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초쯤 대학교지 <고대문화>에다 땜방원고로 썼던 글.
그쪽 요구루다 청년실업, 그 중에서도 대학생 실업,
또 그 중에서도 고려대란 데를 둘러싼 상황을 다뤘더랬다..
편집장께서 코멘트를 잘 해준 덕분에
산만한 글이 그나마 정돈됐다는 걸 이 참에 밝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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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실업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 자본주의적인 머슴[雇傭]의 도덕에서 자유로워지기
취업? : 조삼모사, 그리고 미닫이와 여닫이
고교 시절 이야기로 운을 떼보자. 얼추 15년쯤 전인데, 학생들을 독려한다며 하셨던 어느 스승의 말씀이 있었다. 요컨대 고진감래일지니, “모두가 여~얼공하다 보면 합격은 니들 꺼”라는 것. 속으로 피식, 웃었더랬다. 속으로 웃었던 이유야, 뭐 뻔한 거 아닌가. ‘뒷감당’이 두려웠으니까.
그래도 스승의 ‘독려’가 독려는커녕, 맥빠지는 기만이라는 생각마저 내치긴 어려웠다. 티를 안내 그렇지 어디 나뿐만이었을까? 모두가 ‘열공 모드’로 하나같이 성적이 올랐다 치자. 그래본들 어차피 대학에 발 들일 수 있는 머릿수 자체가 (그 당시) 통틀어 열 중 셋밖에는 안 된다는 거 뻔히 다 아는데, 그런데도 열공만 하면 합격이 다 ‘우리’꺼라니. 완전 어이상실이었던 거다.
어쨌거나 나처럼 요행히 열 중 셋에 들었다는 부류조차 좋게 봐줘 이 정도였으니, 어차피 일곱이 될 수밖에 없던 친구들에게 스승의 변은, 그야말로 엄청 구린 것으로 알려진 고형성 덩어리 같았대도 무방했을 게다.
그럼, 이 말도 안 되는 독려를 받아가면서까지 애써 대학에 발을 들인 동기는? 예나 지금이나 아무래도 좀 더 ‘번듯한’ 미래, 보다 윤택한 삶을 보장해줄 진학의 종착점이라고들 해서였을 게다. 이리 뭉뚱그리기 곤란한 동기가 있다 쳐도, 대학에 일단 들어와야 뭐가 됐든 그 가능성이 좀더 ‘번듯’해지리란 기대는 너나할 게 없었을 터. 해서 그렇게, 지금은 어떤 풍경인지 과문하다지만, 민망한 독려까지 받아가며 대학, 그것도 소위 ‘스카이’ 대학이라고들 하는 곳 중 하나에 (걔중엔 물론 아쉬우나마) 발을 들이셨을 줄 안다.
헌데 듣자니 그 곳이 자기만의 고유한 시간대를 확보하는 건 고사하고, 입시의 여독餘毒을 푸는 것조차 꽤 빡빡해진 모양이다. 그나마 ‘기타’대학들보다는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하다지만, 기타가 아니라서 좋은 줄만 알았던 고려대생들도 기왕이면 다홍치마, 그러니까 화려한 스펙을 갖추겠노라며 ‘또 다시 열공’모드로 지내느라 은근 독기를 내뿜더라는 거다. 그 고충도 고충이지만, 어째 고교 시절에만 듣고 말 줄 았았던 고진감래론이 이제 대학을 담뿍 적시고 있다는 생각만큼은 양보가 안 된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들은 이런 의문 자체를 성가셔하거나 심지어 탐탁치 않게까지 여기나보다. 말하자면 이렇다. 취업여건이 아무리 열악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경쟁’이 지닌 미덕에 불가피하게 드리우기 마련인 그늘이니, ‘학생답게’ 더더욱 열공 모드로, 더구나 명문?일류라는 브랜드와 온갖 스펙으로 몸값 경쟁에서 ‘승리’하면 되리라는 식이다. 바꿔 말해 게임의 법칙 자체를 문제삼는 건 사실상 시간낭비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부적응’의 증거로 치부되기 일쑤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좋든 싫든 게임의 법칙을 따라야 하는 이상 져서 좋을 게 없다는 거야 두말하면 잔소리라지만, 이겼다고 그닥 더 나을 것도 없다. ‘합리적’이라고들 취했다는 취업의 스탠스, 그러니까 ‘빡세게 열공’ 모드는, 이를테면 미닫이문을 여닫이문으로 착각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문을 열겠다며 낑낑대는 건 아닐는지. 그렇게 애꿎게 쏟은 힘 중 반의 반 정도만 미닫이인지 여닫이인지 살피는 데 쏟아도, 문을 훨씬 더 손쉽게 여는 것은 물론이고 오그라든 문짝 대신 새 문짝이 달린 새 집까지 마련할 ‘합리적’길도 아울러 찾아볼만 하다 싶어서다.
‘고용 없는 발전’ 노선의 세계화와 구조적 실업 : 문제, 또는 해결책?
이쯤에서 ‘합리적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소위 명문대, 비명문대 할것없이 그 성원들을 짓누르고 있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은 (비대졸자들에겐 더더욱 폭력적인 면모를 띠겠지만) 왜, 어떻게, 나아가 누구 좋으라고 자리잡게 됐는지 살펴보자. 앞서 이런 걸 다루는 건 시간낭비라며 차라리 “경쟁 논리 따라, 학생답게 스펙 높여 취업전쟁에서 마침내 이기리라”했던 진술의 적실성을 차례로 짚어보는 식이 되겠다.
먼저, 경쟁 논리가 등장하게 된 역사적 맥락부터. ‘원래’다 그런 거 아니냐고 전제하고 들어가기 일쑤인 지금의 열악한 취업조건이 ‘정상적’인 사회적 조건으로 등장한 건 언제쯤일까? 한국 같은 경우 1997년 말 IMF의 개입 이후부터 본격화했다지만, 이런 개입이 의도하는 사회적 조건이 일종의 ‘교리’이자 정언명령처럼 등장한 건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무렵이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침체 국면을 맞이함에 따라 구미권의 기업법인들이 ‘비용’ 압박에 관한 온갖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불만은 일차적으로 전후 호황기에 서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정착한 복지국가 체계를 겨냥했지만, 좀더 명시적으로는 노동인구의 노동력 재생산에 드는 ‘과도한’ 비용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 과도함도 대공황을 유발했던 노동자들의 낮은 구매력, 다시 말해 고용노동인구의 과소소비 경향 상쇄에 초점을 맞췄다지만, 세계경제의 침체 국면 속의 기업법인들한테는 그마저 감당하기 껄끄러워졌던 것이다. 기업법인이 가급적 낮추고자 한 그 비용은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인구 입장에서야 물론 기본적인 삶의 질을 누리는 데 불가결한 ‘한계선’이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윤합리성’을 ‘궁극의 도’로 여기는 기업법인의 합리적 대응책이란? (잠재적) 노동인구를 좀더 확실히 ‘비용’ 계정으로 간주하는 가운데 자본축적에 유용한 ‘(노동력 재생산)비용절감의 테크놀로지’를 사회 전반에 (재)도입, 강화하는 것이었다.
노동인구에 드는 비용을 최대한 낮추는 조건이 강화되는 한편, 이를 정당화하는 각종 이데올로기가 새로이 떴다. 경쟁논리는 노동인구로 하여금 스스로 ‘바닥을 향한 경주’, 즉 임금수준의 전반적 하향화를 자명한 것으로 여기고 그런 조건을 부추기도록 하는 근간이었다. 1970년대 이후 세계화를 통해 유포된 이런 경쟁 논리가 기업법인들의 ‘고용 없는 성장’ 전략의 주요 지렛대로 자리잡았음은 물론이다.
구조조정, 노동유연화, 아웃소싱처럼 이젠 익숙한 경영합리화 테크놀로지의 발전, 확산은 이렇듯 고용비용의 외부화★와 잠재 고용인구의 만성적 과잉화가 짝패를 이루는 ‘자본주의적 인구법칙’과 맞물려 있었다. 이에 따라 구조적 실업, 즉 취업인구의 자질, 능력과는 별개로 기업법인/자본의 이윤합리성에 비춰 실업인구가 되려 ‘창출’되는 상황은 ‘정상적인’ 사회적 조건이 됐다. 기업법인들 입장에서 실업은 문제가 아닌 일종의 해결책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청년실업률은 IMF 이후 13%대를 정점으로 2007년 최소 8%~15% 수준에 머무르며 OECD가입 국가의 평균 청년실업률인 13.3%를 이미 넘나들고 있는 상황이다. (각주 : LG 경제연구원 실업통계 보고서, 발간연도 미상.) 30대 대기업, 공기업, 금융업 등 소위 ‘괜찮은 일자리’ 수도 1997년 154만 2천 개에서 2004년 131만개로 15% 감소하고 1천 명 이상 기업 142곳 가운데 이익을 남기고도 감원한 곳이 셋 중 하나인 데서 알 수 있듯(각주 : “괜찮은 일자리 줄었다… 저임금, 일용직 늘어”, 《경향신문》2007년 6월 3일자. “잘 나가는 대기업이 ‘고용없는 성장’ 주도”, 《한겨레》같은 날짜.)
대한민국 기업법인들 또한 ‘고용 없는 성장’에서 나아가 ‘노동비용의 외부화’에 기반한 발전 추세를 보인다. 2007년 현재 대한민국 역시 서유럽, 미국 자본과 마찬가지로, 규모의 경제를 통해 수익성 제고를 꾀할지언정 고용비용 부담은 최대한 낮추는 ‘자본구성의 고도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코스피지수가 1700선을 넘었다지만, 그래봤자 주주가치의 상승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잠재적) 고용규모의 축소 및 질적 하향화가 이뤄지는데 대한 쾌재의 신호일 따름이다.
이때 놓치지 말아야 할 건,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우울한 현실이 기업가 개인의 ‘품성’이나 ‘선의’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란 데 있다. 외려 이 테제의 전면화엔 역사적 자본주의 체제가 발전과 번영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봐도 좋을 구석이 있다. 자본축적의 확장 과정 자체에 내재한 딜레마★를 돌파하겠다며 채택한 노선이 역사적 자본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크게 잠식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는지라서다.
노동인구에 대한 ‘과다’비용으로 이윤압박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과소비용으로 체제 정당성이 우그러지더라도 ‘될 놈만 몰아주자’ 식 축적노선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중이라는 얘기다. 가치실현에 필요한 잉여, 부가 소수의 부자와 전문가-엘리트 집단한테 한껏 몰리는 가운데, 20세기 초중반 두 차례의 전쟁과 대공황으로 마지못해 떠안았던 사민주의/복지국가 패러다임을 축적의 멍에마냥 성가셔하는 것도 그래서다. 때문에 고용 없는 성장 테제를 촉매로 한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의 ‘완성’은 그 자체 개별 국가들의 내적 응집력을 사실상 사멸시키면서, 역사적 자본주의에 본질적인 양극화 경향을 한층 더 ‘투명하게’ 드러낼 공산이 크다.
케인즈주의, 사민주의에 ‘오염’됐다는 시장-자유 패키지의 ‘유신/복고’를 골자로 한 사회재편 과정은 국가의 통합능력을 덜 중시하는 한편, 시장체제의 세계화로 지구 곳곳을 들쑤셔놨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의 새롭고도 우악스런 귀환을 뜻했다.
구조적 실업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그럼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고려)대학생들의 자세는 어떻다고 할 수 있을까. 먼 발치서 보고 있으면 솔직히, 일단 달리고 볼 뿐 둘러볼 줄이라곤 생판 모르는 값비싼 경주마들 같다. 이걸로도 모자라 눈가리개까지 하고 “달린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참 성실히도 따르는구나 싶을 때마저 있다. 이런 경쟁압력을 부추기는 사회적 조건 자체는 내버려 둔 채 스펙만 좇는다는 건, 고작해야 ‘머슴다움의 기예’만, 그것도 자발적으로 내면화하는 걸로 쫑나기 마련인데도 말이다.
실업이 ‘효율적, 합리적’ 경쟁 및 이윤추구 논리 자체로부터 구조적으로 생산되고 있다는 데 유념한다면, 미취업자들(또는 자본주의적 과잉인구)은 “난 취업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자기규정 속에서 취업 전부터 이미 고분고분한 머슴으로 길들여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 머슴다움에 대한 요청이 잠재적 피고용 인구와 실제 취업인구 모두를 겨냥했던 것인 이상, 취업전쟁에서의 승리란 것도 취업을 위한 경쟁에서 ‘보다 덜 나쁜’ 기업 내부 성원간 경쟁으로 그 무대를 옮긴 데 불과하다.
전쟁은 스펙을 무기 삼아 계속되지만, 정작 승리는 끊임없이 유예된다. 결국 패배할 때까지 말이다. 이때 스펙이란, 져야만 끝이 나는 이런 음울한 처지를 바꿔낼 힘이긴커녕 외려 그런 ‘변화’에 긴요한 힘, 능력의 부재를 증명한다. 그저 취업 모드로만 설정된 재학생들은, 설령 고려대생이 아니라 하버드대생이라 한들 ‘실존적 호환성’ 내지 ‘포트폴리오’의 결여로 ‘가방끈 긴 바보’되기 십상라는 얘기다. 오직 열공으로 값비싸지면 뭐하나. 사유와 안목은 온데 간데 없이, 오직 잘 달리기만 하는 경주마인데.
문제는 어설픈 졸업용 ‘교양’으로, 심지어 오로지 스펙만으로 덧씌워진 무지가 질긴 가방 끈과 결합할수록, 그런 무지는 겸허함의 근거는커녕 알량한 자부심의 증거로 둔갑하기 일쑤라는 데 있다. 이렇다 보니 스카이대학을 나왔다는 사실 자체는 더는 이런 여건의 ‘호전’을 보장하기도 어렵다.
더욱이 스카이대학이라는 학력화폐 보유했다고 삶이 예상했던 대로 번듯해지는 것도 아니다. 사회생활 10년차를 넘겼다지만 “‘중산층다운 삶’을 살기에도 여기저기 결격사유 투성이”기 십상인 거다.(각주 : “우리사회 중산충 있나? … 박탈당한 중산층의 꿈”,《헤럴드경제》2007년 6월 1일자.)
물론, 학력화폐를 밑천으로 하는 사회적 상징자본의 보유 여하 및 그 규모에 따라 ‘경쟁력’과 ‘부가가치’의 크기가 결정되는 판이니, ‘고려대’라는 상징자본은 곧잘 머슴다움의 기예를 내면화하며 잠재적 취업주체들이 처하게 될 구차함이나 찌질함을 달래주는 기초화장품으로 요긴하게 쓰일 순 있겠다. 화장빨이 아무리 좋다한들 ‘생각금지’ 메이크업 잘 먹은 머슴, 잘 풀려봐야 마름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겠지만 말이다.
그만큼, 어째서 그렇게 머슴이 안 되고선 기업법인의 구박 내지 닥달 따위 없더라도 누려 마땅할 기본적인 삶의 질마저 누리기 힘들어지는가, 왜 이 따위 사회적 조건은 ‘선진화’ 담론의 등장과 함께 더더욱 뚜렷해지려는 참인지를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 조바심 낸다고 자본법인들의 마음이 흔들려 한창 진행중이던 자본구성의 고도화를 멈출 리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윤 논리에 복속된 존재증명을 본능으로 여기는 기업법인한테 고용을 늘려달란 호소는 아무리 간곡하다 한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번지수다(듣자니, 총학생회장이 요즘 이런 식으로 기업탐방 가서는 뻐꾸기를 날리기도 하는 모양이던데, 이런 게 바로 삽질이다). 따라서 조삼모사식 채용전략으로 잠재적 취업인구를 유순한 노동자로 길들이려는 기업법인들의 고용규모에 노심초사하는 건, 기업법인들의 노림수인 취업인구의 과잉인구화 전략에 제대로 놀아나는 일일 터.
백 번 양보해 ‘효율’ 논리로 따져도 그렇다. 지금 취업을 놓고 벌이는 안쓰런 악다구니들은 외려 이런 따져묻기가 부재한 데서 비롯된 엄청난 비효율과 낭비 아닐까? 이렇게 각자가 원자마냥 알아서 잘 하면, 모두 다 승리하긴커녕, 시장의 ‘보이지 않는 주먹질’에서 연유하는 패배에 대한 공포와 불안, 스트레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좀더 많은 이윤, 좀더 방대한 자본을 조성해야 한다는 이유로 사회 성원 상당수가 ‘궁핍(=능력의 결핍)’에 시달리는 머슴이 되도 괜찮은 거냔 물음을 우회할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머슴을 없앴다는 자본주의 사회가 자기존속의 논리를 강화할수록, 그렇게 해서 발전을 거듭할수록 어째서 점점 더 많은 머슴을 만들어내고 있느냔 얘기기도 하다.
결국 문제는 구조적 실업자는 물론 취업자 절반이 유순한 머슴으로 살아야 하기 십상인 ‘기업하기 좋은 나라’ 대한민국이, 나아가 이런 머슴의 도덕을 지구적으로도 강화해온 ‘세계화’ 된 자본주의 세계가 과연 살 만한 곳이겠냐는 거다. 나만 머슴 안 되면 오케이 아니냐고? 그렇게라도 영광을 볼 수 있다면 뭐, 뜯어말릴 도리는 없을 게다.
다만, 머슴 따위는 이제 없다며 자신의 남다름을 설파해온 자본주의 문명-사회체제도 고작해야 판형만 바뀐 현대적 권세가들의 사냥터(내지 임상실험장) 아니냐는 원성과 비아냥을, 그저 열등한 자들의 시기, 투정쯤으로 제껴두긴 꽤 버거우리라는 걸 알아두셨음 좋겠다. 그런 원성과 비아냥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진전될지 섣불리 속단하긴 어렵겠지만, 이런 움직임 자체가 실업 대중들의 ‘무능함’ 내지 ‘패배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리라는 점 하나는 분명히 해두자. 이런 정황을 둘러보고서, 다 필요 없고 그냥 자발적으로 자본의 머슴이 되겠노라 맘먹어도 늦지 않다는 거다.
그렇다면 취업담당관들이 선심쓰듯 흘리는 ‘취업의 노하우’라든가 졸업준비위원회의 역할강화 따위가 ‘대안’일 순 없다. 되려 필요한 건, 예컨대 인재의 제일화로도 모자라 급기야 ‘천재화’가 시급하다는 이건희 씨의 바보 같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노심초사할 것 없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성할 독자적 리듬과 동선 아닐까.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 벌거벗은 임금님 놀음에서 빠져나오기
분명한 건, 이런 사회적 조건이 비록 팍팍하긴 해도 필연적인 숙명의 수레바퀴는 아니란 거다. 농구경기에서 상대방이 아무리 현란한 돌파를 하려 해도 맞은 편이 두 손 놓고 있으면 게임 진행 자체가 어렵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그러니까 쳇바퀴 안에서 ‘플레이어’로 뻘뻘대며 안 넘어지려 용쓰느니 차라리, 빠져나올 때 무릎팍 좀 까지더라도 왜 이리 뺑이를 쳐야 하는지만이라도 아는데 시간을 들여보잔 얘기다. 이런 움직임이 노리는 건 물론, 긴 호흡으로 머슴의 도덕이 학생다움의 정수인 양 설레발치는 기업법인 집단 및 (교수도 물론 포함된) 대학관계자들의 독려성 농간과 온갖 겁주기에 더는 휘둘리지 않는 가락과 대안을 벼려낼‘시공간’의 창출일 터.
이렇게, 이윤 논리에 모든 게, 존엄한 삶 자체가 복속돼야 마땅하다는 기이한 본말전도를 어떻게 뒤집을 수 있을지 찬찬히 캐물어보자. 스펙 높이는 데 유용하다는 책들은 잠시, 잠시 좀 접어 두고 말이다. 백날 고대 나왔다고 뿌듯해하면 뭐하나. 가방끈 질기답시고 “가공할 지구적, 지역적 불평등에 둔감해지려는 데서 연유한 심리적 자기위안” 또는 “지루한 반복의 알리바이”나 내뱉는 게 다라면 말이다. (각주 :「지식발전소를 세우는 뜻」, 사이먼 토미, 정해영 옮김, 『반자본주의-시장독재와 싸우는 사람들』(유토피아, 2007).) 이때 고대를 나온 건 자부심은커녕 쪽팔림의 징표밖엔 안 된다.
어쨌거나 취업 못한 게 부족한 내 스펙 탓이오 해가며 전전긍긍하는 일이야말로 자승자박이자, 기업법인 집단이 보급해온 머슴용 도덕의 코뚜레에다 스스로 코 꿰는 일이라는 거. 누구 좋으라고 그리 살 참인지 당최 모르겠다. 이건희 씨한테 잘 보이려고? 반복하는데, 그래봤자 이건희씨를 필두로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분들께서 감동 먹고 채용규모를 늘릴 턱이 없다. 그럴수록 므흣한 표정으로 생산의 기계-자동화에 박차를 가하면 모를까.
하여, 그네들이 벌이는 벌거벗은 임금님 놀이에 더는 농락 당하지 않는 길이란 그 칼자루를 뻘쭘하게 무용지물이 되게끔 하는 일이란 거. 이런 날이 오게 만드는 건 여러모로 두렵기도 하고 분명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거듭남’마저 두려워해선 안 될 일이다. 그게 자신의 앎과 습속을 송두리째 갈아엎는 ‘폭력’으로 다가오더라도 말이다.
폭력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다 그런 건 아니다. ‘새로운 시작’에 필요한 거듭남의 폭력과 고통이 켜켜이 쌓여 복수의 네트워크를 이룰 때, 우리의 능력은 한층 더 크고 두터워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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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용비용의 외부화?
이윤획득에 따르는 총생산비용, 그중에서도 노동력의 재생산(및 이의 ‘선차적 토대’라 할 생태적 재생산) 비용을 떼먹고자 기업법인 수준에서 이뤄지는 합리화 과정, 또는 기예의 총칭.
기업법인은 이 과정을 최대한 ‘효율적이면서도 규모 있게’ 집행하고자 태어난 조직이자 법률적 장치다. 그만큼 기업법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이윤획득에 따르는 총생산비용을 기왕이면 낮추거나, 아예 치르지 않게끔 하는 각종 기예를 도입, 발전시키려 애쓰기 마련이다. 역사적 자본주의 자체가 본질적으로 사용(=지속가능한 살림살이)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교환(=이윤획득)기제에 복속된 생산 유인을 장려하는 사회체제여서다.
이렇다 보니 당장 사용에 필요한 생산수단이 없거나 특정 시점에 ‘빼앗겨버린’ 임금·비임금 형태의 노동자들은 비용 외부화의 잠재적이고도 만성적인 피해대상으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이는 예컨대 농업/먹거리 분야가 그렇듯, 엄청난 규모의 인구가 기아·영양실조에 허덕이건만 전체적인 먹거리 생산은 비만을 걱정할 만큼 풍요를 구가하는 기이한 현실에서 가장 (비)극적으로 드러난다.
자본주의적 부가 그저 증발된 화폐의 총량이 아닌 이상, 부의 증대를 북돋고자 이뤄지는 비용의 외부화 과정은 필연적으로 잠재 노동인구의 지속적인 구매력 저하압력, 즉 ‘착취’로 귀착한다.
★자본구성의 고도화?
자본(가)의 시선에선 늘 골치 아픈 ‘허구적’ 상품, 즉 인간의 노동력이 가치화 과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낮추려 기계류 비중을 높이는 상황을 말한다. 최근 ‘친환경’ 중공업설비로 주목받은 포스코 파이넥스 준공도, 이 과정의 일환이라 할 수 있겠다. 자본(가들)로서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노동비용을 외부화하게, 그러니까 골치 아플 소지를 늘 지닌 인간들을 털어내 비용합리화를 이뤄내게 됐으니.
허나, 포스코 노동자들 입장에서 파이넥스 설비의 증설은 ‘친환경적’이라 한들 그다지 반길 일이 아니다. 똑같은 이유로, 사용가치를 만들어낼(=밥벌이할) 별다른 생산수단도 딱히 없이 불시 감원조치를 통보받게 될 확률만 더 커졌으니까. 이렇듯, 포스코 파이넥스가 창출할 부란 포스코 노동자들과 ‘적대적 관계’ 속에서 그 휘황한 자태를 뽐내게 돼 있는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파이넥스 자체가 적대를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파이넥스의 ‘의미’는 그게 생산수단으로서 어떤 용법을 가지느냐(즉, 그것을 둘러싼 소유관계가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지는 문제라서다.
★자본축적의 확장 과정에 내재한 딜레마?
이윤합리성에 따라 체제의 ‘발전'을 꾀하자니 '사회적 응집력'이 크게 손상을 입겠고, 그렇다고 체제 유지에 긴요하다는 사회적 응집력에 신경쓰자니 설사 국가에 위임한들 자본가들의 이윤압박이 더는 견디기 힘든 지경을 말한다. 대한민국뿐만이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말이다.
자본주의 체제 지속의 중심축인 가치실현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온갖 이윤창출용 스펙터클로 사회 성원들의 소비욕망을 한껏 부추겨야 하면서도, 정작 그런 소비자가 노동자로서 그 욕망을 충족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 비용은 이윤압박을 초래하는 만큼 최대한 떼먹어야 하는 모순이 거의 수습불가능할 만큼 첨예해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