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박근혜식 표준', 실패한 MB 5년 답습하나

[정욱식 칼럼] 소모적인 '격(格)' 논란, 언제까지 할 것인가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프레시안 편집위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6-12 오전 11:13:40

 

 

오늘(12일)로 예정되었던 남북당국회담이 수석대표의 '격(格)'을 둘러싼 기싸움에 끝내 무산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이로써 남북대화를 통해 개성공단 정상화와 이산가족 상봉 등 시급한 현안 해결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당분간 회담 무산을 둘러싼 남북한의 책임 공방이 난무하게 될 전망이다. 남북대화를 계기로 한반도 정세가 대결에서 대화로 반전될 것이라는 희망 섞인 관측도 불확실성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11일 남측은 김남식 통일부 차관을, 북측은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각각 수석대표로 하는 5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선정해 서로 통보했다. 그러나 북측은 남측 수석대표의 급을 문제 삼으면서 대표단의 서울 파견을 보류한다고 통보해왔다. 북한은 이러한 결정 배경에 대해 남한이 수석대표를 장관급에서 차관급으로 교체한 것은 "남북당국회담에 대한 우롱이고 실무접촉에 대한 왜곡으로서 엄중한 도발로 간주"한다는 입장을 남한에 전달했다.
 

▲ 남북 수석 대표의 격 차이로 남북당국회담이 무산된 가운데 12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 설치된 회담장이 철거되고 있다. ⓒ뉴시스


그렇다면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단 남북대화에 대한 북한의 관성과 남한의 새 틀 짜기 시도 사이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관례적으로 남북장관급 회담의 북측 대표로 내각 참사를 내세웠었고, 이번에도 비슷한 급에 해당하는 조평통 서기국장을 수석대표로 통보해왔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통일부 장관의 북측 상대는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정하고는 실무회담에서 북한을 설득하려고 했다. 북한이 관례에 맞지 않는다며 이를 수용하지 않자, 박근혜 정부는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통보했고 북한은 이에 반발해 대표단 파견 보류 결정을 내린 것이다.

회담 개최를 하루 앞두고 보류 결정을 내린 북한의 경직되고도 일방적인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성급한 과욕과 비실용적 태도 역시 상황을 꼬이게 만들었다. 정부로서는 북측 대표의 격이 남측 장관과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고, 또 북측에 시정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남측이 대표의 급을 낮춰 북한에 회담 무산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분명 품격 있는 태도가 아니다. 6월 6일 북한의 회담 제의에 대해 박근혜 정부가 장관급 회담 제안으로 화답했던 태도와도 맞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 내에서는 과거 남북 장관급 회담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강하다. 북한이 남한의 통일부 장관과는 격이 맞지 않은 인사들을 내보낸 것은 남한을 대등한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격이 맞는 인사라고 판단하고 있는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은 내각이 아니라 당 소속 인사다. 또한 대남 기구인 조평통의 위원장도 공석 상태이다. 근본적으로 남한은 선거에 의해 정기적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장관도 수시로 바뀌지만 당 국가체제인 북한에서 주요 간부는 종신직에 가깝다.

이러한 체제의 차이를 간과한 채, 또한 지금까지의 남북회담의 관례마저 무시하고 하루아침에 남북대화에 '국제 표준'을 만들어보겠다는 시도 자체가 무리였던 것이다. 더구나 최근 들어 청와대 인사들은 '원칙', '국제 표준', '신뢰'라는 표현을 남발하고 있다. 이는 이명박 정부가 남북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썼던 표현이 현 정부 들어서도 재생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근혜 정부도 MB의 실패한 5년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번 일이 과도기적 진통으로 끝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아 보인다. 일단 당국간 접촉이 재개되더라도 '누구를 수석대표로 할 것인가'에 대해 합의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무엇보다도 남북 양측에서 강경론이 부상할 가능성이 우려된다. 전격적으로 대화 제의에 나섰던 북한 내에서도 이번 일을 거치면서 또 다시 대화파의 입지가 줄고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질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추상적이고도 모호한 표현 뒤에는 '북한의 버릇을 고쳐놓겠다'는 일방적이고 강경한 사고가 똬리를 틀고 있다. 대화와 협상의 법칙을 박근혜식 표준에 맞추겠다는 접근법을 고수하면서 과연 제대로 된 신뢰가 구축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는 군 장성 출신들이 통일외교안보정책의 실세로 군림하면서 예견된 결과이기도 하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박근혜 정부의 품격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고령의 이산가족과 개성공단 입주기업인, 그리고 강원도 고성 주민 등 남북 대결과 갈등의 최대 피해자들이 이번 남북대화에 품었을 절박한 기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었다면 북측 대표의 격에 이토록 집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제라도 자의적 표준에 집착하지 말고 문제 해결 지향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 하루빨리 실무회담을 재개해 무산 위기에 처한 남북대화 프로세스에 시동을 걸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회담의 격을 총리로 높여 소모적인 '격'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실질적인 대화 틀을 만드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프레시안 편집위원 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