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경 / 농부
 

살구나무를 찾아서 살구나무 동산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구나무 마을을 만들려고 한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많은 살구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데, 나는 그것이 북측 회령 백살구나무이기를 바래서, 그것을 구하려 안타깝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라진 살구나무를 찾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구나무를 잃어버렸듯이 아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하여 그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 연재할 글들은 살구나무처럼 우리가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진지한 호명이다. / 필자

 

‘어떤 현대사’ 「끝나지 않은 길」 출판기념회에서. [사진-통일뉴스]
‘어떤 현대사’ 「끝나지 않은 길」 출판기념회에서. [사진-통일뉴스]

어떤 현대사

안재구 선생님의 두 번째 이야기는 당신의 나이 팔순이 다 되어가는 때에 이르러 이어진다. 첫 번째 이야기가 세상에 나온 후 14년이라는 세월이 또 흐른 후의 일이다. 사람의 나이 팔순이면 모든 일을 다 놓아버리기에 족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다시 펜을 들고 투쟁의 전선에 서있었던 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무엇이 팔순을 바라보는 선생을 집필이라는 힘들고 고된 일로 떠밀었던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지금 세상에 대한 절망이고, 어쩌면 살아온 날들에 대한 자책이며, 또 어쩌면 그 속에서도 기어이 버릴 수 없는 후대들에 대한 기대일지도 모르겠다. 선생은 이렇게 쓰고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커다란 바위처럼 억눌린 일제 식민지 억압의 굴레가 풀리고 누구나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평등한 새나라가 건설되리라고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나랏일에 참여하고, 누구나 식・의・주의 걱정이 없고,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고, 누구나 질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리라고 바랬는데, 오늘날의 세상으로까지 되고 보니 우리들은 모두 다 헛살았다고만 생각되어, 차마 후대들에게 머리조차 들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왜 이 모양으로 되고 말았는가?」

이것은 선생이 지금 나라의 모습에서 떠올린 질문이며, 또한 역사와 시대가 던지는 질문이다. 선생의 고된 집필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스스로 떠안은 책무였을 것이다. 팔순이라는 나이를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되감아 펼치기라도 한 듯, 원고지 2,000여매에 달하는 두툼한 이야기 「어떤 현대사」는 여기서 출발한다.

책으로 출간된 ‘어떤 현대사’ 「끝나지 않은 길」 제1권 표지.
책으로 출간된 ‘어떤 현대사’ 「끝나지 않은 길」 제1권 표지.

뒤집어진 해방

이야기는 재판정에서 시작된다. 재판의 피고인은 당신의 할아버지, 해방의 날 북을 울리는 청년들에 둘러싸여, 만면에 웃음을 가득 채우고 서문다리를 건너오던, 볕에 그을린 붉은 얼굴의 ‘할배’다. 그 얼굴은 간데없고, 피고인이 되어 서있는 법정은 일제 때의 그것과 다름없다.

해방이 되자 맞아죽지 않으려 도망쳤던 일제 때 검찰청 서기가 검사자리에 앉아 할아버지를 윽박지른다.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 밀양군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병든 몸으로도 고단함을 기쁨으로 알고 불철주야 일하시던 할아버지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해방의 기쁨도 해방된 그해의 연말이 가까워오자 조선의 남반부에 진주한 미군이 군정청을 설치하여 점령군으로 행세하고, 일제 통치의 주구들을 다시 불러 군정 통치의 하수인으로 고용했다. 일제 때 하부 관공서의 관리쯤 했던 자들은 면장도 되고 군수도 되었고, 경찰서의 순사하던 자들은 간부로 올랐으며 부장쯤 했던 자들은 서장이나 도 경찰부의 높은 자리에 올라 다시 해방된 조선 사람을 일제의 대신 미제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이와 같이 쓴다. 모두 다 아는 이야기이다. 이남 땅 방방곡곡에서 예외없이 한결같이 일어났던 일이다. 해방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이었다. 남의 땅에서 주인행세를 하던 일제와 친일파들이 쫓겨가고, 잡혀가고 떠나갔던 진짜 주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지도적인 반일 애국자들과 모든 사람들이 제 손으로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 힘써 일하던 때였다.

미군점령은 그 세상을 다시 뒤집는 것이었다. 그들이 소환한 친일파 주구들이 되돌아오고, 믿을 수 없게도 일제 때와 방불한 세상이 먹구름처럼 덮쳐온다. 사람들은 불과 몇 달 사이에 세상이 두 번 뒤집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열세 살 아이의 해방

선생은 그것을 ‘석 달 동안의 해방’이었다고 쓴다. 선생은 열세 살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해방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한다. 새 나라를 세우려는 열띤 마음을 갖고 거리에 모여드는 사람들, 조선독립을 축하하는 벽보와 급조된 태극기의 물결, 고향 하늘에 울려퍼지는 농악소리와 거리에서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사람들, 조선왜놈들에 대한 농민들의 하늘을 찌르는 분노의 분출, 누구나 보았던 이러한 것들 외에 선생만의 특별한 기억도 있다.

「조선어철자법통일안」을 읽으며 한글 맞춤법을 익히던 기억, 아침밥만 후딱 먹고 거리에 나가 어른들의 모임에 기웃거리던 기억, 동무들과 함께 독립과 새 나라에 대해 주고받던 이야기들, 거기서 민주주의, 자유, 평등, 그리고 사회주의의 뜻을 익혀나가던 기억, 동무들과 쏘다니다가 아무 집에 가도 모두 반가워하고 할아버지의 안부를 묻던 기억, 어디를 가도 할아버지 덕으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던 기억들이다.

달라진 학교의 모습은 더욱 감동적이다. 교문 오른편에 왜놈 천황의 조상을 모셨다는 ‘호안덴’도 없어지고, 전시물자생산으로 아이들을 내몰던 실습장도 없어졌다. 날마다 절하기를 강요했던 왜놈 천황이 산다는 ‘니쥬바시’ 사진도 없고, ‘그놈의 일장기’도 없고 날마다 외우게 했던 ‘고고꾸신민노 찌까이(황국신민의 다짐)’도 없다.

조선말을 하다가 죽도록 얻어맞았던 교실에는 조선말이 가득하고, 소년 안재구의 눈에서는 끝내 눈물을 나고야 만다. 날마다 새로 전학을 오는 동무들, 나라 안 먼 곳에서, 일본에서, 만주에서, 북해도 탄광에서, 사하린 얼음판 삼림에서, 대만에서, 남양에서, 해방된 조국을 찾아온 동포들의 아이들, 거기서 태어나 조선말에 서툴어도 아이들은 놀리면서 어울리며 하나가 된다.

선생은 해방을 일러, ‘새 세상에 새로 태어난 듯하다’고 적는다. ‘이때만큼 살맛나는 때는 없었다’고, ‘정말 신나는 세상이었다’고도 적는다. 추석을 앞두고 벌어진 고향동네의 해방잔치는 그 짧았던 세상의 절정을 묘사한다. 돼지를 잡고 떡과 묵을 치고 막걸리를 빚어 마련한 잔치였다. 글을 써나가는 선생의 눈에는 해방의 기쁨으로 활짝 펴진 할배, 아재들의 얼굴과 어깨를 우쭐거리며 신명이 난 아이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마련한 국밥과 술로 점심을 걸판지게 먹고 온 동네가 떨쳐일어나 「농자천하지대본」 서낭기를 앞세우고, 북소리 장구소리를 둑닥거리며 농로를 따라 간다. 「인민공화국」 선포기념과 「인민위원회 결성대회」가 열리는 면소재지 초동학교를 향해 가는 것이다.

절정은 파국을 내포하는 것일까? 미군 비행기가, ‘조선독립 만세’와 ‘조선인민공화국 만세’와 ‘3.7제 소작료 만세’를 부르는 군중들 머리 위를 가로지르며 하얗게 전단을 뿌린다. 전단은 점령군의 포고문이다. 전단에는 ‘조선은 당장에 독립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은 북위 38도선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한다.’ ‘38선 이남의 조선인민은 미군 통치에 절대 복종하라’는 포고령 1호, 연합군의 재산 생명 보호령으로 위반자는 사형까지 한다는 포고령 2호가 적혀 있다.

“왜놈들은 전쟁에 져서 조선 땅에서 쫓겨가지만 ‘호랑이 피하자 단범 만난다.’는 말이 있듯이 미국놈이 들어오면 그 놈들이 이 나라에서 잘 물러날까. 총칼 들고 들어온 놈은 꼭 총칼 든 놈 행세를 하는 법이거든.” 구한말 무관학교를 나와 참위를 지낸 윗집 큰할배가 선생에게 했던 염려이다. 전단은 그 염려가 현실이 되어간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활짝 펴졌던 사람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새 세상은 무엇이었나?

짧았을지언정, 해방의 세상을 살았던 사람은 과거의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해방이 무엇이고, 새 세상이란 어떤 것이며, 우리가 세워야 할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명료하게 알았던 사람들, 그들은 결코 그 세상에 대한 열망을 버릴 수 없다. 책은 선생의 평생을 관통하는 새 세상을 향한 열망과 투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써내려 간다.

새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당시 온 나라에 자주적으로 조직된 「인민위원회」를 기초로 수립했던 국호 속에 압축되어 있다. 「조선인민공화국」이다. 또 그것은 할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 속에 그려져 있다. 그것은 제일 먼저 ‘조선사람이 주인인 나라’이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평등한 나라’이다. 할아버지는, 그런 나라를 세우자면 ‘미국놈들과 싸워 2차 해방이 되어야한다’고 말씀하신다.

새 세상은, 설을 앞둔 큰 장날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환영 밀양군 인민대회」에 나와 햇볕드는 뚝 밑에 앉아 두런두런 나누는 할배들의 대화 속에 들어있다. 그것은 농민이 해방되는 세상이다. 농민의 해방은 땅에 있다. 할배들은 땅이 생겨야 농군들이 정말로 나라백성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새 세상은 농민들이 들고 행진하는 깃발 속에 새겨져 있다. 그것은 농민들의 수백 년 염원이 담긴 구호다 “정권은 인민에게로, 공장은 노동자에게로, 토지는 농민에게로”,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개혁 실시하라!”, “미소공위 성공시켜 임시정부 수립하자!” 이제 막 도착했다고 여겼던 새 세상, 억눌리고 핍박당하며 자나깨나 그려보던 새 세상, 그것은 ‘내 나라’였다.

세상 속으로

가난과 시련은 아이들을 일찍 철들게 하는 법이다. 당시의 조선 아이들은 일찍 철들고 일찍 어른이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선생의 정신적 성장은 놀라운 것이다. 할아버지 슬하라는 환경과, 타고난 발군의 영리함과, 많은 양의 독서를 통해 도달한 높은 지적 수준과, 거기에 활달하고 낙천적인 성격과 사람에 대한 사려깊고 섬세한 감수성이 더해져 선생은 너무나 일찍 격랑의 세상 속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일제말기의 혹독한 삶을 날려버린 해방의 기쁨이 미군정 하에서 다시 식민지로, 가난으로, 억압으로 전락하는 것을 온 몸으로 목격하며 선생은 성장한다.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3·7제 소작료를 관철하려던 종조부 유천할배가 테러를 당하고, 「인민위원회」가 강제 해산되고 치안유지법이 재등장하면서 할아버지가 예비검속으로 잡혀간다. 끼니를 잇기 어려운 세월이 다시 시작되고, 점점 험악해 가는 세월 속에서 선생은 중학교에 진학한다.

1946년

1946년이었다. 불과 한 해도 못되는 사이에 해방은 먼 과거의 일이 되었다. 미군정의 신한공사가 일제가 강탈했던 조선사람의 땅을 차지하고 농민들에게 소작료를 받아갔다. 모리배들을 동원해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내 식량사정이 극도로 나빠지고 쌀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온 나라에 ‘쌀을 달라’는 아우성이 메아리치는 가운데 강제적 식량공출은 도처에서 농민들과의 충돌을 일으키면서 농민들의 원한을 쌓아갔다.

사람들이 기대를 버리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 「미·소공위」가 공전되는 가운데, 미군정의 폭압적인 재식민지화는 멈추지 않는 기관차처럼 온 나라를 깔아뭉개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었다. 민주진영 언론들의 강제 폐간과 대대적인 검거선풍, 미군정의 지원을 받는 우익폭력집단들의 무자비한 테러와 폭력, 식민지교육정책을 위해 고안된 「국대안」이 사람들의 분노를 쌓아갔다.

온 나라를 뒤덮은 가난과 분노는 미군정이 일제 하수인들을 소환해 조직한 군정관리들과 군정경찰의 폭력적 탄압 속에서 봉기로 터져오른다. 「9월 총파업」과 대구 「10월인민항쟁」의 깃발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1946년은, 조국의 38도선 남반부를 강점한 미제가 「모스크바 3상회의결정」을 파탄내고 남조선을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미제의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로 재편하려는 기초를 다져나가기 시작했던 해였다.

미제는 남조선을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 즉 신식민지의 경제적 기초를 형성하기 위하여 일제가 조선민족으로부터 강탈한 토지를 다시 점령군 군정청의 이름으로 강탈했고, 일제가 조선민족의 경제를 파탄내고 착취와 수탈로써 차지한 각종 동산・부동산을 적산이라는 이름으로 군정청 적산관리청으로 끌어 모아 탈취하여 매판자본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46년은 미제가 조국의 남반부를 그들의 신식민지로 재편하려는 강도적 압제의 해였고, 이에 대한 남조선 민중의 새로운 저항을 고하는 새로운 민족해방의 시작의 해였던 것이다.」

선생은 1946년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선생은 중학생이 되어 험한 세상을 향해 첫 걸음을 내디딘다. 그것은 2학년 선배의 권유로 6명의 1학년생들이 모인 작은 독서회 모임이다. 당시의 중학교는 졸업하면 초급교사의 자격이 생기는 상급 교육기관이었다. 학생들의 연령도 다양해서 동급생의 모임이었지만 모두 선생보다 두어살 위의 학생들이었다. 모임은 학습과 함께 첫 벽보투쟁을 출발로 새 세상을 향한 노를 저어가기 시작한다.

체포와 고문을 견디고

한 주에 두 차례 하는 학습과, 거리에 구호를 써붙이는 벽보투쟁과, 장날 읍사무소 앞에서 시도하는 가두연설이 다음 해에 「밀양중학교 학생자치회」를 결성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자치회의 활동으로 전교생이 「메이데이 기념식」에 참가한 사건을 빌미로 선생은 퇴학을 당하고, ‘교장배척운동’의 투쟁수위를 올려 학교 밖으로 확장시키는 벽보투쟁 함화투쟁을 하다가 경찰에 잡혀 밀양경찰서 유치장에 갇힌다. 첫 번째 수감이다.

무지막지한 구타와 비행기 고문, 물고문이 뒤따랐다. 14살 아이에게 말이다. 「일제헌병경찰」이 조선사람에게 가했던 악랄한 고문을, 그 앞잡이들이 이번에는 「미제군정경찰」이 되어 14살 아이에게까지 악착하게 들이댄다. 하지만 선생은 18일 간의 그 고문을 모두 견디고 함께 일한 동료들을 끝까지 보호한 채 석방된다.

이 경험은 선생의 삶에 있어 중요한 결절점이었으리라. 고문은 인간을 육체적으로는 물론, 더욱 혹심하게는 정신을 파괴하는 악행이다. 그래서 고문을 견딘다는 것은 고통과 함께 공포와 싸우는 일이 된다. 사람은 흔히 고통보다도 공포에 굴복한다.

공포란 고통에 대한 예상과, 더 크게는 고립감으로부터 온다. 자신이 세상과, 또 사람들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은 공포를 무력화시키고 고통을 견디게 하는 힘으로 된다. 그것이 한 사람의 내면의 힘이고 사상의 힘이다. 그래서 고문을 견디는 것은 바로 파괴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이 되는 것이다.

선생은 그것을 견뎠다. 고문을 견디는 일에 대한 보상은 떳떳함이다. 사람의 내면에 있어 떳떳함보다 강한 힘은 없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것은 당사자에게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자긍심을 갖게한다. 혹독한 고문을 견디고 나온 열네살 소년에게, 잡혀가고 쫓겨다니면서도 굴하지 않는 할아버지의 삶을 일상으로 보며 자란 소년에게, 좌절이란 없다. 선생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않았지만, 이후 선생의 행로는 이러한 정황을 넉넉하게 짐작하도록 한다.

소년 선전대 일꾼으로

석방되어 나온 선생을 할매와 식구들이 모두 눈물로 맞아주지만, 함께 퇴학당한 동무들은 거의 다 부산, 마산으로 전학가고 할 일도 없어졌다. 짧은 공백의 시간이다. 하지만 선생에게는 공포도 좌절도 갈등도 없다. 처음으로 찾아간 대구의 그림같은 외갓집에서 딴 세상처럼 보낸 한 달도 도피가 아닌 재충전의 시간이다.

신문을 통해 임시정부수립을 놓고 결사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곧장 머리에 떠오른 것은 동지들과 할배다. 한가하게 보낸 시간을 자책하며 바쁜 마음으로 밀양에 돌아온 선생은 곧장 소년선전대 일꾼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7월27일, 「미・소공동위원회속개축하와 민주주의임시정부촉구를 위한 밀양군인민대회」에 운집한 십만에 달하는 밀양군민은, 당시 인민들이 무엇을 원하고 지지하는가를 선명하게 알려준다. 그것은 ‘자주독립’과 ‘토지개혁’과 ‘민주개혁’이다. 선생은 선전대원으로 대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지만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운동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검거와 테러와 대탄압의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남조선단독정부수립의 음모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한 손으론 미.소공위를 파탄내고 조선문제를 무도하게 유엔으로 끌고가면서, 또 한 손으론 애국세력에 대한 가일층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한다. 놈들이 잡으려고 혈안이 된 할아버지의 행방은 오리무중인 채, 필시 선생과 아버지에게 미칠 검거를 피해 온 식구가 대구 구지의 외가로 피신한다. 검거와 테러를 피해 달아나고 지하에 숨어든 애국세력의 겨울은 혹독했지만, 그 모든 탄압과 난관을 무릅쓰고 다음 싸움은 준비되고 있었다.

1948년

1948년이었다. 반만년을 두고 하나로 살아온 민족을 둘로 갈라버린 해, 이후 70년을 넘어 지속되는 나라의 정체성에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지어버린 해, 애국과 매국, 분단과 반분단의 판가리 혈전이 궤도에 오른 엄중한 해였다.

섣달 그믐날,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없는 가운데 식구들이 모여든다. 여러 할매와 할배, 아재와 아지매들이 신년제사를 준비하느라 왁작 웃음꽃이 피어난다. 연계소집에서의 마지막 제사였다. 도동할배는 조직이 무장할 시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독서회에서부터 동지가 되었던 강성호는 반분단의 문제가 민족지상의 과제로 대두되었음을 정리하고 연락방법을 약속한다.

“입학결정 31일 속래” 구지에서 강성호의 연락을 받은 선생은 밀양으로의 떠남을 준비한다. 구지가 피신의 장소이고 휴식의 장소라면, 밀양은 투쟁의 현장이고 조직원으로서의 임무가 기다리는 곳이다. 밀양으로 가는 길은 할배 할매에게로 가는 길이며 투쟁으로의 복귀이다. 아버지 어머니를 설득하고,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집안일을 거들고 동생들을 돌보며 선생은 가슴이 메어진다.

16세 소년 안재구는 자기가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2년 전 중학교 때의 활동이 어마지두에 벌어진 일이었다면 이제부터 가는 길은 결단과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길이라는 것을, 가족과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영별이 될지도 모르는 길이라는 것을, 이미 주변에 널려있는 숱한 죽음들 속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또한 선생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새 세상을 향한 길이라는 것을, 그것이 내 나라를 세우는 길이라는 것을, 그것이 내 가족과 내 고향,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또 그것이 할아버지에게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말이다.

비무장에서 무장으로

「2·7구국투쟁」의 신호가 올랐다. ‘단선단정 반대’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2·7구국투쟁」은 남로당과 민전이 주도한 준비된 투쟁이다. 「전평」 산하 30만 노동자가 전국적으로 일제히 총파업에 돌입하고, 지서습격과 무기탈취, 가두시위와 봉기,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전국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그것은 민족분단을 막으려는 필사적인 판가리 싸움의 시작이었고, 비무장에서 무장으로 전환하는 분기점이었으며, 야산대에서 장기적인 지구전으로 발전해 「제주4·3항쟁」으로 폭발하면서 조직되는 「남조선인민유격대」 빨치산의 출발점이었다.

밀양에서의 투쟁은, 본서경찰의 지원차단을 위해 도로에 함정을 설치하고, 초동면 오방동과 청도면 오산 경찰지서를 습격 무장해제 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선생은 이 봉기의 한 복판에서 다시금 체포되지만, 시위현장에서 검거된 수백명의 군중들 속에 섞여 기지를 발휘하여 빠져나온다. 삶과 죽음이 갈린 첫 번째 순간이다.

몰래 연계소집에 숨어들어 급하게 짐을 챙기는 선생에게 할매는 “무슨 세월이 이리도 모질꼬.” 한탄하며 주먹밥을 뭉쳐준다. 강성호가 남긴 쪽지에 따라 다시금 합류한 동지들 속에는 초동면 면책인 계음아재와 죽서할배, 월산할배도 있다. 그 동지들과 함께 수행한 종남산 정상에서의 봉화투쟁을 끝으로 하나의 싸움은 일단락되지만, 그것은 선생에게 있어 보다 깊이 조직적인 투쟁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무릉동에서

봉화투쟁을 마무리하고 동지들이 이제 헤어진다. 군당 방침에 따라 일부는 귀가하고, 일부는 야산대로 들어가고, 오랜 친구이자 둘도 없는 첫 동지였던 강성호는 「강동정치학원」으로 갔다. 선생은 새로운 동지들과 만나면서 조직이 부여하는 ‘신덕생’이라는 이름을 받아안는다. ‘하는 일마다 사람들에게 덕을 베푸는 일을 하자’는 뜻을 담은 그 이름을 받으면서 선생은 “이름값을 하도록 인민을 위해 살겠다”고 말한다. 선생은 그 다짐을 지켰다. 열여섯살의 어느 날, 스스로 했던 다짐을 평생 지켜왔던 사람, 선생이시다.

「무릉동 이야기」라는 전설을 품은 무릉동에서 선생은 산사람의 삶을 시작한다. 조선의용군에서 일제와 싸웠던 지도원 동지, 박철환 선생을 만나고 함께 훈련할 4명의 동료들이 도착했다. 무장투쟁의 간부가 되기 위한 훈련이다. 산길 34킬로미터를 6시간대로 달리기 위한 훈련과 유격대 생활에 필요한 여러 기술적 방법들을 배워나간다. 실탄없는 사격훈련으로 총기 다루는 법을 익히고, 사상이론학습과 함께 조직생활의 원칙과 의무들을 익혀나간다.

시간에 밀도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어마어마한 부피를 압축한 시간이었으리라. 두 달 반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바깥 세상은 「3·1절 봉기투쟁」으로 시작된 투쟁의 불씨가 제주 「4·3항쟁」의 불길로 타오르며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고, 해발 800미터, 하늘에 닿은 무릉동 산골짝에서는 능히 한 시대를 떠메고 나갈 새 사람이 태어나고 있었다. (… 다음 편에 계속)

 

필자 약력

서울에서 성장하고 학교 다님.
몇 가지 자영업을 전전하고,
산에 다니면서 글쓰기를 시작함.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다,
2015년 입농(入農)하여 농부가 됨.

2005년 암벽등반 수필집으로 등단
2005년 제13회 한국산악문학상 수상 (월간 「사람과 산」 주관)
2006년 중앙일보 산악칼럼 연재
2007년 월간 「사람과 산」 등반기 연재      
2013년 계간 「삶창」 밥 이야기 연재
2015년 (사)겨레하나 주관 ‘개성공단 사람들’ 독후감 공모전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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