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기

현대차지부 신문 칼럼 원고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1980년 5월27일 새벽 3시 광주. 시민들은 다락에, 침대 밑에 숨어 방송차에서 흘러나오는 애절한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가슴을 후벼파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시 송원전문대 2학년에 다니던 박영순이었다. 그날 광주에 있던 사람들은 이 목소리를 29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

 

새벽 3시30분. 숨죽인 광주의 하늘은 탱크의 굉음과 중무장헬기 소리에 일제히 찢겨졌다. 3공수, 7공수, 11공수 등 특전사부대와 20사단, 31사단 등 정규군 2만여명은 광주시내를 포위하고, 항쟁의 최후 거점인 전남도청으로 밀고 들어갔다. 새벽 4시. 전남도청은 완전히 포위됐다.

 

도청 안에는 200명 남짓한 시민군들이 남아 있었다. 최후의 순간, 그들은 죽음을 피하지 않고 결사항전을 택했다. 시민군은 카빈소총을 쏘며 맞섰다. 하지만 M16을 쏘며 달려드는 공수부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를 비롯한 광주민중항쟁 최후의 전사들이 그날 목숨을 잃었다.

 

29년 전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이 아무런 저항 없이 계엄군에게 투항했다면 그들의 목숨은 부지됐을지언정 오월 광주는 쓰라린 패배로 남았을 것이고, 1980~90년대 불타올랐던 민주화운동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최근 보수언론의 과분한 칭송 속에 무쟁의 노사화합선언을 하거나 임금교섭을 회사에 위임하는 등 노동자의 기본권인 쟁의권과 교섭권을 자본에 갖다바치는 얼빠진 노동조합들이 많이 늘었다. 이들이 노동조합의 단결권마저 스스로 포기하는 건 시간문제처럼 보인다. 오월 영령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삶의 고비마다, 운동의 고비마다 우리는 1970년 11월13일 오후 1시30분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길로 돌아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자기 몸에 불을 당긴 전태일 열사를 생각한다. 1980년 5월27일 새벽 광주 전남도청으로 돌아가 죽음으로 항거한 오월 전사들을 생각한다. 1995년 5월12일 오후 4시45분 현대자동차울산공장 본관 정문 안쪽으로 돌아가 민주노조 회복을 위해 분신한 양봉수 열사를 생각한다. 2009년 4월30일에서 5월3일 사이 어느 시간 대한통운 대전지사 앞 숲 속에서 택배노동자를 비롯한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권 확보를 위해 목을 맨 박종태 열사를 생각한다.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우리 삶과 운동이 잃지 말아야 할 ‘정신’을 가슴 속에 다시 새겨왔다.

 

오월 광주를 지켜냈던 힘은 열흘 동안 ‘대동세상’을 일궈낸 광주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와 평등, 연대의 정신이었다. 2008년 촛불로 다시 살아난 바로 그 정신이다. 용산 투쟁과 쌍용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화물연대가 총파업을 결의했고 건설노조가 5월27일 서울에 모여 총파업을 시작한다. 민주노총은 총파업 일정을 앞당기기로 했다. ‘저항과 연대’의 오월 광주를 이 투쟁 속에서 되살려내는 건 온전히 살아 있는 우리들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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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1 17:13 2009/05/2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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