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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무릎 꿇고 '사죄'하던 이영훈 교수를 기억한다

[반일 종족주의 ①] '우리 안의 위안부'론의 허점

19.08.26 07:23l최종 업데이트 19.08.26 07:23l

 

<반일 종족주의>가 논란입니다. 몇 회에 걸쳐 이 책의 문제점을 짚어봅니다. [편집자말]

뉴라이트 학자인 이영훈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은 15년 전 이맘때도 한국 사회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2004년 9월 2일 MBC <100분 토론> '과거사 진상규명 논란' 편에 출연한 그는 위안부 피해자와 성매매 여성을 동일 선상에 놓는 발언을 해서 국민적 공분을 자초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그는 9월 5일 해명서를 발표해,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며 진화에 나섰다. 해명서에서 그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하여 여성을 강제 동원하고 감금하여 병사들에게 성적 위안을 강제한 행위는 국제사회가 협약으로 금하고 있는 성노예 범죄"라며 자신도 위안부 피해자들과 같은 편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다음날인 6일 오전, 그는 경기도 광주시에 소재한 나눔의집을 방문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직접 사죄했다. '사과'가 아니라 '사죄'라고 해야 할 수준이었다. 할머니들에게 큰절을 올리고 50분가량 두 손을 모은 자세로 있었기 때문이다.  
 

 'MBC 100분 토론(지난 2일 방송)'에서 일제시대 정신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이영훈 교수가 6일 오전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사죄방문했다.
▲  "MBC 100분 토론"에서 일제시대 위안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이영훈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사죄 방문했다 2004.9.6.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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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100분 토론(지난 2일 방송)'에서 일제시대 정신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이영훈 교수가 6일 오전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사죄방문했다.
▲  "MBC 100분 토론"에서 일제시대 위안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이영훈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사죄 방문했다 2004.9.6.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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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100분 토론(지난 2일 방송)'에서 일제시대 정신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이영훈 교수가 6일 오전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사죄방문했다. 이영훈 교수가 '할머니들에게 예를 갖춰야 한다'며 큰절을 하고 있다.
▲  "MBC 100분 토론"에서 일제시대 정신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이영훈 교수가 6일 오전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사죄방문했다. 이영훈 교수가 "할머니들에게 예를 갖춰야 한다"며 큰절을 하고 있다. 2004.9.6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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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할머니들은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군자 할머니(2017년 별세)는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하느냐?"고 소리쳤고, 이옥선 할머니는 "일본인 아니냐?"며 "당장 호적등본 떼와라!"라고 호통쳤다.

그런 중에도 이영훈 이사장은 '위안부 강제동원은 범죄'라며 "할머니들이 일제강점기 성노예자라는 역사인식에 동의하며, 철저한 역사청산이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거듭거듭 용서를 구했다. 이렇게 일종의 '이영훈 담화'를 발표하면서 사태 진화를 시도했다.

15년 전에는 "성노예 범죄"라며 사과, 지금은 다시 "성매매 여성"

하지만 그의 인식이나 주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월이 15년이나 흐른 금년 7월 다섯 명의 뉴라이트 학자들과 함께 펴낸 <반일 종족주의>를 읽어보면, <100분 토론>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다.

<반일 종족주의> 제3부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 편의 첫 번째 글은 '우리 안의 위안부'다. 글의 요지는 '일본군 위안부는 해방 후의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와 같을 뿐 아니라 그 전부터 존재했던 일반 성매매 여성과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와 똑같은 제도가 '우리 안'에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일본군 위안부보다 우리 안의 위안부를 먼저 돌아보자는 게 그가 던지는 메시지다.

그는 한국군 위안부와 관련해 "'우리 안의 위안부'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를 그대로 복제해놓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라면서 "6·25 전쟁기의 한국군 위안부가 바로 그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런 뒤 이렇게 말한다.
 

"1951년의 어느 시기로 추측됩니다. 국군은 장병에게 성적 위안을 제공하는 특수위안대를 설립하였습니다. 1956년 육군본부가 편찬한 <6·25사변 후방 전사(戰史)>에 의하면, 특수위안대는 장병들의 사기를 앙양하고 성적 욕구를 장기간 해소하지 못함에 따른 부작용을 예방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그는 특수위안대에 속한 위안부 여성을 700명 정도로 추산했다. 이들이 하루 평균 6.3명을 상대하는 "성교 노동"을 강요당했다고 한 뒤 "그것은 하나의 전쟁 문화였습니다"라고 주장한다. 한국전쟁 때도 '전쟁 문화' 차원에서 위안부가 있었으니 '일본군 위안부도 그런 차원에서 바라보자'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한국군 위안부와 더불어 그가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은 일반 성매매 여성이다. 그는 이들을 '민간 위안부'라 부른다. 이들을 일본군 위안부와 분리해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태도에 그는 의문을 제기한다. "역사를 세밀히 살피면 군 위안부는 이전부터 죽 있어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15세기 이래 조선시대부터 있어온 것입니다. 또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위안부는 우리 사회에 죽 있어 왔습니다."

 
그는 성매매 여성이 한때 위안부로 불린 사실을 부각한다. 이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다를 바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말한다.
 

"한국 정부가 <보건사회통계연보>에서 성매매를 전업으로 하는 여인을 위안부로 규정하는 것은 1966년까지입니다. 다시 말해 1945년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1960년대까지 존속했으며 오히려 번성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는 일반 성매매 여성들을 놓고 "그들은 분명히 일본군 위안부의 계보를 잇는 존재였습니다"라고 규정한다. 불특정 다수의 남성을 상대한다는 점과 더불어 '위안부'라는 똑같은 명칭을 사용한 적이 있음을 근거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성매매 여성을 동일시한 것이다. 어떤 조건이 충족돼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볼 수 있는지를 따지지 않고, 위안부라는 호칭의 동일성만을 근거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강제로 동원된 참혹한 성노예란 점 부정 
 

 지난 16일, 유튜브 채널 이승만TV에 출연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  지난 16일, 유튜브 채널 이승만TV에 출연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 이승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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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건이 충족돼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볼 수 있는지는, 이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인 고노 담화(1993.8.4)에서 드러난다. 고노 담화에서는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나타나듯이 한·일 간에 거론되는 위안부는 '일본 국가권력에 의해' 동원된 피해자들을 지칭한다.

또 고노 담화에서는 "위안부의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런 경우에도 감언·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다고 했다. 이 말에서 나타나듯이 한·일 간에 거론되는 위안부 피해자는 '강제동원'된 여성들을 지칭한다.

고노 담화는 또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 하의 참혹한 것이었다"고 인정한다. 위안부는 참혹한 성노예였다는 것이다.

 

종합하면, 한·일 간에 거론되는 위안부는 '일본 공권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동원돼 참혹한 성노예 생활을 한 여성'들을 지칭한다. 설령 위안부로 불린다 해도, 이 요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민간 성매매 여성들도 자발적으로 그 일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들 대부분이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데는 사회적 영향도 매우 크다. 취약 계층을 그쪽으로 내모는 시스템이 우리 사회 내에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부조리도 당연히 규명되고 청산되어야 한다.

하지만 민간 성매매 여성의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본질이 다르다. 본질이 다르므로 해결 방법도 달라야 한다. 단순히 명칭이 같았다는 이유만으로 양자를 동일시하게 되면 똑같은 해결 방법을 쓰게 되고, 그렇게 되면 두 문제의 해결에 실패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민간 성매매 여성 문제를 올바로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이 문제를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떼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영훈 이사장은 명칭이 같다는 이유로 두 문제를 똑같이 놓고 바라본다. 그러고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을 비판한다. 민간 성매매 여성도 많은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 따지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는 미군 위안부 문제도 언급한다. "해방 후 '우리 안의 위안부'를 가장 길게 대표하는 것이 있는데, 다름 아니라 미국군 위안부입니다"라면서 "민간에서 통용된 호칭은 양색시·양공주·양갈보 등입니다만, 공식적 호칭은 미군 위안부였습니다"라고 말한다.

위의 두 문장은 '미국군 위안부'라는 소제목 하에 처음 나온다. 첫 문장에서 호칭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룬 것은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가 똑같이 불렸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호칭 문제에 집착하는 그의 내면을 드러내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부터 민간 위안부가 있었고 1900년대에는 일본군 위안부뿐 아니라 한국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도 있었거늘,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 꼭 집어내 문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이영훈 이사장의 주장이다.

그가 이렇게 자신 있게 결론을 내리는 최대 근거는 민간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가 한때 똑같은 호칭으로 불렸다는 사실이다. 각각의 특성이 어떤가는 비교하지 않고, 단순히 호칭만 놓고 그런 결론을 성급하게 내린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미군 위안부에만 유독 '선처 호소'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 각각의 위안부 문제가 다 똑같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는 특정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 대우'를 호소한다. 비판하려면 다 똑같이 비판해야 한다고 해놓고, 특정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선처'를 호소하는 것이다.

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비판을 외면한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한국인들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위안부 강제동원을 자행한 일본에 대해서는 비판을 삼간다. 이를 두고 '그는 왜 유독 일본에 대해서만 침묵할까?'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가 일본에만 그런 '선처'를 베푸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그런 태도는 미군 기지촌 문제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그는 이 문제를 명분으로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비판하거나 한미동맹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표시한다.
 
"사회운동가들은 미군 위안부 문제가 국가의 폭력이었다고 비판합니다. 그들은 미군 위안부 문제가 박정희와 전두환 정부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며 국가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지적하고 싶습니다. 동시대 전국 도처에서 발달한 사창가의 여인들은 훨씬 더 비참했다고 말입니다."

미군 위안부보다 열악하게 생활한 성매매 여성들이 있는데 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할 필요가 있느냐는 게 그의 말이다. 그는 미군 기지촌 문제를 비판하는 한국인들을 겨냥해 "나아가 그들은 위안부 문제의 근원에 한미동맹이 있다고 주장합니다"라고 한 뒤 "그러한 주장에 저는 동조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 사회가 성매매를 금지하면서도 미군 위안부를 용인하는 것이 위선적인 태도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렇지만 저는 그 수준에 관한 한, 우리의 인생살이 자체가 위선적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한미동맹에서 파생되는 미군 기지촌 문제를 비판해야 할 대목에 가서 '우리 인생 자체가 다 위선'이라는 엉뚱한 말로 얼버무린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는 정치적 사고의 산물 
 
 이영훈 전 교수 등이 펴낸 <반일 종족주의> 325페이지. 이 전 교수는 "위안부 생활은 '위안부 생활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선택과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  이영훈 전 교수 등이 펴낸 <반일 종족주의> 325페이지. 이 전 교수는 "위안부 생활은 "위안부 생활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선택과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 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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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드러나는 것은, 그가 일본군 위안부뿐 아니라 미군 위안부 문제 역시 불거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그의 인식이 한미일 삼각동맹과 무관치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미일 삼각동맹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그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과 미국을 변호하고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이영훈 이사장이 학술적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 관점으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고 있음을 뜻한다. <반일 종족주의>에 나열된 그의 주장들이 치열한 학문적 탐구의 결과라기 보다는, 한미일 삼각동맹에 대한 정치적 사고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15년 전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호된 꾸지람을 받을 당시 그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하여 여성을 강제 동원하고 감금하여 병사들에게 성적 위안을 강제한 행위는 국제사회가 협약으로 금하고 있는 성노예 범죄"라고 인정하는 '이영훈 담화'를 발표했다. 그래놓고도 그는 그날의 사죄에 아랑곳하지 않고, 위안부에 관한 망언들을 <반일 종족주의> 내에 가득 담았다. 나눔의 집에서 큰절을 올리고 50분간 두 손 모은 채 할머니들의 말씀을 경청했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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