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만나기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의 숨은 주인공
김연민 울산대 교수


▲김연민 교수


"많은 사람들이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자연발생적인 투쟁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 평가는 어찌 보면 무책임하고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일 수 있다. 역사에서 자연발생적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어떤 사건이든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하기는 어렵지 않나? 누군가가 준비하고 조직하지 않고서는 어떤 사건이든 자연발생적으로 터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김연민 교수는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을 남모르게 준비하고 조직했던 바로 그 '누군가'중의 한 사람이었다. 한반도 이남을 휩쓸었던 87년 노동자대투쟁의 '폭발' 뒤에는 김연민, 노옥희, 천창수 같은 이들이 "맨땅에 해딩하듯" 현장을 개척했던 전사(前史)가 숨어 있다. 새내기들로 활기에 넘치는 봄날, 울산대학교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김연민 교수는 20년을 훌쩍 넘긴 옛 기억들을 되살려가며 하나씩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구로공단 야학교사였던 공학도

울산 경실련 공동대표, 울산청소년교육문화공동체 함께 이사장,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울산 공동대표, 인권마라톤대회 조직위원장… 김연민 교수가 현재 갖고 있는 '직함'들이다. 얼마 전까지는 민주화를위한울산교수협의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얼핏 보면 영락없는 시민운동 '코드'다. 그러나 그는 시민운동보다는 서울대 공대 시절부터 일찌감치 노동운동 체질이었다.

철도에 근무했던 아버지를 따라 경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75년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입주과외를 하며 서울살이를 시작한 '경주 촌놈'은 2학년 되던 해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친구에게 써클을 소개해달라고 했고 그때 소개받은 게 '황토'였다. 당시 '황토'는 농촌봉사활동을 주로 하는 연합써클로 이화여대 학생들도 함께 소속돼 있었다. 그는 '황토'에서 '후진국경제론', '동학혁명', 일서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등을 읽고 토론했다. "열심히 했다."

'황토'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던" 이대 친구들이 '정리'된 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봉천동과 신림동 자취방들을 돌면서 세미나를 이어갔다. 당시 그는 청계천 헌 책방 '보문사' 주인에게서 '모택동어록'이며 48년판 '자본론' 등을 구해 읽었다. 책을 가장 많이 갖고 있었고 또 책을 잘 안빌려주기로 유명했다. 구로공단에서 야학도 했다. 야학에서 소모임을 꾸려가면서 구로공단 노동자들과 처음 만났다.

79년, 학생운동권이 다른 단대에 비해 취약했던 서울공대에서 '대형사고'를 쳤다. 박정희정권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서울대 기숙사에 뿌린 것이다. '가리방'으로 긁어 만든 유인물을 학내로 운반하던 버스가 소매치기범 잡는다고 버스 째 태능경찰서로 들어가는 황당한 돌발상황도 벌어졌지만 유인물 살포는 성공했다.

유인물을 뿌리고 두달동안 '조용'하자 "완전범죄"를 자신했던 이들은 우연한 사건으로 검거된다. 서울여대 권명자가 문제의 이 공대 유인물을 갖고 있다가 경찰에 붙잡혔는데 유인물 출처를 캐다보니 "애인 집에서 가져왔다" 이렇게 되는 바람에 줄줄이 엮인 것이다. 조홍섭(현 한겨레신문 환경전문기자), 변재용(현 한솔교육 사장), 배규식(현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연구본부장)이 걸려들어 구속됐다.

이런 사건을 처음 맡은 태능경찰서 덕에 한 방에 있게 된 이들 3명은 용케 '알리바이'를 맞출 수 있었고 사건은 김연민과 나머지 사람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은 채 마무리됐다. 구속된 3명은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10.26이 터지면서 모두 석방됐다.

유인물 사건으로 몸을 피했다가 졸업 후 한국과학원에 들어간 그는 80년 봄 또 '사고'를 쳤다. 출판사에서 유인물을 복사해다 과학원에 뿌린 것이다. 그러나 잠깐이었지만 시절이 좋았던 덕에 "괜찮았다."



울산 현대왕국에 뿌려진 노동운동의 작은 씨앗들

80년대 초반, 서울공대 학생운동권 그룹은 노동현장으로 막 들어가는 분위기였다. 구속된 친구들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고, 마침 과학원 산학협동 프로그램이 있어서 그는 81년 울산 현대중공업으로 입사를 결심한다.

울산에 온 그는 비슷한 시기에 내려와 YMCA에서 활동하던 이상희(전 울산경실련 대표)를 만난다. YMCA에서는 또 Y교사회 활동을 하던 현대공고 교사 노옥희도 만났다. Y교사회는 85년 민주교육실천협의회(민교협), 88년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으로 이어지는 전교조의 전신이었다. 김연민 교수가 기억하는 당시 노옥희 선생은 "아직 의식화가 덜된 상태"였다. 가방장사를 하고 있던 최현오(현 울산연합 의장) 선생도 만났다. 최 선생은 영남화학 노동운동에 관여하고 있었다. 뒤에 만난 천창수는 서울대 사범대를 나왔는데 그보다 1년 후배였다.

현대중공업에 근무하면서 그는 노옥희 선생과 함께 야학 형태의 소모임운동을 벌였다. 당시 동양나일론 소모임의 교재가 문제돼 경찰이 회사에까지 찾아와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경찰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던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까지 시비를 걸었다.

83년 현대중공업을 나온 그는 84년 울산대학교로 들어갔다. 학교로 적을 옮긴 그는 85년경부터 현대자동차 소모임을 꾸렸다. 현대자동차노동조합 건설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일이었다. 당시 소모임에는 이상범(현 울산북구청장), 하인규(현 울산북구의회 의장)를 비롯해 10여명이 함께 했다. 그와는 갑장이었던 이상범의 집이나 양정교회에서 장소를 빌려 노동법과 조직활동 방법 등을 학습했다. 어떤 날은 사택 잔디밭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하부영(현 민주노총울산본부장)이 속한 다른 소모임은 나중에 후배 그룹에 의해 조직됐다.

현대중전기에 다니던 천창수는 현대엔진 권용목, 사영운, 오종쇄 등과 함께 소모임을 꾸리고 있었다. 소모임들 사이에는 자연스레 교류가 이뤄졌다. 봉고차를 타고 부여로 '고적답사'를 가기도 하고 10여명씩 모아서 언양으로 수련회를 가기도 했다. 수련회에서는 울산대에 있던 교수들을 불러다 철학과 경제학 교육을 받았다. Y 이상희를 통해 장명국 선생을 불러와 노동조합 사례 교육을 받기도 했다. 87년 대투쟁이 벌어지기 전 장 선생은 4~5차례 울산에 내려왔다.

현장 소모임을 꾸려가는 한편으로 현장 바깥에서의 일들은 울산사회선교협의회를 중심으로 벌여갔다. 울사협은 강연회나 선전사업을 주로 펼쳤다. 평강교회와 성공회, 지금은 작고한 부산의 김영수 전도사도 외곽에서 한몫을 했다.

86년 여름, 그는 현대중전기 도장부서에 일용공으로 취직했다. "현장이 도대체 어떤가 볼려고 들어갔다." 사례가 거의 없을 성 싶은 '교수의 위장취업'이었다. 그때 노트에 적었던 메모들을 그는 아직도 갖고 있었다.

"컨베어 벨트에 거는 작업 및 도장 완료된 물건 정리작업. 연속작업이며, 서서 하는 작업, 도장숍 온도 30도 이상…오후에는 계속 물만 먹고 서서 작업하기 힘들 정도로 피로감을 느낌, 페인트 냄새도 상당히 남."

"아침 5시 기상, 5시 45분 출발, 7시 10분 도착."

"생산자=하느님. 하느님이 천대받는 세상. 생산자가 천대받는 세상은 사악한 세상."

"노동의 재생산도 불가한 임금 및 노동시간, 노동조건."

"과연 단결과 투쟁과 깨침은 어디에서 시작될 수 있는가?"

그의 위장취업은 그가 가르치던 학생과 현장에서 마주치면서 1주일만에 끝났다.



87년 대투쟁 이후

87년 여름, 노동자대투쟁이 '폭발'했다. 그는 해직을 각오하고 투쟁현장에 결합했다. 현대엔진, 현대미포조선, 현대중전기, 현대자동차, 현대정공, 현대중공업 등에 노동조합이 건설됐다. 그와 함께 소모임을 했던 이상범, 권용목, 천창수 등이 대중 지도자로 등장하며 87년 대투쟁을 이끌어갔다. 노옥희 선생과 울사협은 87년 투쟁의 중심에서 엄청난 실무를 뒷받침했다. 김연민 교수는 숨은 주인공이었다.

87년 이후 서울에서 온갖 정파의 활동가들이 울산으로 대거 내려왔다. "결과적으로는 분열주의만 양산하고 현장에 분파만 심어놓은 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87년 이전에는 그래도 울산 오면 다 와서 인사라도 하고 전체 모임도 있었는데 이후에는 그게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왕창 왔다가 또 다 떠나버렸다는 데 있다. 한 곳에 뿌리내리려면 적어도 10년은 투자했어야 하는데…" 김연민 교수가 아쉬워 하는 대목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왜 이렇게 됐나? 지식인들이 책임을 방기한 것 아닌가? 지식인들이 신자유주의에 포섭되고 우경화되면서 노동운동은 전망을 찾지 못하고 재생산을 할 수 없는 구조로 변해갔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숨은 주인공 김연민 교수.

"누군가가 준비하고 조직하지 않고서는 어떤 사건이든 자연발생적으로 터져나오지 않는다."

그와 함께 더듬어본 87년 이전의 역사 속에서 지금 우리 노동운동이 처해 있는 '위기'를 돌파할 힘과 희망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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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31 22:50 2006/03/31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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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비 2010/06/12 17:00 URL EDIT REPLY
랑솔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