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2006년 5월 1일 메이데이, 시청 앞 광장. 오래간만에 카메라를 메고 노동자 집회에 나갔다. 집회가 끝난 뒤, 투쟁하는 노동자와 함께 하지 못했다든가, 민주노동당 선거 유세장 같았다든가 하는 많은 비판들이 나왔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그 많던 노동해방 깃발들이 왜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였다. 두리번거리며 시청 광장을 돌았어도 노동해방 깃발은 한 장도 찍지 못했다.

깃발조차 사라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노동자들이 ‘노동해방가’라는 흘러간 옛 노래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역사학연구소에서 펴낸 <<노동자, 자기 역사를 말하다>>에 “과거의 기억을 장악하는 자(세력)가 역사를 지배하고, 역사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한다. 노동자가 노동자의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바로 노동해방의 미래를 여는 출발점이다”고 썼다. “흘러간 레코드를 반복해서 튼다”며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동해방이 이제는 흘러간 레코드에서 나오는 옛 노래가 돼 버렸나.

‘노동해방가’를 정확하게 언제부터 불렀는지 모르겠다.

강제와 감시 속에 우울하고 고통에 찬
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기쁨에 찬 빛나는 노동쟁취
동지여 두려움 없다 역사는 우리의 것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노동해방가를 부르기 시작한 때가 1980년대 전반으로 남아있었다. 1980년대, 1990년대 나온 민중가요 책들을 다시 뒤적여 보았다. 복사해서 보던 책은 제본이 헐어서 쪽 마다 따로 놀고 있다. 민중문화연구회에서 1985년에 낸 <<동트는 산하>>에 처음 실려 있다. 1980년 ‘5.18민중항쟁’ 기간 며칠 동안의 ‘해방 광주’를 경험하고, 1985년에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합법성 쟁취 투쟁,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 구로 노동자들의 동맹파업, 서울노동운동연합의 결성과 투쟁을 겪으면서 활동가들과 일부 노동자들이 이 노동해방가를 부르기 시작한 것 같다. 2.3절까지 불러보자.

짓누르는 억압의 사슬을 끊으려다
쓰러져간 동지의 거룩한 뜻 죽지 않았다
탄압을 물리치고 굴레를 깨어버려
동지여 전진이다 노동자의 깃발 날리며

수천 년의 굴욕에 찬 어둠을 불사르고
새 역사의 지평에 떠오르는 찬란한 빛
하늘은 그 얼마나 눈물 속에 기다렸나
위대한 노동자의 승리의 그 날을

1991년에 나온 <<아침이슬 1집>>에는 ‘노동해방가’를 “해방직후 전평이 활동하던 시기에 불려졌다. 구전된 노래로 알려지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전평 때부터 불렀는지 아직 확인을 못했다. 전평 시대의 ‘노동가요. 민중가요’는 대부분 김순남이 만들었다고 할 정도인데 노동은의 <<김순남>>에서 노동해방가는 찾지 못했다.

1986년에 나온 <<메아리>> 제7집에는 이 ‘노동해방가1’과 함께 ‘노동해방가2(여성해방가)’가 실려 있다.

복종의 침묵에서 깨어 일어나 낡은 체제 깨부수고
굳센 용기 힘찬 전진 사선을 넘어
(가자 가자 가자) 천만 노동자여 이 땅에
민주의 횃불 들고 온몸으로 외치나니 노동해방이여

‘노동해방가2’에서 노동해빙은 ‘낡은 체제를 깨부수고’ 이룩할 수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노동해방가1’만큼 많이 불리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래를 통해 1980년대 중반부터 ‘강제와 감시 속에 우울하고 고통에 찬 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에서 해방되고, 낡은 체제를 깨부수고 이룩하려는 ’노동해방‘이라는 말이 일부 노동자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한 역사를 엿볼 수 있다.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을 겪으면서 더 많은 노동자들이 ‘동지’ ‘늙은 노동자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광주출정가’와 함께 ‘노동해방가’를 불렀다. 그리고 7.8.9월 노동자 파업투쟁을 격고 나서 노동자들에게는 힘찬 투쟁의 정서를 담고 있는 더 많은 노래가 필요했다. 그때 김호철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김호철은 1988년부터 몇 년 사이에 노동자들이 즐겨 부르는 노동가요를 수십 편이나 만들었다. 군악대와 직업적 악사를 했다는 경험만으로는 만들기 힘든 노래들이었다. 1980년 민주화의 봄에 계엄법 위반으로 5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1986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활동, 1987년 서울지역 해고노동자복직투쟁위원회 투쟁부장 활동, 1987년 민정당사 점거사건으로 또 5개월 옥살이 같은 공력이 쌓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1988년 4월 30일 연세대에서 열린 메이데이 전야제에서 김호철의 ‘파업가’가 처음 선보였다.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 되어 우리 나선다 승리의 그날까지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역속 해골 두쪽 되도 지킨다
노조 깃발 아래 뭉친 우리 구사대 폭력 물리친 우리
파업 투쟁으로 뭉친 우리 해방 깃발 아래 나간다


뜸도 들이지 않고 바로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로 시작해도 누구도 어색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긴말이 필요 없이, 세련되지 않게 툭툭 던지듯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해골 두 쪽 되도 지킨다” 해도 노동자들은 “맞어 그래야지”하며 받아 들였다. 수없이 불렀고, 20년 가까이 돼가는 지금도 파업 현장에서 여전히 빼놓지 않고 부르는 노래다. 그가 1988년에 만든 노동가요로 ‘단결투쟁가’와 ‘노동조합가’가 있다. 이들 노래에서도 ‘해방 깃발’과 ‘노동해방’을 노래한다.

노래와 구호로 퍼져 나가던 ‘노동해방’이 노동자대중의 가슴 속에 감격스럽게 스며들어 머리 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은 날이 있다. 1988년 11월 13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였다. 그 날 노동자대회는 그때까지 우리 역사에서 ‘전국’의 노동자들이 한 자리에 가장 많이 모인 날이었다. 1946년 메이데이 집회 때 모인 노동자들이나 1987년 7.8.9 노동자투쟁 때 울산 남목고개를 넘어 태화강변에 모였던 노동자들이 수는 더 많았다. 하지만 그때는 ‘전국’에서 모인 것은 아니었다.

대회장은 “계승하자 열사 정신! 철폐하자 노동악법”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열사정신 계승 노동해방 쟁취하자!”는 구호 소리로 가득 찼다. 노동자 선봉대 500여 명이 선서식을 끝냈다. 선봉대로 나선 노동자들과 인천 세창물산 노동자들 40여 명이 연단 위로 뛰어 나갔다. 손가락을 깨물어 하얀 광목 천 위에 ‘노동해방’이라는 붉은 글씨를 써나갔다.

나는 피로 새겨 지는 ‘노동해방’의 장면을 직접 지켜보질 못했다. 전야제가 열렸던 1988년 11월 12일 저녁에 구로역사연구소(지금 역사학연구소) 창립 개소식이 있었다. 전태일 열사 18주기와 전국노동자대회에 맞춰 연구소를 시작한 것이다. 다음날 11월 13일 오전에는 빠질 수 없는 후배 결혼식이 있었다. 피로연도 안가고 신촌으로 달려갔다.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가두행진 대열을 따라 잡았다. 5만여 노동자 학생 시민의 행진 대열 맨 앞에 섰던 것은 지도부들이 아니라 바로 노동자들이 붉은 피로 쓴 노동해방 깃발이었다.

이미 1920년대 선배노동자들이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하면서 “노농계급을 해방하고 완전한 신사회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함”을 강령 제1조로 내세운 적이 있다. ‘노동자들이 해방되는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노동운동의 방향과 목표는 1945년 11월에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에서 계승하였다. 전평의 소멸과 함께 ‘노동해방’은 몇 십 년 동안 역사의 밑바닥을 흘렀다. 골짜기 바위와 자갈과 흙 밑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어느 지점부터 솟아나 샘이 되고, 졸졸 흐르던 물이 모여 콸콸 세차게 흐르듯 1980년대부터 다시 솟아난 ‘노동해방’이 큰 물줄기를 이루기 시작했다.

여의도로 행진하는 도중에 노동해방 구호와 함께 끊임없이 불렀던 노래가 ‘노동조합가’였다.

살아 춤추는 조국 노동자해방 위해
가자 노동조합의 깃발을 힘차게 휘날리자
얼마나 긴 세월을 억눌려 살아왔나
짓밟힌 우리 어깨! 걸고! 단결! 투쟁! 전진이다.
피 묻은 작업복은 파업의 깃발이다
죽어간 동지들이 횃불로 살아난다 노동해방

여의도에 도착한 노동자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악법개폐 촉구대회’를, 전경련 앞에서 ‘노동악법 옹호하는 독점재벌 규탄대회’를 열었다.

대회를 마무리하면서 사회자가 곳곳의 노동자들을 불렀다. 울산 동지들!, 마창 동지들!, 제주도 동지들!. 저 멀리 마산 창원의 노동자들은 대절한 전세버스 18대에 나누어 타고 올라왔다. 기차를 몇 칸씩 전세 내어 올라온 곳도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비행기를 타고 왔다. 그 장면을 보며 교통 통신의 발달과 함께 노동자들은 쉽게 더 크게 단결할 수 있다며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썼던 <공산당선언>이 떠올랐다.

1987년 7.8.9 투쟁을 겪은 노동자들은 1988년, 1989년 투쟁의 성과를 모아 1990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을 만들었다. 경찰의 철통같은 원천봉쇄를 뚫고 전국의 전노협 대의원과 선봉대 700여명과 학생 300여명이 성균관대 수원캠퍼스에 모였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전노협 진군가’를 불렀다.

새날이 밝아 온다 동지여 한발 두발 전진이다
기나긴 어둠을 찢어 버리고 전노협 깃발아래 총진군
잔악한 자본의 음모 독재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총 파업 깃발이 솟았다 한발 두발 전진이다
노동자 해방의 그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2절은 “노동자 주인될 그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으로 끝난다. ‘노동해방’은 전노협 깃발에 쓰여진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과 함께 전노협을 상징하는 말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전노협 시절 전노협 소속 노동자들에게 노동운동의 방향과 목표가 무엇이냐고 설문조사를 했다면 아마 80%이상이 ‘노동해방’이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1946년 9월 10일 미군정 공보부가 8천여 명을 대상으로 ‘미래의 한국통치구조에 관한 여론조사’를 했다. 결과를 보면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 자본주의 13%, 모름이 7%였다. 그때 70%가 원했던 ‘사회주의’에 대한 상은 똑 같은 것이 아니었다.

1990년 전후해서 노동자들의 머리띠와 노래, 구호, 깃발 속에 담겨 있던 ‘노동해방’의 상도 똑 같지는 않았다. ‘강제와 감시 속에 우울하고 고통에 찬 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에서부터 막연히 ‘노동자 주인 되는 세상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곧바로 사회주의를 내세울 수 없는 시대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자본의 지배와 임금 노예 자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노동해방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수없이 펄럭이던 노동해방의 깃발이 어떻게 썰물 빠지듯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을까. 그 자리를 어떻게 ‘민주적 노사관계 쟁취’가 차지하게 되었을까. 역사에서 찾아야 할 노동해방의 ‘오래된 미래’는 무엇일까. 역사의 수면 아래 가라앉아 골짜기 바위 밑을 흐르고 있을 ‘노동해방’은 무엇일까.

레닌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독수리는 때때로 닭보다 낮게 날 수는 있지만, 닭은 결코 독수리처럼 높이 비상할 수 없다..... 그녀는 독수리였으며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하고 독수리로 비유하였다. 나는 ‘노동해방’이 여전히 노동운동의 독수리이며, 반자본주의 저항의 무기이며 탈자본주의 탈주로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뭐 중요하랴. 스스로 닭이라고 자임하는 노동조합활동의 지도부에는 관심이 없지만, 시청 앞 광장에 모였던 노동자대중에게 ‘노동해방’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116주년 노동절 시청 앞 집회에서 내가 카메라에 담아온 것은 노동해방의 깃발 대신 가슴 답답하고 묵직한 이런 질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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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7 17:23 2006/05/2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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