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조만간 장군으로 불릴 모양이다. 엊그제부로 의거 1백주년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자격’을 두고 나오는 얘기다. 아마, ‘민족민주’ 운동 계열이 힘겹게 조성해온 정치적 지형과 이젠 G20 그룹에 든다며 콧구멍 벌름댈 만큼 ‘발전’했다는 대한민국의 모호한 위상이 일정하게 상호수렴하면서 빚어진 정세 효과가 아닐까 싶다.

 

올해 초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인 이태진씨가 <한국경제>에서 낸 목소리는 그 단적인 예다. 그의 주장인즉슨, 안중근 선생은 한낱 의사가 아니라 (사실상 애국혼에 불타는 ‘정규군’으로서 이토를 사살했으므로) 장군이며, 그의 유고 <동양평화론>은 21세기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론을 선취한 것으로 재평가받아야 한다는 거다. 26일부터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이틀 일정으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즈음해 <매일경제>와 한 인터뷰에선 아무래도 후자 쪽에 단단히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런 그에게, 안중근은 “매우 실용적인” 견지에서 대한독립의 미래상을 앞당겨 보여준 장군이자 “대사상가”다.

 

이런 생각이 아전인수성 구라인지, 또는 생각대로 하면된다는 SK텔레콤형 과대망상인지는 일단 제쳐두자. 다만, 그가 식민사관 타파를 금과옥조 삼아 고종을 고독한 근대 개명군주로, 대한제국은 나름대로 근대화에 올인한 입헌전제국가로 ‘바로 보려’ 분투해온 왕당파 지식인 겸 이데올로그였다는 점만큼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기억투쟁’에 관한 한, 그는 왕당파-국사학자로서 할 일을, 그것도 알아서 하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중요한 건 안중근이라는 역사적 행위자를, 또 1909년 하얼빈에서 그가 벌인 사건을 ‘좌파적 시각’에선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기억할 것이냔 점일 테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궁극적으로 이태진 류의 시각·방법 따위와 견해차 운운해 가며 어설프게 상호존중할 여지가 아예 없도록 해야겠기에 그렇다.

 

이와 관련해, 지난 주 토요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과 교수의 칼럼이 그나마 두고두고 곱씹어볼 만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민족민주 운동 기조의 강화 못잖게 이 기조와의 인식론적 단절 움직임도 아울러 촉발한 ‘1980년’을 겪어 논 사람이라 그런가. 어쨌거나 칼럼에선 안중근의 속내를 침소봉대가 아닌 총체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으려 할 때면 “어찌할 수 없이 부대끼게 되는 질문 몇 가지”를 잘 던지고 있다. 여기서는 칼럼 내용 중 두 가지를 실마리로 재조명의 끈을 좀더 팽팽하게 당겨볼까 한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 나로선, “엄격한 논증”과 ‘균형잡힌’ 서술을 의식하느라 애써 둥글게 처리한 듯한 대목에서 부러 각을 세워보자는 거다.

 

우선, 동학과 연계한 농민들에 대해 “좀도둑”이라 부른 것도 모자라 토벌까지 나섰던 안중근에게, ‘대한독립’이 뜻하는 바는 과연 뭐였을까? 적어도 조선의 ‘문명개화’였던 건 확실하다. 즉, 이씨조선이 어여 근대국가란 조직으로 재편돼 조공체제에서 사실상 탈퇴하고 역사적 자본주의 문명(혹은 국가간체제)의 정회원으로 신규가입하는 일이야말로, 안중근식 대한독립의 경로였으리라는 거다. 입헌군주정이 됐든, 입헌전제정이 됐든 말이다.

 

물론 말이 좋아 정회원 가입이지, 이 와중에 엄청치솟게 마련인 식민주의적 주변화 압력을 정작 누가, 어떻게 떠안느냐는 문제는 흘러간 옛일이 아니라 엄연히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하물며 이런 압력을 견디다 못해 봉기한 동학농민들을 손수 손봐줬던 안중근에게, 이 문제는 ‘대한독립’ 만세라는 장엄한 대의에 가려 아예 안 보였거나 보였어도 치워야 할 애물쯤이었던 것도 확실하다. 그의 눈에 비도들의 패악질로나 보였던 갑오농민전쟁은 따지고 보면, 그가 좆는 ‘대한독립’형 근대화 노선이 스스로 빚어낸 모순과 내적 과부하가 그야말로 폭발한 사건이었다. 근대화의 토대인 본원적 축적 과정에서 농민-민중들에 대한 쥐어짜기도 한층 더 악랄해졌으니까.

 

사정이 이렇건만, 안중근은 갑오년의 농민-민중 반란을외려 토벌했다. 근왕파든 문벌관료파든, 조공체제 아래서 누려온 특권적 지위를 성공적으로 쇄신·유지할 수만 있다면 ‘주권위임형 근대화’ 노선도 마다 않을 권세가들은 내버려 둔 채 말이다. 얄궂게도, 치안의 임계선을 벗어난 반란으로 계급적 공포에 휩싸인 이들이 불러들인 청국 정부군, 불청객이었다지만 개명권세가들과 비슷한 걱정으로 들이닥친 일본 정부군과 함께였다. 그 당시 안중근과 조선의 개명권세가들, 심지어 청국·일본 정부 사이의 정치적 거리가 실은 꽤나 가까웠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가 말했다는 동양평화가 과연 이처럼 공통된 (아마도 계급적인) 이해관계 아래 지속돼야 하는 ‘안정된 통치술’ 이상을 의미할 수 있을까?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해도, 앞서 드러난 대한독립의 내적 모순을 ‘완충’해줄 분업체제적 지역 범주 정도일 것이다.

 

물론, 그렇게 공통된 이해가 있다 해서 그만큼 떨어진 거리를 무시해도 좋다는 건 아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직접 처단한 사건도 바로 그 차이에서 기인했을 테니까. 실제로 ‘견리사의’를 중시했다는 안중근에게, 대한제국형 근대화 노선을 접고 보호령형 근대화 노선에 무게를 싣는 조선 내 '견의사리'파, 그리고 이들 을끌어주는 '외세'는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을 성 싶다. 중요한 건, 당시 정세를 목불인견으로 여긴 거야 그렇다 치고, 그럼에도 봐야 할 걸 그가 봤느냐는 점일 게다. 이토를 죽인 게 그에겐 의거였을지언정, 적어도 '우리'에게 쾌거였을진 의문이란 얘기기도 하다.

 

왜? 이를테면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을 처형하는 데 그가 일본정부 측 인사들보다 더 눈에 불을 켰던 조선인들 같은 부류여서? 물론 이게 다는 아니다. 안중근의 농민-대중관이 오늘날 계승은 커녕 철저한 극복 대상이라 쳐도, 그의 의거 자체에 긍정적인 대목이 있다면 그리 평가해야 할 거다. 하지만 유갑스럽게도, 이마저 있다면 과연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적어도 그의 의거를 이후의 지정학적 재편 효과(=근대 일본령 조선의 탄생이)라는 차원에서 토론에 부쳐야 한다고 보는 쪽이다. 그저 ‘침략원흉’을 죽였으니 쪼아~ 식으로 볼 수만은 없다는 거다. 이해영 교수가 한 진술을 빌어 이렇게 질문해 보자. 안중근의 의거가 “그 시대 진보적 지식인 일반”의 “한계를 핑계삼아 친일로 우회하지 않”는 길이었다고는 하나, 그가 과연 그 한계를 “정면돌파하면서 병합 이후 독립운동의 옳은 방향을 제시”했다고까지 할 수 있을까?

 

먼저, 이토 히로부미는 ‘병합파’였을까? 그러니까, 조선 혹은 대한제국이 일본 영토로 복속되길 바랬냐는 거지. 그렇지 않다. 당시 조선반도가 일본에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해도, 이 반도와 어떻게 관계맺을지를 놓고 일본에선 크게 두 파가 경합을 벌였다. 이 중 이토는 말하자면 ‘독립지원파’로, 조선반도의 ‘독립’을 지원, 육성해 일본의 정치경제적 영향권 아래서 사실상 위성국가로 기능할 수 있게 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 반도를 일본 영토로 합쳐 덩치를 키워야 아무래도 안심이라는 논리를 펼친 병합파는, 외려 이토의 정치적 라이벌인 야마카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같은 이들이었다. ‘침략원흉’이라는, 이토에 곧잘 따라붙는 다소평면적인 이미지는 실은 야마카타 같은 병합파에 더 어울렸던 셈이다. 물론, 이토파는 가뜩이나 메이지 근대화의 내정도 추스르기만만치 않은데, 병합은 재정·경제적으로나 ‘국민’ 형성과 결부된 이데올로기적 통합의 측면에서나 부담이 크다고 봤다.

 

요컨대 당시 이토파와 야마가타파는 조선반도를 똘똘한 사냥개로 만들 거냐, 아니면 아예 통째로 삼켜 근대 일본의 뼈와 근육으로 만들 거냐를 놓고 나름 경합을 벌이고 있었던 거다. 피터 듀스 같은 근대일본사 연구자는 이런 구도가 ‘방어적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생겼다고 본다. 19세기 후반 경세계경제 공황으로 구미권 국가들의 대동아시아 식민-제국주의 전략이 상대적 소강 국면에 접어들자, 일본에서 이 국면을 ‘국력신장’의 호기로 삼고 대외정책상의 자율성을 발휘한 결과라는 것이다(이 ‘자율성’이란 것도 물론, 이 지역에서 잠시나마 발을 뺀 구미권 열강의 공모와 후견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했던 거지만).

 

이러한 당시 일본 내 정치 지형과 동아시아 식민-제국주의의 지정학을 염두에 둔다면, 1909년의 사건은 그 ‘의로움’과는 별개로 매우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연성권력’으로 지역 헤게모니의 공고화를 노린 것이었을지언정, 반도의 ‘독립’을 지원·후견하겠다는 구상이 있었던 이토를 안중근은 제거했으니. 야마카타나 그 지지파도 아니고 말이다. 안중근으로선 이토가 조선반도에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간섭’하는 게 응징의 이유가 되기에 족했겠지만, 아마 이토로선 그러지 않으면 대한제국을 방어적 제국주의 전략에 적합한 ‘독립국’으로 써먹기란 난망하리라는 판단이 있었지 싶다.

 

이렇듯 좀더 폭넓게 보면, 이토의 죽음 ‘덕분에’ 대반도 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균형이 무너지고 이내 병합파가 득세하면서, 결과적으로 바로 이듬해 있을 한일병합에 한층 더 무게가 실린 걸 부정하긴 어렵지 싶다. 바꿔 말하면, 일본제국 내의 독립-지원파는 물론이고 대한제국의 ‘(원조형)독립’ 노선파들의 입지까지 좁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으리라는 얘기기도 하다. 설사 그 노선이 안중근이 생각하는 독립 구상과는 꽤 달랐다고 해도말이다. 자 그럼, 그가 연루된 사건이 유일하진 않더라도 이같은 양상에 일정하게 영향을 끼쳤다 했을 때, 안중근에 대한 온당하고도 냉정한 평가는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 그래도 메이지 일본의 ‘뇌수’ 이토를 쏴 죽였으니, (그가 애국 마인드로 충만했을지언정, ‘민족’의식 같은 게 있었는진 매우 의심스럽지만 아무튼) ‘민족혼’을 만방에 떨쳤으니 일단 옳았다고 쇼부치면 되는 걸까?

 

그래서 결론은? 한일병합이 이뤄진 게 실은 다 안중근 때문이라는 걸까? 물론 아니다. 설마, 한일병합을 둘러싼 동아시아 근대의 지정학과 정치경제를 달랑 이토의 돌연한 죽음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 린 없겠다. 다만, 이토를 (잘) 죽였다는 이유만으로 안중근이 했던 생각의 논리와 방법, 상황판단을 긍정 일변도로 오늘에 되살려서야 되겠냐는 거다. 그 바람에, 같은 동아시아 제국주의의 지정학이라 해도 1909년의 사건 여하에 따라 그 진행 양상과 정세적 맥락은 생각보다 꽤 유동적이었으리라는 정작 중요한 사실이 망각돼선 안 되겠다는 거지.

 

이러나 저러나 제국주의였던 거 아니냐, 그런 제국주의의 심장을 쐈으니 잘 한 거 아니냐고 할 순 없다. 그런 식이면 현존 자본주의 세계의 상징 미국 쌍둥이빌딩을 무너뜨렸던 오사마 빈 라덴도 ‘구세의 영웅’이 돼야 할 텐데, 필시 안중근을 숭앙하자는 이들 치고 빈 라덴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진 않을 게다. 뭐 그거야, 안중근은 현존 체제 질서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알 카에다는 그 정치적 구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체제 질서 ‘바깥’을 겨냥하기 때문일 텐데.

 

바로 그래서다. 아무리 1백주년이라 해도 그렇지, 안중근 담론이 소위 보수/진보 진영 할것없이 애국영웅 담론 아니면 안 되기라도 하는 양, 그냥 띄워주기 일색인 게 영 거북하고 괴롭다. 정작 그 애국이 뭐였는지에 관해선 커다랗게 빵꾸가 난 채, 아전인수의 난장판이 되고 있건만 말이다. 이건 뭐, 대한애국부흥회도 아니고. 지금 같은 페이스라면 대기권 돌파도 머지않았다 싶은데, 그럴 만해서 그런 거라면 모를까, 부담백배의 화장발 탓에 저러다 쌩얼마저 상하잖을까 걱정될 정도다. 심지어, 나로호 발사 실패에 대한 아쉬움을 이런 식으로 메울 참인 건가도 싶고.

 

어쨌거나 성찰 없는 기억은 망각이나 다름없다는 데 유념하면서, 안중근의 적절한 자리매김에 필요한 성찰의 준거와 문법을 모색해갈 필요가 있겠다. 내가 보기에 그건, 그간 누락됐거나 묻혀 있었던 역사적 경험의 씨줄과 날줄로 19세기 말~20세기 초 동아시아 근대(화)에 대한 대안적인 역사 서사를 잣는 가운데 가시화할 듯하다.

 

이와 관련, 1998년에 나온 책으로, 올해 초 번역돼 나온 재일사학자 조경달 선생의 역저 <이단의 농민반란: 동학과 갑오농민전쟁, 그리고 조선 민중의 내셔날리즘>(역비, 박맹수 옮김)이 던지는 문제설정은 실로 반갑고 눈여겨볼 만하다. “애당초 근대 이행기의 민중이 근대지향적이라는 논의는 세계사를 통해 실증할 수 없”다는 사실이, 프랑스혁명기 농민반란이 반봉건인 동시에 반자본주의 지향을 가졌음을 보여준 르페브르 이래 상식이 됐음을 상기하면서 그는“민중을 자율적 존재로 복권시키려는 시각에서” “문명개화·자유민권운동기의 민중운동과 사상을 문명개화와 자유민권으로부터 떼어내어 자율적인 것으로” 보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갑오농민전쟁은 (예컨대 안중근 같이) “틀림없이 근대적이었”던 개화파들과 달리 “농민적 토지소유를 요구했던 소농·빈농·반프로층”의 반근대적 지향이 두드러지는데, “본원적 축적 과정을 수반하는 근대화 과정이 농민에게는 일면 비참한 것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면 근대적 변혁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반근대적 변혁의 범주에 속하는 운동이었다고 규정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조 선생에 따르면, “과거에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목가적 공동체에 대한 환상을 유토피아 사상으로 발전시켜가면서 현실의 구 권력(조공체제)과 새로운 조류(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저항하려 한 것이” 갑오농민운동/전쟁과 같은 “근대 이행기 일반적인 농민운동의 모습”으로, 그것은 “미발의 계기라고도 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미발의 계기"가 지녔던 잠재적이고 복합적인 맥락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물론, 궁극적으로 지금 여기서 궁리해야 할 "다른 삶-세계"(들)의 잠재성을 현실화하려는 시도/전망과 맞닿게 마련일 테다.

 

결국 조 선생은 갑오농민전쟁의 경험을 실마리 삼아 “민중의 입장에서 근대=국민국가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던가 하는 의문을 조선(혹은 동아시아) 근대사의 맥락에서도 제기해야” 한다고 본다. 오랜 분단체제가 “자칫하면 국민국가를 이상화할 수도 있”지만,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조선/한반도는 “유토피아로서의 국가의 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민중과 국가의 관계를 다시금 냉정히 바라보는 지평에 설 수 있”다는 견해도 밝히면서 말이다.

 

요컨대, 근대-계몽-애국-문명개화를 조립식 패키지로 하는 지식인-엘리트 중심의 민족주의 서사와 자의식을 상대화·역사화하는 가운데, 역사적 자본주의하 “민족주의 이전의 민족”이나 인민들의 자율적 역동성을 효과적으로 포착하고 서사화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분석 시각’을 새로이 정초하자는 것. 부풀 대로 부풀어오른 최근 담론 흐름에 견주자면야 상당한 ‘왜소화’가 불가피하겠지만, 뭐 어쩌겠나. 그게 '애국개화파' 안중근이란 역사적 행위자의 적절한 자리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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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8 23:33 2009/10/28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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