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015/08/09 14:03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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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사회주의노동자신문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등장한지도 이제 거의 20년이 흘렀다. 90년대 초중반 이념적 대중운동의 잔해 속에서 등장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민주노조운동의 보수화․우경화에 맞서 원칙성과 계급성을 지켜내고 2000년대 대공장하청노조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주역이 되는 등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으나 노동자계급 속에 뿌리 내리는데 실패하고 안타깝게도 점차 사멸하는 운동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사회주의노동자신문은 창간 10주년을 맞아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을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1. 한국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형성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을 풍미한 PDR과 NDR 등 스탈린주의 이론에 기초한 민주주의 혁명론과 단절하고 보다 철저하게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한 노동계급 운동을 창출하려 했던 일군의 정치그룹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그룹들은 해외의 사상이 아니라 8․90년대 한국 운동의 독특한 현상인 혁명적 민중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의 혁명운동은 대부분 북한정권과 연계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그 외에는 대개 낭만적 자유주의 운동에 불과했다. 그러나 72년 유신체제가 성립되면서 갓 형성되고 있던 시민사회는 억압되었고,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 권리조차 평화적인 방식으로는 관철시킬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이로부터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은 1970년대 후반 민청학련 세대를 거치며 급진화 되기 시작했으며, 이 세대의 일부인 이태복, 장기표, 장명국, 김승호 등은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더욱 급진화‧민중화‧이념화되었다. 특히 이태복은 1980년 한국에서의 혁명운동은 한국의 독자적인 당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민노련과 전민학련(학림)을 건설했는데, 아마 이를 한국의 자생적 좌익운동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부르주아 지식인이 주도하는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으로서 민중주의는 1980년대 중반 들어 사회구성체 논쟁이라고 불리는 두 차례의 논쟁을 거치며 이론적으로 더욱 완결적인 운동으로 등장했다. 사구체 논쟁의 첫 번째 국면은 1984년대 말 CNP 논쟁으로 나타났는데 이 논쟁에서 전민노련/전민학련 계열이 주장한 NDR이 승리했고, 이는 CA그룹/서노련으로 이어지며 86년까지 민중운동의 주류가 되었다. CNP 논쟁을 통해 민중운동진영 내부에서 개량주의적 CDR론이 기각되고 운동의 사상적 기초로서 ‘맑스-레닌주의’의 위치가 확고해졌다. 일본어 서적을 통해 수입된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입각한 정치투쟁론과 정당 건설론이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1985년 「강철서신」의 등장과 함께 NL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급부상하였다. 「강철서신」은 CA그룹의 엘리트주의에 소외된 “평범한” 운동권들을 빠르게 사로잡았고, NL은 짧은 시간에 CA를 압도하며 다수파로 등장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며 CA그룹은 결국 붕괴되고 민중운동에 NL의 주도성이 확립되었다. NL의 등장 이후 1988~89년 두 번째로 사회구성체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본래 좌파 성향의 소장 연구자들이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에 대해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PDR론을 제기하면서 시작되었지만, PDR을 주장하는 <현실과 과학>과 CA의 노선을 물려받아 NDR을 주장하는 사노맹의 <노동해방문학> 사이의 논쟁도 주요한 축으로 떠올랐다. 이 논쟁은 사실상 보다 정교한 PDR 이론의 승리로 끝났다. 사구체 논쟁을 통해 이른바 ‘맑스-레닌주의’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PDR 이론이 학생운동으로 침투하여 다양한 PDR론이 등장하면서 좌파 다수가 PDR론을 수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1984년에서 1989년까지 이론적 논쟁을 통해 혁명적 민중주의 운동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형성과 동시에 해체될 운명을 맞고 말았다. 민중주의 이론이 사회주의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동구권과 소련 등 소위 ‘현실 사회주의권’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시작으로 급속히 무너져 내렸다. NDR, PDR 같은 민중주의 이론은 근본적으로 스탈린주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1930년대 코민테른에서 발표한 디미트로프 테제에 기초한 인민전선 류의 스탈린주의가 민중주의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민중주의의 특징은 80년대 노동운동의 미약함 속에서 이른바 기층 민중을 운동의 주체로 설정한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 노선이었다. ‘민중주의’라는 용어 역시 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우선 민주주의혁명, 그 다음에 사회주의혁명이라는 2단계 혁명론을 주장한 NDR이나 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주의로 성장·전화 한다는 1단계 2과정 이론을 주장한 PDR이나 모두 당면 과제를 민중을 주체로 한 민주주의혁명으로 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민중주의자들은 인민전선을 통한 민주연합정부를 당면 목표로 설정했으며, 스탈린주의로부터 엘리트주의 전위관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ND가 조악하고 거친 스탈린주의였다면 PD는 그보다 좀 더 세련된 스탈린주의에 불과했다. 오히려 이론적으로 정교했던 PD들이 현실의 소련을 사회주의 모델로 이상화한 더욱 철저한 스탈린주의자들이었다. 그 결과 1990년 소련이 몰락했을 때, 좌파 민중주의는 ND든 PD든 모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로부터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스탈린주의에 대한 의심은 1990년 소련 인민들이 레닌 동상을 끌어내리는 것을 목도하고 커다란 경악으로 바뀌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들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규모 공동전선으로 백기완 선본(이하 ‘백선본’)을 결성했지만 채 1%도 안 되는 득표라는 무기력한 실패를 맛보았다. 이는 이미 이론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한 민중주의 운동의 붕괴를 실제적으로 본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맑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에 대한 회의가 지식인 사회를 휩쓸었으며 지식인 사회는 급속히 포스트 담론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민중주의 운동은 급속히 붕괴했다. 무엇보다 김영삼 정권의 등장과 함께 민주주의 운동 전선이 해체되었다. 초기 김영삼 정권의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실시 등 급속한 개혁정책은 높은 지지를 이끌어냈고, 혁명적 민주주의자들 대부분이 제도 내의 민주주의자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변절자들이 그러했다면, 운동진영 내부에서도 우경화 흐름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1991년 당시 가장 큰 정치그룹이었던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폐기한 이른바 신노선을 제기했다. 기존 민중주의 정치조직들의 노선전환은 합번적인 민중정당 건설운동으로 현실화되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인민노련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를, 사노맹은 사회당추진위원회(사추위)를 건설했고, 여타 다양한 PD그룹들은 <민중회의>로 결합하여 본격적인 합법 정당건설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이 주도한 백선본의 강령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지향하는 정치노선은 사민주의와 유로코뮤니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정치적 절충주의에 불과했다.  

 
이러한 우경화 흐름을 비판하는 민중주의 운동 내의 좌익 세력들로부터 90년대 초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맹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두 가지가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이론)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데, 첫째 소련 붕괴의 충격을 틈타 국내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IS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둘째 사구체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PTR론의 등장이다. 기존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의심은 1989년 천안문 사태로부터 시작되었다. 천안문 사태 당시 거의 모든 운동진영이 이를 반혁명에 대한 당연한 진압이라고 보았으나 삼민동맹만이 이를 공산당의 배신행위이자 반(反)민주주의적 폭거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발전하는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1990년대 초반에 국내에 들어온 IS(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지지자들이 SWP(영국 사회주의노동당)의 이론을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토니 클리프의 이론이었다. 국가자본주의론은 토니 클리프만 주장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가 1940년대 주창한 국가자본주의론은 소련에 대해 그렇게 비판적인 이론도 아니었다. 이 이론은 1960년대를 지나며 IS 내부에서도 망각된 이론이었으나, 90년대 초 동구권 몰락 이후 트로츠키주의 진영 내부에서 타락한 노동자국가론을 지지하는 트로츠키주의 운동 주류와 IS간에 국제적인 논쟁이 새롭게 진행되었다. 이 논쟁은 사실상 IS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국내에서도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의 충격과 혼란을 틈타 빠르게 전파되었다. 천안문 사태를 비판한 삼민동맹 일부 역시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받아들이며 IS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IS를 이론주의, 엘리트주의, 지식인 운동이라고 비판하며 분리하여 <혁명적국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이하 ‘혁사노’)>를 형성했다. 


한편 1990년대 전진출판사는 레닌저작선집을 출판하는 동시에 PDR론과 NDR론을 비판하며 한국에서 당면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혁명(PTR)이라고 주장하는 일련의 팸플릿들을 발행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소박한 물음에서 출발했다. PD와 ND가 한국사회를 아무리 그 앞에 ‘신식민지’라는 제한을 둔다하더라도 가장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인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한다면, 왜 한국에서 혁명의 과제가 굳이 민주주의혁명이 되어야 하는가? 당시 전진 그룹이라 불리던 이 그룹은 이로부터 한국사회의 당면 혁명을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사회주의혁명이라고 명확히 정식화하였다. 그러나 그밖에는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스탈린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던 전진 그룹은 90년대 초반 한국의 운동진영을 강타한 이론적 혼란기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으로 PTR론을 받아들인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들 (이하 ‘노해투사’)>, <해방의 심장 (이하 ‘해심’)> 같은 새로운 그룹이 등장했고, 이 그룹들의 조직원들은 2000년대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까지 인적으로 이어지며 이 운동의 주요한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1990년대 초에 등장한 혁사노, 해심, 노해투사를 최초의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민정부’를 표방하는 김영삼 정권 출범 이후 유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민중주의 운동단체들의 전반적인 합법화 단계를 밟았지만, 비합법 운동을 유지하는 조직들에는 탄압이 집중되었다. 이로 인해 계급동맹, 혁사노, 노해투사 등 비합법 정치조직들은 93~95년 사이 공안기관의 국가보안법 탄압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이 속에서 초기 사회주의 그룹들은 사실상 소멸했다. 


초기의 비합법 사회주의 그룹들은 국가의 탄압으로 활동이 정지되었지만 1994년 말부터 민중주의 운동의 전반적인 우경화 흐름 속에서 일부 민중주의 그룹에서 좌익적인 분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느 정도 노동자투쟁이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의 반영이었다. 94년에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의 파업 투쟁이 있었고, 95년에는 한국통신노조의 파업이 벌어졌으며, 같은 해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양봉수 열사의 분신과 열사투쟁을 계기로 현장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에서도 95년부터 김영삼 정권의 등장 이후 잠시 사라졌던 화염병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4년 말에서 1995년 초, 민중주의 운동세력의 주요한 축 중 하나였던 사노맹/전학련에서 좌익적인 분파가 분리하여 <새벽별>과 <사회주의학생연맹 (이하 ‘사학련’)>을 건설했다. IS에서도 특유의 인민전선 활동에 반발하며 전투적·노동자적 지향을 보이던 세력이 분리되어 「노동해방의 불꽃 (이하 ‘노해불’)」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초기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잔존세력들과 두 번째 분화한 그룹들이 이합집산하며 96~98년 사이에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다시 형성되었다. 90년대 초반과 달리 이들은 자신들을 기존의 좌파 운동과 명확히 구별되는 다른 운동으로 규정했으며, 대략 96년경부터 이들이 발간하는 팸플릿에 “비합법 사회주의” 혹은 “혁명적 사회주의”라는 말과 함께 기존 운동을 비판하는 ‘민중주의’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공통적으로 기존 스탈린주의적인 민중주의 운동과 의식적으로 단절하려고 노력하면서 스탈린주의와 구별되는 맑스-레닌주의의 원칙들을 사상적 깃발로 견고히 내세우려 했다. 90년대 말에 들어가면 이들 그룹들은 거의 모두 IS의 국가자본주의론을 받아들여 소련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했다. 민주집중제 원리에 기초한 비합법 전위정당의 건설,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혁명, 인민전선 같은 상층연대 방식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투쟁에 입각한 전술, 평의회 권력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등이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내세운 공통의 지반이었다.


이런 지점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은 노해투사와 사학련 일부가 결합한 <노동해방의 길 (이하 ‘노해길’)>의 흐름, 새벽별에서 전환한 <빛> 그룹, 해심과 몇몇 소규모 학생그룹들이 결합한 <노동자권력 쟁취를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들 (이하 ‘노투사’)>, 노해불과 혁사노 잔존 세력이 결합한 <선진노동자의 길 (이하 ‘선노길’)> 정도로 볼 수 있을 듯하다. <현장과 정치>와 <신질서> 그룹도 흔히 이들과 유사한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으로 꼽히지만, 기존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에서 타락한 노동자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장과 정치>나 유고식 자주관리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운 <신질서>는 여러 면에서 민중주의의 잔재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는 면에서, 그리고 이후 행보를 보아서도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90년대 후반까지 이데올로기 세력으로 존재해오던 이들 그룹들은 97년 총파업과 IMF 이후 이어진 구조조정 분쇄투쟁을 계기로 선전 활동에서 현장투쟁에 대한 개입으로 활동의 중심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현장이전을 통해 주로 대공장 하청노동자운동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그 속에서 전투적 선진노동자 운동에 개입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즉,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이론과 전투적 조합주의의 결합을 꾀했던 것이다.

 

2. 현실 노동운동으로 결합과 조합주의


90년대 후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여전히 미숙한 운동이었다. 핵심인물들은 대개 30대 초중반을 넘지 않았고, 조직원들도 대부분 20대 초중반에 불과했다. 합법주의․의회주의로 넘어간 노회한 민중주의자들에 대한 거부와 적대감 속에서 이들은 가진 능력에 비해 완전히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야 한다는 지나치게 큰 과제에 짓눌려 있었으며 주장은 과장됐고 편협했으며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활력이 있었다.


80년대 민중주의자들의 맑스주의 문헌에 대한 이해는 천박했다. 제대로 번역된 맑스주의 서적이 거의 없다시피 한 현실에서 사실상 레닌의 단 두 개의 저작(<무엇을 할 것인가?>와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의 두 가지 전술>)에 남미에서 나온 종속이론과 스탈린주의 교과서를 버무린 것이 민중주의 이론의 전부라 해도 그다지 과언이 아니었다. 민중주의자들은 맑스와 레닌의 원전에 무지했으며, 스탈린주의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된 로자 룩셈부르크, 그람시, 트로츠키 및 유럽의 좌익공산주의 등 다른 혁명적 전통들의 이론과 실천에 대해서는 더더욱 무지했다. 소련을 포함한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붕괴한 뒤 옛 민중주의자들은 제도권 민주주의자로 변절하지 않으면 스탈린주의의 변형물인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를 거쳐 대부분 이른바 포스트주의로 넘어갔다. 합법주의 민중주의자들은 대개 사민주의나 유로코뮤니즘적인 경향으로 빠져들었다.  


한 세대 전체가 민중주의적 인식과 이데올로기에 깊이 침식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어느 정도 이론적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민중주의자들이 철지난 이론이라고 버린 맑스와 레닌, 로자, 그람시, 코민테른 테제 등을 파고들며 자신들의 노선을 정립하려 노력했다. 예를 들어 그람시를 시민사회 이론가로 해석한 인민노련/진정추와 달리 혁사노는 초기 그람시의 공장평의회 이론을 보다 좌익적으로 해석해서 아직 총회민주주의의 전통이 식지 않은 한국의 대공장 노조운동에 적용하려 했다. 이는 향후 십 수 년 동안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실천을 규정한 중요한 이론적 성과였다. 


이런 노력 속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IS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토니 클리프 류의 국가자본주의론으로 현실사회주의를 규정했으며 이 역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것은 기존 민중주의자들의 국유화 사회주의와 단절하고 소비에트(평의회) 형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노동자대중투쟁에 대한 적극적인 강조로 귀결되었다. 


때문에 이들의 초기 활동은 불가피하게 각자의 연구 성과를 집약한 기관지 발행과 학습 중심의 활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미성숙의 시기를 거치며 생긴 불가피한 하나의 편향일 뿐이었다. 하지만 노해길 같은 그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보편적으로 거쳐야 할 선전적 단계가 있다고 표명했다. 다른 그룹들은 이를 선전주의라고 비판했지만, 96년 경 울산으로 중심을 옮겨 대공장 현장조직 운동과 결합한 선노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회주의 그룹들 역시 활동방식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고양되는 대중운동은 이들이 선전활동에 머무르기 어려운 환경을 제공했다. 


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가는 사이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 내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논쟁이 벌어졌다.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두 논쟁은 총파업 논쟁과 그에 뒤따른 선전주의 논쟁이었다. 1996년 말에서 97년 초, 예상치 못했던 총파업 투쟁이 터져 나왔다. 87년 6월 항쟁과 이어진 7․8․9 노동자대투쟁으로 급속히 고양된 남한의 대중투쟁은 89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노동자 대중투쟁은 91년 열사투쟁의 패배로 급속히 꺾였고 92년 문민정부 등장 이후 완연히 하강세를 탔다. 이를 반영하여 첫 번째 노동운동 위기 논쟁이 벌어졌는데, 기회주의적 세력들은 전투적 조합주의의 한계를 제기하며 노동운동이 보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노선으로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은 94년 전기협 투쟁, 95년 한국통신 파업투쟁 등으로부터 이미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95‧96년 NL을 비롯한 반정부 세력들에 대한 강력한 공안탄압이 쏟아졌지만 96년 말 노동법 날치기 사태와 함께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조직노동자들의 투쟁이 격렬히 터져 나와 정권을 강타했다.  


총파업 투쟁 당시, 새벽별 그룹은 <혁명적사회주의자(RS)>라는 명의로 「활화산」이라는 유인물을 발행하며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회와 가두투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하지만 민중주의 운동에서 갓 분리해 나온 새벽별의 인식은 아직 민중통일전선(즉, 인민전선)이라는 민중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혁사노, 노해투사, 해심 같은 초기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은 모두 민중주의자들이 주도한 92년 백선본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새로운 운동을 위해서는 이들과 완전히 단절해야한다는 공통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노맹의 잔존세력에 뿌리를 둔 새벽별은 민중회의와 사추위가 통합한 민중정치연합(민정련)에 대한 개입노선을 버리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는 민주주의 과제가 포함된 사회주의 혁명을 당면 과제로 제시하고 전선체를 소비에트의 맹아라고 주장하는 새벽별의 이론적 한계로 드러났다. 이는 전진 그룹을 따라 당면 혁명을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혁명으로 규정하고 소비에트를 코뮌 국가라고 이해한 노해길이나 노투사, 그리고 혁사노의 영향으로 공장평의회야말로 소비에트  같은 평의회 권력의 맹아라고 생각한 선노길의 인식에 비해 뒤떨어진 것이었다.

 

(전문은 파일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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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9 14:03 2015/08/0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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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5/08/09 13:46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내일?

공산주의 운동의 전면화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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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로|국제코뮤니스트전망 

 

1.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무엇이었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을 풍미한 PDR과 NDR 등 스탈린주의 이론에 기초한 민주주의 혁명론을 받아들인 기존 운동과 단절하고 보다 철저하게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한 노동계급 운동을 창출하려 했던 일군의 정치그룹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사회주의노동자신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엄밀한 구분은 별개로 하더라도, 이 용어 앞에 ’혁명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맑스주의 연속성과 혁명 전통을 벗어난 조류가 너무 많아서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직 규모나 활동 성과와 관계없이 ‘프롤레타리아 계급(혁명의 주체)의 세계혁명(아래로부터의 노동자평의회 국제권력)을 통해 자본주의 착취체제를 폐지(임금노동, 상품생산, 화폐 폐지)하고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운동’ 을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이라 규정할 수 있겠다. 여기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맑스에게 이 두 개념은 동의어였다)는 당이나 국가 수준에서 실천할 수 있는 조건이나 강령이 아니라, 국가, 상품생산 및 가치법칙의 폐지인, 자본주의 사회 관계를 의식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사회운동이다. 그동안 존재했던 한국의 이른바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이 이 규정에 얼마만큼 부합하는지는 별도의 토론과 검증이 필요하다.


필자는 발제자(사회주의노동자신문)의 운동 평가와 문제의식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토론의 폭을 넓히기 위해 한국 사회주의 운동을 세계적인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 흐름과 비교하면서 평가해 보았다.


먼저 세계적인 혁명운동의 흐름에 비해 한국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왜 취약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보겠다. 여기에는 현재의 상황도 포함된다.


첫째, 한국의 노동자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한국전쟁 이후 40년 넘는 오랜 기간, 그리고 계급투쟁의 결정적인 시기에 세계적인 공산주의 운동, 혁명전통과의 단절이 있었다. 


현존하는 국제 혁명조직들은 맑스의 ‘공산주의자 동맹’에서 시작하여 10월 혁명의 결과로서 창설된 제 3인터내셔널에 이르기까지의 노동자 운동의 혁명적 사상과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것은 19세기 말 기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해온 제 2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에서 시작하여, 1914년 제국주의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서 국제주의를 방어했고,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수호했으며, 1919년 코민테른 창설에 공헌했고, 1920년대 코민테른 내부의 기회주의 흐름에 대항해 저항하면서 하나의 국제적 흐름을 형성했다. 그 후 코민테른의 타락과 스탈린주의 반혁명에 맞선 투쟁, 자본의 좌파로 자리 잡은 스탈린주의,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김일성주의 등 사회주의 참칭 세력과의 투쟁, 그리고 자본주의 방어역할을 하는 사민주의, 개량주의, 민족주의 세력과의 오랜 투쟁을 해 온 혁명적 전통이다.


반면 한국에서 오랜 기간 혁명전통의 단절은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김일성주의)이 운동의 다수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무기력했고, 사상 이론적 취약성과 경험부족에 인해 잦은 내부 분열과 대중운동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고통을 겪게 하고 있다.


둘째, 사회주의 선전그룹에서 혁명이론-조직노선/체계를 갖춘 혁명조직으로 나아가기 위한 강령 토론-논쟁의 과정이 없었거나 부족했다. 


1930년대 이후 기나긴 반혁명의 암흑기에도 살아남은 국제 혁명운동세력들은 68혁명 이후 분출한 계급투쟁의 물결과 함께 유럽을 중심으로 남미, 북미, 아시아 일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새롭게 부활하게 된다. 그리고 각개 약진하던 이들은 1970년대 초부터 일련의 국제대회를 개최하여 국제그룹을 형성하고, 1977년에는 전 세계의 혁명적 공산주의 그룹에 국제대회를 제안하여 이탈리아에서 제1차 대회를 하게 된다. 국제대회 참가 그룹들은 이미 내부강령을 갖고 있거나 여러 가지 쟁점들에 대한 토론의 결과 국제적인 수준의 강령을 정립하게 된다. 국제대회의 과정에서 10년 넘는 지난한 강령토론과 사상투쟁의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국제적 수준의 행동통일과 혁명적 공산주의 세력의 국제적 재 조직화 가능성, 그리고 세계혁명당 건설의 전망은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최근에 한국에서 쟁점이 되었던 강령토론의 주제들 대부분은 사실은 이미 40년 전 또는 8~90년 전에 깊고 풍부하게 토론되었던 내용이었고, 한국의 강령논의는 안타깝게도 여기서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민주집중제 원리에 기초한 비합법 전위정당의 건설,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혁명, 인민전선 같은 상층연대 방식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투쟁에 입각한 전술, 평의회 권력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등이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내세운 공통의 지반이었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사회주의노동자신문)

 

한국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큰 성과라 할 수 있는 위와 같은 공통의 지반은 혁명조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당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국내외의 여러 혁명세력과 강령토론을 추진했어야 하는데, 시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검증받을 수 없었고, 독자적으로라도 완성된 강령으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개별운동 수준에 머물렀다. 지금도 이와 같은 소규모 그룹이나 분파의 역할은 미래의 ‘당 노선’을 올바르게 하는데 투쟁함으로써 계급투쟁이 복원될 때 본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셋째, 한국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가장 큰 취약점은 역사적인 계급투쟁과 혁명운동의 경험 부족이며, 이것을 간접적으로 보완해줄 국제적 교류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운동이 전반적으로 폐쇄적일 수밖에 없었고, 특정인물이나 정파의 조직 장악이라는 폐해를 낳았다.


혁명정치는 혁명가들이 계급투쟁에서 배운 경험을 일반화하며 계급운동에 투쟁의 목표와 전망을 전달할 때 발전한다. 길게는 100년, 짧게는 40년 넘는 계급투쟁과 혁명 운동의 경험 속에서 운동의 상승과 퇴조를 총체적으로 반영하여 장기적 전망을 갖고 현실 운동에 임하는 것과 불과 5~10년 정도의 제한된 경험을 모든 운동에 인위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본질에서 다르다. 파시즘 아래서도 살아남아 일상적인 선전전과 현장운동을 이어나갔던 이탈리아 공산주의 좌파 혁명가들의 경험, 68년 혁명 이후 다양한 사상 운동적 조류 속에서도 혁명적 흐름을 재 조직화하고 공산주의 운동의 지평을 넓힌 공산주의자들의 경험, 노조를 넘어선 수많은 와일드 캣 파업과 파업위원회, 대중총회에 함께 한 유럽, 북미, 호주 공산주의 투사들의 노동자 민주주의의 경험, 수많은 국제대회와 포럼, 캠프를 통해 얻게 된 토론문화, 연대의 기풍은 공산주의 운동의 소중한 자산들이다. 이런 경험들이 공유되지 못하거나 배척당할 때 운동은 한 국가, 지역에 갇히게 되고 연속성을 갖지 못한다. 


안타깝지만 한국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취약점은 지금도 대부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수많은 혁명운동의 경험을 공유하고 세계적인 계급투쟁의 흐름에 함께 하기 위한 공산주의자 국제대회 참가-개최 등의 공동 노력은 아직도 보이지 않고 있고, 사노위를 계기로 잠시 점화되었던 강령토론도 중단된 상태이다

 

2. 1992년 이후 사회주의 운동의 간략한 평가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은 출범 문서와 대선평가입장을 통해 1992년 이후 사회주의 정치운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1992년부터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이거나 공개영역으로 나온 사회주의 서클들은 선거주의와 의회주의로 경도되면서 합법·개량주의로 나아갔다. 특히 1997년은 양날개론으로 표현되는 민주노총의 건설과 그에 기반을 둔 민주노동당의 건설로 혁명적 사회주의의 비공개영역과 적대적으로 분리되었다. 2002년의 대선은 이러한 관계설정을 마무리하는 과정이었다. 그 당시 <노동자의 힘>과 <사회당>은 선거전술에 집착하여 혁명정당 건설을 통한 혁명주의의 복원으로부터 이탈했다. 혁명적 사회주의 서클과 함께 혁명당을 건설하려는 노력은 무산되었다.


2003년 <사회주의정치연합>은 중도주의와 선을 긋고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의 연대와 단결을 위한 매개의 역할을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노력의 일환으로 2005년 7월 <혁명적 맑스주의자 모임>의 제안이 있었다. 그 제안은 다음의 몇 가지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자본주의의 표면적 사멸이라는 역사유물론에 근거하여 비맑스주의의 역사적 오류를 비판·극복해야 한다는 점,


둘째, 자본주의의 객관적 구조와 혁명적 주체의 변증법적 결합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근거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실천을 통한 진정한 계급혁명을 이룩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인식했다는 점,


셋째, 과잉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축적위기가 자본의 전략으로 모면될 수 없고 전쟁과 파시즘이라는 야만에의 회귀로 나아가, 결국 인류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점,


넷째, 1920년대 초반의 세계 혁명의 실패, 스탈린주의의 등장은 반혁명의 역사적 반동으로 나아갔고, 이러한 역사적 퇴행에 도움을 주었던 사회민주주의, 무정부주의,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의 유지·강화를 보완하는 반혁명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했고, 혁명세력의 복원을 가로막았다는 점,


다섯째, 지금까지의 인터내셔널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진정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목표로 한 각각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당 건설의 과제가 우리에게 놓여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권력기관인 노동자평의회와 변증법적 결합으로 혁명을 실천해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었다는 점이다.


그 모임의 제안은 세계혁명을 향한 세계 혁명적 맑스주의(사회주의) 진영의 국제주의 실현을 위한, 세계 코뮤니스트 연대를 위한 것이며, 그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의 혁명적 맑스주의자(사회주의자)들도 함께 하면서, 우리의 혁명적 운동을 복원해내고 고립·분산되어 각개약진하고 고군분투해왔던 세력들이 새로운 각오로 힘차게 연대 전진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을 하자는 취지였다. 2년간에 걸친 진지하고 열띤 토론을 기반으로 이 모임은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이하 ‘사노련’)>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동의한 주체들을 중심으로 2008년 2월 출범하게 된다. 


혁명적 사회주의와 혁명당 건설을 공개적으로, 대중적으로 선언하고 계급투쟁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이 흐름은 새로운 시도로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역사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혁명운동의 새로운 주체 창출이 아닌 운동의 몰락 속에서 발생한 단기적 연합운동이었기에 그 한계는 분명했다. 사노련은 서클연합으로 출범했기 때문에, 결합하지 못한 서클과 혁명주의자, 그리고 중도주의 세력 속의 혁명인자들이 다시 한 번 공동실천을 통해 한 걸음 전진하자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 (이하 ‘사노위’)> 결성제안은 더욱 실험적인 시도였으며, 1년 반 동안의 공동실천은 결국 강령, 조직, 전술의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종지부를 찍는다.


사노위에서 분화된 세력이 <노동자혁명당추진모임 (이하 ‘노혁추’)>와 <노동해방>으로 각개약진하고 사노련의 잔존그룹은 <혁명적노동자당건설 현장투쟁위원회 (이하 ‘노건투’)>로 각각 실천하게 된 것은 혁명 세력의 분열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적인 실천을 하면서 계급으로부터 검증받는 과정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12년 총선 선거전술 문제로, 노혁추에서 좌익공산주의 세력이 분화한 것은, ‘종파적 철수’가 아니라 ’정치적 차이’의 결과였다. 그 차이는 혁명당 건설을 둘러싼 정치활동의 전망에 있었다. 

그리고 2012년 대선은 노동자독자후보에서 비판적 지지까지 늘 반복되는 선거전술의 재탕과 이합집산 속에서 두 명의 노동자 후보, 민주노총의 무능, 저조한 득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 사회주의 정치의 실종 등 최악의 선거결과를 초래했고 이는 노동자운동 전체의 쇠락을 가속하는 역할을 했다.


첫째, 변혁모임, 사노위, 노혁추 등은 대선 시기 정세개입(야권연대 반대)을 통해 대중투쟁을 촉진하고 이후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기조 하에 후보전술을 구사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 노선의 후퇴와 지신들의 기반인 전투적 노조운동의 위기 상황에서 정세개입과 당 건설 당위의 압박이 작용한 결과 무리한 선거전술을 사용했다. 이는 선거 이후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라는 퇴보한 계급정당건설 노선으로 나타났다. 또한, 태생적으로 선거주의를 안고 나왔기 때문에 합법과 비합법, 혁명과 개량, 투쟁과 타협 사이의 중도주의 노선에서 계속 퇴보할 가능성이 커졌다. 


둘째, 노건투 등은 역량부족, 후보전술 절차와 선거 강령상의 문제, 그리고 진보신당 참여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며 노동자 후보 캠프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들은 아쉽게도 부르주아 선거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부르주아 선거참여를 전술의 하나로 판단하는 낡은 사고를 보여주었다. 또한, 강령에 입각한 당 건설이라는 원칙과 낮은 차원의 공동전선 형태인 변혁모임 참여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후퇴하거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셋째,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은 부르주아 선거와 후보전술 자체를 반대하였다. 즉,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원칙을 강령수준으로 판단하여 “노동계급에는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하는 투쟁만이 계급 간의 교착상태를 깨고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 수 있다. 선거가 아닌 대중의 직접행동으로, 대리인과 우상을 내세우지 말고 투쟁하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부르주아 정치를 거부하고 노동자의 방식으로 직접정치를 실현해 나가야 할 것”임을 주장했다.
 
현재 더 이상의 연합운동이나 활동가 중심의 당 건설 흐름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제대로 된 반성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혁명주의 세력의 노선 투쟁을 통한 경쟁과 연대·단결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동안 혁명세력이 반혁명적 스탈린주의 세력이나 민족주의 세력, 각종 기회주의 세력과 대적 전선을 공고히 하는 데 주력해 온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독자적인 사상노선으로 논쟁하고 계급으로부터 검증을 통해 신뢰를 획득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노선투쟁의 역사가 이미 유럽과 러시아 등지에서 100년 전부터 있었음을 상기하고 있다. 세계 혁명당 건설을 목표로 노동자 국제주의를 실현하려는 현 단계 한국의 혁명적 맑스주의(사회주의) 세력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맑스주의 사상과 실천의 원칙을 분명하게 내세우고 노선투쟁을 해야 하고, 진정한 의미의 정치 원칙·강령의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공산주의 좌파」의 원칙과 투쟁을 계승· 복원하고, 다른 혁명주의자들과 논쟁하고 토론하며 다시 연대하고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3.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내일? 공산주의 운동의 전면화를 위하여


운동이 전반적으로 퇴조하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여전히 극소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위와 같은 평가는 우리에게 수많은 과제를 남겨주었다. 낡은 것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운동을 지배하고 있다. 낡은 것뿐 아니라 오히려 운동을 과거로 돌리려는 세력이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낡은 것과의 단절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출해야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내일은 한국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의 현재를 넘어서는 일이자, 모든 가능성을 최대한 현실로 바꾸는 일이다.
여기서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공산주의 운동과 과제에 대해 몇 가지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1)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현재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의 현재는 다음과 같이 암담하다.


첫째, 한국사회에 수세대에 걸쳐 오랜 기간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혁명적) 공산주의에 대한 오해와 반감은 지금 세대가 스스로 극복할 수 없고, 반공주의와 스탈린주의 모두에 경도되지 않은 새로운 세대에 의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둘째, (혁명적) 공산주의와 적대하는 세력인 민족주의/스탈린주의의 장기적 운동지배는 운동사회 내부모순마저 적대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자본(주의)과 투쟁하면서 이들과의 투쟁도 반드시 병행하여 대중(운동)에서 분리해야 한다.


셋째, 공산주의 운동이 극복하고자 하는 낡은 운동(조합주의, 의회주의)이 내부 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굳어져, 새로운 주체 창출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새로운 운동이 내부에서 생겨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외부에서 내부로 진입하기에도 장벽이 너무 높다.


넷째, 국제주의 의식과 공동행동 경험부족으로 계급운동과 정치운동 전체가 국내 운동에 갇혀 있다. 작업장, 고용형태, 업종, 정파, 지역, 국가에 갇힌 운동은 배타적 노동자 정서와 자본의 계급 분리 정책과 부합하여 공산주의 운동의 미래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2) 공산주의 운동의 가능성


한국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오랜 기간 단절과 늦게 출발한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 있다. 그 가능성과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산주의 운동은 자본주의 쇠퇴시기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서 새로운 주체와 운동에 부합하는 가장 현실적인 운동이다.


둘째, 맑스주의 연속성과 혁명적 전통을 계승한 사상적 명료함과 풍부함으로 운동의 최종목표를 밝혀 다양한 계급운동을 정치적으로 모아나갈 수 있는 혁명적 운동이다. 


셋째,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은 현실에 존재하는 국제적인 혁명운동이며, 유사한 경향의 국제조직과 실질적인 연대세력이 다수 존재한다.


넷째, 현재(미래)의 공산주의 운동은 조직운영/토론문화 등에서 위계질서나 권위주의를 제거한 운동이기 때문에 새로운 운동주체들이 접근하기 쉽다.


다섯째, 삶과 운동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당-평의회, 계급의식에 관한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여 인간의 사회적 삶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발본적인 운동이다. 


3) 새로운 공산주의 운동이란?


그렇다면 위와 같은 한계와 가능성 속에서 공산주의 운동은 어떠해야 하는가?


첫째, 공산주의 운동은 총체적이어야 한다. 모든 것을 정치사상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으며 여성, 소수자, 장애인, 빈민, 반인종주의, 이주 운동 등과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공산주의 운동을 보다 창조적이고 풍부하게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정치뿐만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 문화와 심리 등 인류의 삶을 규정하는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여, 자본주의 가치법칙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수 있는 전 인간적 운동이어야 한다.


둘째, 공산주의 운동은 혁명적 계급의식의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산물이므로 개별 활동의 연합이 아니라, 집단적 활동, 지속성, 실현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공산주의 조직의 생존 기반이자 물질적 힘이다. 혁명 강령과 공산주의 노동자의 집단적 존재여부가 당대의 계급투쟁 수준의 반영이다.

 
셋째, 공산주의 조직은 과거 왜곡된 전위당 노선이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과 같이 일방적 지도체제와 획일적 성원 규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식의 균질화에 기반을 둔 자발성, 다양성, 창조성을 담아내는 조직체계를 가져야 한다. 모든 조직 활동은 총회에 책임을 지는 수평적 직접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며, 내부 소통에서는 이론과 지식, 정보에 대한 정직한 표현과 전달, 그리고 토론에서 상호 모욕금지를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4)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 쇠퇴하는 자본주의 끝없는 위기상황 속에서 새롭게 분출될 계급투쟁에 능동적이고 장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위해 공산주의 운동은 대중(운동)과 직접 만나 공개적 활동을 펼쳐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공산주의를 염원하고 공산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동지들과 '코뮤니스트(국제주의) 그룹'을 형성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그룹은 지역/현장/활동공간에서 대중과 직접 만나거나 실천하는 기본단위이자 공산주의 운동(조직)의 근간이 될 것이다. 코뮤니스트(국제주의) 그룹은 모든 계급투쟁에 함께하면서 계급투쟁의 가장 혁명적인 부분과 만나, 연대와 공동 활동에 대한 원칙을 세우고, 유연하면서도 원칙적인 코뮤니스트/국제주의자 연대의 전형을 세워나가야 한다. 


둘째, 특정 공산주의 그룹의 확장이나 몇몇 그룹들의 정치적 연합이 혁명당 건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공산주의자들은 '코뮤니즘 운동의 확산'이라는 목적에 맞게 열린 자세로 '세계혁명당의 국제적 분파'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먼저 그동안의 당 건설 운동 실패에 대해 평가, 반성하고, 새로운 조건에서의 공산주의자(노동자)당 건설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주체형성과 강령건설에 나서야 한다. 새롭게 건설될 공산주의자(노동자)당은 세계혁명당 건설에 복무하는 혁명조직이어야 한다.


셋째, 국제적인 수준에서 공산주의, 국제주의 세력과의 교류와 연대를 활성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장기적으로 동아시아와 한국에서 공산주의자 포럼과 국제대회를 개최하고, 아시아에서 공동의 정치 입장을 발행하고, 국제주의 원칙에 따른 공동행동을 통해 아시아 지역 수준에서 계급투쟁 개입을 실현해야 한다.


넷째, 전면전인 이데올로기 투쟁과 장기적이고 총체적인 계급의식 발전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새로운 혁명의 주체가 물리적 힘을 갖기 위해서는 주체의 ‘계급의식’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새로운 주체가 노동자(프롤레타리아)계급 고유의 계급의식 - 적대계급과 계급투쟁에서의 ‘전투성(자발적 행동)’ ‘단결성(투쟁의 확장)’ ‘창조성(자기 조직화와 자기 권력 창조)’ - 을 갖게 되는 계기와 과정, 그리고 혁명조직의 역할에 대해 모르거나 준비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주체는 실체 없는 계급이거나 실현 불가능한 주체로 남게 될 것이다. 


다섯째, 계급투쟁의 새로운 전형 창출 노력해야 한다. 저임금, 비정규직, 실업노동자 중심의 노동자평의회 운동과 조직노동자 운동의 반노조주의-반의회주의 전선의 지역적/수평적 결합과 연대의 전형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노동조합 자체를 넘어서려는 아래로부터의 급진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노조집행부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직접행동을 제안하고, 실제 노동자 행동그룹이 출현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노동자들이 한국이라는 지역에 갇히지 않고 국제주의 관점에서 국제적 계급투쟁의 흐름과 새로운 운동의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를 조성해야 한다. 세계적인 계급투쟁은 다시 한 번 혁명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분출되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이 보여준 용기와 결단, 그리고 깊은 연대의식은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세계가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계급투쟁의 경험으로부터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는 비공인파업, 점령운동 등 새로운 노동자연대의 전형을 창출해야 한다. 


여섯째,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중총회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정치토론 광장을 통해 노동자 토론문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의 토론능력(문화)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실현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선 계급의 무기가 될 것이다. 광장에서의 토론은 직접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며, 내용과 형식을 일치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직접행동들은 수평적 네트워크로 확장되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중심에 서야 한다.

 

나오며


우리는 늦게 시작한 만큼 기초를 튼튼히 하면서 나아가고자 한다. 많은 시간과 조직적 개인적 성숙이 필요한 만큼 더 열어놓고 토론하고 경험하고, 투쟁 속에서 우리의 원칙을 세워나가야 한다. 서두를 이유는 없다. 코뮤니스트 운동에서 적어도 우리는 새로운 세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천히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갈 길이 먼 것이다!
공산주의는 실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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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9 13:46 2015/08/09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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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2015/08/09 12:45

노동조합을 넘어선 새로운 노동자운동을 제안하며

[2호_토론_노동조합을_넘어선_새로운_노동자운동을_제안하며.pdf (385.77 KB) 다운받기]


정현철|국제코뮤니스트전망

 

1. 노동조합의 역사와 본질

 

노동조합은 18~19세기에 노동계급이 자신을 방어하고 생활 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서 성장했다. 자본주의 번영의 시기인 19세기에는 노동계급이 격렬하고 처참한 투쟁들을 통해 자신의 경제적 이해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조합조직들을 건설했고 그것이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을 개선하는 개혁을 위한 투쟁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해온 조직이었고, 그들의 계급에 충성을 다하는 투사들로 구성되었다 .

 

당시에는 이러한 개선들을 자본주의 체제가 감당할 수 있었고, 노동조합은 한편으론 계급의 조직으로 발전하며 계급의식을 발전시켰고, 한편으론 노동자의 노동력 판매조건에 대한 협상자이자, 노동과 자본의 중재기관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노동조합은 계급의 연대와 결합의 중심이 되었고, 계급의식의 발전을 위해 계급을 재구성해나가며, 혁명가들이 노동조합에 개입하여 ‘공산주의를 위한 학교’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그 자체로서 초기부터 관료화되어 있었지만, 계급의 진정한 기관이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 사민주의 정당들과 함께 제국주의적 학살을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하는데 노동조합이 협력함으로써 노동조합의 반(反)계급적 역할이 처음 드러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노동조합이 당보다 훨씬 더 기회주의적이었음을 폭로한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 내부의 많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했었고 독일사회민주당(SPD)에서는 3년 동안 전쟁찬성파와 전쟁반대파 사이의 투쟁이 벌어지다가 결국 전쟁찬성파가 승리하고 그 반대파는 당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그와는 달리 노동조합은 전쟁발발 이전에 이미 향토전선에의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기로 정부와 협정을 맺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노동조합은 전쟁경제와 공장에서의 전시법의 수행을 더 많이 넘겨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소위 노동조합 측은 자본이 당을 정복할 때 추진력이었고, 독일에서 혁명의 실패에 있어서 그리고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중요한 혁명가들의 살해에서도 그랬다. 

 

(전문은 파일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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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9 12:45 2015/08/09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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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2015/08/09 12:36

새로운 주체와 실천에 대하여

 

[2호_토론_새로운_주체와_실천에_대하여.pdf (375.20 KB) 다운받기]

 

김혜진|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현재 노동운동의 위기와 새로운 운동주체 형성에 대해서 첫 번째 발제문은 대공장 노동자들의 한계에 주목하고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로서 불안정노동자에 주목한다. 두 번째 발제문에서는 ‘노동조합’의 한계에 주목하여 그 구조를 뛰어넘는 ‘노동자 평의회’를 주장한다. 첫 번째 발제문은 새로운 운동 주체를 세우는 문제를 고민한다면, 두 번째 발제는 새로운 운동주체를 세우는 형식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발제문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 새로운 주체로서 불안정노동자들에 주목해야 하고,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대공장이나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 노동조합을 뛰어넘는 운동이 ‘노동자평의회’라는 형식으로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전문은 파일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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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9 12:36 2015/08/09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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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2015/08/09 12:30

보다 냉철한 인식과 보다 담대한 상상력으로 비정규직·불안정노동자를 조직하는 운동을

「새로운 주체와 실천에 대하여」에 답변

 

[2호_토론_새로운 주체와 실천에 대하여_에_답변.pdf (402.71 KB) 다운받기]

 

이정인|사회주의노동자신문          


필자가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글에서 제기한 주장들을 거칠게 요약하면 전통적인 공업은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비중과 규모가 축소되고 있다는 것, 이와 함께 비제조업·서비스산업을 중심으로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새로운 노동자층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이야말로 19세 중반에 사회이슈로 등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개념에 더욱 가까운 계층이라는 것, 반면 조직노동운동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대공장과 공공부문의 정규직노동자들은 그 속에서 점차 특권화 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회주의자들은 중공주의라고까지 불릴 수 있는 제조업 중심주의에 빠져 있었으며 이것은 비제조업·서비스산업에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노동자들을 정치적 주체로 세워내는 활동에 인식적인 장애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토론자로 참석해 주신 김혜진 동지는 이 글에 대한 논평과 논점을 제시했는데, 제기된 논점들 중 몇 가지는 매우 일반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문제제기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해 필자의 생각을 좀 더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전문은 파일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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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9 12:30 2015/08/09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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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 2015/08/03 14:01

동아시아 질서의 미묘한 변화와 북한의 선택

북한 4차 핵실험과 6자회담의 갈림길에 놓인 2014년 한반도 질서
 

[2호_정세_동아시아_질서의_미묘한_변화와_북한의_선택.pdf (394.65 KB) 다운받기]


김성렬|사회주의노동자신문


지난해 상반기 한반도의 긴장지수는 최고조에 달했다. 북한은 3차 핵실험을 감행한 직후 정전협정 백지화, 남북불가침합의 폐기 등의 강경책을 잇달아 내놓으며 남북관계를 순식간에 전시상황으로 규정지었다. 한국과 미국도 이제 질세라 대규모 한미연합훈련을 강행하며 맞불을 놓았다. 특히 미국이 전략 핵폭격기 B-52, 스텔스 폭격기 B-2의 한반도에서의 훈련모습을 공개하고 그 위력을 과시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강 대 강의 군사적 대결구도가 펼쳐지면서 한반도 정세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되었고, 급기야 작년 4월에는 개성공단마저 잠정폐쇄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여름을 기점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위기의 징후는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작년 8월14일 남북간 개성공단 재가동 합의 이후 지금까지 극단적인 군사적 대결양상은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최근 북한이 단거리 로켓과 노동 미사일을 발사하고 ‘새로운 형태의 핵실험’을 공언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작년과 같은 수준의 군사적 위협국면으로 단정 짓기 어렵다. 오히려 ‘제3차 북핵위기’라 할 만한 작년의 위기상황이 이렇다 할 협상 테이블 하나 없이 봉합되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과거 제1, 2차 북핵위기(1993년, 2003년)가 극한 대립으로 치달은 끝에 결국은 북미협상을 필두로 조정국면에 접어들었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양상이다.

현재 한반도는 북한의 도발위협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갈림길에 놓여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지금의 ‘평화’는 어디까지나 불확실하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북한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배권력이 북핵을 놓고 위험천만한 치킨게임을 벌일 때마다 한반도는 매번 전쟁위기에 직면해 왔으며 이 같은 위기는 언제든 또 반복될 수 있다. 게다가 한반도 질서는 남북관계에 의해서만 좌우되지 않는다. 동아시아의 역내 질서는 물론 전지구적인 거대한 체스판 속에 놓여 이로부터 강한 규정력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하 전문은 파일로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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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3 14:01 2015/08/0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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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15/08/03 07:35

[대담] 장기해고자가 바라본 해고자의 삶과 노동운동 전망

붉은글씨 2014 특별기획 : 장기해고자 간담회


[2호_특집기획_장기해고자가_바라본_해고자의_삶과_노동운동 전망.pdf (489.81 KB) 다운받기]
 

정리|국제코뮤니스트전망

 

김운용 (사회보험노조 해고자)

이영덕 (사회보험노조 해고자)

유명자 (재능지부 해고자)

이동우 (기아차 비정규직 해고자)

현희숙 (한국교직원공제회콜센터지부 해고자)

 

이번 기획은 한국 노동운동에서 가장 어려우면서도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장기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운동사회 전반을 가감 없이 들여다보고 이후 전망을 밝혀보고자 했습니다. 일상과 투쟁이 분리되지 않기에 삶과 투쟁 모든 면에서 수많은 장벽과 싸워야 하는 동지들의 삶에 다가가 운동의 현실과 전망을 밝혀보려 합니다. 장기해고자 간담회는 2차례의 간담회와 추가인터뷰로 이루어졌는데, 이번 호에는 1차 간담회 내용을 중심으로 싣습니다.

(이하 전문은 파일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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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3 07:35 2015/08/03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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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2015/08/02 16:40

국가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질에 대한 테제

[2호_번역_국가와_프롤레타리아_혁명의_본질에_대한_테제.pdf (405.66 KB) 다운받기]

옮긴이|국제코뮤니스트 전망 

프랑스 좌익 공산주의, M.C.|국제주의 9권(1946년 4월) Bulletin d’Etudes et de discussion of Reveolution Internationale, no.1에서 재인쇄


1) 국가는 역사 속에서 인간 사회를 나눈 적대적인 이해관계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적대적인 경제적 관계의 산물이자 결과이다. 국가는 역사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발전의 과정에 의해 직접 결정된 것이다. 

국가는 계급 위에 선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지배적인 경제 시스템의 사법적인 표현일 뿐이다. 그것은 상부구조이며, 계급의 경제적 법칙의 정치적인 외피이다. 

인간 사이의 경제적인 관계, 계급의 형성, 그리고 그들이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당시의 생산력 발전에 의해 결정된다. 국가가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는 이미 존재하는 경제적 사태들을 정리하고 승인하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받아들이도록 강요되는 법적 강제력을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평형상태, 계급들 간 관계의 안정, 경제적 과정 그 자체로부터 흐르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동시에, 국가는 억압받는 계급들이 선동과 동요에 개입해 사회에 의문을 제기하려는 시도를 막으려 한다. 그러므로 국가는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 역할은 생산을 유지하는 데 필요 불가결한 질서와 보안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이것을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성격을 통해서 할 수 있을 뿐이다. 역사적 과정에서 국가는 최상위 질서의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요소, 생산력의 진화와 발전이 지속해서 맞서야 하는 족쇄로 등장한다.


(이하 전문은 파일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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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2 16:40 2015/08/02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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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2015/08/02 16:26

생태위기, 그리고 자본주의 넘어서기

[2호_쟁점_생태위기_그리고_자본주의를_넘어서기.pdf (445.32 KB) 다운받기]

​황정규|노동해방실천연대(준) 사무처장

(* 이 글은 2013년 5월 12일, 맑스코뮤날레의 섹션, “생태위기, 환경불평등 그리고 녹색자본주의”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들어가며


이 글은 생태학과 맑스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즉 맑스주의가 생태위기를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유효한 사고의 틀을 제시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생태위기를 자본주의와의 관련성 속에서 생생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에 입각해 보면, 현재의 생태위기는 바로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기본적인 본성인 이윤추구,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태위기의 극복은 자본주의의 극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울러 이 글은 이러한 맑스주의의 시각에서, 최근 생태위기의 대안으로서 등장하고 있는 녹색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간략하게 진행한다. 맑스주의의 시각에서 볼 때, 녹색자본주의는 생태위기의 원인인 자본주의가 생태위기의 해결책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녹색자본주의적 시각은 생태위기를 극복하는 데 커다란 장애가 된다. 

이러한 주장을 전개하기에 앞서, 우선 생태학에 대해 맑스가 기여한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이하 전문은 파일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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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2 16:26 2015/08/0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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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4/12/29 13:53

[인터뷰] 노해투사 해산의 교훈과 새로운 전망에 대한 대화

- 조성웅 동지와의 인터뷰

진행 및 정리|김사자 

(* 2014년 5월 1일에 발행된 <붉은글씨> 2호에 실린 글입니다. [편집자]) 


<노동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노동자들>(이하 ‘노해투사’)이라는 비합법 사회주의 조직이 있었다. 한 동지가 성폭력 사건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이 조직이 지니고 있던 관료주의를 비롯한 폭력적 위계구조의 문제가 여실히 드러나면서 결성 10여년 만에 결국 해산하게 된다. 사회주의노동자신문은 노해투사의 요청에 따라 이 논의가 시작될 때부터 참여하여 모든 과정에 함께 했다. 그러나 격렬하고 치열한 논의는 적절하게 매듭지어지지 않은 채 종결되었다. 그리고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 조직의 성원이었던 조성웅 동지는 해산과정의 교훈을 통해 혁명정당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그 내용은 이미 그의 세 번째 시집 <식물성 투쟁의지>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기도 한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대책위 활동 당시 노해투사를 알고 있던 동지들에게만 한정하여 공유했던 공개서(대책위, 「노해투사 성폭력 사건 공개서-노해투사는 어떻게 성폭력을 자행했으며, 어떻게 해체되었는가?」)를 바탕으로 경과를 정리하였다. 또한 대책위 활동 중에 제출된 평가문서를 발췌하여 인터뷰 사이사이에 실었다.
 

노해투사의 조직적인 성폭력 2차 가해에 대한 문제제기와 조직의 해산
 

2007년 A는 노해투사의 정식 성원이 되기 위한 과정 중에 있었다. A는 언어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였고 그 언어성폭력의 가해자 중 한 명인 B는 노해투사의 성원이었다. B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대책위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었다.
 

A의 가입과정 담당자는 박성준이었다. 박성준은 A를 정기적으로 만나는 가운데 대책위 활동에 대해 간간히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던 가운데, 하루는 “왜 대책위는 신속히 종결되지 않고 있으며 B의 현장활동은 왜 지지부진해지고 있냐”며 A를 추궁한다. 그동안 보고를 받아왔음에도 어떤 지지나 지원도 없다가 B의 현장회합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관련하여 A를 추궁하는 박성준의 태도로 인해 A와 박성준 사이에 언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박성준이 이 대책위 활동을 서둘러 종결시키려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A는 노해투사가 이 언어성폭력사건 대책위 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대책위 활동에 대한 박성준의 태도에 대한 문제제기를 담은 서신을 담당자인 박성준에게 제출하여 노해투사에 전달해 줄 것을 요구한다. (노해투사는 오로지 수직적 소통구조로 운영되고 있어 직접 조직의 기구나 다른 성원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할 수 없었다.) 이에 박성준은 “자꾸 이런 식으로 싸움질을 걸면 담당자 교체를 요구하겠다”며 짜증과 화를 냈다. 서신은 조직에 전달되었고 A는 “피해자의 대책위 활동을 지지한다. 박성준은 대책위를 종결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조직 입장에서는 박성준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는 답변을 받게 된다. 이에 답답함을 느낀 A는 주변 활동가들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노해투사에는 담당자의 교체를 요구하고 자신의 문제제기에 대해 논의한 중앙위 회의록을 열람하고 싶다는 2차 서신을 보낸다.
 

그러자 박성준은 A가 고민을 털어놓았던 활동가들에게 “A는 조직 내에서 정치적 거부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비방한다. 이에 문제를 느낀 한 활동가가 문제제기 하자 그 활동가에게만 실수였다며 사과를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A가 해명을 요구하자 박성준은 “그 발언은 신중치 못했고 그 발언은 철회했으니 그렇게 알라”고 답한다.
 

한편 노해투사는 A가 자신의 고민을 주변 활동가들에게 털어놓은 것을 두고 조직적 계통과 보위에 관한 규율을 어겼다며 A에게 자기비판서를 요구하고 그동안 노해투사가 발행한 기관지와 주고받은 문서를 모두 회수하는 징계조치를 취한다. 담당자 교체 요구를 수용하는 것은 문제제기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회의록 열람 요청에 대해서는 그럴 권리가 없으므로 거부한다고 답한다.
 

A는 이러한 조직의 태도에 대해 2차 가해라고 비판한다. 그러자 노해투사는 ‘조직을 검증하려 드는 것이냐. 조직은 가부장적이지 않다. 가부장적이라 매도하는 네가 문제이므로 네 입장을 철회해야 사건에 대한 조직의 입장을 밝히겠다’는 답변을 되풀이 한다. 노해투사 내에서 A의 문제제기에 동의하던 성원들은 ‘당신 현장활동이나 잘 하라’는 답을 들어야 했다. 이렇게 A는 완전히 고립된다.
 

노해투사는 A에게 ‘A의 문제제기는 노동해방 운동의 국제적 전통으로 보아 근거 없는 개념에 의지하고 있고, 조직을 가부장적이라 매도하는 당신과는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며 관계의 단절을 선언하는 마지막 서신을 보낸다. 이렇게 A는 ‘게으르고 조직적 보위를 수시로 어기고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상담해주어야 하는 구제불능’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A는 노해투사에 맞서 싸우기로 마음먹는다.
 

노해투사 내부에서도 일부 성원의 요청에 의해 이 사건에 대해 재논의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당시 이제 막 가입했던 조성웅은 이 사건을 ‘악랄하고 관료적인 조직적 성폭력 2차 가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비판이 제기되는 과정에서 A를 고립시키고 추방하는 데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지도부는 (박성준을 제외하고) 모두 2차 가해를 인정하고 반성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박성준과 그를 옹호하는 성원 일부는 여전히 2차 가해가 아니라는 주장을 개진하며 맞선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①피해자 중심주의를 인정할 수 없다. 피해자 중심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조직의 전통이었고, 여성주의도 과학적이어야 한다. ②2차 가해의 범위를 넓게 적용할 수 없다. 단지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것을 2차 가해라고 볼 수는 없다. ③박성준과 A의 만남 자리와 그 이후의 일련의 조직의 관료적 조치들은 별개이며, 앞선 만남의 자리에서의 박성준의 대책위 활동에 대한 종결 발언만으로는 2차 가해가 성립하지 않기에 이후의 조직의 모습들도 2차 가해가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제기를 조직 내 주도권을 위한 분파투쟁으로 인식하고 대응한다.
 

결국 2008년에 열린 2차 총회에서 이 사안을 다루게 된다.(조직을 설립한지 10여년이 되었지만 총회제도를 신설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논의가 이루어진 회의가 2차 총회였다.) 그리고 이 회의부터 사회주의노동자신문 또한 공식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 총회에서 노해투사가 처음부터 언어성폭력사건 대책위를 서둘러 종결시키려고 했었다는 것이 폭로되었고, 언어성폭력사건 대책위 활동을 지지한다는 조직의 답변들이 사실상 모두 거짓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박성준이 지속적으로 거짓말로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A에게 책임을 떠넘긴 사실도 확인되었다. 논의가 진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성준을 제외한 모든 성원은 조직의 2차 가해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고 책임을 통감한다. 박성준은 대책위의 징계조치에 이의를 제기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 과정에서 이탈하여 종적을 감춘다.
 

결국 2009년 조직을 해산하고 노해투사 성폭력사건 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 이후 대책위에서는 페미니즘 및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조직 전반의 관료주의를 비롯한 문제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
 

----------------------
 

사자: 오늘 인터뷰는 이 사건에 대한 대책위의 공식적인 평가과정을 밟아나가기 위해 준비한 것은 아닙니다. 조성웅 동지 개인적으로 약 5년 전 노해투사의 해산과정에서 느낀 점과 교훈으로 삼고 있는 점을 얘기해봤으면 합니다.
 

성웅: 이 사건에서 노해투사 성원들이 보인 태도를 이해하려면 먼저 노해투사에 대한 성원들의 생각이 어땠는지부터 말해야할 것 같아요. 노해투사 성원들에게 노해투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이유였어요. 전국적 정치신문(NPN)이라는 노선 하나에 청춘을 걸었고, 고립되고 외로운 시기를 신념 하나로 버텼고. 조직의 분열과정, 그 고통 속에서 정립한 이 노선은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하나의 굳어진 신념이었어요. 이 노선을 중심으로 확고하게 통일되어 있다는 환상도 필요했고요. 가장 뛰어난 노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악물고 버텼던 것이죠. 해체되지 않기 위해서.
 

사자: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원들 간의 소통이나 토론은 어떻게 이루어졌던 것인지 궁금한데요. 분명 편하게 서로 의견을 나누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성웅: 먼저 노해투사의 조직구조를 보면 중앙위원회와 중앙위원회가 파견한 지역수임자망 체계, 엄격한 보안체계가 적용되었어요. 비합법, 아니 과도한 비밀주의가 조직운영을 규정했죠. 노해투사는 ‘조직의 엄격한 계통을 통해서만 소통할 수 있다’는 조직운영상의 원칙이 있었어요. 조직과 개인이 맺은 불평등 조약이었어요. 이러한 조직원칙은 노해투사가 창립되었던 시기 혹독한 조직분열 과정에서의 트라우마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고, 전국적 정치신문 노선의 기계적 모방이기도 했어요. 중앙은 정보를 독점하고 통제했어요. 이러한 정보의 독점과 통제는 하나의 형식으로 완성되었는데, 실생활과 완전히 분리된 ‘회의록과 보고서에 의존한 지도’로 귀결되었죠. 중앙에서 만들어지는 지침과 입장이 지도의 전부였어요. 노해투사 성원들은 살아 있는 실체가 아니라 회의록 상의 이니셜로만 존재했고 조직 내부의 직접적인 소통과 대화, 비판과 논쟁, 부단한 공동활동은 파괴되었죠. 중앙은 모든 정보를 독점했는데, 각 지역위원회의 활동은 각자가 알아서 진행하는, 관료적 집중주의와 무정부주의가 결합된 기형이었죠. 계급투쟁으로부터의 고립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미약한 역량, 계급투쟁으로부터의 고립, 그리고 정보는 독점되었지만 지도가 부재한 노해투사가 자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방법은 문자 상으로는 민주주의를 얘기하고 비판의 자유를 얘기했지만, 내부의 차이를 끊임없이 봉합하고 은폐하며 통일을 강조하는 거죠. 조직이 깨지는 것을 정말 두려워했어요. 조직의 분열을 가져온 한 차례의 극단적인 논쟁을 거친 사람들은 두려운 거죠. 끊임없이 비판을 억누르고 봉합하고. 질서를 해치는 사람들을 조직의 이름으로 축출하고. 노해투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조직들이 그랬어요. 노해투사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사실상 민주집중제가 실현된 적이 없어요. 끊임없이 관료주의를 방어함으로써, 소위 말해서 ‘효과적인 체계’에 의탁함으로써, 차이들을 축출함으로써 통일을 이룬 것이죠. 민주주의를 확대함으로써 민주집중제를 강화한 적이 없어요. 결국 그렇게 계급투쟁에 연루되기 위한 살아있는 조직이 아니라 딱딱하게 굳어졌어요. 스스로가 그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알고 있음에도 바꿔내지 못했던 것, 타협했던 것이죠. 자기들이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난 감각적으로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했던, 자기가 살기 위해서 선택했던 어쩔 수 없었던 비극이었죠. 노해투사의 2차 가해를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올바른 신념을 집행했던 것이지 관료주의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혁명적인 사상을 방어하기 위해 기회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이고 부문적인 것을 비판한다고 생각했어요. 조직 노선을 사수하기 위해서 이견들을 축출하는 것은 하나의 싸움, 신념의 집행이었어요. 차이 속의 협력이라는 민주집중제의 실제내용은 없었죠.
 

사자: 노해투사에서 논쟁이 일어나면 이견에 대해 비판할 때 ‘왜 그것이 과학적이지 못한가’, ‘그것이 왜 부르주아적인 것인가’, 이런 식의 접근으로 근거를 확보하려고 했는데요. 그러다보면 오히려 무엇이 합리적인 판단인지에 대한 논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 노선에 가까운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진행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비판을 잘라버리기도 쉽고요. 성폭력 2차 가해의 문제도 주관주의라서 과학적이지 않다거나 하는 반론이 나왔었죠.
 

성웅: 네 그러다보니 이 사안이 내가 박성준을 중심으로 한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서 피해자 중심주의를 제기하고 있다는 분파적인 해석이 나온 것이죠. 2차 가해를 방어했던 젊은 동지들은 자신이 여성주의 활동을 하면서 쌓아온 경험과 감각을 배반하기까지 했어요. 내가 무오류라고 생각하는 이 조직을 살리기 위해서 그런 것이죠. 노해투사는 언어성폭력 사건을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도 못했어요. 2차 가해자가 노해투사의 성원이었고 피해자가 노해투사 성원 가입 과정을 밟고 있는 동지였음에도 불구하고요. “가해자의 활동이 지체되는데 왜 대책위 활동이 종결되지 않느냐”라는 말에서 보면, 일상적인 조직 활동에서 2차 가해는 있을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이게 문제인 것을 인지하고 진지하게 질문에 대해서 귀를 기울였다고 하면 사건화 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지 않았을 거예요. 문제는 귀 기울이지 않고 오류를 덮어서 사건을 묻으려고 한 것이죠. “우리는 결코 그런 조직이 아니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오해다. 부주의와 미성숙한 태도의 문제지 2차 가해는 아니”라고 한 것이죠. 그러니 실제로 공론화하고 문서화 하니까 가해자는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피해자에게 협박을 했어요. 공론화를 한다고 하니까 협박하고 화내고 진압하려고 했던 것이죠. 지지자들이 이 사실을 공유하고 함께 문제제기를 하니까 “개인적 소통 하면 안 되는데 보안수칙 어겼다”고 반응하며 토론을 금지시켰어요. 모든 사건은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모르면 모른다고 할 수 있고, 그 자리에서 솔직하게 반성하면 되는 문제를 사건화 되도록 만든 것이죠. 그 과정에서 가해자는 자신의 지위를 지켰고 피해자를 축출하는데 성공했죠. 조직의 가부장적 문화를 숨기고 반대파에 대한 숙청 작업을 진행한 거죠. 대화하려는 자세가 아닌 것이죠. 존중하려는 자세가 아닌 것이죠. 자기 자리의 흔들림에 대해서 불안 해 하고 비판을 못 견뎌했던 것은 권력의 습성인 것이죠. 
 


노해투사의 중앙 권력은 각 지역위원회의 모든 활동에 대해 보고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성원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 외에 다른 지역과 중앙의 활동에 대해서는 모든 정보를 가질 수는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보안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되었고, 노해투사에 가입하는 사람들이면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불평등 규약이었다. 다른 지역의 성원들과의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권리조차 제약당한 탓에 성원들은 점차 조직 활동 전반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활동을 잘 꾸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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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은 노해투사의 거울이다. 노해투사 중앙은 진리의 환한 빛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언제나 자신을 감추고 신비화했다. 모든 성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았지만, 보고는 중앙의 권력을 위한 것이었지 실천 활동의 지침으로 돌려지지 않았다. 반면, 성원들은 자신 외에 볼 수 없는 지역의 단위에서 보고와 지시라는 조직의 규율을 내면화해갔다. 이 시선의 비대칭성으로 노해투사 성원들은 동등하게 토론하고 대화하는 평등한 주체가 되지 못했다. 중앙에 의한 정보의 독점과 감시는 조직 내부의 활동가들 간의 부단한 공동활동과 직접적인 소통과 대화를 소멸시켰다. 비판과 논쟁,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생생한 정치생활은 회의록으로 대체되었다.
 

-J, 「노해투사 콤플렉스-전위주의와 관료주의 사이에서의 열등감, 욕구불만, 강박」 (J는 오랜 시간 노해투사의 지도부 위치에 있으면서 조직 전반을 이끌었다. 이 글은 대책위 활동이 상당 기간 이루어진 후 조직 성원들로부터 노해투사 활동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모아 전반적인 평가를 내린 것이다.)


사자: 조직 내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 사건에 대한 논의가 있기 전에는 없었던 건가요?
 

성웅: 조직방침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중앙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난 것이라는 진단을 받으면 대화와 논쟁이 불가능한 구조였어요. 조직성원들은 중앙의 회의록을 공유했는데, “조직적 결정에 책임을 다한다, 중앙에서 결정된 것은 모두가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방침을 통해 비판적 활력이 소진되어갔죠. 회의록 상에서의 몇 마디 방침과 결정이 지도일 수 있나요? 지도는 실생활이어야 하고 밀착되어 있어야 해요. 그런데 노해투사 성원들은 자신의 조직이 민주집중제가 잘 구현되고 있다고 생각했죠. 형식적으로는 민주적이었으나, 중요한 방침에 대해 토론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은 중앙의 결정에 형식적으로 동의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했던 민주집중제였던 거죠. 노해투사의 기관지 내용은 성원들에게 확신과 신념을 일으켰어요. 그만큼 중앙에 대한 신뢰가 크죠. 노해투사에서 특별한 것은 이론적 능력을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는 거예요. 정보는 독점되고 지도는 부재했지만 기관지 내용을 통해 중앙은 자신의 권력을 신비화할 수 있었어요. 이 신비화를 통해 노선을 벗어난 비판은 진압됐죠. 그런데 중앙의 독제체제로 유지되어 오던 조직이 최초의 총회를 통해 그 신화가 산산이 깨져버렸어요. 한 동지는 “처음 접하는 직접 민주주의 앞에 노해투사는 벌벌 떨었다”고 표현하기도 했어요. 최초의 총회를 통해 자신들의 자부심과 신념이 허구였던 것이 생생하게 드러났던 거죠. 그럼에도 난 중앙 혹은 편집국 독재체제에서 총회로의 이동, 직접민주주의로의 이동은 발전이라고 생각해요. 아주 느렸지만 변화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벽처럼 답답했던 사람들이 촛불에 연루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놀라웠어요. 하지만 낡은 껍질을 깨기 위한 용기는 없었으나 치장을 다르게 한 것인데. 노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평가 이런 것들은 허용될 수 없었죠. 변화된 현실 속에서 자신도 변화하려고 하는데, 따져보니까 조직의 노선과는 다른 거야. 발전하려다가도 회귀하는 거죠. 노선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사자: 자기 조직의 정치에 대한 신념이 상당히 강했던 것 같은데요. J가 쓴 「노해투사 콤플렉스」를 읽어보면 중앙의 이론과 구체적 방침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웅: 노해투사 성원들은 방향을 정해주면 누구보다 뛰어나게 말하고 쓰고 행동했는데, 뛰어난 동지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유 딱 하나가 부족했어요. 이건 훈육된 것이지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죠. 그렇게 뛰어난 동지들이 중앙에 의탁함으로써, 독립적으로 사유하기를 포기함으로써 노예가 된 거죠. 방침을 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중앙의 방침 밖에서 수많은 사건이 내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충분히 자기 고민이 있음에도, 어떻게 대화해야하는지도 알고 있는데도, 중앙에서 지침을 주지 않으면 스스로 검열하게 되고 머뭇거리는 거예요. 중앙에서 방침이 정해지면 글도 잘 쓰고 자신감도 있고 활력을 가지고 조직을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게 없으면 못해. 어떤 정치적 사안이나 투쟁 사안이든 지침이 없더라도 누구나 정보를 수집하고 가공하고 분석하고 평가하고 입장을 제출할 수 있는 것이잖아요. 레닌은 사칙연산만 알면 국가를 운영한다고 했는데. 지식의 위계를 하나의 고착화된 구조로 만드는 것은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건 사회화된 편견의 문제인 거죠. 
 


노해투사 성원들의 정체성의 근원이었던 혁명적 이데올로기, 이론적 권위에 대한 신뢰는 곧 조직활동 전반을 관장하게 되었다. 혁명적 이데올로기 생산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과 생산량이 많은 사람은 노해투사 권력의 최정점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들은 ‘선택받은 자’들로서 똑똑하다는 조직 내 인정을 받고 공식적으로 지적인 업무에 배당된 사람들이었다. 이 때문에 조직 내 편집국과 중앙위원회의 권위 또는 기관지의 주요 집필가에 대한 권위가 노해투사의 권력이 되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적 권력은 조직 내 위계서열의 맨 위에 있었다.

...

이러한 조직 내 위계는 현장 활동의 태도로도 이어졌다. 사회주의 현장 세포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서 우리가 조직해야 할 현장노동자들은,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잇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녀/그가 얼마나 실천적인가보다, 그녀/그가 얼마나 ‘우리 생각에 더 많이 동의하는지’가 현장노동자를 판단하는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J, 「노해투사 콤플렉스-전위주의와 관료주의 사이에서의 열등감, 욕구불만, 강박」


사자: 그런 것을 보면 노해투사에서 구체적인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낸 것들은 ‘과학’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자기 현실운동에서 쌓아온 감각이 조직의 노선과 불일치 할 때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노선을 버리는 것으로 항상 귀결된 것인데, 여기에는 이론이 경험에 비해 우월한 것이라는 태도가 깔려있었던 것 아닌가요. 물론 이는 사회주의 운동에서 상당히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위에서 누가 만든 글을 피라미드로 뿌리는 구조면 현장에서 정치활동을 하면서 겪는 구체적 경험은 조직의 정치를 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 어렵게 되는 거죠.
 

성웅: 예를 들어 현장에서 제기된 전술방침 같은 것들은 이미 대중들이 다 알고 있는 문제인 거죠. 내가 얘기하지 않아도 현장에서 싸움의 주체들은 요구를 계급적으로 제기하고 전투적으로 집행을 하고 있는 문제예요. 그런데 두꺼운 기관지는 항상 때늦게 제출되어 도착해요. 그러니 현장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얘기하니 재미가 없는 거죠. 또 다른 측면에서 두꺼운 기관지의 다른 글은 또 너무 어렵게 나와. 기관지의 내용들은 정세를 따라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론은 현장과의 대화가 되지 못했던 거죠. 이론과 현장이 분리되어 대화를 생산하지 못했고 이러한 분리가 이어져 왔다고 봐요. 선동이라고 했을 때 구체적인 싸움의 재료를 가지고 구체적인 대화의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실패한 것이죠. 하나의 작은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 ◯◯◯」라고 생각하는데. 이 현장정치신문은 구체적인 싸움이 이론과 분리되지 않고 선동으로 제시되는 하나의 가능성이었다고 봐요. 그런데 노해투사는 이걸 폄하했어요. 실천적인 지도는 부재하거나 방치했던 것이고. 현장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하고 잠을 줄여가며 생산했던 「◯◯ ◯◯◯」의 생산물들에 대해 지침에서 벗어난 내용들이라고 질책하기도 했어요.
 

사자: 저도 당시 「◯◯ ◯◯◯」와 같은 시도가 아주 중요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노해투사에서도 전반적으로 이걸 중요하게 여겼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앞서 질문에서 이론적인 것에 우위를 두는 문제를 얘기했었는데요. 「◯◯ ◯◯◯」가 이론적 엄밀성의 측면에서 비판을 받는 분위기였다는 얘기를 들으니 노해투사는 당시 어떤 문제의식으로 매체들을 발행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앞서 전국적 정치신문이라는 신념에 모든 걸 걸었던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는데요. 사실 노해투사에서 발행했던 잡지는 유통이 잘 안 됐었어요. 사회주의자들의 공동활동의 수단이라고 규정한다면 각자의 활동이 담기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논쟁을 매개하는 수단으로 사고했어야 하는데, 사실 내부회보와 조직화 수단으로 느껴졌습니다.
 

성웅: 기계적으로 해석했던 것이죠. 전국적 정치신문 노선은 100년의 시간이 지난 것입니다. 레닌은 독일의 민주주의를 러시아의 차르 체제 아래서는 적용할 수 없는 조건들 속에서 전국적 정치신문을 제기했던 거죠. 기계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맞는 대중과의 구체적인 대화의 수단이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전국적 정치신문을 얘기했던 대부분의 조직들은 두꺼운 팸플릿을 발간했어요. 내용을 보면 이론지였죠. 대화의 수단이 아니라 소수의 사회주의자를 조직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죠. 전국적 정치선동의 매개체가 아니었어요. 자기복제의 수단이었어요. 노해투사의 경험을 보면 현장에서 조직된 사회주의자 성원이 된 사람이 딱 한명이에요. 대화의 수단이 되지 못했던 것이죠. 대부분의 조직에서 실패했던 수단이었던 것이고. 기계적으로 적용했으나 어느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죠.
 

사자: 자기 조직의 노선에 대한 강한 신념, 그리고 이를 지탱해주는 이론적 작업에 대한 의미부여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노해투사는 다른 조직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한 것인가요.
 

성웅: 경쟁의 대상이죠. 공동활동은 외교전이었고 실제로는 적대적인 경쟁관계인 것이죠. 이런 것들이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진영 전반의 실상이었어요. 말로는 공동활동 공동활동 했지만 이뤄진 적이 없고. 그것도 자기 조직의 승리를 위한 공동활동이지. 차이 속에서의 협력, 논쟁, 끈질긴 합의, 집중된 공동활동은 하나의 문자로 남았죠.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실현되거나 성과를 남긴 적이 없어요. 노해투사는 극단적인데, 타 조직을 동등한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지도 혹은 견인의 대상으로 여겼죠. 노해투사는 자신들이 당건설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주도해야 하다는 신념이 강했어요. 우리는 이미 완성된 사회주의자들이라는 자부심, 어떤 조직보다 혁명적이고 뛰어나다는 신념이 있었던 것이죠. 전국적 정치신문은 사회주의자들의 공동활동의 수단이어야 하는데. 과거 분리과정에서 타 조직과의 공동활동이 제기되었을 때 이 조직과의 공동활동은 노선(전국적 정치노선을 통한 당건설)의 폐기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죠. 그때 나온 논리가 “노선에 대한 것은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공동활동이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거죠. 
 


사회주의가 아닌 ~주의는 사회주의 밖의 이론으로서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 노해투사 내부에서 여성주의는 사실상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자, 어떤 의미에서는 공공의 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올바른’ 사회주의자라고 하는 신념은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다. 따라서 여성주의라는 틀로 제기되는 논쟁은 우선, 올바른 사회주의에 의해 합당한 의견인지에 대한 검열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지적 권력에 의해 ~주의가 계급적인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내려지면 조직 내 토론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노해투사의 사회주의 지적권력의 승인을 받지 못한 이데올로기는 자유로운 토론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전통을 옹호하고 조직을 유지하며 나와 다른 견해를 용납하지 못하는 태도야말로 혁명적 사회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보수주의다.
 

-J, 「노해투사 콤플렉스-전위주의와 관료주의 사이에서의 열등감, 욕구불만, 강박」


사자: 두 번째 시집 <물으면서 전진한다>와 세 번째 시집 <식물성 투쟁의지>에는 각각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요. 두 번째 시집에서는 노조관료들과 의회주의자들이 권력을 가지고 투쟁에서 생성되는 차이를 봉합시켜버리는 것에 대해 비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조합원들의 의지를 무시하고 투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노조관료들과 의회주의자들은 대화의 대상이 아니죠. 누르고 가야 하는 대상인데. 세 번째 시집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투쟁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협력을 통해 긍정적인 힘으로 발현될 차이입니다. 노해투사 사건으로 비춰봤을 때 사회주의 조직 내에서 ‘차이’는 어떤 문제로 접근해야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성웅: 차이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는 합의의 과정을 가져봤다는 얘기를 다른 조직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축출과 분리였지. 그것을 통한 통일의 선언인 것이고. 차이는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현실의 문제인 거죠. 이 차이가 합의될 때까지의 과정, 정말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다고 봐요. 이런 것들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구성해낼 것인지. 이런 고민들을 하는 것이죠.
 

사자: 그 끈질긴 노력의 과정을 관료주의와 대의제가 가로막는다는 것인가요?
 

성웅: 대의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어느 정도 대의적인 방식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지만 관료주의적으로 갈 가능성은 상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개입이 필요해요. 어떤 문제에 대해서 위임하는 방식이 아니라 토론하고 결정하고 집행하는 전체 과정이 연속적인 이행이 되어야 해요. 위임된 지도부가 어떤 과정에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은 해요. 하지만 소환권을 전제로 해서 있을 수 있다. 소환권을 수단으로 직접민주주의로 이행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노동자 민주주의의 체계들은 대중총회체계를 통해서 등장했던 것이죠. 모이고 토론하고 집행하는. 불가피하게 위임될 수밖에 없다고 하면 언제든 현장에서 소환할 수 있고 책임을 묻고 평가하고 새로 선출하고 새로운 방침으로 전환되는 것이 가능해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어떤 형식이란 것도 관료주의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영속혁명일 수밖에 없다고 봐요. 부단한 현실과의 교류일 수밖에 없고 발생한 사건에 대한 참여일 수밖에 없고.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위임하죠. 그것이 유능한 지도부를 구성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성공한 적이 없다는 거죠. 오히려 관료주의만 강화했어요. 이 체계를 폐기해야 해요. 위로부터 당 건설 노선에 입각한 민주집중제는 낡았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역사적 가능성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거죠. 지식의 위계, 조직의 위계를 파괴하기 위한 직접적인 자기 결정을 정치화해야 하고 이 직접민주주의를 실험해야 해요. 이미 주체들이 형성되고 소통의 망이 형성되고 있어요.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촛불과 희망버스에서 대의제로 귀결되고 요약되는 것에 대한 대안이 이미 등장하고 있는 것이죠. 대중총회체계가 실제적인 전망으로 제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당의 역할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지령으로 표현됐던 시대착오적인 개념이 아니라 대중총회와 보폭을 맞추고 함께하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을 소집하고 안건들을 제출하고 토론을 제기하고 합의과정을 가져나가고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고 이 과정을 연속적으로 재평가하는 이런 역할들이 필요한 거죠. 당의 이름이든 의식적인 정치활동의 이름이건 앞으로도 보존되어야 하고 계급투쟁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를 정식화하는 것이 고민의 주제예요.
 

사자: 민주집중제와 혁명정당의 역할에 대해 얘기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기존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공통된 정치노선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성웅: 부르주아 국가의 폭력과 훈육된 대의제, 위로부터의 당건설 노선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이냐의 문제인데요. 희망버스 2차부터 차벽에 딱 막혔잖아요. 3차 때는 ‘너희는 고립되었다’ 퍼포먼스로 마무리하고. 결국은 부르주아 대의제에 의탁해서 양보안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어요. 이것이 현실의 운동이었고 태어난 가능성은 너무나 미약했죠. 그렇다면 희망버스에서 등장했던 직접민주주의, 정치로서의 민주주의를 정식화해내고 혁명의 가능성을 밀어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고요. 혁명의 시간들을 미리 준비하는 사람들이 필요해요. 직접민주주의에 보폭을 맞추는 사람들, 조력하는 사람들로서의 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명령과 지령으로서의 당은 돌이킬 수 없이 낡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여전히 정치적 이행기이자 사멸해가는 준국가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경계선은 여전히 개량주의자들, 중도주의자들 사이에 그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당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부정하는 자율주의자들과는 다르죠. 전 물어요. 국가권력과 구성된 공동체가 어떻게 나란히 존재할 수 있느냐. 자율주의자들에게 이 답을 듣지 못했어요. 국가는 우회하는 것이 아니라 돌파해야 하는 것, 돌파해서 ‘파괴’해야 하는 것이죠. 노해투사 해산과정을 거치면서 <국가와 혁명>을 다시 읽었어요. 예전에는 “대의기구 없는 민주주의, 특히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상상할 수도 없다”고 하는 데에 밑줄을 그었는데, 그 아래 “우리의 진실되고 성실한 열망이라면 의회 없는 민주주의가 상정될 수도 있고 상정되어야만 한다”는 데에는 밑줄이 안 그어져 있더라고요. 예전에 생각할 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무자비한 계급전쟁이라고 읽고 해석했는데, 프롤레타리아트의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무시했죠. ‘의회제 없는 민주주의’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던 거죠. 원전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배우면서 사멸하는 준국가에 걸맞은 이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는 거예요. 부르주아 반혁명에 맞서 불가피하게 폭력을 사용해야 하는 권력으로서만이 아니라 의회제 없는, 대의제 없는. 그런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사실 대의제거든요. 생산지에서 아래로부터 직접 선출된 대표자들이 모여서 국가의 운영을 논하고 결정하고 집행되는. 전 100년 전에는 가장 민주적이고 혁명적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흘렀고 사멸하는 준국가가 가장 끔찍한 국가가 되었던 경험, 부르주아 반혁명에 맞서던 혁명적 대의기구가 반혁명 기구로 급속하게 전환된 역사적 진실을 우리는 알고 있어요. 이 뼈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멸하는 준국가로서의 의회제 없는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넓고 깊은 수평적 연대운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새롭게 정식화하는 문제가 중요하겠다는 거죠.
 

사자: 대의제 없는 민주주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
 

성웅: 중앙은 비어있는 것이어야 해요. 완성되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집합적 힘들에 의해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해요. 그 방법으로써 대중총회 체계를 통해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이죠. 그런데 다 위임해버리잖아요. 집행하는 자가 사실상 권력을 가지고 위계화된 것이 중앙이라는 낡은 이름이죠. 대중총회의 방식들을 통해 가장 끈질긴 방식으로 대화하고 결정하고 집행하고 경험하고 개선하고 이런 것들이 시작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한자리에 모이지 않더라도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우리에게 이미 있어요. 기본적으로 온라인으로 소통하고, 느슨하지 않은 체계로 진행되는 총회를 통해서 결정하고 역할들이 배치되고, 또 온라인을 통해서 소통이 되고. 경험들을 통해 방법을 구체화하고 개선하고. 끊임없이 실험해야한다고 봐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에요. 레닌의 얘기처럼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 거지. 정말로 피곤하거든. 무정부적인 것이 가장 피곤하고 힘든 것이에요. 가장 피곤하고 힘든 것이 민주적인 방식이라는 거죠. 그 피곤한 단계를 거치지 않고 포기함으로써 효과적인 체계로서 위계제도를 우리 스스로 도입해왔죠. 무수한 개성들의 대화와 종합이 없는 한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대화의 마침표 없는 지속. 전망은 먼 미래의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거예요. 살아보고 싶은 것은 지금 나의 삶과 운동으로 표현되어야 해요. 미래의 문제로 밀어버려 유예시켜서는 안 되죠. 내 삶으로 표현되어야, 운동으로 지금 당장 표현되어야 해요.  
 


조직이란 여러 사람들이 특정한 목적을 공유하고 실천하기 위해 모인 곳이다. 여러 사람이 모인 만큼 개성과 취향 그리고 욕망이 모두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조직으로서 노해투사는 성원들의 사고, 감정, 의지 그리고 개성과 취향과 욕망 곧, 개인적 자아를 수용할 수 없는 곳이었다. 스탈린 시대에 공산주의적 인간형을 상정하고 그러한 인간형이 곧 최고의 인간인 것처럼 추대되고 다른 인간들은 박해받았듯이, 노해투사는 노해투사적 인간형을 창출하고 숭배해왔다. 조직을 위해 개인의 욕망을 희생하는 사람, 조직의 기준에 맞추어 일상생활을 통제하는 사람, 혁명활동을 위해 삶의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는 사람, 특히 사회주의 활동을 비밀리에 수행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훌륭하게 이중 생활을 꾸려가는 사람. 노해투사적 주체는 다른 다양한 개성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주체는 감시와 처벌, 규범적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만들어졌다. 그렇다고 노해투사 조직원들이 자신의 자아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주체성과 자아 존중감 없이 어떻게 생활이 가능했겠는가? 다만, 성원들은 조직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사태를 조정했다. 자신을 온통 규정했던 비합 사회주의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은 조직 안에서, 지역 모임 안에서, 회합 안에서만 확인되고 발휘되었다. 그때에만 비합 사회주의 활동가로서의 노해투사 조직원은 존재감을 가졌다. 그러나 친구들 사이에서, 가족들 간에서, 현장에서, 직장에서 그들은 늘 정체성혼란에 빠졌다.
 

-J, 「노해투사 콤플렉스-전위주의와 관료주의 사이에서의 열등감, 욕구불만, 강박」


사자: 노해투사의 해산과정은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사회주의 운동의 태도에도 중요한 교훈을 주었던 것 같은데요.
 

성웅: 노해투사의 성폭력 사건과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봐요. 계급환원주의, 조직보신주의, 부차적인 문제와 중요한 문제, 가부장주의와 관료주의... 개량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가릴 것 없이 지속되고 강화되어온 토대인 거죠. 이와 단절하지 않으면 부르주아 정치의 보완물이 될 뿐 혁명적 전망을 만들어 갈 수 없다고 보는 거에요. 노해투사 성폭력 사건은 이를 명확하고 고통스럽게 제기해주고 있는 것이고요. 단호한 단절 위에서 새롭게 전망을 구성할 수밖에 없어요. 몇 가지 개선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러한 단절 위에서 어떤 정치를 구성해야 할 것인가. 경험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고, 또 현실로부터 진지하게 배워야 하죠. 100년 전의 강령에 대한 해석논쟁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주제에 대한 재평가 작업과 현실에 대한 분석과 학습 속에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를 먼 미래에 고정시켜놓는 것이 아니라, 살고 싶은 먼 미래를 지금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대안이 뭐냐고 했을 때 ‘질문하면서 배울 것이다’라는 것이 내가 가진 자세예요. 이를 위해 코뮤니스트이 여성주의를 강령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일각에서 여성주의는 부르주아 운동, 부문운동이라고 얘기하지만. 주류화 된, 부르주아 국가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여성들을 동원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여성주의가 질문하고 있고 여성주의가 지난 시간동안 싸워온 것을 폐기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을 본다고 하더라도 이 여성주의가 노동운동의 중심에 들어왔을 때 관료주의와 화해할 수 없는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필사적인 싸움인 거죠.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들이 노동운동에서 사건화 되지도 못했어요. 진압되거나 개인적인 문제로 되는 건데. 여성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우리 운동의 내부에 있어야 해요. 내부로 도입되고 중심에 섰을 때 관료주의와 화해할 수 없는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시에 쓴 것처럼 코뮤니스트는 여성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런 감각 없이는 전망이 등장할 수 없어요. 귀결은 노해투사와 같을 것이라는 거죠.
 

사자: 관료주의와 가부장제가 연결되어 있고 이를 강령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인가요.
 

성웅: 한계가 아니라 이미 퇴행인 것이죠. 공감 능력의 완전한 상실인 건데요.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절규에 대한 공감능력이 상실되는 것은 민주적이지도 혁명적이지도 않은 것이죠. 성폭력 피해자가 “짐승 같다”고 울부짖는데도 노해투사는 미동도 안했어요. 이게 노해투사만의 일이냐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박근혜 정부가 젊은 아이들 몇 백 명을 수장시키는 문제와도, 민주노총이 성폭력사건을 대했던 태도와도, 많은 사회주의조직들이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결되어 있어요.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인 거죠. 그러면서 조합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조합 관료주의를 비판하며 혁명적 전망을 얘기하는 것은 정말 기만인 것이에요. 정치의 뿌리가 동일한데 어떻게 혁명적 전망이 될 수 있겠어요. 문자화된 분노 이외에 피부로서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삶으로 받아들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귀 기울이며 찾아가려는 진지한 노력 없이 어떻게 민주주의가 가능하고 혁명적 전망이 찾아질 수 있겠어요. 필사적인 자기노력들을 하지 않으면, 게을러지면 관료주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발생해요. 중단 없는 자기싸움, 생생한 감각과 긴장들, 예민한 감수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거죠. 이건 한계의 문제가 아니에요.
 

사자: 끝까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도주한 성원을 제외하면, 사실 2차 가해를 주도한 성원들을 포함하여 많은 성원들이 적극적으로 해결과정에 임했는데요. 그럼에도 마지막에 잘 매듭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성폭력 사건의 해결 측면에서 평가 지점에 대해서도 얘기할 부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성웅: 오만이 있었죠. 모르면 모른다고 얘기했어야 하는데. 이런 거 가지고 뭐 어떻게 치유가 되고 가해자 프로그램으로 뭐가 바뀌겠냐며 오만하게 여성주의 상담단체들을 폄하했던 점이 있었죠. 그래서 운동적 방식으로 풀 수 있고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책위의 운영과 과정을 보면 노해투사의 감시체계를 보존했어요. 피해자의 분노 앞에서 침묵하는 가해자들에게 너 왜 얘기 안 하냐고 윽박지르고. 노해투사 조직운동에서 그동안 해왔던 방식대로 의지를 강요하며 왜 결과물이 없냐고 하고. 가해자들과 피해자에게 차분하고 구체적인 고민을 할 수 있는 계기, 좀 더 편하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조건과 그 자리를 제공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다 뒤섞여 애기가 되었죠. 대책위 활동을 지금하면 좀 더 잘할 것 같은데... 당시는 나도 질문을 던지던 때였고, 또 문제의식이 있었지만 대안이 무엇인지 잘 몰랐죠. 비극적인 것은 대책위 활동 과정 속에서 가해자들 사이의 또 다른 성폭력이 발생하기도 하고, 여성주의 학습 속에서 새롭게 성폭력이 인지되어 또 다른 성폭력 대책위를 꾸리기도 하고, 또 이 속에서 가해자들의 반성문에 포함되지 않았던 또 다른 비방이 폭로되기도 했다는 것이에요. 대책위 초기 활동의 기본적이고 중요한 활동을 미숙하게 처리한 결과이기도 하죠. 일련의 이런 과정이 공론화를 가로 막았죠. 정말 고통스런 사건의 연속이었죠. 하지만 가해자들도 필사적으로 자기 잘못을 평가하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건의 경우도 이렇게 필사적으로 반성하고 피해자 치유를 위해 프로그램을 완수를 했던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적절한 시기에 정리를 했어야 하는데 결국 하지 못했어요. 다만 노해투사가 스스로 조직노선을 평가하고 단절한 것인데, 자신의 활동을 되돌아보고 무엇이 잘못된 건지 알게 된 것은 성과라고 생각해요. 만약 이를 공론화하면 무엇을 잘못한 건지 무엇을 하면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큰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그게 안 된 거죠. 대책위 활동에 있어 무지와 오류를 생각하면 어떻게 하면 더 좋았을까 하는 것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있어요. 구체적인 대안을 찾지 못하고 또한 낡은 습성을 반복하기도 했지만 이 과정을 통해 배웠죠. 노해투사 대책위 활동을 통해 등장했던 질문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 질문들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끈질기게 배우겠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답이에요. 그래서 항상 묻는 것이고요. 노해투사 성폭력 사건과 대책위 활동은 지금도 돌덩이처럼 남아있어요.
 

사자: 오랜 시간 누적된 문제가 한 순간 터진 것이라 시간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요. 이번 인터뷰가 하나의 매듭을 짓기 위한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해산 직후 주변 활동가들에게 한정적으로 이 사건을 공개했을 당시 다른 사회주의 조직에서 “이건 규율의 문제다. 규율이 확실하면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정말 제대로 평가를 남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요. 그 이후 여러 정치조직들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태도나 관료적이고 비민주적인 사건들에 대한 얘기를 듣노라면 지금도 그 의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얘기가 있다면 해주시죠.
 

성웅: 어떤 문제든 곁에 있고 귀 기울이고 공감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바로 이곳에서 비판적 활력은 생성된다고 봐요. 삶이든 운동이든 곁에서 나에 대해 동의하고 함께 해줄 수 있는 것들이 필요한 거죠. 곁은 하나의 정치이고, 공동체가 발생하는 장소죠. 노해투사의 지도력은 곁이 없었어요. 욕구를 억누르라는 것이었고, 그 위에 헌신으로 유지되었던 것이죠. 자기 삶과 운동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자신의 긍정적인 힘들을 밀고 나갈 곁이 없었어요. 그래서 중앙의 지침, 명령이 모든 것을 대체했죠. 그렇게 노해투사는 삶과 운동의 긍정적인 활력들을 대부분 소진시켰죠. 바로 여기서부터 신앙이 발생했어요. 활력이 소진되고 화석화된 신념, 신앙이 강해질수록 뒷문으로 부르주아 정치가 도입되고 공고해졌죠. 곁에 설 수 있는, 지지하고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싸움을 밀어갈 수 있는 구성된 힘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구성된 힘은 무엇보다도 독립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힘이고 비판적 활력으로 직접 행동할 수 있는 힘이라 생각해요. 이것이 코뮤니즘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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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9 13:53 2014/12/29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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