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가 되는 삶들>(새물결, 지그문트 바우만 쓰고 정일준 옮김)이란 책에 대해선

 지난 해 가을에 이미 소개한 바 있는데, 아래 글은 올해 5월 중순쯤인가,

 서울서부비정규노동센터(준) 회원들과 함께 읽고서 했던 세미나의 후기 되겠다.

  

소개글과 어느 정도 중복을 피할 수야 없겠지만,

그건 그만큼 거듭 강조하고프다는 얘기이기도 하겠고.
달리 말하면, 앞으로 우리가 원튼 원치 않든 감안해야 할 국내외 정세와 관련해

이 책에서 유용하게 건질 만한 건 뭔지 위주로 정리한다고 했다는 얘기이기도 하겠고.

올 초인가부터 진행중인 이른바 한국 사회체체 논쟁과 관련해서도
음미해야 할 구석들이 많다는 생각여서이기도 하겠고.
당장 따로 뭔가 작정하고 새로 쓸 여유가 없어서이기도 하겠고.ㅠ


 

 

***

 

<개그콘서트>에서 요즘 한창 뜨고 있는 꼭지가 “분장실의 강선생님”이라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한 인기 하는 꼭지가 있죠. “독한 놈들”이란 꼭진데요. ‘양아’풍 친구들 셋이 한 묶음이 돼, 상식을 뒤집는 “독설”로 웃음을 주는 코너입니다. 잘 모르시거나, 누구마냥 티비와는 아예 담쌓고 있는 분들ㅋ을 위해 한 대목 소개하잠 이렇습니다.

 

난 본격적으로, 지금 티비를 보고 있는 아이들의 동심 다~ 깰 거야.

잘 들어. 니들 무술학원에 다니면 관장님이 이런 얘기 할 거야.

 

“우리 무술학원은 싸움보다 예.의.를 가르치는 곳이다. 알겠나?”

 

여기서 말하는 예의, 인사 아니다, 학원비다. (나머지 둘이서 한목소리로 후렴하듯, 독해~)

학원비 안 내면 인사도 안 받아줘. (독해~)

선생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제 날짜에 학원비 내는 거야. (독해~)

 

어떻게, 독한가요? ㅋ

 

 

어쨌거나 지그문트 바우만 할배가 쓴 <쓰레기가 되는 삶들>을 (다시) 읽다 보니, 그 얼개상 “독한 놈들” 코너가 취한 방식과 꼭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현존 사회를 지속, 옹호하려 설레발치는 부류들한테서 독하단 힐난 듣는 거야 두말함 잔소리겠지만, 그런 그들에 맞서 현존 사회를 뿌리부터 바꾸겠다는 자칭 ‘진보-좌파’들한테도 독하기로만 치면 별다르지 않겠구나 싶었달까요.

 

단순히 상식을 뒤집는 것 정도면야, 이렇게까지 독하다곤 안 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바우만 할배 얘기가 진짜 독한 건, ‘우리’가 이른바 ‘문제의 뿌리’라 간주해온 것들이 실은 실제 뿌리에서 자란 (잔)가지일지 모른다는 점을 그야말로 거침없이 환기하고 있어서겠다 싶어섭니다.

 

물론 문제 해결의 열쇠가 “상식의 회복”에 있다고 믿는 쪽에서 볼 땐, 얘길 왜, 뭐 하자고 이렇게까지 밀고 가야 하는지 갸우뚱할 수 있을 거예요. 심지어 이른바 ‘좌파적 상식’이란 이름으로 이제껏 ‘노동자’들에게 지적 무기의 반열에 오른 앎들마저 그 존립근거를 집요하게 캐묻고 있으니, 꽤 거북하다 못해 그 저의가 궁금해지기도 할 테구요. 워낙에 ‘포스트모던’ 사회이론가로 분류됐던 터라, 혹자는 고작해야 반체제에 필요한 ‘대오/전열’을 흐트러뜨리려는 ‘지적 이중간첩’이란 딱지를 붙일라나요. 실제로야 어떻든 간에 말이죠.ㅋㅋ

 

하지만 적어도 제가 보기에 이런 거북함 내지 의아함을 자아내는 바우만 옹의 논의는, 의외로 간단한 물음에 대한 진중한 답변 혹은 성찰이라 봐요. 그게 뭐냐면,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며, 대체 언제적부터 이렇게 살아온 거냐는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지에 대해서도요.

 

이 책의 부제인 “모더니티/근대성과 그 추방자들”이란 구절이 뜻하는 바를, 앞서 던진 물음과 엮어 좀더 구체화해보죠. (‘모더니티/근대성’이란 개념어에 일단 부담백배일지 모르겠으나, 내용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표현이 낯설어 그런 거지 싶습니다.ㅋ)

 

저 구절은 뭔 뜻이냐 그럼? 그러니까, ‘세계화 혹은 진보’로 인류 대다수를 구원하겠노라 했던 근대화된 세상이, 그 첨단을 향할수록 어째 인류 대다수를 ‘헐벗음’의 막장으로 이끌고 있다는 겁니다. 자본주의적인 생산과 소비의 무한자유를 떠받치는 극심하고도 광범한 불평등 속에 비정규/불안정 노동자, (청년)실업자, 이주(노동)자, 철거민, 탈농화한 난민이라 이름붙은 ‘추방자’들을 (종종 ‘테러리스트’로 변질될 수 있다는 주의사항까지 친절히 덧붙여) 양산하면서요.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세상이 자본주의-근대화로 재미가 쏠쏠했거나 앞으로도 그러길 원하는 강자들의 이해에 따라 애초 어떻게 설계됐고 나아가 새로이 ‘재개발’돼려는 참인지, 그 와중에 우리네 삶은 어떻게 볼모잡혔다 결국 재활용마저 곤란한 쓰레기로 ‘팽’당할 참에 있는지를, 꽤나 독하게 다룬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바우만의 얘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건, 이런 근대적 추방자들이 역사적 자본주의 발전의 ‘부수적 피해자’ 내지 ‘예외 상태’가 아니라는 데 있어요.

 

(애초부터 글로벌 스케일로 벌어지는)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하여 ‘통합과 배제의 변증법’이라는 국가통치술상의 왕복운동 속에 지리적 재편성을 만성적으로 겪어야 하는 사회적 과잉인구/추방자들이란, 자본주의적 삶과 이를 조직화하는 독특한 설계원리로서 근대성을 떠받치는 ‘정상적’ 조건이라는 거죠. 행복한 소비(실은 낭비)의 노예들이 되어 과시적 소비의 과잉에 탐닉하는 맞은 편에서, 누리는 것이라곤 오로지 결핍과 헐벗음의 과잉일 뿐인 (한때나마 자본주의 문명(화)의 멤버십을 가질 수도 있었던) “쓰레기”들이 넘쳐나는 어처구니 없는 모순이 오늘날 우리 눈앞에 공공연한 건 그래섭니다.

 

요컨대, “쓰레기가 되는 삶”들은 많으니까 심각하고, 적으니까 사소하다는 식으로 치부되고 말, 그저 숫적이고 양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죠. 끊임없는 자본축적에 대한 완곡어법으로서 ‘경제발전’이 요구하는 특정하면서도 특이한 사회적 관계로부터, 그 관계 자체의 필요가 잉태한 인구학적 통제 혹은 편성의 문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성이란 역사적 자본주의가 생산해온 쓰레기의 처리가 좀더 효과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뤄지는 데 필요한 사회적 설계도란 무엇인가에 관한 기획으로, 그만큼 어떤 보편적 표준이긴커녕 애초부터 정치적인 긴장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죠. ‘문제는 경제’라는 걸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정치’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는 걸 테고요.

 

바우만은 특히 경제발전의 내적 계기로써 지난 30여년 동안 성가를 높였던 ‘세계화/지구화’는, 그 과정상의 ‘시행착오’가 아니라 전적인 성공 탓으로 근대화된 세계에 파국적인 도전을 초래했다고 해요. 왜냐. “근대화의 전지구적 확산과 그로 인한 근대적 생활 양식의 세계적 보급”으로 “근대화한 지역에서 배출되는 잉여 쓰레기-근대적 생활방식이 점점 더 대규모로 생산할 수밖에 없었던-를 정기적으로 때맞춰 비우고 청소하는 데 활용되던 배출구의 봉쇄”가 현실화됐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사회적 봉쇄 상태가 조장하는 불안에 기초해 “국가 사명의 재규정”이 이뤄지는데요. 한마디로 말해, ‘국민국가에서 요새국가로’ 전환하는 겁니다.

 

쓰레기가 워낙에 넘쳐나다 보니, 이제 재활용의 여지에 대한 고려는 낭비를 조장하는 발상으로 공격받습니다. 이는 “거의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점증하고 있는 안전에 대한 우려”의 발로이기도 한데요. 쓰레기 산업이 재활용이 아니라 “철저히 밀폐된 용기에 밀봉해” “‘생분해’와 부패를 가속화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건 이 때문입니다. 이때, “‘생분해’와 부패”가 구체적으로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한편으로(근까, 대체로 근대 세계체제의 중심부와 반주변부 지역에서) 그것은, 쓰레기 유출/재활용에 방점을 찍던 국민국가 형태가 더는 지속불가능해졌음을 뜻합니다. “국내전선에서는 억압과 군사화 수준을 높이면서 지구적, 초국적 기업의 이익은 갈수록 더 많이 보호”하는 한편 “사회 문제들은 점점 더 범죄화되는” “요새국가”로의 전환은 그래서 이뤄지죠. “복지로부터 형벌 양식으로”의 현저한 중심이동이 일어난다고 할까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 현 이명박 정부의 ‘폭주’를 이른바 박정희 시대로의 회귀/퇴행으로만 보는 건 좋게 봐도 부분적으로 타당하고, 냉정히 따지면 현 정세의 새로움을 놓치는 분석적 게으름의 소치일 공산이 큽니다. 외려 근대국가 체제에 보편적인 제도적 본능의 발현이자 현재 진행, 강화중인 통치양식 일반의 '기능적 동조화' 과정의 일환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동일한 선율/코드에 맞춰 ‘하나된’ 율동을 선보이는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선수들처럼요. 이 율동 자체가 새로운 건 물론 아니지만 그럼에도 새로움을 말할 수 있다면 그건, 그 통치 양상이 영토적 경계나 지리적 거리, 지정학적 위상을 뛰어넘어 갈수록 ‘대동소이’해지고 있다는 점일 듯합니다.

 

다른 한편으로(즉, 대체로 근대 세계체제의 주변부 지역에서), 지구적 근대화가 “자기 꼬리를 먹고 사는 뱀”으로서 그나마 “꼬리와 위장 사이의 거리가 뱀의 생존 기회를 위협할 정도로 짧아지고, 즐기기만 하다가는 자기를 파괴하고 말 것이라는 전망이 명백”해짐에 따라 쓰레기 처리 방식은 ‘비공식’ 산업의 형태를 띠며 한층 더 잔혹한 양상을 보입니다. “부족간 전쟁과 학살, 그리고 부지런히 상대편 병사들을 죽이면서도 그 과정에서 ‘잉여 인구’를 흡수, 소멸시키는 ‘게릴라군’의 확산”과 더불어 주변부 국가에서 “유일하게 번창하는” 비공식 쓰레기 산업은, “‘근대성의 후발 주자들’이 강요에 의해 또는 자의로 시행하는 ‘전지구적 문제에 대한 지역적 해결책’ 가운데 하나가 되고요.

 

*

 

혹자한테서는 다 좋은데, 어떤 실천적 시사점을 얻기엔 논의가 지나치게 방만하고 너무 ‘근본적’이어서 별로 건질 게 없다는 불평이 나올 법도 합니다. 어쩌면 그건 이 책이 이른바 ‘진보-좌파’로서 옳다고 믿었던 것들, 스스로 ‘현실적으로 타당하다’고 간주했던 원칙/전술/전략들이 과연 얼마나 유효한 건지를, 꽤나 ‘불편한 진실’과 분석을 통해 묻고 있기 때문일 듯도 싶은데요.

 

기회 있을 때마다 하는 얘기지만, 제 생각은 그래요. 우리에게 그간 정작 부족했던 건, 특정한 답들이 아니라 근본적인 물음 아녔냐는 거죠. 좋든 싫든 지금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한편으론 사회민주주의적 진전 혹은 민주화에 따른 ‘일정한 성취’로 인해, 다른 한편으론 그 성취에 대한 체계적 반격으로서 일어난) 그같은 변화가 빚어낸 ‘단절와 연속’ 속에서 우리에겐 어떤 실천적 갱신과 확장이 필요하냐는 물음 말입니다.

 

이 물음과 맞닿은 ‘이론적 지체’가 꽤 오래 됐다고 보는 저로선, 이 책이 독자에게 가져다줄 불편함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한 번쯤, 아니 어쩌면 몇 번이고 치러야 할 ‘몸살’에 가깝잖나 싶어요. 한때(1990년대 초중반) 회자됐던 <껍데기를 벗고서>란 책제목이 암시했던 바, 그 ‘껍데기 벗기’가 한 번으로 족한 줄로만 알지 않는다면 말이죠.^^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펼치는 바우만의 이야기는, 이를테면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다룬 문제틀을 개정-증보한 것으로, “오늘날 근대국가(=국가간 체제)란 과연 무엇에 쓰는 물건이며, 여기에 어떤 식으로 개입해야 하느냐”에 관한 예리한 분석과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통찰들로 넘쳐난다고 보는 쪽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따옴표 친 질문을 무난한(그래서 무척이나 안이해 보이는) 답변으로 더는 뭉갤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해야 할 테지만요.

 

그렇더라도 논의 자체가 워낙에 ‘총체적’이라고 할 정도로 섬세하고 넓은 접촉면을 이루고 있는 만큼, 이 책의 가치는 미시구조적/거시구조적 층위를 떠나 독자가 두려는 무게중심이 어디냐에 따라 각양각색의 빛깔을 띨 듯싶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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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0 04:07 2009/11/20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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