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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09/08
    정신 질환은 없다.
    순수
  2. 2004/09/08
    길들이기
    순수
  3. 2004/09/08
    매너리즘?
    순수
  4. 2004/09/08
    악인 만들기(1)
    순수

정신 질환은 없다.

* 이 글은 미류님의 [발명/질병/배제]의 덧글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질환'이라는 말은 더욱 견고하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요? 제가 순수님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모든 '질환'-감기, 맹장염 등-은 허구라고 생각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질환' 혹은 '정신병'은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
참고로,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 등에 대해서 현대'의학'은 약물'치료'를 기본으로 놓고 있습니다.
저는 "부르"는 행위 자체를 "욕망"으로 봅니다. 정신질환으로 분류하고 부르는 바로 그 지점과 그 효과를 저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죠.

감기와 정신질환의 가장 큰 차이는 Naming 이전의 작동이 확연히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감기와 정신병을 유명론의 결과로 봅시다. 그럼 이 둘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감기는 "신체의 사건"이고, 정신질환은 "관계의 사건"입니다. 저는 후자가 명확하게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훨씬 섬세하게 "권력"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합니다.
그 차이 지점은 바로 "실현"에 의해 결정됩니다. 즉 "욕망"의 실현에 대한 작동이 바로 정신질환인데요, 신경증이라면 자아의 억압이겠고, 정신병이라면 자아의 해방(?)이겠죠. 여기서 문제는 자아와 주체, 타자로 돌아갑니다. 타자에 의해 생산된 주체에 의해 자아는 위치하게 되는데, 그 위치를 벗어나게 되면 "욕망"은 "실현"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을, 교환 체계를 벗어나는 것은 실현되지 않는 거죠. 여기서 방법은 두가지 입니다. 자아가 (시장에 편입되도록) 중재를 하거나, 자아가 이 둘을 교란하거나...(자기만의 유토피아를 만들고 자본으로부터 충분히 달아났다고 외치는 겁니다. 또는 자본가를 사살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거죠.)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 등은 후자에 속하는 건데요,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치료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환자의 작동 매커니즘에 약물 등을 가해서 저지하는 거죠. 저는 이게 전기충격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타자에 의해 실현의 문제, 실재계-상징계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죠. 모든 치료 과정은 타자에 의해 주체로 포섭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지인들 중에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데요, 굉장히 재밌는 사실은, 타자는 확고부동한 채 그들만 주체로 구성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 차이는 당연히 안정제 등의 약물이 차지하구요. 이건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과 별반 차이 없습니다. 타자를 배제하고 포섭하는 동일자의 폭력이죠.
타자가 정해놓은 위치를 고수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을 "병"으로 발명한다면 이것을 "생의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요? 의학은 이 모든 걸 포섭하고, 치료에 약물을 부여함으로써 또한 다시 이걸 포섭하는 재생산 조건을 생산하는 게 아닐까요? 개인을 주체로 포섭하기 위한 투쟁은 의학의 힘을 입어 더욱 가열차지고 있을 뿐입니다.
P.S. 글을 쓰고보니 푸코의 동일자-타자와 라캉의 타자-주체가 다른 때보다 심하게 뒤섞인 것 같네요.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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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기

* 이 글은 다섯병님의 [ ‘강남 CCTV’ 4일만에 첫 범인 검거]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우리는 프라이버시권을 조금씩 조금씩 다른 가치(그것은 범죄예방과 같이 때로는 공익적이다.)와 맞바꾸고 있다. 당장은 다른 공익적 가치가 더 커보이더라도 조금씩 프라이버시권을 포기해가다보면 우리는 투명한 사회에 살게되리라는 것은 전혀 과장된 얘기가 아니다.

프라이버시를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왜냐면 "나"와 그 외부를 가르는 경계를 만드는 작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거리에 있는 CCTV가 내 집을 비추지만 않는다면 내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발언한다고 해서 그의 프라이버시 영역 설정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거리는 공적 공간인데 왜 거기에 대해서 프라이버시를 이야기하는 것이냐"라고 하면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또 다시 생각하자. "범죄예방"은 "공익"에 속하는 것일까? CCTV가 예방한다는 범죄는 개인에게 속하므로 이 또한 다른 의미의 프라이버시 보장 시스템이 되는 것이 아닐까? (CCTV가 당신의 스토킹으로 인한 어려움을 해결합니다!) 과연 프라이버시의 경계와 공익의 경계는 어떻게 설정될까?
가끔 정부정책에 대해 비판할 때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비판을 하는데,
물론 그 비판이 적절할 때도 있겠지만 자칫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거리에 설치되는 CCTV에 반대하는 것은 돈만 들지 범죄예방의 효과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설사 효과가 있더라도 프라이버시권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 부분에서 고민을 풀 열쇠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바로 "효과"란 부분. 즉, CCTV가 우리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도식적인 말보다는 CCTV는 우리에게 "범죄예방"의 "효과"를 작동시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 가운데 CCTV에 관한 담론은 이중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하나는 CCTV를 통한 범죄예방의 효과, 또 하나는 CCTV 반대를 위한 범죄예방의 효과. CCTV 논쟁은 이 "효과"를 그대로 둔 채 함께 달려나가게 된다. 우리는 여전히 타자의 욕망 안에 있다.
CCTV가 판옵티콘이 아니다. 우리가 판옵티콘이라는 효과-속의-존재인 것이다. CCTV를 찬성하건 반대하건 우리는 감시 체제 안에 안주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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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리즘?

문득 내가 쓴 글을 내가 읽어보니,
너무 뻔하다.
맨날 똑같은 이야기만 쓰는 것 같고...
이제는 내가 스스로 질릴 것 같다.
이 답답함은 최근 전혀 사유-활동하고 있지 않은 내 모습의 반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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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만들기

* 이 글은 심순님의 [도그빌]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내가 느낀 이 영화의 미덕은
아무튼 악인들이 처단된다는 것이다.
"처단"이라는 단어에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 청산"이라는 무시무시한 프로젝트가 떠올라 포스팅을 한다.

이런 사고는 매우 편하다. "화씨 9/11"에서 처럼 억지가 됐건 뭐가 됐건 그 사람만 열심히 까면 되는 거다. 어찌됐든 악인을 축출하기 위해서 모든 희생을 각오하면 되는 거다. (그 결과는? "화씨 9/11"은 정말 엉성하다.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보여준 그 센스는 다 어디로 간 것인가?) 8.15 연설에서 노무현은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더라도 친일 청산을 해야 한다고 굳은 의지를 밝혔다. 괴물이 등장하면 건물을 부수건 누가 밟혀 죽어나가건 뭘 하건 울트라맨은 도심에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의의 용사의 숙명이다.
개인적으로는 "도그빌"과 "지구를 지켜라"는 동일한 방법으로 진행을 하고 엔딩을 처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으로 첨철된, 그래서 모순적 현실을 극명히 드러내고, 또한 "유토피아적 해법은 없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그런 인간들이 꿋꿋이 살아남아
약자들을 끝까지 탄압하니까 말이다.
"도그빌"은 강자와 약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평범한 사람들의 미시권력에 대한 이야기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렇게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우리네들이야 "왜 그럴까?"를 파고 들겠지만, 이 영화는 그 작동 자체를 덤덤히 보여주고 있다.
악인을 멸할 구세주는 재림하지 않는다.
단지, 악의 축을 상정하고 그를 멸망시킬 권력이 바뀌어갈 뿐이다.
아이들을 보는 부모가 보는 앞에서 죽이고, 울지 않으면 살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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