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2014/12/29 13:29

[서평] 코뮤니스트는 여성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하늘을 덮다 -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을 읽고

 

조성웅 |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조합원, 시인

 

(* 이글은 2014년 5월 1일에 발행된 <붉은글씨> 2호에 실린 글입니다. [편집자])

 

 

암투병 중인 아픈 엄마 곁에서 [하늘을 덮다 -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을 읽었다. 몇 번을 책장을 덮었다 다시 펴 끝까지 읽었다. 피해생존자 심촌 샘의 존엄함이 다시 회복되는 그 처절한 투쟁의 시간을 직시하려 했다.

 

심촌 샘은 가부장-관료주의*의 고통 받는 피해자였고 그 고통을 다 견뎌내느라 온 몸에 병이 들었지만 난 그녀가 토해내는 언어에 귀 기울이고 그 언어 속에서 내 삶을 성찰했다. 우리가 진실로 강해질 수 있는 건 우리 안의 평등을 이루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라고 난 믿는다. 심촌 샘의 고통스런 투쟁의 기록은 우리 안의 평등을 이루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역사다.

 

< “계급은 언제나 성별화되고 인종화된다”([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서문 중에서, 낸시 홈스트롬, 메이데이) 대표적으로 노동조합이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우선 해고를 합의해주고 성폭력 가해자를 옹호하는 조직보신주의는 계급의 단결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억압의 문제를 은폐하고 이를 제도화한다. 여성억압을 제도화 한 가부장제는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이유인 관료주의와 결합하여 부르주아 정치를 더욱 강화한다. 난 이를 가부장-관료주의라 부른다>
 
 

"동정 받고 싶지 않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인간선언인가? 존엄함인가? 평등을 이루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인가?

"내 삶의 봄을 기다리는" 심촌 샘의 투쟁을 통해 난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워지고 강해질 수 있는가를 배운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관료주의가 완전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조직보위론과 계급환원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을 갖게 하고 성찰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낡은 운동과 단호하게 단절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난 심촌 샘의 투쟁의 기록을 읽으면서 내가 참여했던 운동 과정에서 겪었던 일들을 되돌아보고 싶었다.

 

조직보위론 - 완전하게 드러난 관료주의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민주노조운동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소멸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공감능력의 상실은 자본에 통합된 정신을 뜻한다. 그렇게 피해생존자 심촌 샘의 눈물과 절규를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자리엔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명령의 질서, 권력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지도자를 보위하기 위해 관료적 명령이 동원됐고 성폭력이 사용됐으며 침묵이 강요됐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자본가들과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성폭력과 2차가해도 마다하지 않았던 자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했다.

 

이 조직된 폭력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미 민주노총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위계 질서로 구성되었으며 명령이 비판과 토론을 대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법적 제도적 그리고 노동조합 규약으로 완성된 관료주의(부르주아 정치)가 완성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대공장을 토대로 내셔널센터에 집중된, 정규직 남성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 권력은 계급투쟁을 조직하는 역할이 아니라 "협상과 타협, 노자간의 화해"가 자신의 본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노동조합 관료들은 100만 촛불에 총파업으로 화답하지 않음으로써 이명박 정부를 돕고 박종태 열사 투쟁을 확대하기 위한 평조합원들의 투쟁 의지를 억압하고 통제 해 열사투쟁을 서둘러 마무리함으로써 이명박 정부를 돕고 쌍용차 공장점거파업을 확대하기 위한 총파업을 조직하지 않음으로써 이명박 정부를 도왔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민주노총이 부르주아 지배질서의 일부분으로 포섭되었다는 것을,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이유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한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노동조합 관료들, 개량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운동사회 전체를 휘감고 있는 가부장-관료주의의 내부를 환하게 들여다보게 했다. 몇 년전 울산 '사라져라 성폭력' 강좌에서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자인 이황현아 동지는 "여성에 대한 태도를 갖지 않으면 좌파 운동은 망한다"고 내전을 비추는 별빛처럼 말했다.

 

그러나 이미 망하고 있었다. 이미 좌파 운동은 여성에 대한 태도를 갖지 않았으므로 몰락하고 있었다 민족주의자들, 개량주의자들, 조합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중도주의자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 내에서도 성폭력 사건은 발생했고 가해자였던 조직의 리더를 보호하는 것이 조직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됐다. 성폭력 사건은 끊임없이 비정치적 사안으로 전락하고 투쟁현안 보다 언제나 부차적인 것이 됐다. 광범위한 2차 가해, 조직적 폭력이 재생산됐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성폭력 사건은 은폐되거나 부인됐다. 그리고 은폐와 부인의 체계적인 이론화가 진행됐다. 사건의 끝엔 대부분의 피해자가 운동사회로부터 축출당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이것이 운동 사회에 내에서 발생했던 모든 성폭력 사건의 기본 특징이었고 완연하게 드러났던 관료주의(조직보위론)였다. 발생한 사건에 대한 독립적인 사유는 실종되고 비판과 토론은 억압됐으며 조직의 방침에 대한 복종만이 재생산됐다. 코뮤니즘과 관료주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그렇게 성평등한 조직문화, 좀더 민주적이고 더욱 문화적인 혁명적 주체의 재구성을 위한 계획은 의식적으로 폐기됐던 것이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운동사회 전체를 휘감고 있었던 가부장-관료주의의 내면을 충격적으로 보여줬다. 

 

민주노조운동엔 여성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도 여성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민주노조운동도, 대공장을 중심으로 설계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도 여성의 부재를 그 특징으로 했다** 여성들은 여성성을 버림으로써, 자신의 독자적인 요구를 삭제시킴으로써 "동지"로서의 이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여성억압과 차별, 성별권력에 대한 인식과 성찰 없이 우리는 계급적일 수도 민주적일 수도 혁명적일 수도 없다. 가부장주의는 관료주의가 기생하고 있는 숙주이고 부르주아 정치로 우리를 빠져들게 하는 늪지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성원들은 조직 내 성별 분업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또한 여성활동가들은 약간의 고민 끝에 자신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일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직접적인 성별분업과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가 간과되었다. 성별분업에 대한 고민이 존재하지 않고 또는 뛰어난 조직이기 때문에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그 자체는 조직이 ‘성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기인한다. 그런데 이 ‘성 중립’이란 몰성적인 것이다. 몰성적인 조직에서는 보편적인 성만이 작동한다. 그 보편적인 성이란 다름 아닌 남성일 것이다. ... 이처럼 성 중립적인 조직이라는 착각은 조직 안의 가부장적인 문화에 대한 인식을 차단하고 조직의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무지를 정당화했다. 그러는 사이 조직 내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토론은 민주적이고 계급적이며 올바른 토론으로 이해되고 정당화되었다([노해투사 콤플렉스] 중에서, 노해투사 성폭력 대책위)>

 

운동의 위계, 계급환원주의

 

"어려운 시기에 정부와 맞서 싸워야 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 조직에 치명적이니 참아 달라"

 

2008년 12월 28일 전교조 위원장인 정진화가 심촌 샘을 만나 한 첫 마디였고 조직된 폭력이었다. 조직보위론과 함께 이 계급환원주의는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있다. 공황기 노동자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피해생존자 심촌 샘의 고통과 절규를 삭제시키려 했던 것이다.

 

노동자계급 중심성은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이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다양한 경향의 운동과 접촉하고 교류하면서 이 운동에 대한 태도를 취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이 운동이 노동자계급의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대중적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으로 도달할 문제이지 낡은 선언만으론 완성될 수 없는 문제다.

 

현시기 이 계급환원주의는 더 중요한 투쟁과 덜 중요한 투쟁, 삭제되어도 좋은 투쟁으로 운동의 위계질서를 도입함으로써 수평적 연대운동을 가로 막는다, 특히 성폭력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등장하는 계급환원주의는 여성 억압과 차별, 폭력의 문제를 노동자계급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바로 그 지점에서, 차이 속에서 협력을 생산해야 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풍부한 대화를 삭제시키면서 “계급의 문제”로 도망가는 수단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부장주의를 지속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관료주의가 주거하도록 길을 열어 놓는다. 특히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할선이 중층화 되고 신분제도가 공고화 된, 계급이 재구성되고 있는 현 시기에 계급환원주의는 여성, 장애, 성소수자, 불안정 노동, 청소년운동의 배제를 낳고 결국 이 운동을 부르주아의 영향력 하에 가두도록 만든다. 오로지 조직노동자 운동에만 역량을 집중하도록 하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조직된 노동자들만의 이해, 조합주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계급환원주의는 조직활동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조직 내에서, 운동 사회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 대한 무관심으로 드러나고 조직적 토론은 배치되지 않는다. 또한 문제해결을 위한 조직적 역량을 투여하지 않음으로써 조용히 문제가 삭제되기를 바라는 분위기를 더욱 굳어지게 한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되고 투쟁하는 시기는 쌍용차공장점거파업이 진행되고 있는 시기였다. 민주노총 대의기구를 통해 피해 생존자의 외침을 삭제 시키려했던 자들은 총파업을 의도적으로 조직하지 않음으로써 쌍용차 공장점거파업을 고립시키고 양보안으로 자본가계급에게 협력하려고 한 자들이었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활동과 쌍용자동차 공장점거파업을 위한 정치조직들 간의 공동의 정치활동은 위계를 갖지 않는 하나의 투쟁이었다. 하지만 이는 분리되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자하자면 자신의 일이 아니었던 만큼 정치조직들의 주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난 2008년 연말 현대미포조선 굴뚝 투쟁에 연대하러 가면서 한 혁명적 사회주의자와 나눴던 대화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는데 성폭력 대책위에 발목 잡히지 않았으면 한다. 가능한 빠르게 잘 마무리 하고 복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난 "노력하고 있다"라고 짧게 답했다. 그를 이미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난 그의 충고(?)에 적극적으로 논쟁을 조직하지는 않았다.

 

난 당시< 노해투사 성폭력 대책위 위원>이었고 현대미포 굴뚝투쟁 지역대책위 집행위원이었다. 그는 성폭력 대책위 활동보다 공황기 노동자 운동을 조직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게 노해투사 성폭력 대책위 활동은 현대 미포 굴뚝 투쟁을 조직하는데 있어 전혀 발목을 잡지 않았다.

 

한 동지의 굳어진 인식과는 반대로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려는 나의 노력은 평등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키우도록 했다 집단적으로 진행된 여성주의에 대한 학습은 내 삶과 운동의 가부장주의를 성찰하는 계기가 됐다. 공감능력과 평등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이 성장할수록 그 모든 조직된 폭력에 타협하거나 위축되지 않은 힘 또한 성장시켰다. 난 불법파견 철폐투쟁을 위해 철탑고공농성을 했던 최병승 동지와 함께 흔들림 없이 현대중공업의 조직된 폭력에 맞서 공세적인 물품공수 투쟁을 조직했다.

 

또한 노해투사 조직노선 평가 작업은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을 휘감고 있었던 관료주의에 대해 직시하도록 했으며 혁명적 전망을 새롭고도 더욱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이는 당시 진행되고 있었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강령투쟁의 연장이기도 했다.

 

나에게는 노해투사 성폭력 대책위 활동과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강령투쟁과 공황기 노동자 투쟁이 계급투쟁의 평면 위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다. 우리 안의 평등을 이루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들이야말로 우리를 더 계급적이고 민주적이며 혁명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성주의, 우리 안의 평등을 이뤄야 할 강령의 문제

 

몇 년전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파업을 조직하기 위해 가장 치열하게 투쟁했던,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이었던 한 여성 동지는 내게 “여성주의자들이 모두 사회주의자(코뮤니스트)는 될 수 없어도 모든 사회주의자(코뮤니스트)는 여성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내게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여성주의에 대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 국가와 자본의 가장 매혹적인 파트너는 여성이었다.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창의성, 여성성, 그녀들의 노동력을 동원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자본의 요구에 여성주의는 능동적으로 편입했다. 여성주의는 “성주류화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국가의 자문기구가 되었다. 영패미니스트들의 정직한 문제제기와 그 성과를 인정하더라도 이 땅의 여성문제는 투쟁을 통해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서 주어진 것, 주류화되고 제도화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주류화의 핵심적인 문제는 혁명적 비판 정신이 사라지고 부르주아 개혁에 안주하거나 포섭되었다데 있다.

 

***< [2009년 ‘사라져라 성폭력’ 울산 강좌 중에서, 이황현아] 난 “여성주의는 기층 여성 노동자들과 결합하지 않았다. 여성노동자들이 주체로 서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주의가 주류화되었다. 여성의 역사를 이해하고 나의 위치를 성찰하는 것. 여성노동자들이 주체화되어야 한다”는 이황현아 동지의 견해에 동의할 뿐만 아니라 “여성주의와 노동운동이 융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가장 적극적으로 내 정치생활의 전망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전투적 여성주의 운동이 ‘성주류화 전략’을 채택하고 국가의 파트너가 되었다는 것, 혁명적 비판 정신이 사라지고 부르주아 개혁에 안주하거나 포섭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코뮤니스트는 여성주의를 폐기해야 하는가? 그렇게 전투적 여성주의자들을 탓하며 여성주의는 중간계층의 운동, 부문운동이라고 치부해야 하는가? 여성주의도 ‘관점’이 중요하다. 바로 이곳에 코뮤니스트 자신의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여성주의 그 자체를 거부하는 건 여성억압과 차별, 폭력에 맞서 성평등한 조직문화, 평등에 대한 예민한 감각으로 무장한 혁명적 주체의 재구성을 위한 코뮤니스트 자신의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것, 관심이 없다는 것, 계획이 없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민주노총 - 각 연맹 - 대공장 집행부로 이어지는 노동조합 관료주의는 가부장제와 결합하여 술과 성 접대, 성매매 문화와 함께 강화되어 왔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가족임금제는 여성노동자들의 우선 해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고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고립시켰으며 조합주의 관료주의를 강화해왔다. 관료주의가 강화될수록 노동자 운동 내부엔 위계가 체계적으로 도입되었고 특히 여성은 핵심적인 활동영역에서 배제되거나 허드렛일이나 조직 내 돌봄 노동에 배치됐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관료주의가 가부장제를 기초로 성장하고 가부장제를 수단으로 하여 더욱 강화되어 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가부장제를 넘어서지 못하는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혁명적 공동체를 구성할 수가 없다. 또한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여성주의 운동은 여성 해방과 일치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정치생활에 위계가 허용되지 않도록, 차이가 제도화됨으로써 권력화 되지 않도록, 비판과 토론이 배제되거나 억압되지 않도록, 우리 안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 코뮤니스트의 여성주의가 필요하다. 여성주의자들이 모두 코뮤니스트가 될 수 없어도 모든 코뮤니스트는 여성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노동운동 내부에 여성주의가 도입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난 여성가족부 앞에서 농성투쟁을 하던 박사랑 동지의 곁에서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불파투쟁도 힘들어 죽겠는데 여가부 투쟁에 함께 할 여력이 없다’는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박사랑 동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노동조합은 공식화하지 않았지만 박사랑 동지의 투쟁을 불법파견투쟁의 부담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그 논리는 ‘불법 파견 투쟁이 마무리 되어야 성폭력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의 전술적 판단일 수는 있지만 더 큰 투쟁, 더 중요한 투쟁을 상정하고 지금 투쟁하고 있는 여성조합원의 독자적 요구를 유보하라고 하는 건 조합주의를 강화할 뿐이다.

 

왜 불법 파견 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하고 투쟁했던 박사랑 동지가 자신의 상처와 고통에 대해 침묵해야 하는가? 불법 파견 투쟁에 대한 현대자본의 탄압과 성폭력, 이 이중의 고통에 힘겨워 하는 박사랑 동지의 이야기에 왜 귀 기울일 수 없는가? 왜 박사랑 동지의 투쟁에 결합하는 것이 불법 파견 투쟁을 계급적으로 강화한다는 것을 사유조차 못하는가? 전투적 비정규직 운동에서조차 여성노동자의 독자적인 요구는 억압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처럼 힘의 집중은 배제가 아니라 평등을 이뤘을 때 가능한 문제다.

 

더 크고 중요한 투쟁을 위해 지금 투쟁하고 있는 여성조합원의 독자적인 요구를 억압하고 삭제시키려는 굳어진 습성과 행위는 그토록 크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불법파견 철폐투쟁을 신분상승운동으로 전락시키고 조합주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자본가계급의 의해 구획된 성별권력 관계, 위계관계, 제도화된 차별을 능동적으로 허용하는 일이며 그 이데올로기에 순종하게 함으로써 수평적 연대운동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박사랑 동지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성장시키기 위해 조직적 토론을 진행하고 불법파견 철폐투쟁과 함께 이 투쟁을 노동조합의 중요한 투쟁으로 배치하면 배치할수록 자본가계급이 설치한 제도화된 차별과 위계질서의 장벽을 넘어 평등에 이르게 될 것이고 우리 운동이 평등하면 평등할수록 불법파견 철폐투쟁은 신분상승운동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계급투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성주의가 노동자운동 밖이 아니라 노동운동 내부에 자리 잡고, 우리 정치활동의 중심에 굳건하게 세워질 수 있다면 처음부터 운동의 위계질서와 대면할 수밖에 없고 조합주의, 관료주의와의 화해할 수 없는 계급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코뮤니스트가 여성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부르주아 정치(관료주의)에 맞선 가장 단호한 계급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배제 없는 수평적 연대운동, 혁명적 정치 운동의 복원을 위해 코뮤니스트는 여성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위계는 없다. 모든 투쟁은 평등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 사이의 차별과 위계, 이로부터 발생하는 억압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 없이 관료주의와의 투쟁을 시작할 수 있는가? 여성 억압을 외면하고서 평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이제 여성주의를 성폭력 사건 해결 지침쯤으로, 하나의 부문운동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평등을 이루기 위한, 우리 운동을 혁명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강령의 문제로 사유해야 한다. 이것이 [하늘을 덮다 -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을 읽고 내가 생각하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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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9 13:29 2014/12/29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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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2013/04/12 20:47

창간특집 인터뷰 -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1호특집-인터뷰김수행성공회대석좌교수.pdf (554.20 KB) 다운받기]

 

 

자본주의는 망해가고 있어!

노동자들의 필요와 욕구를 위한, 새로운 사회로 가야 해!

 

김수행 선생은 한국 맑스주의 1세대를 대표한다.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맑스주의 운동과 이론의 대중화를 위해서 노력해 온 분이다. 선생과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서 골똘히 생각한 문제가 있다면,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선생의 그 ‘원칙’이 무엇인가였다.
인터뷰는 크게 네 가지 틀로 진행했는데, 맑스주의 입문 동기, 현 세계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정세 인식, 새로운 사회와 과거 소련 사회 평가, 복지 담론에 대한 질문이었다. 인터뷰 내내 느낀 답은, 선생의 ‘맑스 원칙’과 ‘노동자 해방’이라는 굳건한 이론적 원칙이었다. 게다가 선생은 학술적인 용어보다는 대중적인 화법으로 쉽게 설명한다. 맑스의 정치경제학을 현학적인, 문헌학적 경향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설명하려는 선생의 노력이 몸에 밴 탓이리라.
선생의 청년 시절인 1960년대는 분명 독재 정권의 암흑시대였다. 선생의 지속된 맑스주의 ‘이론 연구 투쟁’은, 한국 사회 『자본론』 완역으로 빛났다.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의 공산주의 유령은, 그래서, 이렇게 성큼 한국에 다가올 수 있었다.
선생과 인터뷰는 성공회대 연구실에서 3시간 정도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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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2 20:47 2013/04/12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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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2013/04/12 20:47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 - 새로운 주체를 위한 노동계급 역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

[1호특집-탈공업화와새로운프롤레타리아운동.pdf (612.10 KB) 다운받기]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

새로운 주체를 위한 노동계급 역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

 

사회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대공업을 자본주의 생산의 집적과 집중의 필연적 결과물인 동시에 세상만물의 가치를 창출하는 물질적 생산의 중심이자 계급의식의 집약된 혁명 내지는 혹은 사회진보의 기지로 상정해왔다. 그러나 지난 십여 년 간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 촛불투쟁, 희망운동의 경험들은 이러한 가정이 단순히 환상이나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공통된 역사적 경험인바, 객관적인 계급과 당위적인 계급 사이에는 항상 커다란 차이가 있어 왔다. 2차 대전 이후 세 번의 주요한 국제적인 반정부투쟁, 즉 68혁명, 90년대 반세계화 운동, 그리고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벌어진 여러 투쟁들에서 전통적인 공업노동자들은 보조자나 주변부에 머무를 뿐 무대의 주인으로 등장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자들은 공업노동자계급이야말로 자본주의 최후의 순간 분기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힐 메시아라는 철석같은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과연 이러한 믿음이 정당한 것이었는지 역사적 고찰을 통해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전문은 파일로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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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2 20:47 2013/04/12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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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2013/04/12 20:47

[기고]왜 지금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1호서평-왜지금사회주의페미니즘인가.pdf (645.44 KB) 다운받기]

 

 

왜 지금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진부하다는 생각을 단박에 날려주는 이 책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는 파문 같은 책이다. 자유주의와 급진주의 페미니즘, 심지어 국가 페미니즘이 판을 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좀체 만나기 힘든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 논조가 ‘폭력의 시대’의 대항 트렌드를 선도한다. 왜 지금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 ‘좀비 자본주의’를 고쳐 쓰는 것은 불가하며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 방안이 사회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현재 진행형 기획”이다. 여기 서른다섯 명의 페미니스트들은 성과 계급, 인종과 민족을 가로질러 여성억압 이론을 논쟁적으로 제시하고 해방의 정치적 전략을 제안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이론적․정치적 힘과 자원을 보여주는 이들 페미니스트의 기획은 여/성의 고유한 기억과 경험, 풍부한 사례와 분석을 바탕으로 한 발로 쓴 글쓰기이다. 이들의 21세기 여성해방 기획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처방전’이다. 어쩜 이렇게 우리의 고민을 빼닮을 수 있을까? 섹슈얼리티, 가족, 노동과 같은 익숙한 주제뿐 아니라 공공성, 생태, 정치, 사회변혁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이끄는 논쟁 속으로 거침없이 빠져 들어가다 보면, 단언컨대, 이들이 던져준 소용돌이에서 ‘자유’를 맛볼 수 있다.
요즘 한국에서 ‘배신 3부작’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이야기를 꺼내보자. 홈스트롬이 들어가는 말에서 언급한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What Is Socialist Feminism?, 1976년 처음 쓰인 이 글은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고전이라 불리며 2005년 Monthly Review에 재수록 되었고 신기섭이 번역하였다)에서 그녀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진정으로 사회주의, 국제주의, 반인종 차별적, 반이성애적 여성주의”라고 했다.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정치적 일관성을 얻으려면 “다른 부류의 여성주의자들과 구별되는 여성주의자로, 다른 부류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구별되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차별화해야 한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부류의 여성주의,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부류의 사회주의를 구획지어야 한다.” 알 듯 모를 듯 아리송한 말이다. 사회주의자이면서 페미니스트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성찰하도록 이끈다. 이로부터 물경 3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그 답이 이 책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안에 있다. 어머니와 아내로 인식되었던 여자들이 노동자로 인식된 것은 19세기와 20세기 내내 완전한 시민으로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가부장체제’라는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과 같다. 프로이트가 말한 짜는(weaving) 일밖에 못 하는 여성은 없다. 여/성들은 이제 ‘가부장체제’라는 무기로 새판을 짜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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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2 20:47 2013/04/12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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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2013/04/12 20:46

[연재]맑스 죽이기1 :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

[1호이론-맑스죽이기1_변증법적유물론과사적유물론.pdf (758.86 KB) 다운받기]

 

 

 

I. 우리가 알고 있는 맑스

_ 맑스주의는 체계적인 이론인가?

 

II.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의 진의

_ 유물론적 역사파악과 역사적 유물론은 정말 같은 말일까?

 

III.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와 철학

_ 맑스주의는 철학인가?

 

 

 맑스를 만나면 맑스를 죽여라!

 

최근 발간되는 몇몇 맑스주의 개설서가 아직도 스탈린주의 교과서에 바탕을 둘만큼 소련 교과서 체계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이런 상황은 사회주의라는 문제의식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유의미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운동의 입지와 실천의 지평을 협소하게 만들고 있다.

1990년대 소련과 동유럽 붕괴 이후 소련이 사회주의가 아닌 것 같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며 맑스주의를 살리려는 다양한 시도가 등장했다. 이러한 작업은 소위 맑스주의 정통의 계보를 어디까지 살리고 어디까지 죽여야 하느냐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맑스와 엥겔스 역시 인간인 이상 시대적 한계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이라는 방법을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 자체에 적용시키고 그것이 가진 시대적 한계 속에서 합리적 핵심을 포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고민에서 맑스주의를 다시 되짚어 보는 연재를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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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2 20:46 2013/04/12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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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2013/04/12 20:45

다시 ‘소련’을 말하다 -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원제: State Capitalism in Russia)

[1호쟁점-다시소련을말하다.pdf (642.45 KB) 다운받기]

다시 ‘소련’을 말하다 

_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원제: State Capitalism in Russia)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에요! 어리석은 짓이에요! 당신들이 계획하고 있는 게 혁명이란 걸 모른단 말입니까?”
“그래요. 혁명이에요! 어째서 그것이 어리석죠?”
“어리석어요. 왜냐하면 혁명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 당신이 말하는 우리가 아니고 나의 우리 - 혁명이 마지막 혁명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 이후에는 어떤 혁명도 있을 수 없어요.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죠….”     

      
  - 예브게니 자마찐, 『우리들』 중에서

 

 

1. ‘상실의 시대’ 그 이후
 

소련은 무엇이었는가? 소련은 어떤 사회였는가? 역사의 무대에서 소련이 사라진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의 규정에 따르자면 소련의 붕괴는 이른바 ‘단기(短期) 20세기’의 종료를 알리는 것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서부터 사실상 시작된 지난 20세기는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의해 본격화 되었고, 이후 그것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만큼 10월 혁명에서의 승리와 환희를 뒤로 하고 후퇴와 변질의 역사적 단절을 통해 등장한 소련 역시 전쟁과 혁명, 그리고 냉전으로 점철된 20세기의 세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한 축을 형성했다.
때문에 지구 영토의 1/6을 점한 그것도 ‘현실 사회주의’라 불린 소련의 붕괴가 미친 충격은 대단했다. 세계사의 한 시대가 마감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문제는 ‘역사의 종언’을 운운하는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공세 앞에 대부분의 좌파세력은 무기력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동조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러시아 혁명은 역사적인 실수로 매도당했고, 맑스주의는 스탈린주의와 동일시되며 매장당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승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회주의를 향한 전망과 정치는 역사의 오류를 답습하는 구시대적인 것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하지만 소위 ‘상실의 시대’는 영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에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필요충족이 아닌 이윤추구의 경쟁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본색이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사회주의를 절대악으로 보는 전통적인 우익세력이나 사회주의의 실현불가능성을 외치는 자유주의 세력 모두 일반화된 상품생산 사회로서 자본주의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점에 대해서는 하나 같이 속수무책이었다.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가 분리되어 생산과 소비 역시 일반적으로 분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를 매개로 한 생산과 소비의 사슬에서 어느 한 쪽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위기는 발생하고 늘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08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인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IMF 경제위기’로 기억되는 지난 1998년 동아시아 경제위기는 미국 등 세계경제의 호황에 힘입은 수출호조로 일시적인 극복이 가능했지만 현재 가중되고 있는 경제위기는 그 양상이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경제위기의 진원지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미국이다. 때문에 중국 등은 일방적으로 수출하고 미국 등은 일방적으로 수입하는 ‘글로벌 불균형’이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른 것 아니냐는 비관적인 전망마저 나올 정도로 세계경제는 구조적인 위기에 봉착해 있다.
하지만 반복되는 위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경제가 스스로 붕괴된다거나 파국에 이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이는 여태껏 경험한 가장 큰 경제위기였던 20세기 전반기의 대공황을 비롯해 자본주의 체제가 그간 겪었던 수많은 경제위기의 역사가 예증해준다. 오히려 지금의 위기국면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때 이른 낙관도 성급한 비관도 아닌 점차 확산되고 있는 대중의 자각과 정치적 각성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수많은 사람들은 이제 직접 발언하고 직접 행동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지난 2011년은 유럽과 미국, 중동 등 세계 각지에서 경제위기의 고통을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전가하는 자본과 이를 비호하는 권력에 맞서 대중의 직접행동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해로 기억되고 있다.
새로운 대중운동의 가능성과 역동성은 고장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성찰로도 이어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맑스의 『자본론』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가 도래했고, 남한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관심과 목마름이 감지되고 있다. 그만큼 과거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역시 더없이 중요해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세기 동안 존재했고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있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진단과 판단 없이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계급의 폐절로 집약되는 사회주의는 오직 ‘지나간 미래’로서 대중의 기억 속에 봉인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지난날의 ‘불편한 진실’은 결코 우회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다.
이러한 점에서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이하 『소련』)가 남한에서 1993년에 이어 2011년에 재출간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소련의 붕괴와 맞물려 지난 1993년 당시 『소련』이 출간되었을 때의 충격과 놀라움이야 지금에 와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소련』이 맑스주의 운동에서 고전으로서 지닌 역사적인 가치는 아직 유효하다. 지금과 같은 ‘위기의 시대’에서 소련 문제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미래를 기획하고 고민하는 데 있어 여전히 그 방향을 설정하는 시금석의 자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소련을 말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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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2 20:45 2013/04/12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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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2013/04/12 20:44

소련, (국가)자본주의, 그리고 세계혁명 -『서구 마르크스주의, 소련을 탐구하다』를 읽고

[1호쟁점-소련(국가)자본주의그리고세계혁명.pdf (526.26 KB) 다운받기]

소련, (국가)자본주의, 그리고 세계혁명

_『서구 마르크스주의, 소련을 탐구하다』를 읽고

 

얼마 전 김수행은『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한울아카데미, 2012)라는 의미 있는 책을 쉽게 풀어 출간했다. 우리나라에 마르크스의 『자본』을 처음으로 번역하여 대중화시킨 원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러시아 혁명 이후 존재했던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 그 성격을 규정한 적이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의 토론과 논쟁에서도 그들의 국가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앞으로 올 세계혁명에 대한 실천적 쟁점을 정면으로 다루고 언급하지 않았다. 여름방학 동안 <사회실천연구소>가 개설한 『자본』 강의가 끝난 후 수강생들과 함께 종강 뒤풀이를 하는 시간에 막역한 친구이며 동지인 그와 함께하며 그의 책 이야기를 하며 비로소 ‘현실 사회주의’와 미래 사회에 대한 입장을 같이하게 되었다.

 

(전문은 파일로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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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2 20:44 2013/04/12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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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2013/04/12 20:42

우파에 대항하는 ‘좋은 노조’,좌파노총 건설? - 허영구의 『새로운 시대의 총연맹, 좌파노총』 비판

[1호서평-우파에대항하는좋은노조좌파노총건설.pdf (533.23 KB) 다운받기]

 

우파에 대항하는 ‘좋은 노조’, 좌파노총 건설?

허영구의 『새로운 시대의 총연맹, 좌파노총』 비판
  

다시 좌파로?
 

노동조합, 노동운동에서 좌파라는 단어만큼 힘을 갖는 말이 또 있을까? 좌파라는 말은, 정치적 입장을 표현할 때나, 행동을 결정할 때, 세력을 합칠 때, 흔하게 ‘잣대’로 등장한다. 속된말로 “저쪽은 우파고 우리는 좌파야”라는 말을 안 들어본 활동가가 있을까? 이렇듯 좌파라는 말은, 세력과 노선을 가르는 경계 기준이자, 은연중에 우리의 사고를 하나의 공통분모로 형성하는 하나의 단어가 됐다. 그렇다면, 우리는 노조운동, 아니 노동운동에서 좌파란 무엇인지, 대체 좌파는 무엇을 지향하는지, 정확하게 제기하고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이 물음에 답하는 책이 최근에 발간됐다. 민주노총 전직 간부 출신인 허영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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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2 20:42 2013/04/12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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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013/04/12 20:19

형식과 내용의 통일을 지향하는 연극을 위해 - 연극 <시계1>에 대한 평가

[1호문화-연극시계1에대한평가.pdf (500.09 KB) 다운받기]

 

 

형식과 내용의 통일을 지향하는 연극을 위해

연극 <시계1>에 대한 평가
 

들어가며
 

연극을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보통 배우, 무대(희곡을 포함한 부대요소), 관객이라 말한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연극의 3요소라고도 한다. 이 요소들이 극(드라마)적으로 엮여, 한정된 현재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참여하는 이들에 의해 일회적으로 진행되고 끝나는 것이 연극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연극이 끝나도 희곡이란 텍스트로 남지만, 희곡 그 자체는 문학적 측면에서의 기록일 뿐 연극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없다. 요즈음은 공연실황을 녹화하여 영상으로 남길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또 다른 차원의 기록이지 연극은 아니다. 연극을 현장성의 예술이라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연극은 끝남과 동시에 사라지고, 연극에 참여한 이들의 기억과 감상 속에만 남게 된다. 그래서 연극이 그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매체를 통해 상영되는 현대의 영화나 TV 드라마에 비해 전파력의 속도나 범위, 그에 따른 대중 영향력이 매우 작을 수밖에 없다.
말머리에 연극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연극 작업이 갖는 매력을 조금이라도 밝히고 싶기 때문이다. 연극의 일회성과 현재성이 우리 삶을 닮아있어, 연극 작업은 삶에 대한 극적인 고백이라서 매력적이라는 심미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런 연극의 일회성과 현재성 위에서, 배우와 관객이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상호 반응하는 가운데 연극의 극성이 만들어진다는 연극만이 갖는 특징이 얼마나 매력적일 수 있는가를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 중간에 끼어드는 것은 없다. 기획, 연출, 무대미술, 조명, 음향, 의상, 분장, 소품, 진행 등의 다양한 역할과 효과가 있지만, 말 그대로 역할이며 효과이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영화나 TV 드라마의 카메라, 스크린이나 브라운관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카메라나 스크린, 브라운관 없는 영화나 TV 드라마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매체 장르의 본질이다.
이와 달리, 기계적 매체-시스템의 끼어듦 없이 바로 배우와 관객으로 얼굴과 얼굴이 대면하는 연극은 직접행동을 그 원천으로 삼고 있다. 직접행동 가운데 열릴 수 있는 수많은 전망과 가능성은 요즈음의 혁명운동 - 사회주의 정치의 현실에서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생각해 볼 때, 예술적으로 실천해 볼 수 있는 연극은 얼마나 매력적일 수 있겠는가.
그 매력이 연극 실천의 장으로 끌어당기는 중력 같은 힘으로, 행복한 등떠밈으로 그 실천 앞에 서게 한다. 이 실천이 사회적 차원으로 바로 이어져 혁명의 중요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혁명의 과정에서 지치지 않게 힘을 북돋워 주는 재밌는 놀이이며 축제일 수는 있겠지만. 연극은 연극일 뿐이라는 한계설정을 잊지 않는 현실인식 위에서.
 

(전문은 파일로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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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2 20:19 2013/04/1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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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번역 2013/04/12 20:11

프롤레타리아 행정의 몇 가지 요소

[1호기획번역-프롤레타리아행정의몇가지요소.pdf (592.31 KB) 다운받기]

 

 

프롤레타리아 행정의 몇 가지 요소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한 치의 의심 없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혁명은 위로부터 밑에까지 자본주의국가를 파괴했고 부르주아 지배를 처음으로 완전하게 이룩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대체했기 때문이다.(파리 코뮌은 단지 이러한 독재를 위한 전제조건을 만들었을 뿐이다.) 맑스주의자가 이를 진보적 경험(그 후의 반혁명에도 불구하고)으로, 프롤레타리아와 인류 전체의 해방의 길로 이끈 한 걸음으로 분석해야 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전문은 파일로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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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2 20:11 2013/04/1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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