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만나기
소중한 실패와 오류를 딛고 새로운 20년을 설계한다
민주노총울산본부 하부영 본부장


▲민주노총울산본부 하부영 본부장

지난 14일 취임식을 갖고 직선 3기 민주노총울산본부를 이끌고 있는 하부영 본부장을 만났다.

'조국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입사한 현대자동차

하부영 본부장은 충남 부여에서 나고 자랐다. 당시 박정희 정권 아래서 '조국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논산공고 기계과에 들어간 그는 19살 되던 77년 9월 2명씩 추천되는 공고 실습생으로 뽑혀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울산 오는 고속버스도 없어서 대구까지 고속버스 타고 갔다가 동대구 터미널에서 시외버스로 울산에 왔다. 다들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다. 주머니에는 달랑 7만원이 들어 있었다. 월세방을 얻어 공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앞이 깜깜하고 절망스러웠다. 빨리 때려치우고 대학이나 갔으면 했다.

어릴 적 그에게는 부자 이모가 있었다. 천석군 집이었던 이모 댁에는 읽지도 않은 새 책이 수천권 쌓여 있었다. 국민학교 5~6학년 때 그 집에서 대망, 대벌, 미야모토 무사시 같은 일본 소설들과 삼국지 등 1~2천권은 족히 읽었다. 그는 부자 이모를 보면서 어린 마음에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차별'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릴 적 이 기억과 잠재의식이 노동운동을 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됐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말했다.

76년 현대자동차에서도 노조설립을 기도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사건에 관여했던 이가 그의 조장으로 있었다. 조장은 그에게 늘 "보안을 지키고 철저히 노조를 준비해야 한다"고 틈만 나면 얘기했다. 조장의 이야기는 10년 가까이 꾸준히 비밀스럽게 계속됐다. 그 덕에 현대자동차에 언젠가는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하고 젊은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의식이 알게 모르게 심어졌다.

그가 노동조합이란 걸 처음 눈으로 보게 된 건 1980년이었다. 주물공장에서 일하던 대전 친구한테 놀러갔다가 공장 마당에 200여명이 모여 노래하고 구호하는 모습을 봤다. 시위대는 '우로 어깨 삽'을 하고 회덕역까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거리시위를 벌였다. 친구는 그 노동조합의 쟁의부장이었다.

80년대 초반 서점에서 프랑스 저자가 쓴 '인식과 관심'이라는 책을 사다 읽었다. 그 책에는 깨알같은 글씨로 사회문제와 노동자, 노동운동 등에 대해 적혀 있었다. 뭔가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두달을 낑낑거리면서 읽었다. 그때 얼마나 고생하며 읽었는지 이후로 그 책을 다시는 읽고 싶지 않았지만 뭔가 많은 것을 느꼈다.

87년 노동자대투쟁과 현대차노조 결성

87년 7월 24일 현대자동차에도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그런데 반장이 홍보물을 나눠주는 걸 보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7월 25일 어용노조 집행부가 본관식당에서 현수막 들고 나오는 걸 보고 이상범씨를 무등태운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타도하자"며 현수막을 뺏고 온공장을 돌면서 시위를 벌였다.

공장은 마비됐고 협상이 벌어졌다. 민주파 반, 어용 반으로 임시집행부를 꾸리자는 가합의가 된 걸 보고 그렇게 되면 명분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공장별로 사람을 뽑아 협상팀을 꾸리고 공개협상을 하자고 주장했다. 본관 로비에서 공개협상이 진행됐다. 바깥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다. 정문에서 경비들과 싸움이 벌어지고 몇몇 분노한 노동자들에 의해 본관 유리창이 깨지고 중역의 승용차가 뒤집어졌다. 회사는 결국 포기하고 어용노조 사퇴와 민주노조를 인정하는 5개항을 합의한다.

임시집행부는 버스 2대에 나눠타고 양정교회 이신기씨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집이 비좁아 다음날 야음동에 있던 그의 2층 독채로 3~40명이 다시 옮겼다. 배가 불러 있던 그의 아내는 2박3일동안 밥을 해내야 했다.

본관 여사원 도움을 받아 조합원명부도 만들었고 임시집행부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1대 위원장선거에 부위원장후보로 나섰지만 패배했다.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이 시작됐다. 권용목, 천창수, 김연민 교수 등과 "작전 짜듯" 만나 교육을 받았다. 1대 이영복 집행부가 첫 단체협약안을 만들어 대의원대회에 가져왔다. 오십몇 조항의 일본식 단협을 베낀 것이었다. 대의원들은 집행부의 단협안을 폐기해버렸다. 공은 대의원들에게 넘어왔다. 1박2일동안 공인노무사 수험책을 참조해가며 단협 전문부터 써내려갔다. 100개 가까운 조항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땐 인터넷도 없어서 여기저기 일일이 물어봐야 했다. 현대차노조의 첫번째 단협안은 이렇게 만들어졌고 이후 울산지역 대부분 사업장 단협의 모태가 됐다.



90년 4.28 연대투쟁과 직권조인

2대 집행부 사무국장이던 90년 4월 현대중공업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현대중공업에 공권력 투입이 임박해지면서 현대차노조는 본관 앞 잔디밭에서 대의원대회를 열어 연대총파업을 결의했다. 본관 앞 밤샘농성이 시작됐다. 이튿날 새벽 공권력이 투입됐다. 현대차 공장 담을 따라 전경들과 충돌이 일어났다. 전경들이 최루탄을 공장 안으로 쏘기 시작했다. 최루탄 가스로 온공장이 다 섰다. 자동파업이었다. 구정문 쪽에서 전경과 맞붙었다. 그렇게 시작된 4.28 연대투쟁은 오전 10시까지 계속됐다.

4.28투쟁으로 1천명 가량 연행됐지만 이상도씨를 제외하고 다 풀려났다. 이상도씨에 대해서도 조기석방을 선처하는 수준에서 기관과 협상이 진행됐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계속 파업하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민실노의 파업 선동 유인물이 현장에 뿌려졌다. 민실노 핵심 회원들이 구속됐고 구속자 석방 때까지 파업을 계속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상범 위원장은 "이대로 끌려 다닐 수 없다"며 파업을 정리할 뜻을 굳혔다. 일주일만 더 파업하자고 설득했지만 위원장은 완강했다. 결국 회사가 바꿔놓은 3~40개 단협 조항을 그동안 회사와 합의했던 협상 문안으로 원상회복시키는 선에서 직권조인을 지켜봐야 했다.

현총련, 대우차 해외매각저지투쟁

2대 집행부에서 내려오기 전에 현대그룹 노조 사무국장들로 정책단협의회를 꾸려 현총련 창립을 준비했다. 규약과 예산안을 만들고 위원장단 결의를 끌어내고 실무자도 준비하고 서로 안하겠다는 의장까지 '작업'해서 만든 다음, 경주 도투락월드에서 현총련이 출범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직권조인하고 연대사업 포기를 선언했던 2대 집행부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현총련 건설에 그렇게 힘을 쏟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97년 노개투가 끝나고 회사는 5천555명을 정리해고시키겠다며 노조를 압박했다. 6대 정갑득 집행부의 사무국장이었던 그는 정리해고를 피해가는 길을 택했다. 6대 집행부는 대의원들로 고객불만조사단을 꾸려 전국의 정비공장에 보내고 공장별로 현장보고대회까지 열었다. 회사는 인위적 감원을 하지 않겠다며 물러섰다.

2000년 8대 정갑득 집행부의 부위원장으로 치렀던 대우자동차 해외매각저지투쟁에 대해서는 "대단히 중요한 투쟁으로 다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광고비 사건으로 중도에 물러나야 했지만 해외매각저지투쟁 이후 국내대기업의 헐값매각이 쑥 들어갔다는 점을 성과로 지적했다.

비정규직 상한선 16.9% 합의

8대 집행부는 완전고용보장서를 합의하면서 하청노동자 투입 상한선 16.9%에 합의했다. 생산공장 기준으로 산재자, 상집 파견, 6개월 임시작업, 공장 내 2차 벤더 등 엄격한 사유제한을 통해 하청 투입을 제한했다면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정리해고를 막기 위한 내부 노동시장의 최소한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95년 연말까지 현대차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90% 수준이었다. 문제는 하청 사장들이 중간에서 그 임금을 다 떼먹었다는 데 있었다. 96년 하청업체들과 재계약하면서 현대차는 하청 임금을 70%로 삭감한다. 그러나 하청노동자들이 받는 실제 임금에는 변동이 없었다.

당시 사유제한은 합의가 이뤄졌고 임금은 연차별로 3년차 87%까지 이야기가 접근되다가 광고비 사건이 터지면서 다 끝나버렸다. 이 문제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면서 현장에서는 물밀듯이 비정규직 투입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16.9%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는 16.9%의 정신을 다시 살리는 것이 필요하다며 모듈이 대거 들어온 지금은 사유제한을 엄격히 적용할 경우 8~9% 정도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지금 있는 정규하청(6~7천명)은 16.9% 합의를 위반한 것이므로 전원 정규직화하면 되고 한시하청(3천여명)에 대해서는 사유제한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덧붙여 한시하청 노동자는 기간제로 하고 처우를 개선함과 동시에 인력은행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6.9% 때문에 현장이 다 무너졌다고 털어놨다. 노동운동은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잘 살자고 했던 것인데 회사와 합동으로 하청에 힘든 일을 시키고 노동자 스스로 직영과 하청을 차별하는 것은 노동의 정의로움과 도덕성, 대의명분을 다 잃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16.9%가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게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며 약속이 파기됐을 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16.9%에 대해 반성하는 전직 위원장들의 기자회견문을 작성한 것도 그였다.



방황, 반성, 새로운 모색

98년 지나면서 노동운동은 크게 바뀌었다. 많은 활동가들이 스스로 전망을 잃어버리고 회사와 쉽사리 타협하기 시작했다. 민주와 어용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현장이 무너졌다!

그는 98년 국가부도사태를 겪고나서 충격을 받았다. 노동조합, 노동운동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조합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노동운동이 뭔가 방향을 잘못 잡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노동운동이 삶의 질을 높이고 조합원에게 행복한 세상을 가져다줬는지 궁금하고 의문이 들었다. 그는 조합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은 하나같이 지금 사는 게 불행하다고 답했다. 노조를 만들어서 오히려 조합원들을 불행에 빠뜨린 건 아닌가? 사람을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 게 아니라 세상을 불행에 빠뜨리는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반동이 아닌가? 조합원들 과로사로 죽이려고 물량확보투쟁한다고 본관 앞에 텐트를 치는 것이 과연 운동인가? 이건 운동이 아니라 개짓거리고 반동이다. 뭔가 잘못 가고 있다. 반성과 방황이 시작됐다.

"2003년 들어서면서 뭔가 정리가 돼가는 것 같았다. 단순했다. 우리 전부가 다 미쳤었다. 조합원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지난 19년동안 가장 잘못했고 후회하고 반성하는 게 바로 장학금제도와 진료비 지원제도를 들여온 것이다. 기업내 복지를 관철시킨만큼 조합원들의 이기주의와 실리주의도 우리 스스로 자극시키고 만들어온 것이다. 노동운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평등과 연대의 정신을 훼손시켰다. 이제 대기업 노동자들만 특혜받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 전체 사회를 봐야 한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무상교육, 무상의료 갖고 파업 하겠나? 자기들은 다 받고 있는데. 5~60만이 특혜받고 1천500만이 소외받는 세상, 우리가 이런 잘못된 세상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정리를 하다보니 갑자기 할 일이 너무 많아졌다. 주변 동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했다. 대의원들에게 물량확보투쟁은 '모르고 하는 반동 짓'이라고 이야기하니까 대의원들이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많이 잡혀가는 것 같다."

호랑이 세마리 등에 올라탔는데 중심을 잘 잡아야지...

민주노총울산본부는 세 정파가 모여 만든 통합지도부라는 점에 대해 그는 "호랑이 세마리 등에 올라탔는데 씩씩하게 3년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며 "모든 것을 공조직 중심으로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운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3조직에 별도 주문을 하지 말라고 했다"며 "중심을 잘 잡아야지 지역본부 사업이 잘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부영 본부장은 87년대투쟁 기념사업을 지금부터 준비하고 울산지역 노동운동 20년사를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예산을 확보해 지역본부 건물을 4층으로 올리고 이런 큰 그림을 갖고 역량과 재정을 모으면 충분히 모아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울산지역의 통합적 기운을 높여 노동운동의 메카로서의 상징성을 부활하고 확대, 강화하는 데도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노동운동연구소를 만드는 일은 그 일환이다.

지역사회 차원의 의제도 적극 개발하겠다고 말했다.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제 등 있는 법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는 현장을 대대적으로 조사해 노동탄압백서를 발간하고 법지키기운동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더불어 5.31 지방선거 전에 구체적 대응방안을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전철은 버스와 택시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이므로 미리 대책을 세워 민주노총의 입장을 빠른 시일 안에 요구할 것이며, 국립대는 법인화를 전제로 설립되기 때문에 민영화되는 것은 시간문제고 그렇게 될 경우 등록금이 사립대와 똑같아지는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대형 관급공사에서 다단계불법하도급을 통한 중간착취를 근절시키기 위해서도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별노조에 대해 그는 기업별 노사관계와 기업별노조는 당연히 실리주의와 담합적 노사관계로 갈 수밖에 없다며 산별성공지원단을 꾸려서라도 지역 차원의 산별 분위기를 조성하고 정책적 선도력을 가져갈 것이라고 말했다. 전임자임금지급금지에 대해서는 대안을 만들려고 하면서 꼬투리를 잡히는 것보다 잘못된 법은 폐기시킨다는 각오로 무조건 저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부영 본부장은 지난 과정 속에서 경험한 '소중한 실패와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생각을 잘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노동운동의 지나온 20년을 결산하고 새로운 20년을 설계하는 일은 비단 그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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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31 22:49 2006/03/31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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