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흥겸형 카페에서 퍼왔다. 어린이날, 김기돈 목사님 글 읽으며 영 잘 안되는 '즐겁게 운동하기'를 상상해본다.

 

 

 

 

 

<작아>가 만난 사람 - 편해문


 

놀이로 가득 찬 놀이꾼 세상

 

글/사진  김기돈

 



눈 뜨면 놀 궁리를 했다. 해 떨어지고 깜깜해지도록 온 동네를 쏘다니며 놀았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에서 재미로 가득 찬 시간이 흘러넘쳤다. 골목 구석구석 뛰어다니고 흙더미에 뒹굴면서 흥미진진한 내 세상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날마다 새로운 일이 넘쳐났다. 얼굴 가득 설레고 흥겨운 색깔을 칠했다. 놀 궁리는 늘 무엇보다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다른 것이 끼어들지 못할 만큼 다채로웠고, 하늘만큼 크고 무궁했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놀이의 기운이 몸 깊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명나는 놀이꾼 편해문(38세) 님을 만났다.


놀이가 밥이었던 시간

사당동 산동네 가파른 골목길은 멈추지 않는 곳이었다. 눈을 감아도 여기에서 저기로 이어지는 길을 훤하게 꿰고 있던 아이들에게 골목길은 느릿느릿 흘러가다 빠르게 휘감아 돌고 모퉁이에 부딪혀 솟구치는 물줄기만 같았다. 골목이 교차되는 곳에서 만나서 궁리를 하고, 모퉁이를 돌면 다시 이어지는 길에서 또 만나 깔깔거리며 맛나고 배부른 시간을 만들었다. 어른들이 고단한 달동네 비탈진 삶을 하루하루 이어가는 동안에도, 뛰어넘고 뒹굴고 달리고 올라가서 장난치며 내 세상에 흠뻑 빠져있었다. 골목은 창조하는 공간이었다. 끝도 없이 놀이가 만들어지고 아이들만의 공간으로 경험되었다. 모자람 없는 유쾌함과 신명나는 경험에 어른들의 시간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놀이 밥으로 날마다 배불렀던 달동네가 결국 재개발 철거를 만나게 되었다. 종일 쏘다니며 놀던 골목길도 흙더미에 묻히고 집도 철거되어 무너지던 날, 어린 편해문 님의 꿈같은 시간도 그렇게 묻혀버리는 듯싶었다. 그 무렵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고, 대구 작은집에 내려가야 했던 가슴 먹먹한 시간은 낯선 일상의 연속이었다. 어려워진 집안 여건은 여러 가지를 바꾸어 놓았다. 다니던 중학교를 그만두어야 했고, 집을 나와 ‘밖’에서 기약 없는 시간을 만들어가야 했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여러 책들을 만나고 사람도 만나고, 많이 읽고 생각하고 글도 쓰면서 조금씩 삶의 눈을 열어가던 시간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우리 가락을 들으면서 꿈틀거리며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이 느껴졌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고 배우고 싶었다. 안동에 민속학을 배울 수 있는 대학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검정고시를 거쳐 유일하게 민속학과가 있는 안동대학과 인연을 맺었다. ‘밖’에서 만난 소리가 몸을 타고 들어와 내 몸 안에 있는 어떠한 뿌리를 건드리는 것 같았다.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것을 하고 싶었다. 눈에 들어온 것은 ‘일노래’였다. “판소리는 주목을 많이 받지만 ‘일노래’는 배우지 않잖아요. 가장 소외된 것이 무얼까 생각한 끝에 일노래(노동요) 공부를 시작했어요.” 모심을 때, 김맬 때, 농사지을 때 부르는 노래를 배웠다. 여러 곳을 다니면서 노래를 채집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면서 여러 곳을 다녔다. 그런데 자신이 배우던 ‘일노래’에 노동이 빠져있어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던 즈음, 소리채집을 하다가 아이들이 ‘놀면서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감전된 듯 무언가 오랜 시간 눌린 것이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놀이가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놀이로 배를 채우던 시간, 그 골목 가득한 설렘이 마음에서 달려 나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종일 뛰어다니며 놀았던 골목에서 목청껏 노래 부르며 웃음 함박 피어나던 기억이 새로웠다. 아이들 ‘놀면서 부르던 노래’를 찾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은 그 즈음이었다. 전승이 멈춘 전래동요를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듣기 시작했다. 오는 세대 아이들과 신명나고 비밀스러운 놀이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지나서 노래와 놀이를 다시 만났다.  

 


놀던 힘으로 넘어온 언덕


편해문 님은 아이들의 노래를 찾아서 4년 동안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아이들의 노래와 놀이, 옛 이야기를 모으고 정리했다. 놀이와 노래가 함께 있고, 거기에 사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요즘은 노래가 많이 사라졌어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옛날 노래와 이야기를 조사하면 노래가 제일 먼저 사라져요. 왜냐면 노래가 일과 관련이 되어있으니까. 노래는 어른에겐 노동과 아이들은 놀이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이는 노래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생물종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관련된 많은 것들이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노래 하나가 사라지면 문화가 그만큼 협소해지고 오랫동안 전승되며 그 안에 쌓인 삶의 역사와 생명력까지도 잃는 것이거든요.” 오랫동안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온 놀면서 부르는 노래는 놀이일상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노래에서 놀이를, 놀이에서 노래를 만나게 된다. 그이는 250개 넘는 놀면서 부르던 아이들 노래를 살려냈다.

 

그이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도대체 지금껏 아버지나 어머니나 우리는 세상을 무슨 힘으로 살아왔을까?” 뒤돌아보니 그것은 분명 ‘놀이’였다. 자신도 ‘놀이 밥’을 먹고 그 힘으로 살아왔다. 그걸 새삼 다시 깨달은 것이다. 어릴 때 동네 골목에서 누나들이 고무줄을 하곤 했다. 그 화려한 발재간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높이를 더해가며 고무줄은 손을 뻗어도 안 닿는 곳에 이르러서야 놀이판이 정리되곤 했다. 그런데 한 누나가 발가락을 걸어 키보다 높은 고무줄을 내리는 거였다. 자세히 지켜보니까 옆 돌기를 하면서 몸이 수직이 되었을 때 순간 손가락을 쭉 펴는 ‘안간힘’을 보았다. 가장 높은 단계에서 계속 막히다가 어느 순간부터 되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다른 누나들도 그 단계를 넘게 되었단다. “한번 되면 계속 마음에서 싹을 틔우고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게 되지요. 이런 힘이 실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지금은 살기 어렵고 낯설지만 안간힘을 다해 이겨낼 수 있다는 거예요. 놀이에서 길러진 힘이 발휘되는 거지요.” 놀이에서는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죽는 경험을 한다. 금을 조금만 밟아도 죽지만, 그것이 영영 끝은 아니라는 것도 안다. “놀이 속에서 죽고 살고, 이기고 지고, 실패하고 견디고, 해내고 어울리는 여러 상황을 엄청나게 경험하는 거예요.” 이러한 일을 현실로 겪는다면 견디기 어려운 일이고, 감정의 무게를 견지지 못하겠지만, 이렇게 놀다보면 어느 순간 걱정도 사라지고 자신도 놀이 안에서 에너지를 쌓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놀이에서 쌓은 힘은 두고두고 ‘살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이는 요즘아이들이 놀이와 떨어져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보고 있다. 놀이를 통해 ‘살 힘’을 기르지 못하고 벽에 부딪히면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없게 된다. “사람들이 좋은 책을 먼저 읽으라고 하지, 먼저 놀게 하지 않아요. 그런데 사실 책은 놀고 나서 시간이 있을 때 읽어야 해요. 노는 것에서 출발해야 해요.” ‘놀이’가 오갈 데가 없는 상황, 놀 자리도 없고, 놀 시간도 없어, ‘놀이 밥’을 못 먹어 허기진 세대를 보고 있다.  

 

그이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틈’과 ‘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학원으로, 다시 집으로 오가는 동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이들은 틈이 없다. 숨 막히도록 틈 없는 일상에서 놀이를 잃어버리고 있다. 그이는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아이들이 가장 괴롭게 보내고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이 아이들이 앞으로 세상을 가꾸어 갈 텐데 어떻게 할 건가 말이에요. 그런 아이들이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갈까요. 아름다운 시절을 아름답게 보내도록 하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거예요.”

 

아이들은 놀지 않으면 속으로 병들고 견디지 못한다. 생체리듬이 그렇게 되어있다. 아이들에게 놀이를 빼앗는 것은 가장 가혹한 일이다. “틈이 없으니까 어떻게 놀겠어요. 공간도 없어요. 아이들이 접선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과 공간이에요. 틈과 터를 마련해 주면 ‘놀이’는 반드시 부활하게 되어있어요.”

 

편해문 님은 그런 아이들이 스스로 길을 찾고 있는 것도 보았다. 아이들의 해방구는 다니는 길이었다. 유일하게 어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틈과 터이다. “아이들은 그래서 인라인을 끌고 타고 다니는 거예요. 그것이 없었으면 어쨌을까 싶어요. 이것이 아니었다면 살면서 ‘밖’이라는 공간을 발견하지 못했을 거예요.” 어른들은 자신이 놀이도 모르고 일하는 것밖에 모르니까 그것을 아이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이렇게 아이들은 눈물겨운 선택을 하는 것이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그이는 이런 아이들이 안쓰럽고 고맙다.


놀기 위해 세상에 온 사람


편해문 님은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든다고 본다. 현재의 자신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생기지도 않을 일들을 지레 안고 살아가라고 말한다. 그래서 계속 일하게 만들고 현재에서 눈을 못 붙이게 하고 틈을 갖지 못하게 한다. 그이는 이런 상황이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승되고 있다고 본다. “그래도 놀이를 경험했던 세대가 이러한 상황을 감당하고 있는데, 놀지 못한 아이들 세대는 어떻게 될까 걱정되요. 스스로 ‘놀거리’를 찾은 사람은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기다운 삶을 만들어 갈 힘을 얻게 되는 거예요.”

 

‘비석치기’라는 놀이를 할 때 단단하게 세워둔 비석을 동무의 비석이 탁 쳐서 넘어트리면 ‘온몸이 넘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비석을 고르기 위해서 몇날 며칠 돌아다니며 어렵게 구한 것이어서 거기에 깃든 정성이나 마음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공기놀이나 비석치기가 끝나면 잘 모셔두고 늘 제 분신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밤에 눈을 감고 놀잇감을 하나하나 점검하면 마음 편하게 잠들게 된다. 편해문 님은 모든 것이 상품화된 요즘은 놀잇감을 만들러 직접 헤매고 다닐 필요도 없고 마음이 깃들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마음이 연결되지 않은 것은 ‘게임’에 불과하고 놀이형식을 갖추었어도 놀이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컴퓨터 게임은 더 나아가 아이들을 ‘전쟁’에 몰아넣고 있다. 이기느냐 지느냐를 넘어서 분노와 화풀이를 화면 밖으로까지 이어가기 때문이다.

 

그이는 오로지 ‘아이들은 놀기 위해서 세상에 오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자연에서 몸만 있으면 가장 행복하게 놀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런 놀이능력을 살려주어야 한다. “도대체 어느 역사에 이렇게 이른 나이에 ‘중독’이라는 말과 만나는 경우가 어디에 있느냐는 거예요. 놀이가 전부이고 웃음 가득한 놀이가 비로소 아이들을 아이답게 살도록 하는데, 이런 것이 설 자리가 없게 되었어요.” 놀이는 노는 아이에게 달려있다. 놀이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틀도 없지만 아이들이 만족스럽게 웃고 있으면 가장 좋은 놀이라고 본다. 아이들은 ‘밖’에서 놀면서 물과 흙을 만나고 추위와 더위를 겪으며 모자람 없는 경험으로 큰다. “아이들이 놀이를 하면서 얼굴이 밝아지고 환하게 웃음을 찾을 때 저도 행복해져요. 놀이는 웃음이에요. 웃음을 만나려는 과정이 놀이라고 생각해요. 장난감이나 물건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놀이가 우선이에요. 왜 놀려고 하는가, 웃으려고 하는 거예요. 웃다보면 사랑이 생기고 웃음은 많은 것을 치유해요. 결국 놀이는 웃음, 사랑, 관계를 위한 도구예요. 놀이를 위해서 놀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놀이는 사랑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죠.”

 

그러기 위해서 어른들도 놀이를 배워야 하고, 자신의 놀이를 찾아야 한다. 상품이 된 것들 말고, 일상에서 이어지는 노는 자연스런 놀이를 만들어가야 한다. 함께 무엇을 고치는 것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작은 일들도, 텃밭을 가꾸는 것이나, 거창하지 않은 나눔이나 봉사도 다 노는 것이다. 진심으로 노는 만큼, 놀이를 통해 ‘살 힘’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뜻에서 편해문 님은 잘 노는 사람이다. 자본의 질서에 매여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버린 틈도 없는 견고한 질서에 틈을 내고 노는 공간을 만드는 ‘노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노는 사람이 필요하다. 놀이꾼이, 노는 아이들이 생명 넘치는 세상을 만들게 될 것이다. 그이는 얼마 전에 놀이 길동무 박보영 님과 한 살림지기가 되었다. 함께 놀이 길동무가 되어 아이들이 자유로이 놀이로 채워가는 놀이세상을 꿈꾸고 있다.


“아이나 어른이나 놀이를 하는 시간은 사람답게 살아가며 사랑하는 시간이기도 해요. ‘나’를 인식하는 순간이면서 동시에 ‘너’를 만나는 순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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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5 12:04 2008/05/05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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