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해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입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논란은 넘쳐나고 있지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모색들은 아직도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현재 위기논쟁의 핵심은 무엇이며, 그를 넘어서기 위한 모색은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87년 이후의 노동운동, 노조운동이 엘리트(즉, 활동가) 중심에 머물렀고, 이로 인해서 노동자 일상 문화로 정착하지 못하고 단지, 민주화 운동의 연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노동운동과 노조운동의 현장에는 오로지 어용노조에 반대하는 것으로서만 독자적인 의미를 유지할 수 있는 87년 노동체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에 기초한 현실 인식과 조직적 실천으로 인하여 겪게 되는 인식의 장애와 실천운동 상의 혼란의 인정 여부가 논쟁의 핵심에 있다고 봅니다. 즉, 지체된 특수한 노동자 정치양식으로서 87년 노동체제는 이미 처음부터 그 뒤늦은 지체성 때문에 한계를 갖고 있었음에도 명망가, 엘리트 중심의 노동운동에 안주함으로써 현대적이지 않은, 시대에 걸맞지 않는, 퇴행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봅니다. 현재의 위기논쟁의 핵심은 87년 노동체제의 역사적 시효만료에 대한 식별 불능성에서 초래되는 것으로서, 현 시기에 전개되는 질적으로 변화된 현상들을 과거의 틀로써 억지로 환원시켜 해석하려는 경향, 이론을 잘못 적용해대는 과학주의와 자의적이고 실용적으로 현실을 해석하는 경험주의적인 경향, 곧 착시 현상들에 기원한다고 봅니다.
한국사회의 노동자 정치양식의 변화를 신자유주의 세계화로의 변동과 한국의 정치적, 사회, 문화적 변동의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럴 때, 87년 이후 노동체제는 분단과 후진국의 특수성에 따라 지체된 채 국제 정치적 배려의 산물로서 등장했던 특수한 노동자 정치 양식이었고, 이 87년 노동체제는 87년 이후 형식적 민주화 진전과 같은 정치, 사회, 문화적 변화,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전면화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시효만료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정치양식이 설사 유지되고 지속적으로 관찰가능한 지배적인 양식이라고 해도, 역사적으로 시효만료되었다면 그것은 기존의 예리함과 주요 효력을 상실하여 정체되고 질곡에 빠진 모습을 드러낼 뿐입니다. 이는 주요 활동가 정파들의 활동양식에서 지지부진한 상태로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그 명백한 증후들로 민주노총의 제도화 및 국가내부로의 포섭과 사무직 노조의 증가, 그에 따른 민족주의 및 국가주의적 성향의 주도, 노동유연화의 수용, 어용과 민주노조의 구분 불가능, 관리된 형식적 파업, 기업의 문화적 통제에 대한 대응부재, 가부장제적 노동자 조직화와 운영방식, 이에 따른 부정, 부패로의 연루, 활동가 정파 조직 내외를 불문한 이전투구의 노골화, 정파 및 활동가들의 이권 연루 및 이권추구 경향, 사회적 감시대상으로 노조운동의 전락 및 통속화, 정책으로 수용하면서 공허하게 외치는 신자유주의 반대구호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87년 노동체제와 87년 노동체제 이후 현재의 신자유주의 통치의 시기를 분명하게 식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변화된 신자유주의적 통치양식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자 정치 양식들을 찾는 노력과 더불어 다양한 차이들(여성, 비정규직, 이주 노동자 등)을 아우르는 진정한 노동자의 형상을 지속적으로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노동자 조직과 활동가 조직들이 공장과 지역을 통합하여 노동자 일상문화를 창출하고 확산시키며 동시에 공장과 지역을 독자적이고 진정한 노동자 정치의 장소가 되도록 만들어가는 노동자정치와 노동자문화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의 문제는 정치운동 수준과 조합운동 수준의 문제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운동과 조합운동의 결합방식에서도 논란이 많습니다. 총체적으로 정치운동과 조합운동은 어떻게 재조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치운동과 조합운동은 기본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봅니다. 그리고 서로 분리될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조합운동 속에서 제대로 된 정치운동이 전개되지 못하고 분단과 지체에 따른 한국적 특수성에 의해 어용반대, 민주노조라는 왜곡된 형태로서만 전개되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국가보안법의 비호 아래 민족주의적, 사민주의적 모습을 띠게 되는 엘리트 중심의 노동자 정치운동의 일반성을 드러내었고, 그 귀결이 민주노동당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이념적 제약이 큽니다.
하지만, 간혹 예외적인 시공간에서만 등장하는 것이긴 하지만, 다양한 노동자들의 역사적 정치양식들이 존재합니다. 그것들이 노동자 일상문화로 확장되고 정착해 갈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기획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당의 이념과 노선에 따라서 편협해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기존의 민노당에 의한 현장의 정치 단위화 시도(공장위원회 등)와는 별도로 노조운동의 독자적인 기획들이 다양하고 창조적으로 마련되어야 합니다. 민노당이나 민주노총 중앙의 현장 정치조직화 시도는 패권적, 경쟁적이거나 억압적이지 않고, 최소한도 이러한 기획들을 지원하거나 공동으로 노력하는 등의 노동자들의 정치양식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협동관계를 유하도록 견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큰 문제는 안 됩니다. 민노당과 민주노총 중앙이 가진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이념적 한계와 엘리트 중심의 위계적 당 조직으로는 새로운 정치양식을 올바르게 식별할 수 없고, 설사 정보가 있더라도 조직적으로 포섭하려고 하는 것 외에는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일단은 긍정적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추후에는 대립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 때는 현재보다는 다양한, 어느 정도는 준비된 가능성들이 열려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눈앞의 신기루에 현혹되지 않고, 독자적인 정치적 기획들을 중심으로 지역과 공장을 노동자의 장소로 만들어가려는 현장중심의 노동자 정치, 문화운동이 일관되게 전개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실천이 87년 노동체제를 노동자들이 추구한 소중한 지혜로 재평가하고 새로운 맥락에서 위치시키고 이로부터 도움 받게 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조직 내 민주성 회복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한 다양한 제안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관료화된 조합주의운동 질서를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관료적이고 조합주의적 대안이 공공연하게 제시되기도 합니다. 관료화된 조합주의질서를 극복하기 위한 민주성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신자유주의적 통치체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자유와 자율, 민주 등이 자본에 순기능하도록 새로이 맥락화되고 오히려 일부 전문직 노동자들에게는 적극 권장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앞서 서두에 언급되었던 것과 유사하게, 그리고 지난 2월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서 보았듯이, 민주노총의 민주화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활동이고 비판의 대상자들은 오히려 민주적 절차에 따라서 온건하게 조직을 운영하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처럼 민주주의 주장은 이제 역설적인 지형 위에 위치되어, 전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의미로 독해될 수 있는 정치지형이 마련된 것입니다. 이것은 운동의 관리화, 통치화, 체제내화된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또한 관료제를 극복하자는 주장으로서는 결코 관료제를 극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열정과 이념이 앞섰던 조합운동 초기와는 달리, 조직의 규모 증대와 제도화는 조합원의 요구 증대와 더불어 제도적, 사회적 감시의 증대에 따라서, 더욱더 관료제적인 방식을 그 처방으로 추구하게 합니다. 그것의 정당성을 절차적 공정성과 효율성에서 찾습니다. 동시에 관료들은 지식과 정보의 독점성을 추구합니다. 이것을 전문적인 자산으로 삼아 관료들은 자신의 지위를 보호하여 오래 동안 혹은 반복해서 관료로서 봉직할 수 있게 되고, 그들의 일을 통해 얻게 된 전문지식은 조합원 대중들을 통치되어야 할 존재로 대상화시키게 됩니다.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봅니다.
이에 대해서 조합원 대중들과 활동가 조직들이 취할 수 있는 방안으로 생각되는 것은 노동자들의 지식, 정보, 사고 수준을 향상시키고, 글과 말로써 분명한 견해들을 제출할 수 있도록 글쓰기, 말하기, 논평하기 등을 통해 노동자 지성을 활성화시키고 광범하게 소통할 수 있는 교육문화운동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너무 미약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저희들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사고를 제대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관료들의 통치가 자의적인 힘을 쓰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봅니다.
다른 방안은 누구나 다 얘기하는 것으로서, 권력을 장악하여 갈아치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론적, 경험적으로 보건대 확실한 것은 그게 일시적으로만 가능하고 다시 원래대로 환원되고 만다는 점입니다.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처럼 새로이 노동자조직의 권력을 잡은 사람들도 사고가 엄밀하지 못하여 사이비 과학적이고 경험주의적이며 실용주의적인 권력 및 패거리 지향적 사고와 활동방식, 그리고 조직원리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은 비슷한 사람들이고, 따라서 결과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제는 다른 곳, 즉 위임이나 대리 정치가 아닌 진정한 노동자 상에 기초한 진정한 노동자 정치가 부재한 데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민주노총에서 볼 수 있듯이, 노동자 대중을 대표한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일터에서 조직 속에서 노동자 세상과 진정한 노동자문화에 관해서 아무것도 보여주거나 증명하지 못했고 노동자들의 역사적 지성을 오히려 비하하거나 억압하거나 비현실적이라고 부정했습니다. 그들은 그 정체를 잘 알지 못하면서 단지 유럽의 지식인들의 운동을 흉내 내면서 시민 또는 민족적 통일체로서 노동자를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군대식 노동자조직 방식처럼 허상을 노동자적/ 반노동자적이라고 보고 새도우 복싱했던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노동자로서의 스스로의 모습과 역사적 지성을 식별하고 인정하게 되면 사태가 어디로 전개될지 몰라 두려워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가부장적 조직원리나 부정부패에 연루되지 않으면 조직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통속적인 해결책들과 타협하듯이, 대부분이 아주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방식으로 조직을 유사 합리성의 외관 하에서 운영하는 척했을 뿐입니다. 진정한 노동자 형상으로부터 노동자들이 스스로 멀어져가면서 (불가능한 일일 뿐인) 엘리트 지식인들을 닮아가고자 했을 뿐입니다. 노동운동과 노조운동의 명망가들은 영화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에 잘 묘사되었듯이 예수의 제자들처럼 두려움 때문에 단지 개인적인 것이었을 실존상황으로 사태를 잘못 축소 혹은 과장해서 인식하면서 노동자인 자기를 부정하고 정당화했던 것 같습니다.
현장성에 대한 강조 역시 오래 기간 지속됐던 문제입니다. 그러나 현장성의 강조가 구호로서만 존재하거나, 조합운동 안에서의 보충적 내용으로서만 제기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그동안 전개됐던 현장조직운동에 대한 판단과 그를 넘어서는 전망의 문제와도 연동됩니다. 이런 점에서 조합운동을 넘나들면서 노동운동의 현장성을 새롭게 강화하기 위한 모색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노동자 지성의 역사적 계승과 새로운 형성을 위해서 가족/지역/공장 시공간에 초점을 두고 새로운 정치양식을 추구하는 노동자 교육문화운동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다시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87년 노동체제의 역사적 시효만료, 즉 기존의 민주노조운동 방식으로 담아낼 수없는 포화상태를 인정하고, 새로운 정치적 실천방안을 치열하게 검토하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것을 조합원 대중의 일상 삶과 연계시키고 노동자들의 생각을 확인하고 실천방안을 모색하는 방법론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첫번째와 관련해서 보면, 앞서 언급되었듯이 역사적으로 시효만료된 정치양식으로서, 현장조직에 기초한 민주노조운동은 민주노동당의 등장으로 이제 그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자 지성, 즉 노동자들이 역사적으로 발전시켰던 하나의 특이한 정치양식으로서 전통으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적인 조직형식으로 여전히 중요하며, 이제 노동자들의 지성에 기초한 노동자 정치를 확고하게 준비하는 새로운 기능을 담당하는 장소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만약 기존의 조직방식을 고집하여 특정 정파의 정치위원회 기능만 하는 단위로 축소된다면 예컨대, 민주노동당이 현장조직을 건설하면 사회당도 건설하고 뉴라이트나 한나라당도 건설할 것입니다. 이제는 전과 달리 모두 다 정당성이 있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따라서 정당의 정치단위로서 수동적인 기능에 머물지 않는 대중운동적 성격을 지닌 다양한 열린 형태들이 공장과 지역을 가로지르면서 작동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활동가 조직을 횡단하는 열린 소통이 필요합니다. 그러지 못하고 계속 정파적 담합구조와 위원회 구조를 통해서 노조를 통치하면 노조운동의 전망은 민노당으로 통합되는 일밖에는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민노당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더욱 더 비판의 표적이 되면서 그 세가 위축되고 다른 다양한 이념성향의 정치조직들이 작업장에 만연할 것이며 민노당은 그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은 완전히 소멸될 것입니다.
선진노동자 또는 활동가들의 위상에 관해서 보면, 민주노총 계열 집행부와 활동가조직이나 비 민주노총 계열 집행부와 활동가 조직 사이에 큰 차이 없다는 식의 반응과 같은 조합원들의 거리를 둔 반응들이 활동가들을 현장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합니다. 저희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것은 그간의 활동가 조직의 선도적이고 엘리트적이고 열정적인 활동들이 이룬 성과인 동시에 업보와 같은 것으로서 조합원들과의 신분상 차이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들이라고 봅니다. 치하와 명성은 거리를 그 대가로 치릅니다. 새롭게 발명되거나 발견된 대의의 천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새로운 노동자 정치양식과 탐색과 더불어 87년 체제의 민주노조 정치를 진정한 노동자 정치라는 새로운 문제인식 하에서 계승 발전시키려는 대의의 천명이 확고해야 할 것입니다. 어정쩡한 정책개발 접근은 불가능한 해법이며 엘리트 지식인들, 즉 변호사 등 전문직의 상품화된 지식의 유혹이며, 비노동자적이라고 봅니다. 정책은 통치수단들의 적절성을 검토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노동자들을 대상화한 결과, 즉 노동자운동에 외재적인 형태이며, 지배 혹은 통치의 도구로서 기능할 뿐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아마도 여러 노동자 정치 양식들 중에서 어떤 하나를 선택하는 것일 겁니다. 그것을 학자들처럼 정책이라고 부르고요.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중요한 것은 기존의 철학과 이론, 조직원리 등의 전면적이고 철저한 검토가 일상적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누가 와서 강의하고 하는 방식이 아닌 일상 공장, 지역, 가족생활 속에서 토론되고 검토되고 내재적으로 형성되도록 운동화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활동가들의 현장 분석을 위한 방법론을 마련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공장과 지역이 모두 현장입니다. 현장은 다차원적인 시공간입니다. 축이 무엇이가에 따라 다양한 현장이 펼쳐집니다. 노동자 지성이라는 노동자 문화 내재적인 정치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우리는 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현장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장, 가족, 지역 등 각 현장들 속에서 경험하고 내재적으로 사고하여 가설을 세우고 확인하는 방법론을 체득해서 실천으로 옮겨내는 문화활동가 실천 방법론을 개발해야 합니다. 이론과 방법론은 과거에는 소수 이론가나 학자들이 독점했던 것인데, 인터넷 등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이제는 그것들도 낡았습니다. 새로운 방법은 노동자들의 문화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정련하고, 확산시켜서 활동가와 조합원 대중들 모두 스스로를 임파워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새로운 대중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활동가들의 기풍과 전망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활동가들에 어떤 기풍과 전망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중요한 몇 가지만 강조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현장의 문제를 풀어가지 못하게 했던 인식의 장애들, 기존의 타율적인 사고틀을 꼼꼼하게 검토하고 토론해보아야 합니다. 그를 통해서 자신이 문제의 해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준 답은 진정한 답이 아닙니다. 단지 참고자료일 뿐입니다. 활동가들은 현장의 문제를 잘 알면서도 자신의 언어가 아닌 지식인들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언어로 문제를 정리해서 풀어가는 접근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동료들 간에 도움을 받고 줄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힘은 같이하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까? 노동자들에게 철학은 필요치 않습니다. 철학은 지식인들의 지배를 위한 무기입니다. 실천과 노동자들이 삶과 이야기 속에 있을 건 다 있습니다.
둘째로, 활동가들은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동료들이 잘 알도록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장, 가족, 지역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개발하고 수집하고 써내야 합니다. 동료들과 글쓰기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제대로 알고 있는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확인하고 스스로 고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말만이 아닌 제대로 된 반성이 가능합니다. 글쓰기는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해주고, 스스로 차지하고 싶은 위치를 드러내어 주고 거기에서 글을 쓸 수 있게 해줍니다. 모든 일에 자신감을 줍니다.
셋째로, 고전읽기를 비롯한 다양한 책읽기와 토론을 항상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정리된 책 몇 권 읽어서는 부족합니다. 노자, 장자, 맑스, 레닌 등을 읽어낼 수 있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교육은 가족구성원들을 스스로 교육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료의 교육으로 이어집니다. 역시 이것도 임파워시킵니다. 즉,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넷째, 노동자들의 역사적인 지성들을 노동자적 관점에서 올바르게 평가하고 그에 근거한 인간주의, 사회 생태주의적 실천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얘기는 많은 이들이 하고 있기에 생략합니다.
다섯째, 그동안 억압되었던 개별성을 공동체성과 더불어 고려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공동체성의 측면은 너무나 제한적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더 다양한 개인사를 담고, 축적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성으로만 우리의 일상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개별성을 고려하지 못하면 운동의 공간은 노조 사무실이나 활동가 조직 내부 또는 정파집단 내부로 축소되어 자족적이게 되거나 전체주의적인 타락의 난맥상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양자의 통일로서 희망의 시ㆍ공간을 창출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여섯째, 열린 말하기 훈련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만남을 갖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자신의 가족, 정파집단, 조직원, 친구들하고만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부자유의 상태로 가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남은 노동자들에게 힘을 줍니다. 활동가들은 이를 조직활동을 통해 이미 터득했습니다. 하지만 조직의 좁은 틀을 넘어서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타자들과 진정으로 만나서 인간적으로 말하는 법을 우리는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비정규직과 만나 함께 하거나 여성, 이주노동자들, 다른 정파 조직원과 함께 하려면 더불어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그들 사이의 통역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누군가가 열어야 운동의 전망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모든 것들이 온전하게 실효성을 갖고 추진될 수 있으려면 노동자문화운동, 새로운 노동자 정치양식의 필요성을 공유하고, 그것의 개발에 용기 있게 투신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공장과 지역과 가족을 시간, 화폐, 국가와 자본이 지배하는 죽은 노동의 장소가 아닌, 진정한 노동자 형상이 주도하는 생동성의 장소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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