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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은 확실히 계급의식이 있어야 한다"
전평 활동가 이수갑 선생 초청 강연회


▲ "해방된 조국에서 죽어간 동지들 한시도 잊을 수 없다"

울산노동자배움터 창립기념 특별 강연회가 20일 오후 6시 양정동 배움터 교육관에서 열렸다.

60여명이 꽉 들어찬 교육관에서 82세 노(老) 운동가 이수갑 선생의 이야기는 밤 11시 넘어까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


운명처럼 뛰어든 노동운동…60년전 학습한 조직원칙, 지금도 여전히 훈련중

1945년 해방이 되어 일자리를 구하던 선생은 운전면허증과 자동차 수리기술 덕에 부산 철도에 취직했다. 어느날 "노동자가 단결해서 전민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독립조국을 건설하자"는 삐라가 공장에 뿌려졌다. 소작도 못부쳐먹는 3대째 머슴 집안에서 태어나 지독한 고생을 겪어야 했던 선생은 "해방된 조국에서 나같이 못사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고 절실히 느꼈고 운명처럼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선생의 나이 21살이었다.

'철저히 기본계급 출신'이었던 선생은 선배들로부터 며칠씩 '집중교육'을 받았다. 유물론과 변증법을 거의 암기하다시피 하며 공부했다. 당시 서울에서 두루마기 차림의 40대 남자가 내려와 선생을 특별교육시키기도 했다. '가혹한 지도부'라고 할만큼 교육은 '철두철미'했다.

선생은 당시 선배들로부터 기합까지 받아가며 학습했던 '조직활동의 4가지 원칙'을 들려줬다. "조직대상을 볼 때 주관적으로 분석하면 절대 안된다. 자기 주관대로 계획을 세우면 실정에 맞지 않게 된다. 따라서 실정을 철저히 조사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실정에 맞는 계획이 세워지면 산만적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선생은 '조사-계획-조직-적극' 이 4가지 조직활동 원칙을 갖고 부산 철도를 조직해들어갔다.

당시 부산철도 공작창에는 1,700명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대부분 전평을 지지했지만 조직 가입은 꺼리고 있었다. 선생은 우동그릇 설겆이통을 바꾸는 투쟁을 시작했다. 처음 이 문제를 가지고 공장장에게 항의하러 가자고 했을 때는 두세명밖에 모이지 않았지만 3일을 계속 싸운 결과 2~30명으로 늘어났다. 차라리 굶겠다는 항의에 설겆이통이 바뀌었다. 그 다음은 밥 투쟁. 우동그릇을 던져가며 싸운 이 투쟁을 통해 참가자들이 1,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전평에 가입한 인원은 고작 30여명. 선생은 무리한 싸움을 피하면서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투쟁을 통해 핵심들을 차근차근 모아나갔다. 몇달만에 선생은 철도 공작창 대부분의 노동자를 전평에 가입시킬 수 있었다. 선생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학습했던 조직원칙을 여전히 훈련중에 있다고 말했다.


전평이 각인한 '계급의식'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는 일제 때 옥중에서, 지하에서 벌여온 노동선배들의 독립투쟁을 계승해 해방 후 남과 북이 합쳐 건설한 것이었다. 전평은 상층부가 없었다. 전체가 평의회였다. 전평은 노동자의 권익뿐만 아니라 통일된 독립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선봉에 서서 미군정과 싸웠다.

미군정과 친일파, 서북청년단은 전평을 파괴하기 위해 탄압과 학살을 일삼았다. 당시 철경(철도경찰)보다 더 무서웠던 것이 대한노총이었다. 숱한 노동자들이 "가죽잠바를 입고 허리에 권총을 찬" 이들에게 학살되고 고문당했다. 울산에서도 보도연맹 사건으로 백양사에서 집단학살이 일어났고 방어진에서는 산채로 사람들을 수장시켰다.

"많은 동지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죽고 구속됐다. 내 눈 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많이 봤다. 그 좌절과 분노를 어느 한시도 잊은 일이 없다. 하루 한끼도 못먹고 아지트도 자기가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집념을 잊지 않았다. 때로는 동료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선'이 있을 수도 있고 고립돼 있을 수도 있다. 언제든가 창의성을 갖고 독자적으로 역사의식을 가지고 활동하라는 것이 전평 선배들의 엄명이었다."

선생은 이후 8차례 구속과 고문을 당했다. 그 시련 속에서도 선생을 '버티게'해온 힘은 '계급의식'과 '역사의식'이었다.

"나는 나 혼자가 아니고 노동자계급에 속해 있다. 내가 무너졌을 때 옆 동료가 다 무너진다. 내가 자본과 권력에 함락되는 것은 노동자계급 전체에 크나큰 죄악이다."


민주노총의 위기…'혁명'하듯 노동운동 변화시켜야

이수갑 선생은 강의 내내 민주노총의 심각한 위기를 지적했다. "민주노총 상층부에 과연 계급의식이 있느냐? 전혀 없다. 우리는 지금 과거 일본의 경우처럼 노동운동이 급박하게 무너지기 직전인 상황이다. 어용화된 민주노총 상층부는 노동운동을 말살하고 무력화시키려는 자본과 권력의 '프락치'다."

"노동운동은 이제 밑으로부터의 원칙을 찾아야 한다. 혁명하다시피 노동운동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이제 더 이상 노동운동이 살아날 수 없다. 사용자가 민주노총과 일부 산별 연맹의 절대다수 대의원 한사람 한사람을 움직이고 있는 현실에서 간선제를 고집하는 분자는 자본과 권력의 '프락치'라고 봐야 한다. 민주노총 상층부의 어용화를 막는 길은 조합원의 직접선거밖에 없다. 조합원이 바로 최고권력기관이 돼야 한다."

민주노총 이수호 전 집행부의 '사회적 교섭'에 대해서도 비판을 잃지 않았다. "이수호 전 위원장이 노동운동은 달라져야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노동운동이 이제는 투쟁을 하지 말자는 얘기다. 노동운동의 본질은 자본가와 투쟁해서 노동자의 요구를 쟁취하는 데 있다. 자본가계급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이룩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교섭은 이같은 노동운동의 본질을 변질시키고 있다."

"사용자의 눈치를 보고 영향을 받는 것은 더이상 민주노총이 아니다. 전평은 확실한 계급의식과 이념이 있었다. 민주노총은 지금 그런 의식이 없다. 노동운동은 확실히 계급의식이 있어야 변절되지 않는다. 노동조합 상층부가 자본과 권력의 회유와 매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조합원들이 밑에서부터 일상적으로 지도부를 감시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 민주노총이 직선제를 못하면 대한노총, 한국노총과 다를 게 없다."

선생은 "노동운동의 역사는 절대 단절되지 않는다"며 "선배들은 대한노총과 한국노총의 어용 상층부와 치열한 투쟁을 벌여왔다"고 말하고 "지금 다시 이 투쟁을 이어가야 한다. 이것이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이번 민주노총 임원 보궐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민주노총 변혁운동은 지속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노동운동 중심지 울산에서 민주노총을 변혁하는 운동 펼쳐야

"전평 활동할 때보다 지금 조건은 훨씬 용이하다. 그때는 엄청난 고립 속에서 활동해나갔다. 사방이 막막했다. 46년도 철도 파업 때 수천명이 해고당했다. 그야말로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수 없는 삼엄한 전투상황이었다. 전평은 당시 '우리는 하나의 피지배계급이다', '하나의 노동자계급이다'라는 역사의식과 계급의식이 확고히 인식돼 있었다. 민주노총 상층은 그런 계급의식이 없다. 가장 무서운 것은 자본과 권력에 결탁해 노동운동을 말살하고 무력화시키는 민주노총 내부의 '프락치'다. 이들이 민주노총 안에서 발을 못붙이도록 축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제대로 살아가는 사회를 보고 죽었으면 여한이 없겠다. 내가 죽더라도 역사가 노동운동을 이어가야 한다. 울산에서 역사를 다시금 창조한다는 각오로 민주노총을 새롭게 변혁하는 운동을 이어가기 바란다." 선생의 간곡한 주문이다.


뒷풀이 자리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 이수갑 선생은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에 여성 동지들을 많이 조직했어. 신문지에 먹물로 구호 벽보 만들어서 부산시내에 죄다 붙여놓고 저녁 때 지금 문현동 있는 산 위로 올라가서 여성 동지들과 노래 부르고 할 때, 살면서 제일 기분좋고, 얼마나 투지가 살아나는지…"

"노동운동을 하면서 가장 깨끗하게 살 수 있었다. 죄 없이 산 게 노동운동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부심을 느낀다. 열번 다시 태어나도 노동운동을 하겠다. 인생을 잘 타고났다."

82세 선배 노동운동가의 마지막 이 말에 이제 겨우 20년 남짓 노동운동을 벌여온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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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1 23:13 2006/02/21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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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 2006/02/25 01:34 | DEL
'전망좋은당' 건설을 처음 제안한 게 2004년 10월인데, 1년 반 가까이 흘렀다. 당시나 지금이나 때는 무르익었는데, 나서는 사람들이 없다. 그래서 중간보고를 하자면 현재까지 진척이 없다.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