다. 김용환은 신문에 대문짝하게 보도된 박헌영의 탈출 소식을 두만강변에서 접하고 이 노랫말을 지었다고 한다.

『이정 박헌영 일대기』는 남북한 모두에서 철저하게 '버림받았던' 박헌영의 삶과 죽음을 '지구 위에 산재하는 모든 자료를 수집하겠다'는 각오로 작업한 10여년의 '고투' 끝에 연보 형태로 완성한 역작이다. 임경석은 말한다.

"1994~1996년 2년 간의 모스크바 체류 동안 나는 기대 이상의 행운을 맛보았다. 문서보관소의 문서철 속에서 60~70년 전에 작성된 박헌영 관계 각종 기록의 원본들을 목도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전율을 느꼈다. 내가 느낀 생생함이란, 그 감격이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렵다. 박헌영뿐만이 아니었다. 분단체제하에서 남한에서는 '빨갱이'란 이유로, 북한에서는 '종파분자'라는 이유로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사람들의 혁명운동 족적이 생생하게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 자료들은 운동 전개과정의 굽이굽이에 얽힌 그들의 고뇌와 격정, 생각과 숨결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 책은 박헌영에 대한 "섣부른 평가"를 자제하고 있다. 임경석은 박헌영에 대한 역사 평가를 "훗날 다시 쓰게 될 '박헌영 평전'"으로 조심스레 미룬다. 우리 또한 '평가'에 앞서 우선 이 책을 따라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 당수 박헌영의 행적을 쫓아가 보자.


상해, 첫번째 구속,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의 짧은 기자생활

박헌영은 1900년 5월 28일 충남 예산에서 농민 박현주와 그의 둘째 부인 이학규의 사이에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고 대흥보통학교를 나온 후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소설 『상록수』를 지은 심훈이 경성고보 동창이다.

1920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 박헌영은 그해 11월 상해로 망명, 사회주의 운동에 입문했다. 21년 3월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 비서가 됐고 5월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에 입당했다. 고려공산당이 운영하는 사회주의연구소에서 활동하던 박헌영은 이 시기에 상해로 유학온 주세죽과 결혼했다. 21년 8월 북경에서 고려공청 중앙총국이 결성됐고 박헌영은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22년 3월 고려공청 제2차 중앙총국의 책임비서가 됐다.

22년 4월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은 비밀리에 조선으로 입국하려다가 중국 안동현의 한 음식점에서 신의주 경찰에게 체포돼 평양형무소에서 1년 10개월을 복역했다. 24년 1월 출옥한 뒤 곧바로 서울로 올라온 박헌영은 2월 신흥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3월 고려공청 중앙총국 책임비서로 재선임됐다. 4월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했고 조선청년총동맹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됐다.

25년 4월 17일 서울 한복판에 있는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가 열렸다. 박헌영은 화요회 야체이카(세포) 대표 자격으로 이 대회에 참석했다. 다음날 박헌영과 주세죽의 살림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제1차 창립대표회가 열렸고 4월 21일 박헌영은 고려공청 책임비서에 선임됐다. 그해 5월 동아일보를 퇴사한 박헌영은 8월 한양청년연맹 집행위원을 맡았고,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조선일보에서는 논설위원 신일용의 필화사건으로 10월에 바로 해직됐다.


두번째 투옥, 소련으로의 탈출과 '국제선' 활동

25년 11월 국외로 발송한 고려공청의 비밀문건이 일본 경찰에 압수되면서 박헌영과 주세죽은 종로경찰서에 체포됐다. 두번째 투옥된 박헌영은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박헌영의 진술이다.

"일제 경찰은 연행된 사람으로부터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냉수나 혹은 고추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거나, 손가락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가죽채찍으로 때리거나, 긴 의자에 무릎을 꿇어앉힌 다음 막대기로 관절을 때리거나 한다. 7,8명의 경찰들이 큰 방에서 벌이는 축구공놀이라는 고문도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먼저 '희생양'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다른 경찰이 이를 받아 다시 또 그를 주먹으로 갈겨댄다. 이 고문은 가련한 '희생양'이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박헌영은 재판도중 자살 시도와 단식을 거듭하며 정신병자 흉내를 냈고 몇차례 병보석 신청 끝에 27년 11월 감옥문을 벗어났다.

28년 8월 일본 경찰의 감시를 따돌리고 박헌영은 만삭인 주세죽과 함께 함흥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주세죽은 딸 비비안나를 해산했다. 11월 모스크바로 간 박헌영은 29년 1월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했고 2월 소련공산당에 입당했다. 국제레닌학교에서는 호치민 등 아시아의 젊은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공부했다. 박헌영은 31년말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32년 1월 박헌영은 코민테른의 지시로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사업을 위해 상해로 파견됐다. 상해에서 김단야와 함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기관지 『콤무니스트』를 발행했다. 이 잡지는 33년 7월까지 발간됐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비밀리에 국내 공산주의운동을 지도했다. 당시 국내 공산주의운동에서 '국제선'으로 불렸던 그룹이 바로 이 조직이었다.


세번째 체포와 6년만의 출옥, 도피와 지하운동

33년 7월 박헌영은 상해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됐다. 박헌영은 심문과정에서 28년 8월 탈출 이후 약 5년 동안의 행적에 대해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필사의 위장진술에 나섰다. 다행히 박헌영의 해외활동에 대한 아무런 물적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34년 12월 경성지방법원은 박헌영에게 징역 6년형을 선고했다.

34년 주세죽은 모스크바에서 김단야와 재혼했다. 37년 11월 김단야는 스탈린의 대숙청에 휩쓸려 소련비밀경찰에 체포돼 사형당했다. 38년 주세죽은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39년 9월 박헌영은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했다. 12월 이관술과 만나 경성콤그룹의 지도자가 됐다. 그리고 41년 2월까지 청주와 서울의 비밀 아지트에 기거하면서 지하운동을 벌였다. 이 기간에 박헌영은 아지트 키퍼였던 정순년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박헌영과 정순년 사이에 41년 3월 태어난 아들이 박병삼, 원경 스님이다.

41년 1월 경성콤그룹 이관술, 이현상, 김삼룡 등이 체포됐다. 박헌영은 서울 아지트를 버리고 대구로 피신했다. 박헌영은 "행상인도 되어보고…약사나 심지어 점쟁이 노릇"까지 해가며 검거를 피해 계속 도피했다. 42년 12월 광주로 피신한 박헌영은 45년 8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김성삼이라는 가명을 쓰며 종연방직공장 변소 청소부와 벽돌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박헌영은 김삼룡의 처 이금순을 비롯해 전남 일원의 경성콤그룹 조직원들과 비밀활동을 계속 했고 서울주재 소련영사관과도 비밀교신을 주고받았다.

45년 8월 15일, 박헌영은 벽돌공장 감독에게 "장래를 위하여 서울로 가겠다"는 간단한 말을 남기고 광주를 떠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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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6 14:50 2006/02/1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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