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씨가 어제 일본대지진 피해자를 위한 모금공연에서 '서시'를 불렀다고 쌍욕 날리는 이들이 꽤 많은 모양. 조씨한텐 도무지 "역사의식"이 탑재돼 있지 못하다나. 조영남씨가 뭘 하든 어설픈 데다, 심지어 그 어설픔을 개성으로 착각하는 난감한 꼰대인 건 나도 십분, 익히 알고 있다. 허나 그렇대서, 일본산 주민들을 위무할 노래로 '서시'를 고른 일이 글케 쌍욕 먹을 일일까? 외려 서시의 쓸모를 박제화하려 드는 이런 '특정한 역사의식'이야말로 비판, 극복돼야잖을지.

 

이 특정한 역사의식이란 거야 뭐, 두말할 것없이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이겠다. 관변과 재야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민족주의가 '비판의 무기'로서 가진 유효성을 다한 지는 이미 오래일 게다. 2008년 이후 민족해방파들의 꽃밭이 된 민주노동당이, 민주당, 국참당 같은 민주개혁파와의 정치적 동침에 적극적인 상황은 상징적인데. 민족해방파는 예전처럼 소위 비판적 지지 논리를 앞세워 다름을 구사하던 '재야 시절'과 달리, 이젠 별다르지 않음을 알아서 부각하는 중이다. 엔엘들이 이렇게 내파 중이라 해서, 민족주의적 비판의식이 어떤 자기부정의 계기를 '일정하게나마' 열어 줄 수 있단 점마저 부정하긴 물론 쉽지 않다. 이런 의식을 유발하는 자본주의 지정학이나 기제가 여튼 굴러가는 한, 그냥 쌩깐대서 쌩까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다만, 소위 비판적 민족주의자들 스스로, 민족주의가 특정 시기(근까 20세기에 걸쳐) 비판의 무기로서 한창 탄력받았던 게 "계급갈등적 맥락"을 머금고 드러내줬기 때문이란 것만큼은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게다. 프란츠 파농 같은 이가 그래서 민족주의의 이런 제한적 쓸모를 염두에 두고, "민족의식에서 사회의식으로"의 신속한 이행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던 걸 텐데. 파농은 분명 "인터내셔널"로 알려진, 비판적 국제주의라는 정치적 입지를, 비백인-비유럽계 대중의 자리에 서서 이렇게 번역했던 셈이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좀 '실질적으로 바뀌길' 바라는 이들이라면 이 지적은 낡긴 커녕 여전히, 아니 아마 앞으로 더더욱 중요해질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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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4 12:59 2011/03/24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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