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7/04/10 09:01
Filed Under 이미지적 인간


 

책을 잘 읽지 못한다. 전공 서적도 잘 못 읽는 판에 인문사회과학 책이라니...

하지만 틈틈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올해, 캄보디아에서의 일주일을 함께해준 책이었다.

 

사 놓기만 하고 책꽂이에 예쁘게 꽂혀만 있기가 몇년이었다. '동양고전'이라는 제목에 눌려(난 한문은 완전 꽝이다. 내가 고등학교때 이과에 갔던 이유가 한문이 싫어서 였다는... ㅠㅠ) 들쳐보는데도 대단한(!) 결심이 필요했다. 한자 읽으려 애쓰지 말고, 읽을 수 있는 한글이나 잘 읽자는 결심으로 책장을 넘겼다.

 

대화하는 듯 부드러운 문체지만 날카로운 지적들과 해석들이 넘쳐났다. 지금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해서 세상을 바꿀만한 관계들의 망을 넓혀가는일...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게 그게 아닐까 싶어졌더랬다.

 

 



-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속에 있는 것...

 

- 무일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 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 지천태괘와 천지비괘에서 공통적인 것은, 어느 것이나 다 같이 교交와 통通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와 통이 곧 '관계'입니다. 이것이 주역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항상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그것이 태泰인 까닭, 그것이 비丕인 까닭이 오로지 열려 있는가 그리고 소통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의하여 판단되고 있는 거지요.

 

-  어쨌든 희망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서부터 키워내는 것임을 박괘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을 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추풍 속에 서듯이 우리 시대의 모든 허위의식을 떨처내고 우리의 실상을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르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솟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0)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 "낯선 거리에 임자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 심心이 개인으로서 인간성과 품성의 의미라면 덕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에 무게를 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이 좋으면 그 사람의 인간관계도 좋아지고 넓어지겠지요. 그리고 심호는 착하다는 뜻이고 착하다는 것은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소중히 하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러나 우리는 심과 덕을 일정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덕은 당연히 인간관계에 무게를 두는 사회적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했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세웠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누구보다도 '선생'들이 읽어야 할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성생들은 결과적으로 자기를 배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지요. 자신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거나 자기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하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이지요. 자기를 기준으로 남에게 잣대를 갖다 대는 한 자기 반성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미혹을 반성할 여지가 원천적으로 없어지는 것이지요. 한 사회, 한 시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회, 그 시대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히 직시하고 그것을 답습할까 봐 부단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회 발전은 그러한 경로를 거치는 것이지요.

 

- 그래서 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격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지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전쟁이야 말로 흉물임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묵자는 인간 본성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것입니다. 묵자는 소염론所染論에서 인간의 본성은 물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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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0 09:01 2007/04/10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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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후 2007/04/10 22: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천으로 읽긴 했지만... 이렇게 서평까지 쓰는거 본께 한가한개벼... -_--

  2. 해미 2007/04/11 1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후/ 이게 서평으로 보이냐? 그저 메모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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