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동이 그랬단다. 20대 투표율 50%면 반값등록금 실현은 가능하다고. 그 충정은 높이 사겠는데, 나로선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정치를 왜 자꾸 투표나 투표율 따위로 환원하고 마는지, 그 말이 또다른 약장수질로 전락하지 않을 보장은 어디에 있느냐고. 백 번 양보해, 그게 정치적 관심을 '일단' 유발할 가장 손쉬운 방식이겠다 쳐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갑갑함이 뚜레뻥될 만한 가닥을 어서부터 잡음 좋겠냔 질문일 테다. 정치를 어쩜 그렇게 왜소하게밖엔 못 보냐고 김제동 같은 이들을 일일이 건드려야 할지, 역사적으로 정치에 대한 '우리, 시민 아닌 시민'들의 실천적 입지와 상상력이 어쩌다 이렇게 짜부라들었는지부터 짚어야 하는 건지. 물론, 이 두 질문은 따로 또 같이 가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게 다 반공주의적 일상감각이 우리네 삶 곳곳에 찌든 탓이라 하기엔 아무래도 불충분하다. 모종의 정치경제적인, 따라서 문화적인 '지체' 탓으로 돌리는 건 더더군다나 진부하고 부적절해 보이거니와. 대한민국이 성취했다는 소위 발전이란 게, 이렇게 지체됐다고 할 만한 조건/정세의 발전, 공고화와 샴쌍둥이처럼 나란히 이뤄져왔다고 하면 또 모를까.
내가 보건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계속 확인하고 또 따져물어야 할 작금의 상황은 이렇다. 자유민주주의적 대의장치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꽤 오래 전부텀 사실상 전시성 껍데기였단 사실. 그리고, 그런 대의형식 자체가 사실상 무늬만 유권자인 대다수의 경제-문화적(고로 정치적) '소수자'들이 저마다 당면한 현안들을 '가능한 한 모든 장소에서' 효과적으로 의제화하고 집단적으로 궁리해 가기에 적합한지. 이런 확인/질문의 이면엔 물론, 저렴하게 부려먹고 쥐어짤 노동력 풀이 지구곳곳의 "민주화 압력"으로 매말라가자, 이윤 창출에 식은땀 흘리게 된 자본축적 과정(혹은 소위 자유시장 메커니즘)의 지랄맞은 히스테리가 가로놓여 있다. 뭐, 우아하게들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라고 하고, 노무현 땐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이명박 땐 선진화라 달리 불렸던 우리네 일상의 자유시장주의적 재식민화 과정 말이다. 어이없게도, 자칭 민주개혁적 진보라고 해온 이들은 말할것도 없고, 심지어 좌파적 진보 내지 좌파라 하던 이들 중 일부마저 이 점을 그간 작심하고 우습게 여기거나 곧잘 놓치고들 해왔지만.
상황이 이런데도, 우린 여전히 선거정치의 스펙터클, 혹은 정말 낡았거나 시효만료된 상식의 매트릭스에 그야말로 스스로 붙들려 있는 거 아닌가, 싶다. 특히, 명박 아웃만 되면 마치 이 세상이 구원될 양 "민주주의 회복"이란 아리까리한 기치로 (여기다, 뭣보다 정치경제적 상류 계급에 대한 증세 투쟁 구상도 없는, 소위 복지란 양념만 듬뿍 쳐발라) 핏대 올리는 이들. 사뭇 고통스런 자기부정의 계기가 깃든 거듭남의 과정도 없이, 이명박 도당의 후진 삽질 퍼포먼스에 핏대만 올렸다간, 제 발등 찍으면서 웃는 엽기적 바보 되는 건 순식간일 테다. 비록 그 뼈저린 깨달음이 시나브로, 때론 한참 지나서야 올지는 몰라도.
사족일지 모르겠지만, 이런 허망한 깨달음에 이르는 시간과 아예 단절하거나 적어도 굳이 연루되지 않으려는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비판적 실천의 기예가 바로 (내가 알기론 진정 좌파적 입지에서 정의 가능한) '정치'임은 물론이다. 흔히 잘못 알려져 있다시피, 짜고 치는 드잡이질이나 그저 무난하고 어설프기만한 타협이니 상호존중, 담합의 테크닉 따위나 일컫는 말이 아니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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