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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옆에 우리가 있다” 성별불문 운집한 성차별·성폭력 끝장집회

참가자들 “사법부도 유죄” 분노...김지은 씨 “판사는 왜 가해자에겐 묻지 않나”

최지현 기자 cjh@vop.co.kr
발행 2018-08-18 21:55:36
수정 2018-08-18 2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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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도로 행진을 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도로 행진을 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민중의소리

"판사님, 가해자의 증인들이 하는 말과 그들이 낸 증거는 다 들으면서, 왜 저의 이야기나 어렵게 진실을 이야기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나요? 왜 제게는 물으시고 가해자에게는 묻지 않았나요? 왜 제 답변은 듣지 않고 답하지 않은 가해자의 말을 귀담아 듣나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피해자 김지은 씨의 입장을 대신 읽어내려가는 정혜선 변호사의 목소리가 18일 광화문 인근 도로에 울려퍼지자 일대는 순간 숙연해졌다. 이날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미투운동과 함께 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5차 성차별·성폭력 끝장집회'에서였다. 집회 주제는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못살겠다 박살내자'였다.

김 씨는 "죽어야 제대로 된 미투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죽어야 할까 하는 생각도 수도 없이 했다"며 "큰 모자, 뿔태안경, 마스크 뒤에 숨어 얼마나 더 사람들을 피해 다녀야 할까, 이 악몽이 언제쯤 끝날까, 일상은 언제 찾아올까 생각한다"고 토로했다.

김 씨는 "이제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제가 기댈 곳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가만히 있는 거 밖에 없다"며 "이게 지금 제가 겪고 있는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뉴시스

"안희정은 유죄다, 사법부도 유죄다"

 

서울 중심에 모인 참가자들은 안희정 전 지시가 1심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데 대해 분노를 표출하며 김 씨의 입장에 공감을 표했다. "안희정은 유죄다, 사법부도 유죄다", "조병구를 탄핵하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조병구는 안 전 지사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 부장판사다. "진짜 미투, 가짜 미투, 네가 뭔데 판단하냐", "'피해자다움' 강요마라, 가해자를 처벌하라"는 것도 주된 구호였다.

안 전 지사 판결 등에 대한 분노는 김 씨와 같은 여성에 국한되지 않았다. 나이를 불문하고 모인 참가자들 가운데엔 남성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중당, 녹색당 등 진보정당도 공개적으로 참가했으며, 서울여성회, 한국여성노동자회 등 여성단체를 비롯해 여러 시민사회단체도 함께 했다.

그동안 '불편한 용기' 주최로 열린 집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전 집회에는 '생물학적 여성'만, 그것도 단체 소속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만 참석할 수 있었다.

또 당시 대다수 참석자들이 일부 남성 네티즌들이 신상을 찾아내 공격하고 조롱거리로 삼는 점을 두려워 하며 얼굴을 가리고 모자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집회는 얼굴을 가리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사회적 공감대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목이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민중의소리

남자친구와 함께 집회에 참가한 정모(39.여)씨는 민중의소리와 만나 "안희정 판결을 보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이 들어 처음 집회에 왔다. 마치 법원이 너희(여성)는 그냥 받아들이라고 강압적인 선언을 한 느낌이 들었다"며 "여성 차별에 대한 (억울한) 감정을 눌러왔는데, 그걸 몸으로 (보여주고) 실천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와 함께 집회에 참가한 이모(43.남)씨도 "이런 피해를 당했으면 어떤 절차로 구제를 받아야 하는데 피해를 말하기도 힘든 상황"이라며 "이런 게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힘을 보탰다.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오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발언대에 올라 "1심 재판은 위력의 지형이 그대로 드러난 전시장과 다름 없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재판부가 합리적이고 새로운 법적 과제 제시한 듯이 말해서, 언론도, 입법부도 들썩이지만 위력 성폭력에 관련 법을 적용하지 않은 1심부터 제대로 살펴봐야 한다"며 "피해자답지 않은 시선과 잣대, 애초 피해자의 말이 의심스럽다고 보는 색안경이 있는 한 어떤 성폭력에도 법이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인 권김현영 씨는 "이번 판결에서 주어가 바뀌었다. 위력을 행사했다는 주어는 피고인이고 가해자, 안희정이다. 그런데 재판부는 피해자한테 '그때 당신은 뭐했냐'고 물었다. 주어가 바뀌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담당 재판부를 "역대 최악의 2차 피해 가해자"라고 비판한 뒤 "판결문 전문을 읽고 재판부가 가해자 편을 들 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폭력 그 자체였다는 걸 알게 됐다. 안희정은 유죄고, 재판부도 유죄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민중의소리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참가자는 점점 더 불어났다. 인도를 넘어 도로 1차선까지 채운 참가자들은 2차선까지 채울 정도로 불어났다. 진행자가 "우리가 바로 김지은의 세력들이다. 3차선까지 세력을 확장하자"고 제안하자, 참가자들은 3차선까지 자리를 넓혔다. 진행자는 "더 이상 우아하게 진행하지 않겠다. 분노를 표출하자"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보내자고 거듭 목소리를 높이며 피해자에 대한 연대의 뜻을 보였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여성인권의 역사는 잘난 자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말하기,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투쟁, 우리들의 연대를 통해서 만들어왔다. 더욱 치열하게 싸우자. 더욱 강렬하게 연대하자"며 "강고하게 보이는 가부장제를 해체하고, 성평등을 이룩하자"고 호소했다.

최근 고은 시인의 성폭력 의혹을 제기한 최영미 시인도 "김지은 씨를 지지한다"고 밝힌 뒤 준비해온 시를 읊었다.

참가자들은 1차 행사를 마친 뒤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광화문, 경복궁, 안국동, 종로2가를 거쳐 다시 돌아오는 도로 행진을 1시간 반가량 벌였다. 지나가던 시민들과 외국인 관광객들도 사진을 찍거나 어떤 일인지 물어보며 크게 관심을 보였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도로 행진을 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도로 행진을 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민중의소리

행진이 끝난 뒤 날이 어두워졌지만, 참가자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주최 측 관계자는 "2만명 정도 모인 것 같다"고 말했다.

행사는 계속 이어졌다. "어둠의 장막을 거두고 밝은 빛을 밝히자"며 '피해자다움', '남성연대', '강간문화' 등이 적힌 30m 현수막 찢기, 휴대폰 플래시 밝히기, 횃불 밝히기 등 퍼포먼스도 벌였다.

자유발언에선 성폭력을 폭로하는 '미투'가 잇따랐다. 자신을 '성폭력 생존자'라고 소개한 한 여성은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가해자를 끝내 법적 처벌받게 한 과정을 공개해 응원의 박수를 받았다. '문단 성폭력 피해자'라고 밝힌 또 다른 여성은 "성폭력이 아니라고 말하기 전에 무엇이 성폭력인지 알아라"라며 "용서 구하지 말고 그냥 사과를 하라"고 울먹이며 일침을 가했다.

참가자들은 "피해자 옆에 우리가 있다"며 끝까지 싸워나가겠다는 의지를 모으며 밤 9시까지 이어진 집회를 마무리했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밤 늦게까지 남아 구호를 외치고 있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밤 늦게까지 남아 구호를 외치고 있다ⓒ민중의소리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있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있다.ⓒ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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