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의 장소로 다시 보는 일본
―권혁태,『일본의 불안을 읽는다』(교양인, 2010)
자문자답 인터뷰
_어떤 책이야?
<들어가는 말> 마지막 구절에 잘 요약돼 있다 싶더라구. “평화와 민주주의의 ‘도금’에 가려져 있던 일본의 전후가 과연 어떤 사회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분열, 트라우마, 자기기만, 불안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통해 다루고 있어. 책쓴이는 전후 평화의 상징인 와다쓰미상을 1969년 전공투가 파괴했던 사건이 “전후 일본 사회가 걸어온 평화와 민주주의의 허구성에 대한 내재적 비판”이라고 평가하는데, 이 표현도 이 책 전반에 대한 깔끔한 요약이겠다 싶고.
_전후 일본에 관해 괜찮은 질문을 던지는 책은 사실 이 책 말고도 여럿이잖아. 그런데도 굳이 이 책을 눈여겨 보게 된다면, 어떤 점에서일라나 그건?
아닌 게 아니라 근현대 일본에 관해 다룬 책들은 이미 여럿 나왔지. 그 중 어떤 게 제일 낫다고 하는 건 이제 좀 우습다고 할 만큼 말야. 차라리 서 말인 구슬을 하나로 꿰듯이 서로 잇고 엮어가며 읽을 만한 다른 책으로는 뭐가 있는지 짚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몰라.
_뭐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라고 뜸을 들이나 그래. 묻는 것부터 답을 하라구, 이 책이 어째서 읽을 만한지.
거참, 성미 한 번 느긋하시다. 아무리 좋은 쌀밥이라도 뜸을 들여야 제 맛이라는데. 어쨌거나, 이 책이 어째서 읽을 만하냐구? 퉁쳐 말하면, 일본 얘기가 도무지 일본 얘기가 아니란 걸 가랑비 옷 적시듯 환기해 주더라구.
_뭔 소리야 그게? 일본 얘기가 일본 얘기가 아니라니. 명색이 일본을 다뤘다는 책이라면서, 그럼 문제가 있다 못해 꽤 큰 거 아냐?
아니, 오히려 정 반대지. 일본 얘기가 일본 얘기가 아니더라는 말은 일본 이야기의 부재를 뜻하는 게 아니라구. 그러니까, 분명 근현대 일본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푼 건데도 도통 남의 나라 얘기라는 생각이 안 들더란 뜻이야. 한마디로 말해 ‘이어보기’의 미덕을 잘 살렸다 싶어. 물론 이건 기존에 알던 것(혹은 ‘국민화·국가화’된 기억)들을 이어붙인다거나, 가령 영·정조대를 ‘지금 여기’ 상황과 무턱대고 견주려는 시도 따위하곤 전혀 달라. 이어보기의 미덕은 사건들의 연쇄 구도를 드러내 이 구도를 사실상 가려온 익숙한 통념과 표상, 지식들에 균열을 내는 데 있으니까.
_그 미덕이 어떻게 발휘됐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자기 기만’을 다룬 3장의 세부 꼭지들이 그렇지. 긍정하는 쪽으로든 부정하는 쪽으로든, 일본을 ‘타자화’하려는 지적·실천적 전략이야말로 사실상 지속불가능한 자기 기만이겠다는 점을 환기해주고 있더라구. 일본이란 장소 특유의 국지적 맥락과 변화하는 속성들은 물리적인 거리와 무관하게 일본과 이웃해 있는 지역·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규명돼야 한다고 할까. 가령『국화와 칼』이라든가『일본적 경영』,『축소지향의 일본인』같이 전전이나 전후 일본의 정체성 내지 ‘번영과 성공’을 다룬 일본·일본인론은 이런 관계론적 시각과 방법을 불모화·주변화하면서 ‘냉전의 지정학’을 떠받쳐 준 국민/민족문화론이었던 셈이지. 3장은 일본산 국민/민족문화론의 맹점과 자기 기만을 짚되, 이같은 문제를 4장에서 소개된 오키나와계 일본인 아라카와 아키라의 주장처럼 “국가라는 환상 공간 속에서 사수하는 통합의 질서에 대한 끝없는 이의제기”가 어째서 유효하고 한층 더 짜임새 있게 이뤄져야 하느냐는 질문으로까지 진전시키고 있다고 보거든.
_3장 얘길 한다면서 4장에 나온 얘길 끌어들이고 있잖아.
내 생각에 그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봐. 이 책에서 설정한 키워드들은 근현대 일본이라는 4면체의 상이한 측면을 가리키고 있는 셈이니까.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 불가능한 측면들로서 말야. 실제로 재일조선인과 오키나와·아이누인들, 그리고 이들과 계급·계층적으로 겹치면서 주변화돼 있는 불안정노동자들을 다룬 4장은 경제적·문화적 차별·배제를 정당화해온 민족주의 내지 국민/민족문화론의 자기 기만과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겠지. 여기엔 일본과의 공모 관계 속에서 발전해온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도 예외일 수 없어. 외려 책쓴이가 말하는 “계속되는 식민주의”가 탈식민지 주권국가 대한민국에선 어떻게 변주돼왔는지 되새김해볼 장기적이고 지역적 규모의 분석 틀은 갈수록 중요해질 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_그런 분석의 틀은 어떻게 짤 수 있는 건데?
책에서 책쓴이는 “일본의 헤이와를 시공간적으로 주변 지역과의 관계 속에서 성찰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 이로 테사 모리스 스즈키를 언급하는데, 마루카와 테츠시의『냉전문화론』과『리저널리즘』도 함께 눈여겨봐야 할 듯해. 책쓴이가 취하고 있는 시각을, 마루카와는 어떻게 하나의 ‘방법’으로 구체화하고 있는지 참조할 수 있을 테니 말야. 강상중 선생도 아마 2000년 초쯤에 대한민국에서 이승만·박정희를 ‘국부’로 재조명하려는 움직임과 ‘새역모’가 주축이 되어 자학사관 타파 세력이 탄력을 받는 일본에서의 움직임을 별개가 아니라 동일한 맥락 속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탈냉전’ 국면이 냉전기의 역사적 지배 블록 내부에 불러일으킨 ‘모종의 불안’ 징후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거지. 마루카와는 앞서 언급한 책들을 통해 이런 독법에 힘을 실어줄 방법의 칼을 벼리고 있는 셈이야.
물론 이런 문제의식 아래 이뤄진 선행 작업이 없진 않아. 가령『끝나지 않은 20세기: 동아시아 역사 1894~ 』같은 책은 기존 민족사 내지 일국사의 산술합으로 지역사나 세계사를 이해하려는 데서 탈피해, 관계론적 시각과 방법에 바탕한 역사서술을 시도하고 있더라구. 해서, 각론들의 세부가 총론과 잘 맞춤하고 있느냐? 그런지에 대해선 좀 갸우뚱해지던데, 그래도 예컨대 스페인내전 당시 저항군 사이에 불렸던 저항민요가 어떻게 현재 중국에서까지 불리게 됐는지 이야기하는 대목은 아쉬운 대로 참 반갑더라구. 한반도-동아시아 규모의 역사적 시공간에서도 이와 엇비슷한 사건들의 연쇄는 열전과 냉전의 이중주로 빚어진 반공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봉인돼버려 그렇지, 분명 있을 거라 보거든. 얼마 전 논란이 됐던『요코 이야기』만 해도 자본주의적 식민주의의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켰다며 결국 전량 회수 조치됐지만, 난 그 책에서 다룬 이야기가 20세기 동아시아 지정학 속에서 짜고 치는 고스톱 내지 일종의 묵계처럼 코드화돼 있던 ‘전전’의 문법, 다시 말해 이 문법으로 인해 봉인돼 있던 기억들을 본의 아니게 불러올 텍스트로 봤단 말이지. 이는 물론, 마루카와의 작업이 보여주듯 이 기억들을 어떻게 불러내 다시 혹은 새롭게 서술할지에 관한 ‘각’이 따라붙어야 하는 것이겠지만 말야.
_어째, 애초 가려던 길에서 샛길로 길게 빠진 느낌이다.
그, 그런가. 좋게 얘기하면 지금까지 얘기한 생각 내지 궁금증들이 책을 읽으면서 생겼더라는 얘기겠고, 나쁘게 얘기하자면 국물은 진한데 소금이 빠진 곰탕 마냥 책쓴이가 보여준 이어보기의 윤곽이 좀더 선명히 드러났으면 좋았겠더라는 얘기겠지. 어쩌면 그것은 앞으로 한반도-동아시아 지역에서 ‘끝나지 않은 20세기’와 씨름하는 가운데 “자발적 공존의 네트워크”를 형성·강화하는 데 힘이 돼 줄 지식구조의 윤곽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보니까 에필로그가 없던데, 에필로그에서 이와 관련한 고민의 일단을 좀 내비쳤으면 어땠을까도 싶더라구.
_그래서, 읽는 내내 마냥 수긍이 된 건가?
그럴 리야 없겠지. 스스로 하고 있는 얘기도 때때로 흡족치 않을 판에 말야. 부분부분 아쉬운 대목이랄까, 생각을 달리하는 대목들이 있었어. 가령「일본군과 정신주의」꼭지에서 ‘햐쿠닌키리(百人切り)’에서 보이는 잔학함·폭력성을 ‘불완전한 근대’의 산물이자 비유럽권 후발근대화 과정에 특유한 ‘속도의 폭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시 말해 ‘근대적 인간형’은 원래 이러저러한데 일본에선 그에 비해 불완전했다는 설명이 그렇지. 요소론적인 설명법인데, 근대화의 여러 유형들이 애초 위계화된 상호연쇄 속에서 이뤄지는 과정임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말야. 칼 폴라니 같은 경우 홀로코스트로까지 치달았던 독일 파시즘을 ‘자유시장’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라 정확히 자유시장을 태반으로 탄생한 ‘자기보호적 대응’의 일환으로 보는데, 백승욱 교수는 이를 “근대적 주체 구성의 파멸적 효과”라고 하더만. 이렇게 보면 자유시장의 (반)주변부 권역-국가에서 구조화되거나 내면화되는 폭력을 어딘가 불완전하거나 미완인 것의 연장으로 보느냐, 아니면 그 자체 근대(적 식민)화 효과의 일부로 볼 거냐는 쟁점이 생길 텐데. 난 후자 쪽 얘기가 더 와닿아서 말이지. 제임스 스콧 같은 사람은『국가처럼 보기』같은 책에서 이같은 폭력성 내지 폭력에의 유혹을 ‘하이모더니즘’의 유산이라고도 하던데, 난 이런 시각에서 일본이나 한국처럼 따라잡기식 근대화가 이뤄졌던 장소에서 나타나는 유·무형의 폭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봐. 고약하게 길든 버릇 마냥, 소위 전근대적 잔제로 도매급할 게 아니라 말이지. 그리고 분열을 키워드로 다룬 1장에서 보여주는 분열의 양태들이 하나의 키워드로 묶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어. 가령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투쟁에 관한 얘기와 일본 전공투 내지 좌파의 몰락을 다룬 얘기가 분열을 공통 고리로 하곤 있지만, 그 둘은 결이 좀 다르고 또 의당 다르게 다뤄야 하는 것 아닌가 싶더라구.
_그렇게 토달 게 많으면 직접 책을 써보는 건 어때?
무슨 당치 않은 소리야. 야구해설 잘 한다고 야구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또는 그래야 하는 건 아니잖아. 아무튼 서경식 선생님이 그랬다매? 재일조선인 같은 ‘소수자’들의 기억은 한반도-동아시아의 경험을 특수화하지 않고서 자본주의적 문명화의 폭력에 대항하는 피억압자들인 ‘우리’의 역사로 보편화될 수 있다고 말야. 적어도 일본의 근현대사, 아니 동아시아의 근현대사가 조장해온 불안의 자장을 교란하고 마침내 잦아들게 할 그런 ‘우리’를 꿈꾸는 사람들에겐, 이 책이 친근하면서도 반가운 길잡이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싶네. 정말 그런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꼭 한번 읽어봐.
반가운 서평이네요^^ 잘 읽겠습니다~
반가우셨다니, 제가 고맙고 반갑죠 뭐.ㅎ 네, 아쉬운 대로 함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