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기관지 <노동과 세계>에 보낸 청탁원고.
지난 9월 17일 민주노총 미조직특위+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마련한 워크숍
"민주노조 운동이 청년들과 만나는 길"에 대해 촌평한 글이다.
보내구 나서 그쪽서 따로 별 말 없는 걸로 보건대, 실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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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는 짧고, ‘글쎄’는 길다. 지난 달 민주노총, 아니 엄밀히 말해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특위와 한국비정규센터가 함께 ‘청년 조직화’ 워크숍을 가졌다는 소식에 스스로 보인 반응은, 돌이켜보건대 이랬다. 왜냐고? 좀 있어 보시라. 안 그래도 대체 왜 그런 건지 써 볼 참이니까. 쓸 참이라고 했지만, 길 것 없이 한방에, 이렇게 갈 수도 있다. ‘미심쩍으니까!’
이렇게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어 주길 바라는 하는 맘이야 사실, 뻑하면 ‘오해’라고 뭉개기 바쁜 이명박 대통령 뺨을 후려치고도 남을 정도다. 헌데 진짜 이러고 말면 스스로도 미심쩍은 게, 왠놈의 국외자가 흘린 냉소로 치부할까 싶어 그렇다. 달리 보면 주류/비판 진영할 것 없이 만연한 바, 당치 않은 허세로 요행이나 바라는 이른바 ‘한방주의’에 본의 아니게 일조하는 건가도 싶고. 그럼, 지면 제약상 ‘호오’한 이유로서 워크숍의 취지를 먼저 짚고, 그와는 별개로(아니, 어쩌면 그 덕에) 떠오른 몇 가지 질문들을 ‘글쎄’ 차원에서 던져보는 것으로 갈음해 볼까 한다.
이른바 민주노조운동이 (이런 뭉뚱그림이 좀 거슬린다 해도) ‘청년’들과 만나는 길을 터보자 했다. 만나는 일 자체야 하등 토달 게 없다. 에둘러서 만나자고 한 거지, 내심 ‘통’했으면 좋겠다는 문제의식까지 나름 갖췄다. 특히 실업 여부나 취업의 질을 막론하고 자본의 욕망만큼 출렁대는 불안의 너울에 휘둘리기 십상인 오늘날, 이 따위 삶의 조건에서 빠져나올 ‘작당모의’를 당사자인 청년들과 함께 해보겠다는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물론, 듣기에는 일단 그렇다는 얘기다. 민주노조운동이야 청년들과 무려 통하고 싶다 치고, 청년들은 어떨까? 계속 만나고 싶어 할까? 행여, 이게 다 반공 이데올로기와 그 변주들의 내면화, 조중동 류가 일삼는 악의적 왜곡 탓이라고 둘러대진 말자. 일정 정도 분명 그렇겠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역시 분명하니까. 길트기가 당연히 집체동원형 삽질이 아닌 한, 기존 활동가와 청년들 간에 형성될 ‘연합의 힘’은 그저 물리적 산술합일 리 없다. 연합이란 공통된 실천감각을 상호되먹임하는 과정으로, 바로 이런 연합이 이뤄질 때 길트기는 삶의 불안을 잠재우는 긍정적 ‘문화형성의 정치’가 되는 셈일 게다. 민주노조운동은 과연 스스로 이런 정치의 당사자로 거듭날 수 있을까? 이런 정치를 ‘잔여’적인 것으로 여기는 조직적 관성, 청년들을 상대로 연대 아닌 하대의 문화가 공공연한 일상문화와는 단절할 수 있을까?
좀더 근본적으로, 스스로든 활동가들과의 연합으로든 집단적 조직화가 필요해졌다 할 때, 그 연합 경로가 왜 꼭 ‘민주노조’라야 할까? 똑같이 탁자라 불려도 쓰임새나 제작방식은 사용당사자의 필요나 감성에 따라 각양각색 아닌가? 조직화도 이런 발상이 필요한 건 아닐까? 더구나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집단적 대응/조직화 필요와는 별개로, 적어도 ‘민주노조’식 조직화가 사실상 정세적으로 유효성을 다했다고들 한 지 오래인 마당에 말이다. 우리,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진정한 힘과 응집력은 어쩌면, 무작정 하나 되고 보는 데서가 아니라, 상이한 조직화 형태들이 ‘생성하는 차이들의 네트워크’를 이루는 데서 비로소 형성되는 것 아닐까?
이런 의문들이, 워크샵 취지에 일부 공감하나 크게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